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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381년(우왕 7)~1461년(세조 7) = 81세.] 조선 초기 태종 때의 문신. 은일(隱逸).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을 지냈다. 호는 효창(曉窓)인데, 자호(自號)는 서호산인(西湖山人)이다. 본관은 평산(平山)이고, 거주지는 행주(幸州)이다. 아버지는 고려 봉선고(奉先庫) 판관(判官)신안(申晏)이고, 어머니 장흥 임씨(長興任氏)는 고려 문하성(門下省) 찬성사(贊成事) 임세정(任世正)의 딸이다. 세종 때 좌의정(左議政)을 지낸 신개(申槩)의 동생이다.
[태종 시대 활동]
1402년(태종 2) 식년시(式年試) 문과(文科)에 갑과(甲科) 1등으로 장원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22세였다.[『방목』, 『태종실록』 태종 2년 4월 3일] 1404년(태종 4) 사간원 우정언(右正言)에 임명되었는데, 사간원 좌정언(左正言) 노이(盧異)와 함께 태종에게 직언(直言)하기를, “주상이 외식(外飾)에만 힘쓰고 실덕(實德)이 없어서 썩은 참외와 같습니다. 또, 남의 처첩(妻妾)을 빼앗아 궁중에 비빈(妃嬪)으로 들였습니다.” 라고 하였다. 태종이 매우 격노하여, 신효와 노이의 직첩(職牒)을 회수하고 벼슬에 나오지 못하도록 금고(禁錮)에 처하였다.[『태종실록』 태종 4년 1월 21일 · 5월 3일] 신효는 벼슬길에 나온 지 얼마 안 되어 태종의 비행을 폭로한 것이다. 당시 <노이와 신효의 직언(直言) 사건>은 관리 가운데 아무도 감히 할 수 없는 일을 과감하게 실행하였기 때문에 당시 고려에 충성하고 조선에 협력하지 않던 유학자들은 젊은 신효와 노이의 용기를 칭찬하여 마지않았다.
태종 이방원(李芳遠)은 정몽주(鄭夢周)를 죽이고 조선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왕자의 난을 일으켜서 정도전(鄭道傳)을 죽였던 인물이므로, 조선의 관리는 아무도 그를 비판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노이와 신효가 겁을 먹지 않고 바른 말을 하자, 당시 사람들은 두 사람을 ‘뼈대가 있는 신하[硬骨之臣]’라고 칭송하였다. 신효는 황해도 연안부(延安府)에 안치(安置)되었고, 노이는 벼슬에서 추방하여 영구히 등용하지 못하게 하였다.[『태종실록』 태종 4년 5월 12일] 그러나 1406년(태종 6) 5월 태종은 노이와 신효를 용서하고 경외 종편(京外從便)을 명해 서울 이외의 지역에 마음대로 살수 있도록 하였다.[『태종실록』 태종 6년 5월 24일] 당시 고려가 망하고 겨우 10여 년이 지남 시기였으므로, 대다수 유학자들은 고려에 충성하고 조선에 벼슬하지 않았다. 그러나 젊은 유학자들은 현실을 인정하고 벼슬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신효와 그의 큰형 신개는 그 중에 한 사람이었다. 큰형 신개는 벼슬에 계속 종사하였으나, 신효는 벼슬하지 않고 고려에 충성하는 다른 유학자처럼 은거하였다.
[세종 시대 활동]
1426년(세종 8) 신효의 형 신개가 세종의 신임을 얻어서 여러 도(道)의 관찰사와 대제학(大提學) · 대사헌(大司憲) 등을 역임하였는데, 그들 형제를 아는 사람들이 동생이 오히려 형보다 낫다고 추천하여, 신효를 유학(儒學) 교수관(敎授官)에 임명하려고 하였다. 그때 장령(掌令) 이안경(李安敬)이 아뢰기를, “지금 신효를 교수관으로 삼았는데, 신효는 노이 · 이양명(李陽明)과 함께 같은 죄로 안치되었습니다. 사헌부의 재차 소청으로 인하여 노이는 그 직첩을 거두고 서인(庶人)으로 폐하였으나, 신효는 죄를 논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신효에게 천만 다행한 일이었는데, 이제 또 벼슬을 제수하니, 실로 옳지 못한 일인가 합니다.” 하였다. 세종이 말하기를, “이러한 죄에 걸린 자는 다시 쓰지 말라는 말인가? 다시는 아무 말도 하지 말라.” 하였다. 그러나 이틀 후에 세종이 대성(臺省)에게 이르기를, “신효의 일을 언책(言責)을 맡은 자가 말하는 것은 마땅하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는 지난번에 다시 노이의 죄를 논할 적에 신효는 거기 끼이지 않았으니, 그 죄의 경함을 알 수 있다. 그러니 그를 쓰는 것도 또한 옳지 않겠는가.” 하니, 사간(司諫)박안신(朴安臣)과 지평(持平) 송명산(宋命山) 등이 계하기를, “신효가 헛된 일로 지존(至尊을 비방하였으니 불경이 이보다 더 클 수가 없습니다. 제 몸을 보존하여 여생을 마치게 된 것도 다행한데, 하필 다시 이와 같은 사람을 쓰려고 하십니까?” 하니, 세종이 말하기를, “나도 알았다.” 하고, 신효의 교수관 임명하려고 하였으나, 오히려 신효가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세종은 지신사(知申事) 정흠지(鄭欽之)를 좌의정(左議政) 이직(李稷) · 이조 판서 허조(許稠)에게 보내어 다음에 인사가 있을 때 다시 의논해서 보고하게 하였다.[『세종실록』 세종 8년 12월 14일 · 12월 16일]
세종은 신효의 은일(隱逸)로서 남으려고 하는 뜻을 존중하여 더 이상 벼슬에 임명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의 큰형 신개를 발탁하여 이조 판서로 삼았다가,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임명하였다. 세종의 통치 32년 동안에 의정부 3의정(三議政)은 황희(黃喜) · 맹사성(孟思誠) · 허조(許稠) 등 몇 명에 지나지 않았는데, 세종이 신개를 우의정 · 좌의정에 임명한 것을 보면, 신개도 신효처럼 6덕(六德)을 갖춘 사람일 것으로 보인다.
신효는 1405년(태종 5)에 도성(都城)을 떠나서 행주(幸州)에 나가서 살면서 스스로 자기 호를 ‘서호산인(西湖散人)’이라고 부르고. 행주에서 은거하였다. 1461년(세조 7) 노병으로 81세로 돌아갈 때까지, 65년을 동안 행주의 서호에 살면서 도성 문안에 한 번도 들어온 적이 없었다.[「신효 묘갈명」]
[사간원 정언 노이와 신효의 직언 사건]
1404년(태종 4) 5월 사간원 좌정언 노이와 우정언 신효가 상소하여, 태종이 외식에만 힘쓰고 실덕이 없으며, 또 남의 처첩을 빼앗아 궁중에 비빈으로 들이었다고 공격하자, 사간원 좌사간(左司諫)조휴(趙休) 등이 상소하여 노이와 신효의 죄를 청하기를, “지금 정언 노이 · 신효 등은 모두 용렬(庸劣)한 재주로 성명(聖明)을 만나 벼슬을 얻어서 이에 이르렀으니, 미땅히 더욱 충절(忠節)을 닦아서 조금이라도 보답하기를 도모해야 할 것인데, 생각이 여기에 미치지 못하고 망령되게 공손치 못한 말로 지존(至尊)을 기망(欺罔)하였으니, 불경(不敬)한 죄가 이보다 더 클 수 없습니다.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태종이 상소를 궐내(闕內)에 머물러 두고 내려 보내지 않았다. 사간원에서 다시 노이와 신효를 탄핵하니, 태종이 그들을 고향 전리(田里)로 돌려보내라고 명하였다.[『태종실록』 태종 4년 5월 1일 · 5월 3일]
그때 태종이 노이와 신효를 불러서 임금에게 공손치 못한 말을 하고 바깥사람들과 떠들면서 말한 까닭을 물으니, 노이가 대답하기를, “말이 불손한 것이 아니라, 곧게 말하는 것이 본래 간관(諫官)의 직책이며, 또한 밖에 떠들어 말한 것이 아니라, 다만 동료들과 말한 것뿐입니다.”하였다. 사간(司諫)조휴(趙休) 등이 상소하기를, “좌정언 노이가 지존(至尊)을 향하여 함부로 불순한 말을 만들어 내었고, 밖에서 사람들과 떠들면서 말하였으니, 청컨대 직첩을 거두고 해외로 물리치소서. 우정언 신효도 또한 노이를 도와서 말하였으니, 아울러 죄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처음에 조휴 등이 노이를 탄핵할 것을 의논하니, 신효가 말하기를, “이것은 나도 함께 의논한 것이다” 하였으므로, 조휴 등이 이에 신효를 아울러 탄핵하여 죄주기를 청하였던 것이다.
조휴 등이 또 종친(宗親) · 공신(功臣)에게 노이와 신효의 상소문을 보여주고 말하기를, “노이가 이르기를, ‘주상이 외식에만 힘쓰고 실덕이 없어서 썩은 참외 같고, 남의 처첩을 빼앗아 궁중에 들이었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이리하여 종친과 공신들이 노이와 신효에게 죄를 주자고 상소하였다. 태종이 노이와 신효를 불러서 이를 물으니, 노이가 대답하기를, “옛날 소신(小臣)이 사관(史官)으로 있을 때에, 해주(海州)에 호가(扈駕)하여 어리석은 충정을 앙달(仰達)하여 곧 가납(嘉納)을 입었으므로, 이로 말미암아 감격하여 항상 생각하기를, ‘만일 언관(言官)이 되어 말할 것이 있으면, 전후를 돌아보지 않고 다 말하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지난번에 말하고자 한 것은 다른 뜻이 없고, 주상께서 실덕은 힘쓰지 않고 밖으로 인의(仁義)를 꾸미고, 이신(李伸) · 김보해(金寶海) 등이 여색(女色)을 바치어 전하를 속이었는데도, 일찍이 죄를 받지 않았으므로 죄를 청하려고 한 것뿐입니다. 썩은 참외에 비유하고 남의 처첩을 빼앗았다는 말은 신이 한 말이 아닙니다. 신효는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들은 자가 잘못 들은 것입니다.” 하고, 드디어 사건의 본말(本末)을 끝까지 말하였다.[『태종실록』 태종 4년 5월 3일]
앞서 이신(李伸)이, 혼인을 허락하고 시집갈 때를 기다리고 있던 장군(將軍) 김보해(金寶海)의 누이를 궁중에 바쳤다.[『태종실록』 태종 4년 4월 27일] 태종이 이를 알고 곧 내쳤으나 이신과 김보해 등이 태종의 총애(寵愛)를 얻으려고 여색(女色)을 기어이 바쳐서 아첨하려고 하였다. 태종은 후궁이 얼마나 많았는지를 알 수 없으나, 태종은 서출 8남 13녀가 있었다. 그들을 낳은 후궁 10여 명 가운데 숙안옹주(淑安翁主)를 낳은 김씨일 가능성이 있다. 고려나 조선 시대 왕이나 왕자들의 남의 기첩(妓妾)을 빼앗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노이와 신상이 이를 비판하였던 것이고, 태종이 이에 대하여 격노하였던 것이다.
태종이 말하기를, “네가 이와 같이 할 말이 있었다면, 어찌하여 면대(面對)하여 진달하지 않고, 사석(私席)에서 말하였느냐” 하니, 노이가 대답하기를, “신이 사석에서 말한 것이 아니라, 다만 동료들과 더불어 원의(圓議)에서 말하였을 뿐입니다.” 하였다. 태종이 말하기를, “옛날에 백이(伯夷) · 숙제(叔齊)가 주(周)나라에 벼슬하지 않았는데, 네가 반드시 백이 · 숙제의 뜻이 있어서 이런 말을 하였을 것이다. 지금 마땅히 전리(田里)로 놓아서 보내겠다.” 하였다. 노이가 말하기를, “신의 죄가 죽어야 마땅한데 전리(田里)로 돌아가게 되오니, 덕택(德澤)이 지극히 후합니다. 그러나, 신이 백이 · 숙제의 마음이 있다면 마땅히 일찍 물러갈 것이지 어찌 오늘에 이르렀겠습니까. 간관이 되어서 한 번도 미충(微忠)을 바치지 못하고 갑자기 전리로 돌아가니, 이것이 한스럽습니다.” 하였다. 태종이 말하기를, “너의 이 말을 들으니 나도 또한 슬프다. 눈앞에서 오랫동안 임용(任用)한 사람을 하루에 내치니 어찌 슬프지 않겠느냐.” 하였다. 신효는 집에 머물러 있으라고 명하고 상소(上疏)는 머물러 두고 내려 보내지 않았다. 좌헌납(左獻納) 박초(朴礎)가 대궐에 나와서 상언(上言)하기를, “노이는 죄가 중한데 벌이 가볍고, 신효는 노이와 죄가 같은데 벌이 다릅니다.” 하였다. 태종이 말하기를, “노이가 말한 것이 근거 없는 일이 아니니, 어떻게 죄를 주겠느냐? 다만 노이가 사관(史官) 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근시(近侍)에 있은 지가 오랜데, 나더러 ‘겉으로는 옳은 체하고 속은 그르다’ 하였으니, 내가 이를 분별하고자 하나, 내가 덕(德)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노이와 신효의 말은 다만 다른 사람에게서 들은 것뿐이다.” 하였다. 박초가 다시 아뢰기를, “노이의 죄가 작지 않으니, 마땅히 중벌(重罰)을 가하여야 하고, 신효는 죄가 같은데 홀로 면하게 되니, 또한 불가합니다.” 하였다. 태종이 말하기를, “노이의 말이 모두 곧으니, 내가 죄주지 않으려고 하나, 잠시 그대들의 청을 따랐고, 또 그의 벼슬하지 않으려는 뜻을 이루어 주기 위하여 전리(田里)로 놓아 보내는 것뿐이다. 또 이 말은 누구나가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어찌 신효가 말할 수 있었던 것이겠는가? 그러므로, 다만 집에 돌아가게 한 것이니 다시는 말하지 말라.” 라고 하였다.[『태종실록』 태종 4년 5월 3일] 그 해 5월 12일 노이의 직첩을 회수하여 영구히 서용(敍用)하지 않고, 신효는 연안부(延安府)에 안치하였다.[『태종실록』 태종 4년 5월 12일] 1406년(태종 6) 5월 노이와 신효를 용서하여 경외 종편하였다.[『태종실록』 태종 6년 5월 24일]
[성품과 일화]
신효는 6덕(六德)을 갖춘 사람이라고 한다. 그의 5대손 신흠(申欽)이 지은 그의 묘갈명에 의하면, “예법에 맞는 말로 임금을 인도하는 것은 충(忠)이고, 목숨을 바쳐 절개를 굽히지 않는 것은 의(義)이고, 세상을 버리고 멀리 숨어사는 것은 정(貞)이고, 재능을 감추고 스스로 드러내지 않는 것은 명(明)이고, 자연의 조화에 맡겨 천명을 아는 것은 지(智)이고, 천진(天眞)을 보전하고 기심(機心)을 막는 것은 달(達)이다. 충(忠)이란 신하의 법이고, 의(義)란 선비의 절개이고, 정(貞)이란 밟아 가는 길이 바른 것이고, 명(明)이란 행하는 일이 슬기로운 것이고, 지(智)란 자신에게 충실한 것이고, 달(達)이란 천명에 편안한 것이다. 이 6덕(六德)을 갖추어야 무궁한 후세에 법도를 세울 수가 있는데, 대체로 육덕을 갖춘 사람은 조선 초기 신효 한 사람뿐이었다.” 하였다.[「신효 묘갈명」]
신효는 대과(大科)에 장원 급제하여, 태종 때 사간원 우정언으로 있다가 궁중 안의 일을 직언하다가 태종의 뜻을 거슬러 마침내 행주로 돌아와서 집을 짓고 살았다. 스스로 호를 ‘서호산인’이라 불렀으며, 81세까지 살면서 한 번도 발길을 도성 문안에 들인 적이 없었다. 그의 큰형인 인재(寅齋) 신개는 좌의정이 되어 세종을 도와 태평성대를 이룩하였으나, 당시 나랏일을 의논하는 자들이, 동생 신효가 도리어 형 신개보다 오히려 낫다고 하면서 다투어 신효를 천거하여 한번 벼슬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신효는 끝내 벼슬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세속에 휩쓸려 살며 자신의 몸을 더럽히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신효 묘갈명」]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고양(高陽) 행주산성(幸州山城) 동쪽 산기슭에 있고, 5대손 신흠(申欽)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신효 묘갈명(申曉墓碣銘)」, 『상촌고(象村稿)』 권25 「5대조 정언 묘표(五代祖正言墓表)」] 증손자 신영(申瑛)이 출세하여 승정원 도승지(都承旨)로 추증되었다.
부인 남양 홍씨(南陽洪氏)는 고려 전서(典書) 남희충(南希忠)의 딸이다. 2남 3녀를 낳았는데, 장남 신자희(申自熙)는 전직(殿直)을 지냈고, 차남 신자행(申自行)은 경력(經歷)을 지냈고, 3남 신자계(申自繼)는 주부(主簿)를 지냈으며, 딸들은 정이주(鄭而周), 임진생(林震生), 민순(閔諄)에게 각각 시집갔다. 신자계의 손자 신영도 과거에 장원 급제하여 중종ㆍ인종ㆍ명종 세 조정에서 벼슬이 의정부 참찬(參贊)에 이르렀다.[「신효 묘갈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