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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99년(연산군 5)∼1559년(명종 14) = 61세.] 조선 전기 중종~명종의 문신. 의정부 우참찬(右參贊)을 지냈고, 증직(贈職)은 좌찬성(左贊成)이다. 자는 윤보(潤甫)이다. 본관은 평산(平山)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사직서(社稷署)영(令) 신세경(申世卿)이고, 어머니 고령 박씨(高靈朴氏)는 박사란(朴思爛)의 딸이다.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외조부이다. 김식(金湜)의 문인이다.
[중종 시대 활동]
1516년(중종 11) 나이 18세에 사마시(司馬試) 진사과(進士科)로 급제하고[『방목』]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갔는데, 순후(醇厚)하고 독실(篤實)하여, 동료 친구들이 모두 탄복하였고, 또 문장으로 성균관에서 연이어 으뜸을 차지하니, 공경(公卿) 대신들 중에서 그의 문장을 본 사람들은 모두 그를 칭찬하였다고 한다.[「신영 비명」] 1523년(중종 18) 알성시(謁聖試)문과(文科)에 갑과(甲科) 1등 장원(壯元)으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25세였다.[『방목』] 1523년(중종 18) 봄에 중종이 성균관에 행차하여 선성(先聖)을 배알(拜謁)하고 인하여 유생(儒生)에게 시험을 보였다. 신영이 수석을 차지하자, 즉시 갑과(甲科)의 홍패(紅牌)를 하사(下賜)하면서 6품의 성균관 전적(典籍)으로 임명하였다. 그의 그때 나이 25세의 젊은 나이에 갑과 1등 장원으로 뽑혔는데, 그의 행실과 문장은 조야(朝野)의 모든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서 모두 앞날을 기대하였다.[「신영 비명」]
1523년(중종 18) 4월에 홍문관(弘文館)에 뽑혀 들어가 부수찬(副修撰)이 되었다.[『중종실록』 중종 18년 4월 24일] 젊었을 적에 사서(沙西) 김식(金湜)의 문하에 수학하였는데, 스승 김식이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화(禍)를 당하자, 그가 성균관 유생(儒生)으로서 김식의 신원(伸寃)을 상소하자, 그를 시기하는 자들이, “신영도 역시 사림파의 무리와 관계가 있으니, 어찌 저런 사람이 옥당(玉堂)에 들어올 수 있겠는가?”고 말하면서 마침내 그를 탄핵하였다. 형조 좌랑(佐郞)과 병조 좌랑(佐郞), 함경도 도사(咸鏡道都事), 공조 정랑(正郞), 형조 정랑, 병조 정랑을 역임하고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을 겸임하였다. 좌랑으로 있을 때 춘추관(春秋館)의 사관(史官)을 겸임하였고, 정랑으로 있을 때는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 그러나 대간의 탄핵을 여러 번 받았는데, 이것은 그가 남에게 맹종하면서 권력자에게 아부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신영 비명」]
1523년(중종 18) 4월 홍문관 부수찬이 되었는데, 그때 사헌부가 아뢰기를, “수찬 신영은 출신(出身)한 지 한 달 만에 갑자기 시종(侍從)하는 관직에 임명되었으니, 그를 체직하소서.” 하니, 중종이 전교하기를, “신영이 비록 출신한 지는 오래되지 않았으나 의정부와 이조의 의논이 같았고 홍문록(弘文錄)에도 수록되었으니, 빨리 임용했다고 해서 방해될 게 무엇인가.” 하였다. 그때 사신(史臣)은 논평하기를, “처음에 조광조(趙光祖) 등이 죄를 받던 날 유생(儒生) 1천여 명이 대궐문을 엎드려서 그의 무죄를 주장하였는데, 신영도 곡읍(哭泣)하던 대열에 끼었었고, 또 임금에게 소장(疏章)을 썼었는데, 이환(李芄)에게 적발되었기 때문에 탄핵을 받은 것이다.” 하였다.[『중종실록』 중종 18년 4월 25일 · 윤 4월 7일]
1525년(중종 20) 6월 성절사(聖節使) 정윤겸(鄭允謙)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중국 명(明)나라에 다녀왔다. 그 해 10월 병조 좌랑 신영이 삭서(朔書) 곧 매월 초에 실시하는 글씨기 시험에 여러 차례 우등하자, 중종이 그에게 붓과 먹을 내려 주게 하였다.[『중종실록』 중종 20년 10월 19일] 1529년(중종 24) 신영이 수원 군수(水原郡守)로 나갔는데, 수원의 풍속은 완악(頑惡)하고 어리석어 다른 고을보다 교화하기가 어려웠으나, 신영이 위엄과 은혜를 아울러 베풀어 정치의 교화가 크게 이루어졌다.[「신영 비명」] 1532년(중종 27)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3년상을 마치고 나서 한성부 서윤(漢城府庶尹)에 임명되었다.
1534년(중종 29) 7월 사헌부 지평이 되었고, 8월 사헌부 장령이 되었다.[『중종실록』 중종 29년 7월 12일 · 8월 23일] 1535년(중종 30) 4월 홍문관 교리(校理)가 되었다가, 10월 홍문관 부교리(副校理)가 되었다.[『중종실록』 중종 30년 4월 19일 · 10월 10일] 1536년(중종 31) 11월 사간원(司諫院)사간(司諫)이 되었다가, 윤12월 사헌부 집의(執義)가 되었다.[『중종실록』 중종 31년 11월 13일 · 윤12월 26일] 1537년(중종 32) 2월 홍문관 응교(應敎)가 되었다가, 10월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에 발탁되었다.[『중종실록』 중종 32년 2월 21일 · 10월 17일] 승정원에 들어가서 여섯 번 자리를 옮겨서 도승지(都承旨)에 영전되었다. 또 성균관 사예(司藝)를 거쳐, 병조 참지(參知)에 특별히 임명되니, 이는 대체로 중종이 비로소 그 재덕(才德)을 알아보고, 장차 그를 크게 중용하려 한 것이었다. 그가 급제한 지 15년 동안에 벼슬이 엄체되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은 오히려 승진이 늦다고 생각하였다. 그가 입조(立朝)한 이래로 사류(士流)들이 대부분 붕당(朋黨)에 속하여 권력을 다투고 권력자에게 아부하면서 서로 밀어주고 혹은 배척하였는데, 동인(東人)에 소속하지 않으면 서인(西人)에 들어갔었다. 그러나 신영은 혼자 동인도 정말 좋지 않지만 서인도 마땅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끝내 어느 당파와도 친하게 지내지 않고 초연하게 동인과 서인에 어느 편에도 소속되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모두 보통 사람이 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여겼다.[「신영 비명」]
1539년(중종 34) 중국 명나라 사신이 와서 예의(禮儀)가 복잡하고 출납(出納)의 번잡하기가 다른 날보다 몇 갑절이나 되었으나, 그가 마치 아무 일이 없는 듯이 척척 처리하였다. 1540년(중종 35) 1월 이조 참판(參判)이 임명되어 전형(銓衡)을 맡게 되었으므로, 더욱 임무가 무거워 졌다.[『중종실록』 중종 35년 1월 18일] 그 해 5월 궁궐의 돌을 채취해 간 일 때문에 도승지 김섬(金銛),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 권벌(權橃), 병조 참판 신광한(申光漢), 이조 참판 신영 등이 자수(自首)하여 대죄(待罪)하였고, 좌의정(左議政)홍언필(洪彦弼)도 대죄하였는데, 중종이 전교하기를, “사간원이 아뢴 것은 금내(禁內)에서 돌을 채취해 간 경우이다. 금외(禁外)에서 채취하는 것까지 다 금지할 수는 없는 것이니, 대죄하지 말라.” 하였다.[『중종실록』 중종 35년 5월 12일]
1542년(중종 37) 1월 사헌부의 탄핵을 당했다. 이때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요사이 정사(政事)하는 사이에 공도(公道)가 행해지지 못하고 사정(私情)에 따르는 폐단이 많이 있는데도, 전조가 공천(公薦)이라 핑계하고 도리어 사정을 써서, 주의(注擬)할 적에 친척(親戚)을 피하지 않았으며, 논박을 받았던 사람을 오래되지 않아 서용(敍用)하였고, 수령(守令)을 서로 바꾸게 될 적에도 대부분 사정으로 한 것이 많았으니, 판서 성세창(成世昌)과 참판 신영을 파직하소서.” 하니, 중종이 대답하기를, “이조의 당상관(堂上官)은 재상(宰相)인 사람들이니, 파직하는 것은 너무 지나치지 않겠는가.” 하고, 윤허하지 않았다.[『중종실록』 중종 37년 1월 21일] 그 해 4월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이 되었고, 10월 예조 참판이 되었다가, 1544년(중종 39) 5월 병조 참판이 되었다.[『중종실록』 중종 37년 4월 23일 · 10월 15일, 중종 39년 5월 1일]
[명종 시대 활동]
1546년(명종 1) 봄에 과거시험을 관장하여 노진(盧禛) 등 33인을 선발하였다. 그 뒤에 10여 년 동안 이조 · 호조 · 예조 · 병조를 두루 거치면서 혹은 한 차례, 혹은 두 차례 모두 참판(參判)이 되었는데, 그 명망이 장관(長官)보다 높았다. 두 차례 대사헌(大司憲)이 되었고, 또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 사헌부에 있을 때는 법을 집행하는 데에 공평하였고, 법률을 원용(援用)할 때에는 바르게 적용하여 모두 합당하였다. 교만한 벼슬아치가 있어서 자기 세력을 끼고 대간(臺諫)의 위엄(威嚴)을 능멸하고 사람을 시켜서 그에게 일을 청탁하면, 즉시 임금에게 상주(上奏)하여 탄핵하였다.[「신영 비명」]
1546년(명종 1) 3월 영의정 윤인경(尹仁鏡)이 아뢰기를, “관상감(觀象監)제조(提調)는 2명뿐인데 이언적(李彦迪)은 고향으로 내려갔고, 신영은 80세가 된 노모(老母)가 있다고 합니다. 새달에는 영천(永川) 땅의 태실(胎室)을 간심(看審)할 일이 있는데, 신영은 노모 곁을 멀리 떠날 수 없고, 이언적 역시 쉽게 올라오지 못할 것이니, 이언적을 체직시키소서.” 하니, 명종이 이를 허락하였다.[『명종실록』 명종 1년 3월 25일]
1547년(명종 2) 1월 호조 참판이 되었고, 1550년(명종 5) 2월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이 되었다가 바로 사간원 대사간이 되었으며, 8월에는 다시 우윤이 되어서 동지사(冬至使)로 중국 명(明)나라 북경(北京)에 가서 동지(冬至)를 하례하였다.[『명종실록』 명종 2년 1월 16일, 명종 5년 2월 6일 · 2월 13일 · 8월 2일 ] 1551년(명종 6) 3월 중추부(中樞府)동지사(同知事)로 있을 때 신영은 『이단변정(異端辨正)』1부를 구해서 명종에게 바치자, 인쇄하여 널리 반포하게 하였다.[『명종실록』 명종 6년 3월 16일]
1552년(명종 7) 3월 신영이 대사헌이 되자 사직을 청하였으나, 명종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 해 7월 호조 참판이 되었고 10월 이조 참판되었다가 바로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이 되었다.[『명종실록』 명종 7년 3월 21일 · 3월 23일 · 7월 11일 · 10월 2일 · 10월 16일] 1553년(명종 8) 봄에 호조 판서로 자리를 옮겼는데, 한성부의 번잡한 정무와 호조(戶曹)의 중대한 일을 처리하는 데에 있어서 그의 재주와 능력이 넉넉하고 여유 있게 크게 베풀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미 병이 들었으므로 곧 병으로 인해 벼슬에서 물러날 것을 간청하였으나, 명종이 즉시 허락하지 않다가, 상서(上書)가 네 번이나 이르자 허락하였는데, 대체로 임금이 그 직임을 대체하기가 어렵다고 여겼기 때문이다.[「신영 비명」] 그 해 5월 의정부 좌참찬(左參贊)이 되었는데,[『명종실록』 명종 8년 5월 25일] 병에 걸렸다. 병에서 조금 회복되자, 의정부 우참찬(右參贊)에 임명되었으나 그의 병이 날로 더욱 심해지는 데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공무(公務)에 더욱 피로하여 1556년(명종 11) 여름에 의원(醫員)을 찾아 병을 치료하겠다고 간청하니, 명종이 이를 허락하고, 중추부(中樞府)지사(知事)에 임명하여 병을 요양(療養)하게 하였다. 이것은 명종이 노신(老臣)을 존중하여 취한 조처였다. 서반(西班)에서 한가하게 지내면서 녹봉(祿俸)을 받고 병을 치료한 지 4년 만에 마침내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1559년(명종 14) 5월 8일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니, 향년이 61세였다. [『명종실록』 명종 15년 5월 8일 「신영 졸기」]
[성품과 일화]
신영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성품이 순박하고 온후(溫厚)하며, 화기(和氣)가 넘쳤다. 남을 상대할 때에는 공손(恭遜)함을 다하였고, 일을 처리할 때에는 정성을 다하였다. 집에 들어와서는 잉첩(媵妾)을 거느리는 즐거움이 없었고, 벼슬에 나아가서는 사사로이 붕당(朋黨)을 만든 적이 없었으므로, 어느 누구에게서도 원망과 미움을 받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걸출하였는데, 글을 읽고 학문(學問)을 하기 시작하면서 아버지의 문인(門人)과 더불어 그 사이에 끼여서 글을 배우니, 모두들 자기가 그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여겼다. 아버지 신세경이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과 교분(交分)이 있어서 그 아들을 인사시켰더니, 김안국이 한번 보고서 그가 원대(遠大)하여 명경(名卿)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였다.[「신영 비명」]
나랏일에 대해서는 조심하여 자기의 지위(地位)에 따라서 할 일만 행하였는데, 오랫동안 호조와 한성부 · 의금부(義禁府)의 당상관(堂上官)으로 있었을 때에는 모두 옥송(獄訟)의 번잡한 임무이므로, 남들은 혹은 수고스러움을 꺼리고 세쇄(細瑣)한 것을 싫어하였으나, 그는 홀로 문첩(文牒)을 간추려서 핵심을 파악하여 일의 정황을 상세히 꿰뚫어보니, 낭료(郎僚)가 된 자들이 모두 그를 두려워하여 복종하였다. 신영이 병조 참판과 호조 참판으로 있을 적에 당시에 장관으로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자가 있었는데, 신영이 외유내강(外柔內剛)하여 장관을 잘 섬겼다. 그러나 정사에 방해가 되고 나라를 병들게 하는 일에 대해서는 신영이 더욱 성의(誠意)를 다하여 장관을 감동(感動)시켜서 설득시키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리하여 장관이 비록 모두 따르지는 않았지만, 물러나서도 또한 신영의 충성과 신의에 대하여 경탄하고 탄복하여 원망하는 말이 일절 없었다.[「신영 비명」]
공무(公務)가 파한 뒤에는 곧 집으로 돌아가서 일찍이 다른 사람과 더불어 왕래하며 친분을 맺은 적이 없었으므로, 다른 사람 역시 그에게 친하게 아부하는 자도 없었다. 관직이 팔좌(八座) 곧 판서와 참찬에 이르러도 대문 앞에 사람들의 수레 자국이 없었는데, 남들이 혹시 그가 너무 허술하여 시속(時俗)에 걸맞지 않는다고 비판하였다. 그러나 그는 일찍이 스스로 말하기를, “도(道)가 있는 때에 폐해지지 않으면 족하니, 탁류(濁流)를 치고 청파(淸波)를 일게 하며, 원망을 돋워서 화(禍)를 불러들이는 것은 내 뜻이 아니다. 나의 어리석음과 고지식함을 가지고도 남이 이끌어주지 않아도 홀로 임금의 지우(知遇)를 받아서 6경(六卿)의 지위에까지 올라갔으니, 마땅히 스스로 나의 졸박한 것을 지킬 뿐이지, 어찌 감히 다른 사람의 일삼는 바를 본받아서 조정에 부끄러움을 끼치겠는가?” 하였다.[「신영 비명」]
어떤 종신(從臣)이 있어서 신영을 불손(不遜)하다고 지목하여 제멋대로 무함(誣陷)을 하였지만, 신영은 일찍이 마음을 동요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저가 평소에 내게 원한이 없는데, 내가 견디지 못할 줄을 마음으로 알고서 나를 비난하는 것이니, 나도 또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그러나 그 사람이 평소에 음흉하다고 일컫던 자인데, 그에게 탄핵을 받는 이들은 반드시 당대의 명망 있는 인사로서 모두들 그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도리어 영광으로 여기고 있다.” 하였다.[「신영 비명」]
[묘소와 후손]
시호는 이간(夷簡)이다. 묘소는 경기도 김포(金浦) 마산리(馬山里)에 있고, 막내 사위 김계휘(金繼輝)가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신영 비명」]
부인 단양 우씨(丹陽禹氏)는 우석규(禹錫圭)의 딸인데, 자녀는 4남 4녀를 낳았다. 장남 신홍서(申弘緖)는 온양 군수(溫陽君守)를 지냈고, 차남 신승서(申承緖)는 생원시에 합격하여 개성부 도사(開城府都事)를 지냈으며, 3남 신희서(申熙緖)와 4남 신광서(申光緖)는 모두 학행(學行)이 있었다. 딸들은 판관(判官) 구흡(具洽), 현령(縣令) 송령(宋寧), 감찰(監察)이형(李珩)과 예조 참판 김계휘에게 시집갔다. 황강(黃岡) 김계휘는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아버지다.[「신영 비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