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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80년(성종 11)∼1546년(명종 1) = 67세.] 조선 중기 연산군~명종 때 활동한 무신. 충청도 병마절도사(忠淸道兵馬節度使)를 지냈다. 자는 화중(和仲)이다.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공조 참판(參判) 윤보(尹甫)이고, 어머니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종실 영천군(永川君)의 딸이다. 그의 형 윤여필(尹汝弼)은 장경 왕후(章敬王后)의 아버지이고, 인종(仁宗)의 외조부이다.
[연산군∼명종 시대 활동]
그는 나이 15세에 아버지가 돌아가자, 글공부를 그만두고, 무예(武藝)를 익혔는데, 1501년(연산군 7) 무과에 합격하여 선전관(宣傳官)에 보직되었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났을 때, 장인인 이세좌(李世佐)가 문죄를 받았는데, 사위인 그도 사건에 연루되어 장(杖)을 받고 함경북도 명천(明川)에 부처(付處)되었다. 이듬해인 1505년(연산군 11) 궁중에 뇌물을 써서 충주(忠州)로 옮겨졌다.[『동고유고(東皐遺稿)』 권6 「유명조선국 가선대부 충청도병마절도사 윤공 신도비명(有明朝鮮國嘉善大夫忠清道兵馬節度使尹公神道碑銘)」, 이하 「윤여해 신도비명」으로 약칭]
1506년(중종 1) <중종반정(中宗反正)>이후 방면되어 서울로 돌아왔다. 1507년(중종 2) 선전관을 거쳐서 훈련원(訓鍊院)주부(主簿)가 되었다. 이어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이 되었고, 도총부(都摠府) 도사(都事)를 거쳐서, 훈련원 판관(判官)에 임명되었다. 1508년(중종 3)에는 군자감(軍資監)으로 옮겼고, 얼마 후에는 사복시(司僕寺) 판관(判官)으로 전직되었으며, 사복시에 재임할 때에 모친상을 당하였다. 1512년(중종 7) 상복을 벗은 후, 특지(特旨)로 군자감 판관(判官)에 임명되었고 1513년(중종 8) 상의원(尙衣院) 판관이 되었다.[『동고유고』 권6 「윤여해 신도비명」] 그런데 그가 상의원에서 입직(入直)할 때에, 밤에 술에 취해서 활과 살을 들고 맨발로 승정원으로 가서 창고 안에 도둑이 들었다고 고하였다. 그러나 승지(承旨)들이 사람을 보내어 알아본 결과, 허황된 말이었으므로 법사(法司)가 이를 추고(推考)하였다.[『중종실록』 중종 8년 10월 16일] 게다가 상의원 판관으로서 춘향 대제(春享大祭)의 집사(執事)가 되어 재숙(齋宿)할 때에도 술김에 동료를 구타하여, 직장(直長) 신준지(申遵之)가 눈에 상처를 입어 제사에도 참여하지 못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그가 이미 서계(誓戒)를 한 뒤에 또 술을 마시고 동료를 구타하였으니 이는 매우 광패한 짓이라며 대간(臺諫)으로부터 추문당였다.[『중종실록』 중종 10년 1월 25일]
1516년(중종 11) 군자감으로 전임되었고 1517년(중종 12) 돈녕부(敦寧府)첨정(僉正)이 되었고, 얼마 후에는 훈련원을 거쳐서 의빈부(儀賓府)경력(經歷)이 되었다. 1525년(중종 20) 돈녕부 부정(副正)을 거쳐서, 훈련원으로 전임되었다가, 1528년(중종 23) 돈녕부 정(正)으로 승진되었다. 1531년(중종 26) 사복시로 전임되었고, 1534년(중종 29) 통례원(通禮院) 우통례(右通禮)가 되었다가, 영흥 부사(永興府使)에 임명되어 외방으로 나갔으며, 1537년(중종 32) 임기를 마치고 돌아온 후, 돈녕부 도정(都正)에 임명되었다. 1538년(중종 33) 충청도 수군절도사에 피천(被薦)되어 부임하였을 때에는 직무를 염결간숙(廉潔簡肅)하게 처리하여 변방의 인화(人和)를 얻었으나, 병으로 사직하였다. 1541년(중종 36) 남양 부사(南陽府使)가 되어서는 부세(賦稅)를 공평하게 하여 백성들을 안도(安堵)하였는데, 그해 겨울에는 충청도 병마절도사에 발탁되었다.[『동고유고』 권6 「윤여해 신도비명」]
1543년(중종 38) 함경도 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으나 간원이 아뢰기를, “함경남도는 내지(內地)라 할지라도 방비의 조치는 북도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관방(關防)의 중책을 가려서 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병사(兵使) 윤여해는 본디 술병[酒病]이 있고 나이도 늙어서 곤외(閫外)의 위임을 결코 감당하지 못하니, 체직시키소서.”하니, 왕이 답하기를, “윤여해는 당상이 된 지 이미 10년이 되었고 전에 영흥 부사를 지내어 남도의 일을 알 만하겠기에 특별히 시킨 것이라며, 반대하다가 결국 그를 체직시켰다. [『중종실록』 중종 38년 8월 26일]
[<을사사화>와 윤여해]
1545년(인종 1) 다시 돈녕부로 들어갔는데, 이때부터는 벼슬이 오르는 것이 두려워서 벼슬길에서 마음을 돌리고 오직 술로 자적(自適)하였다. 처음에 그의 조카 윤임(尹任)이 동궁(東宮)이었던 인종의 외삼촌으로서 큰 권세를 누리니 사대부들 가운데 윤임에게 붙은 사람이 많았다. 역시 외척(外戚)인 김안로(金安老)도 동궁을 보위해서 정사(政事)를 담당하고 후일을 도모하기 위하여, 서로 가까이 지내니 윤여해는 매양 그들은 빈축하여 말하기를, “윤임은 무식한 무부(武夫)로서 간사한 사람을 받아들이고 조정 정사에 간여하고 있으니 끝내는 화를 면치 못할 것이다.” 하였다. 인종이 즉위함에 이르러 윤임과 김안로가 고귀해지자 그는 초연(愀然)히 시름에 잠겼다. 마침내 명종이 즉위하면서 소윤(小尹)인 윤원형(尹元衡) 일파가 대윤(大尹)인 윤임 일파를 제거하는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나면서 그의 말처럼 되니 사람들이 그의 선견(先見)에 감복하였다. 그러나 윤임이 죽었을 때에 윤임의 삼촌인 윤여해도 연좌되어 충주(忠州)로 귀양 갔다.[『동고유고』 권6 「윤여해 신도비명」]
1545년(명종 즉위) 명종은 “윤여해가 벼슬한 지 이미 오래되었고 늙었으며, 윤임 등과는 상관이 없는 것 같은데 연좌시키는 것이 너무 과중하니 말감(末減)에 의할 수 없겠는가?” 하였다. 홍언필(洪彦弼啓) 등이 아뢰기를, “법으로는 당연히 연좌되어야 하지만 상의 말씀이 지당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윤여해는 연좌시키지 말고 고신(告身)만 모두 추탈(追奪)하라.” 하였다.[『명종실록』 명종 즉위년 9월 15일] 그러나 1546년(명종 1) 삼공 및 대신들은 그가 이미 대역죄에 연좌되었음을 들어 방면을 반대하는 사이에[『명종실록』 명종 1년 8월 4일 · 8월 5일] 유배지에서 그해 12월 향년 67세로 돌아갔다. [『동고유고』 권6 「윤여해 신도비명」]
윤여해는 인생의 초년과 말년에 두 번에 걸친 유배생활을 하였다, 첫 번째는 그의 나이 25세 때인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에 장인인 이세좌가 연루되면서 사위인 그도 연좌되어 함경북도 명천에 부처되었는데, 그 기간은 2년이었다. 두 번째는 그의 나이 66세 때인 1545년(명종 1) 일어난 <을사사화>로, 그의 조카인 윤임이 윤원형 일파에게 죽음을 당하면서 삼촌인 그도 연좌되어 충주로 귀양 갔다. 두 번의 유배 모두 본인은 잘못이 없었으나 단지 사화에 연루된 이들이 인척이라는 이유로 연좌죄에 걸려 힘든 유배생활을 하였다. 이후 그가 관직을 수행하면서 술에 취하여 벌인 사건과 말년에 오직 술로 자적하였던 것은 모두 이러한 괴로움에서 발현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두 번째는 결국 방면되지 못하고 1546년(명종 1) 유배지에서 돌아갔으니 안타까운 일이라고 하겠다.
[성품과 일화]
윤여해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본바탕이 고매하고 글을 읽어 대의(大義)에 통하였으며 식견이 탁월하여 언론과 거지(擧止)에 현인(賢人) 군자(君子)의 기상이 저절로 나타났었다. 선(善)을 좋아하고 도(道)를 즐겼으며 의로움을 듣고는 감개(感慨)하였고, 교만함을 좋아하고 영화를 탐하는 자는 호서(狐鼠)와 같이 보았다. 살림살이에 마음을 쓰지 않았고 재물을 아끼지도 않아 가난한 친척이나 친구를 보면 가재(家財)를 털어서 구원하였는데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선한 사람들이 많이 다치는 것을 항상 가슴 아파하였는데, 그의 의로운 소문이 조야(朝野)에 파다하게 퍼졌었다. 그는 손님을 좋아하여 항상 술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때로 술에 취하여 실수를 하게 되면 부인이 번번이 규간(規諫)하여 바르게 하였으니 그의 명덕(名德)이 성했던 것은 사실 내조(內助)의 힘이 컸던 것이다.[『동고유고』 권6 「윤여해 신도비명」]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교하현(交河縣) 와동리(瓦洞里)에 있다. 이준경(李浚慶)이 지은 신도비명(神道碑銘)이 남아있다.[『동고유고(東皐遺稿)』 권6 「유명조선국 가선대부 충청도병마절도사 윤공 신도비명(有明朝鮮國嘉善大夫忠清道兵馬節度使尹公神道碑銘)」] 부인 광주 이씨(廣州李氏)는 중추부(中樞府)판사(判事) 광양군(廣陽君) 이세좌(李世佐)의 딸인데, 자녀는 3남 2녀를 낳았다. 1남은 윤인(尹仁)은 공보다 먼저 죽었다. 2남 윤정(尹侹)은 장원서(掌苑署)별좌(別坐)이고, 3남 윤건(尹健)은 예빈시(禮賓寺) 부정이다. 1녀는 유사(儒士) 이계(李誡)의 처가 되었고, 2녀는 현감(縣監) 안여경(安汝敬)의 처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