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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391년(공양왕 3)∼1452년(문종 2) = 62세.] 조선 초기 태종~단종 때의 문신. 예문관 (藝文館) 대제학(大提學)을 지냈다. 자(字)는 중회(仲晦)이다.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아버지는 보문각(寶文閣) 제학(提學) 겸 선공감(繕工監)판사(判事)윤규(尹珪)이고, 어머니 합천 이씨(陜川李氏)는 순흥부사(順興府使) 이원적(李元*)의 딸이다.
[태종 ∼단종 시대 활동]
1411년(태종 11)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음직(蔭職)으로 사직단 직(社稷壇直)에 보임되었고, 다시 군자감 직장(軍資監直長)에 임명되었다.[『성근보집(成謹甫集)』 권2 「좌참찬 공간 윤공 신도비명(左參贊恭簡尹公神道碑銘)」] 1420년(세종 2) 식년시(式年試) 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뒤에[『방목』] 승문원(承文院) 박사(博士)가 되었고, 1421년(세종 3) 승정원(承政院)주서(注書)에 임명되었다. 이어 감찰(監察)이 되었고, 이조 좌랑과 병조 좌랑을 거쳐서, 우헌납(右獻納) 겸 세자 우정자(世子右正字)가 되었다. 1426년(세종 8) 좌헌납(左獻納)이 되었으며 헌납(獻納)과 이조 정랑(正郞)을 거쳐서, 1428년(세종 10) 사헌부(司憲府)장령(掌令)으로 승진되었다. 1429년(세종 11) 사재(司宰) 부정(副正)으로서 경차관(敬差官)이 되어 전라도에 파견되었다. 1432년(세종 14) 사간원(司諫院)지사(知事)와 동부대언(同副代言)을 거쳐, 1434년(세종 16) 우부승지(右副承旨)가 되었다. 1435년(세종 17) 우승지로 승진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였는데, 병이 완쾌된 후인 1437년(세종 19) 예조 참의에 임명 되었고, 1439년(세종 21) 충청도 관찰사가 되었다.[『세종실록』 세종 21년 6월 12일]
1440년(세종 22) 예문관 제학(提學)을 거쳐서[『세종실록』 세종 22년 6월 9일] 예조 참판(參判)으로 승진되었고, 곧 이어 성절사(聖節使)로 임명되어 명(明)나라에 파견되었다. 1441년(세종 23) 경기도 관찰사를 거쳐서, 1442년(세종 24) 형조 참판이 되었고, 1444년(세종 26) 한성부 윤(漢城府尹)이 되었다가, 예조 참판에 임명되었다.[『세종실록』 세종 23년 11월 14일, 세종 24년 10월 8일, 세종 26년 1월 20일 · 윤7월 14일] 1446년(세종 28) 한성부 판사(漢城府判事)가 되었다가, 형조 판서로 자리를 옮겼다.[『세종실록』 세종 28년 9월 6일 · 12월 2일] 그 이듬해에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이 되었고, 1449년(세종 31) 공조 판서에 임명되어 원접사(遠接使)가 되었고 호조 판서에 임명되는 등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세종실록』 세종 29년 12월 3일, 세종 31년 2월 1일 · 12월 22일 · 12월 26일]
1452년(단종 즉위) 호조 판서로 국장 도감(國葬都監) 제조(提調)가 되었고, 의정부 좌참찬(左參贊)에 임명되었다. 병 때문에 사직(辭職)하였으나, 다시 예문관 대제학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풍질(風疾)이 날로 악화되어 사은숙배(謝恩肅拜)를 하지 못하고서 정침(正寢)에서 돌아가니, 나이가 62세였다.[『성근보집』 권2 「좌참찬 공간 윤공 신도비명」, 『단종실록』 단종 1년 6월 13일 「윤형 졸기」]
[성품과 일화]
윤형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성근보집』 권2 「좌참찬 공간 윤공 신도비명」] 그는 성질이 순후(醇厚)하고 삼갔으며, 별다른 특이한 재능이 없었지만, 성색(聲色)을 즐기지 않았다. 그는 평생 미희(美姬)나 첩을 두지 않았을 뿐 아니라, 부인이 별세한 뒤에 자질(子姪)들이 침구를 시봉할 사람을 한 사람 두도록 권하였으나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섬기기를 지극히 효성스럽게 하였는데, 그의 거처가 어머니의 집과 거의 7~8리 가량 떨어져 있었으나, 질병(疾病)이나 사고(事故)가 있지 않으면 비록 비가 오고 눈이 오더라도 혼정신성(昏定晨省)을 폐하지 않았다.
윤형은 지조를 굳게 지키며 아첨(阿諂)하지 않았다. 성품이 검소하여 화려한 의복이 없었고 음식도 많은 반찬을 갖추지 않았다. 아들과 사위들이 많았으나 수하 사람을 훈계하여 한 사람도 교만한 습성을 가진 자가 없었다. 사람들이 단술[甘酒]을 가진 것을 보면 반드시 이를 경계하기를, “이름을 더럽히고 일을 폐(廢)하는 것으로서는 이것보다 지나치는 것이 없다.”하였다. 매양 남의 잘못을 보면 희언(戲言)을 통한 바른 말을 하여 휼간(譎諫)하는 풍모가 있었다.
그는 세종시대에 현달(顯達)하여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는데, 실록에 있는 윤형의 졸기에 나타난 세종과의 일화를 살펴보면 윤형의 능력과 집안을 높게 평가하고 있던 세종이 그를 유념하여 발탁한 결과로 보인다. 그가 여러 관직을 거쳐 우부승지가 되어서 입대(入對)하게 되었을 때 세종이 묻기를, “경(卿)은 시중 윤관(尹瓘)의 몇 세손인가?”하니, “16대(代) 손입니다.” 하였다. 세종이 말하기를 “경의 가세는 다른 종족(宗族)과 비할 바가 아닌데, 더구나 과거에 올랐으니, 누가 감히 갑자기 현달하였다고 논의하겠느냐? 경은 주서에서 10년 만에 승지가 되었으니, 근래에 없던 일이다.” 하였다. 윤형이 경전(經典)과 사서(史書)를 뒤섞어 끌어다가 부주(敷奏)하기를 상세하게 밝히니, 세종이 “경은 책을 읽을 때에 몇 번 보아서 이와 같이 능히 기억할 수 있는가?” 하니, “신은 겨우 30번 정도 읽습니다.” 하였다. 세종은 “나는 여러 책을 모두 1백 번 읽었고, 다만 『초사(楚詞)』와 『구소수간(歐蘇手簡)』만은 30번 정도였을 뿐이다.” 하였다. 그가 좌승지(左承旨)로 옮겼는데, 병 때문에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병이 오래 되어도 낫지 않으니, 세종이 여러 차례 경연(經筵)에서 시신(侍臣)에게 묻기를, “윤형의 병은 어떠한가? 참으로 쓸 만한 사람이다.” 하였다.[『단종실록』 단종 1년 6월 13일 「윤형 졸기」]
[묘소와 후손]
시호는 공간(恭簡)이다. 묘소는 경기 양주(楊州)의 동쪽 사동(巳洞)에 있고, 성삼문(成三問)이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성근보집(成謹甫集)』 권2 「좌참찬 공간 윤공 신도비명(左參贊恭簡尹公神道碑銘)」] 1455년(세조 1) 좌익 공신(佐翼功臣) 2등에 추증(追贈)되었다. 부인 청주 곽씨(淸州郭氏)는 봉상시(奉常寺)소경(少卿)곽순(郭恂)의 딸인데, 자녀는 7남 4녀를 두었다. 1남 윤찬(尹贊)은 수(守) 형조 정랑(正郞)이고, 2남 윤제(尹提)는 연희궁 직(衍禧宮直)이며, 3남 윤임(尹任)은 장사랑(將士郞)이고, 4남 윤진(尹進)은 중부 녹사(中部錄事)이며, 5남은 윤근(尹瑾)이다. 6남 윤종생(尹終生)은 아버지 보다 먼저 죽었으며, 7남은 윤우(尹遇)이다. 1녀는 감찰 나유선(羅裕善)의 처가 되었고, 2녀는 지평(持平) 유자황(柳子晃)의 처가 되었으며, 3녀는 정득지(鄭得之)의 처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