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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27년(세종 9)∼1504년(연산군 10) = 78세.] 조선 초기 세종~연산군 때의 문신. 영의정(領議政)을 지냈다. 봉작은 파평부원군(坡平府院君)이다. 자(字)는 탕좌(湯佐)이고, 호는 청봉(晴峯) 또는 춘산(春山)이다.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거주지는 서울(京)이다. 아버지는 배천 군수(白川郡守) 윤경(尹坰)이고, 어머니 이씨는 지태주(知泰州) 이임(李霖)의 딸이다.
[세종∼세조 시대 활동]
1447년(세종 29) 사마시(司馬試)에 생원으로 합격하고, 1450년(문종 즉위) 24세의 나이에 식년(式年) 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방목』] 1453년(단종 1) 승문원(承文院) 저작(著作)이 되었고, 1455년(세조 1) 호조 좌랑으로 원종 공신(原從功臣) 2등에 녹훈되었다.[『세조실록』 세조 1년 12월 27일] 1457년(세조 3) 중시(重試)에 합격하였는데, 3월 세조가 세자에게 이르기를, “옛날에 당(唐)나라 태종(太宗)이 고종(高宗)에게 이르기를, ‘내가 훌륭한 재간(才幹)과 공로(功勞)가 있는 사람을 다 임용하지 않은 것은, 네가 이들을 임용해서 너의 은혜를 입도록 하게끔 하는 것이다.’ 했는데, 후세(後世)에 당나라 태종을 평론(評論)하는 사람이 태종을 책망하기를, ‘먼 앞일을 생각함이 너무 심하니 그릇된 일이다.’고 했다. 내가 공로가 많이 있는 사람을 다 임용하지 못했다면 네가 알아서 이들을 임용해야 할 것이니, 최선복(崔善復)과 윤필상과 같은 무리가 이들이다.”며 그를 높이 평가하였다.[『세조실록』 세종 3년 3월 27일]
1463년(세조 9)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었고 3월 명(明)나라 사신(使臣)의 선위사(宣慰使)로 평안도에 파견되었으며, 10월에는 수궁 승지(守宮承旨)가 되었다. 그해 12월에 그가 세조에게 강음에 가서 부모(父母)의 분묘(墳墓)를 배알(拜謁)하고, 파주(坡州)에 가서 조부모(祖父母)를 근친(覲親)하고자 청(請)하니, 세조가 황해도 관찰사와 경기도 관찰사에게 치서(馳書)하여 부모의 분묘에 치제(致祭)하고 조부모에게 잔치를 내려 주게 하였다. 그가 형방 승지로 오랫동안 형옥(刑獄)을 맡으면서 세조의 두터운 신임과 총애를 받았기 때문에 이러한 특전을 받았다.
형방 승지였던 윤필상이 숙직을 하게 되었는데, 날씨가 갑자기 매우 추워졌다. 이때 그는 세조가 반드시 옥중의 죄수에 대해 하문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죄수들이 범한 죄의 경중을 미리 파악하여 기록해놓았다. 밤 오경이 되자 세조가 “오늘밤 날씨가 갑절이나 추우니 옥중에 있는 죄수가 얼어 죽을까 염려된다. 현재 갇혀있는 죄수가 몇 명이나 되는지 빨리 기록하여 고하도록 하라.” 하였는데, 윤필상은 그가 미리 작은 책자에 준비한 것을 즉시 보고하였다. 이에 세조는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들어오라고 명한 다음 술과 고기를 하사하고 말하기를, “이 사람은 나의 보배로운 신하이다.”하였다.[「윤필상 묘표」] 이때부터 거듭 승진하여, 1464년(세조 10) 좌부승지(左副承旨)가 되었고, 그 이듬해에 좌승지로 승진되었으며, 1467년(세조 13) 4월 도승지(都承旨)로 발탁되었다. 구례(舊例)에는 도승지가 이조를 관장하였는데, 그에게 형조를 관장하도록 세조가 명한 것은 형사(刑事)를 중하게 여겼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가 오랫동안 형옥을 맡으면서 그 분야에 능통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1467년(세조 13) <이시애(李施愛)의 난> 때에는 도승지로 왕명을 받들어 난을 평정하고 그 공으로 우참찬(右參贊)에 임명되었고, 1등 적개 공신(敵愾功臣)에 녹훈되었으며, 파평군(坡平君)에 봉해졌다. 그 해 강순(康純) 등이 파저강(婆猪江) 주위의 건주 여진(建州女眞)을 토벌할 때 왕명을 받고 가서 그들을 위유(慰諭)하였다. 이해에 세조가 죽자 수묘관(守墓官)으로 3년간 능을 지켰고, 다시 좌리 공신(佐理功臣)이 되었다.
[성종 ∼ 연산군 시대 활동]
1470년(성종 1) 우찬성(右贊成)이 되었다. 1471년(성종 2) 경상도에 가뭄이 들어 기근이 심하자 우찬성으로 진휼사(賑恤使)가 되어 기민을 구제하였고, 다시 경상도 관찰사를 겸임하면서 외방으로 파견되어 이듬해까지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하였다. 1473년(성종 4) 의정부 우찬성 겸 이조 판서가 되었다. 그 뒤 1474년에는 이조 판서와 의금부 당상을 겸직하였으나, 한명회(韓明澮)와 노사신(盧思愼) 등 권신들이 전권을 휘두르면서 이조의 권한인 인사권까지 침해하므로 이에 분개하여 사직하였다.
1477년(성종 8) 3월 대왕대비인 정희왕후의 명으로 중궁을 폐하는 문제를 논하였는데, 그가 의금부(義禁府)판사(判事)로서 관련 당사자들을 국문하였다. 이해에 좌찬성이 되었고, 궁각(弓角)을 수매(收買)하기 위한 주청사(奏請使)로 명나라에 다녀오면서 건주위(建州衛)의 야인들을 자세히 탐지하여 보고하였다. 1478년(성종 9) 우의정(右議政)이 되었으며, 1479년(성종 10) 좌의정(左議政)으로 승진하였다.[『성종실록』 성종 9년 11월 17일, 성종 10년 8월 1일] 이해에 명나라에서 건주위를 토벌하고자 조선으로 하여금 군사를 요청하였는데, 조정에서는 어유소(魚有沼)를 도원수로 삼아 군사를 파견하였으나, 어유소는 얼음이 녹아 강을 건널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회군하였다. 일이 급박하여지자 한명회 등은 다시 정벌군을 파견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이에 윤필상은 좌의정 겸 서정 도원수(西征都元帥)로 가 되어 병력 5천을 거느리고 가서 큰 전공을 거두고 돌아왔다.[「윤필상 묘표」]
1481년(성종 12)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483년(성종 14) 겸(兼) 세자부(世子傅)가 되었다. 1485년(성종 16) 영의정이 되었으며, 1493년(성종 24) 파평 부원군에 봉해졌다. 그 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1496년(연산군 2)에는 궤장(几杖)을 하사받았다. 1498년(연산군 4) <무오 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서, 김일손(金馹孫)과 김종직(金宗直)의 문집 편집자 들을 국문하였는데, 그 공으로 노비와 전결(田結)등을 하사받았다. 1503년(연산군 9) 그는 연산군에게 경연(經筵) 영사(領事)를 사직하기를 청하였으나 연산군이 허락하지 않았으며, 10월 경연 영사를 겸하였다.[『연산군일기』 연산군 9년 1월 18일 · 10월 25일]
[<갑자사화>와 윤필상]
1504년(연산군 10) <갑자 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나자, 윤필상은 연산군의 생모인 윤비(尹妃: 제헌왕후)의 폐위를 막지 않았다는 이유로 추죄(追罪)되었다. 연산군은 그의 고신(告身)을 다 빼앗고, 가산을 적몰하였으며, 아들과 함께 외방으로 유배시켰다. 연산군은 곧 이어 “윤필상이 여러 조정에서 내리 벼슬하고 몸이 대상(大相)이 되었으니, 사직을 지키는 계책을 고수하여 제 몸을 잊고 인군을 섬겨야 할 것인데, 선왕조에서 큰일을 의논할 때, 후사(後嗣) 왕은 생각지 않고 오직 왕의 뜻을 순종하기만 하여, 큰 변을 가져오게 하였으니, 대신으로서 나라와 휴척(休戚)을 함께하는 의리가 없다. 이에 사약을 내려 대신으로서 아부하고 제 몸만을 생각하는 자의 경계를 삼게 하겠다.”며 그를 사사(賜死)하도록 명하였고, 그는 유배지인 진원(珍原)에서 사사되었다.[『연산군일기』 연산군 10년 윤4월 19일 「윤필상 졸기」]
윤필상이 젊어 북경에 간 적이 있었는데, 그 때 만난 점 치는 사람이 그에게 말하기를 “평생의 수명과 지위가 모두 높으나, 다만 종말에 가서 삼림(三林) 아래에서 죽을 것이다.” 하였다. 그 뒤에 널리 점쟁이에게 물어도 모두 삼림 두 글자를 해석하지 못했다. 그가 사화에 연루되어 진원으로 귀양가 조그만 초가집에 붙여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저녁에 이웃 사람이 곁에 사는 밭 매는 사람에게 말하기를, “내일은 아침 일찍 모두 상림(上林) 밭으로 모이라.” 하였다. 그가 “어째서 상림 밭이라고 하는가?” 묻자, 주인집 사람이 말하기를, “여기서 5리를 못 가서 지명이 상림 · 중림(中林) · 하림(下林)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하였다. 그가 듣고 비로소 삼림 아래라는 말이 생각나서 집을 우러러보며 상심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연산군이 사자를 보내어 죽이려 하였는데[『해동야언』 권3] 사자가 이르자 스스로 술에 비상 가루를 타서 마셨으나 효과가 없어 다시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연산군일기』 연산군 10년 윤4월 19일 「윤필상 졸기」] 1506년(중종 1) 10월 신원(伸寃)되었다.
[성품과 일화]
그는 몸이 작으나 담략(膽略)이 있었으며[『신증동국여지승람』 권11] 총명하고 기민하여 일처리 하는데 능하였다. 젊어서는 가난했는데, 과거에 급제하고는 세조의 인정을 받아 승지가 되고, 매우 총애를 받았다. 일을 민첩하게 보아 왕의 뜻을 많이 맞추니, 세조가 항상 빠른 매[快鶻]라고 불렀다. 그가 정승이 된 지 수년이었지만 재변과 과실이 없었다. 그러나 국사를 의논하는데 있어서는 반드시 위의 뜻의 지향하는 것을 보아 영합(迎合)하는 말을 하므로 사림(士林)들이 비루하게 여겼다고 한다. 그는 성품이 욕심이 많고 인색하여 재산을 모으기 위해 배와 양곡의 값이 올라가고 내려가는 시세를 보아서, 장사꾼들을 끌어다가, 사고 바꾸었으므로 그의 집 문 앞이 저자와 같았다. 그리하여 재산이 거만이었는데, 일찍이 자녀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고, 한 되, 한 말을 내고 들이는 것도 모두 자신이 다 간섭하였다.[『연산군일기』 연산군 10년 윤4월 19일 「윤필상 졸기」]
[묘소와 후손]
묘소는 황해도 강음현(江陰縣) 남쪽 금교(金郊)에 있고, 윤안성(尹安性)이 지은 묘표(墓表)가 남아 있다.[「윤필상 묘표」] 부인 창녕 성씨(昌寧成氏)는 성허(成栩)의 딸인데 자녀는 2남 3녀를 낳았다. 1남 윤간(尹侃)은 참의이고, 2남 윤숙은 승지(承旨)이다. 1녀는 목사 신조의(辛祖義)의 처가 되었고, 2녀는 군수 김진(金震)의 처가 되었으며, 3녀는 현감(縣監) 지준(池浚)의 처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