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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374년(공민왕 23)∼1446년(세종 28) = 73세.] 조선 초기 태조~세종 때의 문신. 좌의정(左議政)을 지냈다. 자는 자격(子格)이고, 호는 인재(寅齋), 양졸당(養拙堂)이다. 본관은 평산(平山)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고려 종부령(宗簿令) 신안(申晏)이고, 어머니 장흥 임씨(長興任 氏)는 고려 문하성(門下省) 찬성사(贊成事) 임세정(任世正)의 딸이다. 사간원(司諫院)사간(司諫)신효(申曉)의 형이다.
[태조~태종 시대 활동]
1390년(공양왕 2) 고려 사마시(司馬試)에 진사(進士)ㆍ생원(生員) 양과에 합격하였는데, 나이 17세였다.[『사가집(四佳集)』 문집(文集) 보유(補遺) 1 「좌의정 문희 신공 신도비명(左議政文僖申公神道碑銘)」] 1393년(태조 2) 식년시(式年試) 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20세였다.[『방목』] 1394년(태조 3) 수도를 천도(遷都)하게 되자, 개성(開城)의 송정(松亭)에서 한양(漢陽)의 정릉동(貞陵洞)으로 이사하였다. 1395년(태조 4)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에 임명되었는데, 그때 태조가 실록(實錄)을 보려고 하자, 그가 상소를 올려서 그것이 불가하다고 논하여, 태조가 이를 그만두었다.[『사가집』 문집 보유 1 「좌의정 문희 신공 신도비명」]
1400년(정종 2)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에 임명되었다가, 문하성(門下省) 습유(拾遺)로 옮겼고, 형조 좌랑(佐郞) · 호조 좌랑(佐郞)을 거쳐, 충청도 도사(忠淸道都事)로 나갔다. 얼마 안 되어 인주 지사(仁州知事)로 있다가, 임기가 만료되면서 1402년(태종 2) 6월 사간원 좌정언(左正言)에 임명되었고, 헌납(獻納)으로 승진되었다. 여러 자리를 거쳐 1408년(태종 8) 이조 정랑(正郞)에 임명되었다. 1410년(태종 10) 의정부(議政府)사인(舍人)이 되었으나, 태종의 명령을 받고 즉시 해당 관청에 전달하지 않았다고 파직되었다. 곧 예문관 직제학(直提學)에 임명되었다가, 승문원(承文院) 판사(判事)로 옮겼다.[『사가집』 문집 보유 1 「좌의정 문희 신공 신도비명」]
1411년(태종 11) 가례색(嘉禮色) 별감(別監)에 임명되어, 충청도에 가서 처녀들을 선발하였다.[『태종실록』 태종 11년 9월 14일] 1413년(태종 13) 사간원 우사간대부(右司諫大夫)에 발탁되어 춘추관(春秋館)편수관(編修官)ㆍ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사가집』 문집 보유 1 「좌의정 문희 신공 신도비명」] 그해 11월 사간원 우사간 신개가, 각 품계(品階)의 서사(署謝) 곧 대간(臺諫)의 서경(署經)을 받아서 임명하는 법을 시행하기를 청하니, 태종이 직접 상소를 읽어보고 좌우에게 말하기를, “애숭이가 사체(事體)를 알지 못하고 대신들이 권력을 농단한다고 망언을 한다.” 하였으나 그가 주장을 굽히지 않자, 태조 때 4품 이상에게 관교(官敎)로써 서사를 대신하던 제도를 개혁하여 3품 이상에게 대간의 서경을 반드시 실시하도록 만들었다.[『사가집』 문집 보유 1 「좌의정 문희 신공 신도비명」]
1414년(태종 14) 사간 신개가 예조 좌랑 정조(鄭慥)와 함께 파직되었는데, 태종이 상왕(上王) 정종에게 헌수(獻壽)할 때 예무(禮務)를 알지 못하여 실례(失禮)하였기 때문이다.[『태종실록』 태종 14년 1월 10일] 4월 예조 참의(參議)에 임명되었다가, 1415년(태종 15) 8월 병조 참의로 자리를 옮겼고, 겨울에 가선 대부(嘉善大夫)로 품계가 오르면서 1416년(태종 16) 2월 충청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다. 이때 감옥의 죄수 7명이 무고(誣告)를 당하여 사형(死刑)을 당하게 되었는데, 관찰사 신개가 이 사건을 평반(平反)하여 누명을 벗겨주니, 사람들이 그 명석함에 탄복하였다.
한성부 윤(漢城府尹)에 임명되었다가 1417년(태종 17) 4월 공조 참판(參判)이 되었는데, 천추사(千秋使)에 임명되어 황태자(皇太子)의 절일(節日)을 하례하기 위하여 중국 명(明)나라 북경(北京)으로 갔었다. 그때 황태자가 남경(南京)에 있었는데, 영락제(永樂帝)가 남경은 길이 멀고 또 여름철 장마를 만나서 가기가 힘들다고 하여, 예부(禮部)에 명하여 조선의 전문(箋文)과 방물(方物)을 받아들이고, 조선의 사신을 북경에서 바로 돌려보냈다.[『태종실록』 17년 5월 17일 · 7월 4일] 그 해 7월 천추사(千秋使) 공조 참판 신개가 중국 북경에서 돌아왔는데, 8월 어머니 상을 당하였다. 3년 상을 끝마치자, 여러 차례 조정의 부름을 받았으나 아버지가 연로하다는 이유로 사양하였다.[『사가집』 문집 보유 1 「좌의정 문희 신공 신도비명」]
[세종 전반기 활동]
1419년(세종 1) 10월 전라도 도관찰사가 되었는데, 11월 신개가 아버지의 병 때문에 사임을 하였으므로, 이백지(李伯持)를 대신 임명하였다.[『세종실록』 세종 1년 10월 24일 · 11월 14일] 1420년(세종 2) 1월 전 참판 신개를 학당 조성색(學堂造成色) 세조(提調)로 삼았다가, 집현전(集賢殿)제학(提學)에 임명하였다. 그 해 3월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으나,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상례를 치렀다.[『세종실록』 세종 2년 1월 10일 · 3월 16일, 『사가집』 문집 보유 1 「좌의정 문희 신공 신도비명」]
1422년(세종 4) 12월 세종이 신개를 특별히 황해도 관찰사에 임명하였다. 이때 황해도 전체가 기황(饑荒)이 들어 굶어 죽는 백성이 많았는데, 관찰사 신개가 직접 마른 식량과 술, 마실 것과 옷가지들을 가지고 마을을 출입하면서 궁핍한 백성을 구휼하니, 백성들이 이에 힘입어 살아나게 되었다.[『사가집』 문집 보유 1 「좌의정 문희 신공 신도비명」] 1423년(세종 5) 12월 형조 참판이 되었다.[『세종실록』 세종 5년 12월 11일]
1424년(세종 6) 3월 세종이 살곶이[箭串]에 있는 전지를 문무백관들에게 과전(科田)으로 나누어 주었는데, 참판 신개는 1결 50부를 받았다.[『세종실록』 세종 6년 3월 13일] 그 해 9월 진주목 판사(晉州牧判事)가 되었는데, 얼마 안 되어 병으로 사직하였다.[『사가집』 문집 보유 1 「좌의정 문희 신공 신도비명」] 1425년(세종 7) 12월 좌군(左軍) 총제(摠制)가 되었다가, 1426년(세종 8) 2월 경상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다. 그 해 12월 기장현 지사(機張縣知事) 임길양(林吉陽)이 해동청(海東靑) 3마리를 사로잡았는데, 관찰사 신개가 진짜 해동청이 아니라고 하여 놓아 보내게 하였다. 나중에 세종이 이를 듣고 의금부(義禁府)도사(都事) 유지함(柳之涵)을 보내어 사실을 조사하게 하였다.[『세종실록』 세종 8년 12월 14일]
1427년(세종 9) 동지 총제(同知摠制)이 되었다가, 형조 참판에 임명되었다. 그런데 그해 6월 좌의정 황희(黃喜)의 사위 <서달(徐達)의 살인 사건>에 연루되어, 세종의 명으로 대사헌(大司憲)조계생(趙啓生)과 함께 의금부에 갇혔다. 좌의정 황희와 우의정 맹사성(孟思誠)은 관직을 파면하고, 서달의 아버지인 형조 판서 서선(徐選)은 직첩을 회수하였다. 형조 참판 신개는 강음(江陰)으로, 대사헌 조계생은 태인(泰仁)으로, 형조 좌랑 안숭선(安崇善)은 배천(白川)으로 각각 귀양보내고, 범인 서달은 장 1백 대에 유(流) 3천리를 속(贖)으로 바치게 하였다.[『세종실록』 세종 9년 6월 18일 · 6월 21일] 1428년(세종 10) 2월 세종이 부처(付處)하였던 조계생 · 신개 · 하연(河演) 등을 석방하도록 명하였다.[『세종실록』 세종 10년 2월 12일] 신개는 황해도 강음현에 귀양가서 「육송정기(六松亭記)」를 지어서 자신의 뜻을 나타냈다.
1430년(세종 12) 7월 예문관 대제학(大提學)이 되었고, 이어 전라도 관찰사로 나갔는데, 11월에 세종에게 흰 낭간(琅玕)을 바쳤다.[『세종실록』 세종 12년 7월 3일 · 8월 10일 · 11월 29일] 1431년(세종 13) 2월 사헌부 대사헌에 임명되었는데, 동생 신효처럼 헌관(憲官)의 골수(骨髓)를 지녀서 직언(直言)을 서슴없이 곧잘 하였다. 동생 신효는 태종 때 대간이 되어서 직언하다가 문외 출송(門外出送)당하여, 두 번 다시 도성(都城)에 들어오지 못했다. 그 해 10월 중군 도총제(中軍都摠制)가 되었다가 수문전(修文殿) 제학에 임명되어,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우빈객(右賓客)을 겸임하였다. [『세종실록』 세종 13년 2월 1일, 『사가집』 문집 보유 1 「좌의정 문희 신공 신도비명」] 1432년(세종 14) 3월 중추원(中樞院)지사(知事)가 되었다가 5월에 다시 대사헌이 되었다.[『세종실록』 세종 14년 3월 18일 · 5월 9일]
[세종 후반기 활동]
1433년(세종 15) 윤8월 중추부(中樞府)동지사(同知事)가 되었고 10월 황주 선위사(黃州宣慰使)가 되었으며, 11월 이조 판서가 되었다.[『세종실록』 세종 15년 윤8월 20일 · 10월 1일 · 11월 13일] 1434년(세종 16) 10월 이조 판서로 있던 중에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부사(副使) 중추원 동지사 홍이(洪理) 등을 이끌고 표전문(表箋文)과 변명하는 주본(奏本)을 가지고 북경으로 갔다가 1435년(세종 17) 3월에 돌아왔다.[『세종실록』 세종 16년 10월 26일 · 10월 27일, 세종 17년 3월 6일] 그해 3월 정2품상 정헌대부(正憲大夫)에 가자(加資)되어 형조 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얼마 뒤에 병으로 사직하였다. 그 뒤에 중추부 사(使)ㆍ보문각(寶文閣) 대제학(大提學)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9월에 다시 형조 판서에 임명되었다.[『사가집』 문집 보유 1 「좌의정 문희 신공 신도비명」]
1436년(세종 18) 4월 의정부 참찬(參贊)이 되어, 춘추관 지사(知事)를 겸임하니, 세종이 『고려사(高麗史)』를 수찬하라고 명하였다. 그해 6월 의정부 찬성사(贊成事)로 승진되었는데, 그때 압록강 지류 파저강(婆猪江: 동가강)에 사는 오랑캐가 국경을 침범하자 세종은 신개의 강경한 의견에 따라서 최윤덕(崔潤德)을 보내어 이만주의 소굴을 정복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세종실록』 세종 18년 6월 22일 · 9월 30일] 1437년(세종 19) 8월 의정부 좌찬성(左贊成)이 되었고, 1438년(세종 20) 이조 판서ㆍ세자 이사(世子貳師)를 겸임하였다.[『사가집』 문집 보유 1 「좌의정 문희 신공 신도비명」] 1439년(세종 21) 종1품상 숭록대부(崇祿大夫)로, 6월 정1품상 대광보국 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에 승품되고 의정부 우의정에 임명되어, 집현전 영사(領事)ㆍ경연(經筵) 영사ㆍ춘추관 감사(監事)를 겸임하였다. 1440년(세종 22) 4월 세종이 영의정 황희와 우의정 신개에게 초헌(軺軒)을 내려주고, 인하여 예조에 전지하기를, “이제부터는 이품(二品) 이상은 초헌(軺軒)을 타도록 허가하라.” 하였다.[『세종실록』 세종 22년 4월 3일 ]
1441년(세종 23) 과거를 관장하여 이석형(李石亨) 등 33인을 뽑았다. 1442년(세종 24) 2월 사역원(司譯院)도제조(都提調) 신개 등이 사역원 녹관(祿官)들에게 원내에서는 중국말만 쓰게 할 것을 아뢰었다.[『세종실록』 세종 24년 2월 14일] 그 해 8월 춘추관 감사 신개(申槪)와 춘추관 지사 권제(權踶) 등이 『고려사(高麗史)』를 찬술(撰述)하여 바쳤다.[『세종실록』 24년 8월 12일]
1443년(세종 25) 우의정 신개가 나이 70이 되었다고 벼슬에서 물러날 것[致仕]을 청하려고 하였으나, 세종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세종실록』 세종 24년 12월 25일] 1444년(세종 26) 4월 우의정 신개가 여러 날을 병중(病中)에 있었으므로, 세종이 중관(中官)을 보내어 궤장(几杖)을 하사하였다.[『세종실록』 세종 26년 5월 28일] 1445년(세종 27) 1월 좌의정으로 승진되었다. 그해 겨울 10월에 병이 위독하여졌으므로, 세종이 의원(醫員)을 보내어 진찰하게 하고 진귀한 물품을 계속하여 내려 주었으나 온갖 약을 써도 효험이 없었다. 마침내 1446년(세종 28) 1월 5일 의정부 좌의정 신개가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이 73세였다.[『사가집』 문집 보유 1 「좌의정 문희 신공 신도비명」, 『세종실록』 세종 28년 1월 5일 「신개 졸기」]
유고집으로 후손 신현국(申鉉國)ㆍ신우균(申佑均) 등이 편찬한 『인재집(寅齋集)』 4권 2책이 남아 있다.
[황희의 사위 서달의 살인 사건]
1427년(세종 9) 신개는 <서달의 살인 사건>에 연루되어 의금부에 갇혔다가 강음(江陰)으로 귀양갔다. 서달(徐達)은 형조 판서 서선(徐選)의 아들이고, 좌의정 황희의 사위이다. 서달이 모친 최씨(崔氏)를 모시고 충청도 대흥현(大興縣)으로 돌아가는 길에 신창현(新昌縣)을 지나다가 그 고을 아전이 예대(禮待)하지 않고 달아나는 것을 보고, 종 풀종(芿叱宗) 등 세 사람을 시켜서 달아난 아전을 잡아 오도록 하였다. 종 풀종이 길에서 어떤 아전 하나를 붙잡아서 그를 마구 때리고 그를 앞세워서 달아난 아전의 집으로 안내하게 하였다. 이때 아전 표운평(表芸平)이란 자가 이것을 보고 항의하니, 종들이 그 말에 화를 내고, 아전 표운평을 10여 차례 매질하고 난 다음 쓰러진 그를 끌고 서달이 있는 곳까지 왔다. 아전 표운평이 정신을 잃고 말을 제대로 못하자, 서달이 홧김에 쓰러진 아전을 잘 살펴보지도 않고 발로 차면서 말하기를, “일부러 술 취한 체하고 말을 안 하는 구나.” 하고, 수행원 서득(徐得)을 시켜 도리어 몽둥이로써 무릎과 다리를 50여 대나 때렸는데, 그 이튿날 아전 표운평은 죽었다.[『세종실록』 세종 9년 6월 21일]
아전 표운평의 집에서 관찰사에게 고소하니, 관찰사 조계생이 조순(趙珣)과 이수강(李守剛)을 시켜 신창에 함께 가서 국문하게 하였다. 조순과 이수강은 서달이 종들에게 명령하여 아전을 때려서 죽였다고 옥사(獄辭)를 작성하여 신창의 관노(官奴)에게 주어 관찰사에게 보고하였다. 그때 황희가 찬성(贊成)으로 있었는데, 신창은 바로 그와 친한 판부사(判府事) 맹사성(孟思誠)의 본고향이므로, 맹사성에게 부탁하여 원수진 집안과 화해시켜 달라고 부탁하였다. 아전 표운평의 형 표복만(表卜萬)이란 자가 때마침 서울에 왔었는데, 맹사성이 불러서 타이르기를, “우리 신창 고을의 풍속이 아름답지 못하다는 소문이 나지 말게 하라.”고 하고, 또 신창 현감 곽규(郭珪)에게 서신을 보내어 서선의 사건을 잘 주선해 주도록 부탁하였다. 서달의 아버지 형조 판서 서선도 또한 곽규와 이수강이 있는 곳에 찾아가서 서달이 자기 외아들인 것을 말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동정해주기를 간청하였다. 마침 그때 서선의 사위 노호(盧皓)가 신창의 이웃 고을에 수령관으로 재임하고 있었는데, 그도 곽규와 이수강이 있는 곳에 혹은 몸소 찾아가기도 하고, 혹은 사람을 시켜서 애걸하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신창 현감 곽규가 노호와 서로 내통하면서, 정보를 일러주기를, “차사관(差使官)의 보고가 지금 막 떠났다.” 하니, 노호가 말을 타고 길목을 질러가서 기다리다가 차사관을 매수하여 그 서류를 손에 넣었다.[『세종실록』 세종 9년 6월 21일]
서달의 어머니 최씨의 겨레붙이인 강윤(康胤)이란 자가 나서서 원수진 표운평의 집안을 꾀어서 큰 이익을 줄 것을 약속하고, 사적으로 화해하기를 권하고, 표복만도 역시 뇌물을 받고 맹사성과 곽규의 말대로 원수진 동생 집에 찾아가서 달래기를, “죽은 자는 다시 살아날 수가 없는 것이고, 본 고을 재상과 현임 수령의 명령을 아전으로서 순종하지 않다가 나중에 몸을 어디에다 둘 것이냐.” 하였다. 마침내 사화장(私和狀)을 써서 받아 가지고, 죽은 표운평의 아내에게 주어서, 신창 고을에 바쳐서 온수현(溫水縣)으로 보내니, 이수강이 조순과 함께 의논하여 다시 조서를 작성하기로 하고, 관련된 증인을 모아 가지고, 드디어 옥사(獄辭)를 새로 만들면서, 서달을 면죄시키고 모든 죄를 종 풀종에게 씌어 관찰사 조계생에게 보고하였다. 충청도 관찰사 조계생이 윤환(尹煥)과 이운(李韻)을 시켜 다시 사건을 국문하게 하였는데, 윤환 등도 또한 서선과 노호와 이수강의 청탁을 받았으므로, 그 새로 꾸민 죄안(罪案)대로 회보하니, 관찰사 조계생과 도사 신기(愼幾)는 다시 죄안을 살펴보지도 않고 형조에 그대로 이첩(移牒)하여 보고하였다. 실무를 맡은 형조 좌랑 안숭선(安崇善)이 7개월 동안이나 미적거리다가 다시 더 논하지도 않고, 형조 참판 신개에게 넘겼다. 최종 사건의 처결을 맡은 형조 참판 신개도 역시 죄안을 자세히 살피지 아니하고, 감옥의 서달을 방면하고, 옥사의 죄는 종 풀종 등에게 돌아가게 되어, 법률에 비추어 풀종 등 종 3명을 사형하도록 의정부에 보고하니, 의정부는 그대로 세종에게 보고하였다.[『세종실록』 세종 9년 6월 21일]
세종은 정부에서 보고한 서달 사건의 옥사(獄辭)에서 사리에 어긋난 점이 있음을 발견하고, 권력이 배후에 있다고 의심하여, 의금부에 내려서 다시 심문하도록 하였다. 임금이 의옥(疑獄)이라고 하여 다시 심문을 하면, 3성(三省) 곧 의정부 · 의금부 · 대간이 추국(推鞫)하여 철저하게 진상을 규명하는 것이 관례이다. 마침내 서달의 죄는 형률에 적용하면, 교형(絞刑)에 해당하였다. 처음에 세종은 강경한 태도를 가지고, 좌의정 황희, 우의정 맹사성, 형조 판서 서선을 모두 파면하고, 형조 참판 신개는 강음으로, 대사헌 조계생은 태인으로, 형조 좌랑 안숭선은 배천으로 각각 귀양보냈다. 의정부와 형조 · 사헌부가 완전히 기능이 마비되자 세종은 며칠 만에 황희 · 맹사성 · 서선을 석방하여 직임에 복귀시키고, 신개와 조계생을 유배에서 석방하여 돌아오게 하였다. 또 범인 서달은 장 1백 대에 유(流) 3천리를 속(贖)으로 바치게 하였으므로, 서선의 외아들 서달은 죽지 않고 목숨을 부지하게 되었다.[『세종실록』 세종 10년 2월 12일]
[성품과 일화]
신개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타고난 자질이 명민하고, 학문은 정밀하고 상세하였으며, 단정(端正)하여 법도가 있었고, 청렴(淸廉)하고 고상하여 부화(浮華)함이 없었다. 친척과 친구를 지극한 정성으로 대하였고, 노복(奴僕)들이 허물이 있더라도 매질을 하지 않았다. 비록 집안 자제들이라고 하더라도 신개가 당황하여 말을 빨리 하거나 경솔하게 행동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사가집』 문집 보유 1 「좌의정 문희 신공 신도비명」]
처음 벼슬길에 나선 때로부터 내외직(內外職)을 두루 거치는 동안에 관직에 있으면서 일을 할 때에는 옳지 않은 일을 시행한 적이 없었고, 대간에 있을 때는 봉장(封章)과 항소(抗訴)가 옛 간신(諫臣)의 풍도(風度)가 있었으며, 6조(六曹)의 판서가 되어서는 관대하고 대범하게 정무를 처리하면서 대체(大體)를 견지하였다. 그러나 의정부에 들어가서는 놀라울 만큼 국사(國事)에 전심(專心)하여, 밤낮으로 고심하여 옳은 것은 세종에게 올리고 옳지 않은 것은 폐기시켰으며, 중요한 일에 대해 건의하고 아뢸 일이 있을 때에는 사실 대로 말하여, 정책을 반드시 실행하도록 기획하여, 세종의 태평성대를 이룩하게 하였던 것이다.
어려서부터 조숙하여 마치 성인처럼 행동하였다. 일찍부터 외할머니 원씨(元氏) 품에서 양육되었는데, 그의 나이 겨우 3살에 이런 일이 있었다. 창호 벽(壁)에 낙서 자국이 있어서 원씨가 여러 아이들을 불러다가 힐책을 하였는데, 여러 아이들은 다투어 변명을 늘어놓았지만, 신개는 유독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자신의 키를 가리킬 뿐이었다. 키가 창 벽까지 미치지 못하는 것이 과연 한 자 정도였으므로 그가 하지 않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원씨가 이를 기특하게 여기며, “우리 집안을 일으킬 사람은 반드시 이 아이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나이 13살이 되어 비로소 책을 읽었는데, 마음에 큰 뜻을 품고 게으름을 피우는 일이 없이 힘써 배우고 열심히 익혔다. 일찍이 문충공(文忠公) 조준(趙浚)이 그를 한번 보고 대단히 칭찬하며 말하기를, “장차 재상감이다.” 하였다.[『사가집』 문집 보유 1 「좌의정 문희 신공 신도비명」]
그의 문장(文章)은 고고(高古)하고 간결(簡潔)하였는데, 사부(詞賦)를 좋아하지 않았다. 벼슬살이한 이래로 지은 소장(疏章)과 주의(奏議)가 전후하여 수백 편이었지만, 여기저기서 남의 글을 주워 모은 것이 아니라, 모두 시무(時務)에 절실한 것들이었다. 다만 그의 문장은 공명(功名)과 정사(政事)에 가려서 사람들이 잘 몰랐다.[『사가집』 문집 보유 1 「좌의정 문희 신공 신도비명」]
[묘소와 후손]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묘소는 황해도 평산부(平山府) 농평리(慶坪里) 금강(金剛)의 선영(先塋)에 있는데, 사가정(四佳亭) 서거정(徐居正)이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사가집(四佳集)』 문집(文集) 보유(補遺) 1 「좌의정 문희 신공 신도비명(左議政文僖申公神道碑銘)」] 1452년(문종 2) 세종의 묘정(廟廷)에 배향(配享)되었다.[『신증동국여지승람』 권41]
첫째 부인 평강 채씨(平康蔡氏)는 채윤경(蔡允敬)의 딸인데, 후사 없이 일찍 죽었다. 둘째 부인 선산 김씨(善山金氏)는 군사(郡事) 김가명(金可銘)의 딸인데. 자녀는 아들 셋을 두었다. 장남 신자준(申自準)은 충청도 관찰사를 지냈고, 차남 신자승(申自繩)은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을 지냈고, 3남 신자형(申自衡)은 사헌부 집의(執義)를 지냈다.[『사가집』 문집 보유 1 「좌의정 문희 신공 신도비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