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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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한(申瀚)

서지사항
항목명신한(申瀚)
용어구분인명사전
분야정치·행정가
유형인물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총론]
[1482년(성종 13)∼1543년(중종 38) = 62세.] 조선 중기 성종 때의 문신. 상호군(上護軍)을 지냈다. 자는 중용(仲容)이다. 본관은 고령(高靈)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좌의정 신용개(申用漑)이고, 어머니 밀양 박씨(密陽朴氏)는 밀원 부원군(密原府院君) 박건(朴楗)의 딸이다. 영의정(領議政)신숙주(申叔舟)의 둘째 아들 신면(申㴐)의 손자이다.

[중종 시대 활동]
1506년(중종 즉위) <중종반정(中宗反正)> 때 아버지 신용개를 따라서 반정군에 참여하여, 원종공신(原從功臣) 3등에 봉해졌다. 1507년(중종 2) 반정에 참여한 공으로 선전관(宣傳官)에 임명되었고 가을에 사마시(司馬試)에 진사과(進士科)로 합격하였다. 1510년(중종 5) 장흥고(長興庫) 주부(主簿)를 거쳐,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에 임명되었다. 1511년(중종 6) 공조 좌랑(佐郞)에 임명되었다가, 형조 좌랑으로 옮겼다.[『양곡집(陽谷集)』 권11 「판결사 신공 묘갈명(判決事申公墓碣銘)」] 1513년(중종 8) 평시서(平市署) 영(令)으로 승진하였다가, 얼마 안 되어 호조 정랑(正郞)으로 옮겼는데, 대간에서 평시서 영에 임명된 지 몇 달이 지나지 않아서 너무 빨리 호조 정랑에 임명되었다고 탄핵하였다.[『중종실록』 중종 8년 12월 14일]

1514년(중종 9) 공조 정랑이 되었다가, 1515년(중종 10) 형조 정랑으로 옮겼는데 신한이 이 송사를 처리하면서 외가 친척 여자의 편을 들었다고 대간에서 탄핵당하자 아버지 우의정 신용개가 그 잘못을 사과하였다.[『중종실록』 중종 10년 2월 4일] 중종의 제 1계비(繼妃)인 장경왕후(章敬王后)가 1515년(중종 10) 인종을 낳다가 죽었다. 산릉을 조성할 때 신한이 산릉 총호사(山陵摠護使) 정광필(鄭光弼)의 지휘 아래 분장관(分掌官)이 되었는데, 광중에 돌이 있는 줄 알지 못하고 산릉을 만들었다. 장경왕후의 산릉이 바로 희릉(禧陵)이다. 나중에 희릉을 돌이 박힌 나쁜 땅에 썼다는 것이 뒤늦게 밝혀져서, 사헌부의 탄핵을 당하였으나, 영의정 정광필의 비호를 받아서 무사하였다. 영의정 정광필은 아버지 신용개와 절친한 친구였을 뿐만 아니라, 서로 혼인을 맺어서 정광필은 신한과 인척 관계에 있었다. 1537(중종 32) 4월 김안로(金安老)가 정권을 잡았을 때 정적 정광필을 제거하기 위하여 이 사건을 문제 삼아서 그해 5월, 6월 내내 군신 간에 논란이 되었는데, 결국 희릉을 천장(遷葬)하였다.[『중종실록』 중종 32년 4월 23일 · 4월 25일 · 4월 30일 · 5월 1일 · 6월 4일] 희릉은 경기도 광주(廣州)의 헌릉(獻陵)의 오른쪽 자리에서 현재의 고양군(高陽郡) 원당리(元堂里) 서삼릉(西三陵)으로 옮겼다.

1517년(중종 12) 개성부(開城府) 경력(經歷)에 임명되었는데, 개성은 고려의 국도로서 인물이 번창하고 장사꾼들이 많아서 다스리기가 어렵다고 소문이 났으나, 경력 신한이 개성 상인들을 엄격하게 통제하니, 간교한 장사치들이 숨을 죽이고 감히 방해하지 못하였다. 1519년(중종 14) 가을에 아버지 좌의정 신용개가 병으로 자리에 눕자, 벼슬을 버리고 와서 약시중을 들었는데, 나라에서 특별히 그를 의빈부(儀賓府) 경력(經歷)에 임명하였다. 아버지의 병이 위독해지자, 온갖 정성을 다하여 몇 달 동안 간호하였으나, 마침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3년 동안 상복(喪服)을 입고 시묘(侍墓)살이를 하였는데, 건강을 잃을 정도로 상례(喪禮)를 지나치게 지켰다.[『양곡집』 권11 「판결사 신공 묘갈명」]

1521년(중종 16) 상복을 벗고, 내자시(內資寺) 첨정(僉正)을 거쳐 배천군수(白川郡守)로 나가서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객관(客館)이 오래되어 허물어졌으므로, 자신의 봉급을 떼어서 사람을 고용하여 중건하였으나, 고을 백성들은 이를 알지 못하였다. 1526년(중종 21) 내자시 첨정을 거쳐, 선산부사(善山府使)로 나갔다가, 대동찰방(大同察訪)에 임명되었다. 명나라에 가는 통역관들이 무역할 물건을 많이 실어가기 때문에 역참(驛站)이 피폐해졌으므로, 그가 부임하여 청탁을 막고 법을 엄하게 집행하여 그 폐단을 모두 없앴다. 그 뒤에 제용감(濟用監) 부정(副正)에 임명되었다가, 1531년(중종 26) 사섬시(司贍寺) 부정으로 옮겼으며, 사도시(司導寺) 정(正)으로 승진하였다. 얼마 안 되어 광주목사(光州牧使)로 나가서 민간의 폐단을 개혁하고 조세를 공평하게 거두었다. 1536년(중종 31) 장악원(掌樂院) 정에 임명되었다가, 통례원(通禮院) 우통례(右通禮)로 옮겼고 그 뒤에 좌통례(左通禮)로 승진하였다. 사도시 첨정을 거쳐, 1539년(중종 34)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진되어 장례원(掌隷院) 판결사(判決事)가 되었다.[『양곡집』 권11 「판결사 신공 묘갈명」]

1540년(중종 35) 중추부(中樞府) 첨지사(僉知事)로 전직되었는데, 성절사(聖節使)에 임명되어 중국 명(明)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성절사로 중국 명나라 북경(北京)에 가서 명나라 세종(世宗) 가정제(嘉靖帝)의 생신을 축하하고, 명나라에서 돌아와서, 광주목사(廣州牧使)에 임명되었다. 1541년(중종 36) 진주목사(晉州牧使)의 자리가 비자, 진주 목사로 옮겼는데, 부임한 지 1년 만에 경상도 관찰사의 고과(考課)에서 으뜸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진주목사 신한은 과로로 인하여 피로가 쌓인 끝에 비장(脾臟)에 병이 났다. 1542년(중종 37) 가을에 병이 갈수록 심해지자 진주 목사를 사직하고 서울 집으로 돌아왔다. 1543년(중종 38) 상호군(上護軍)에 임명되었으나, 그때 이미 병이 위독해져서, 9월 22일에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이 62세였다.[『양곡집』 권11 「판결사 신공 묘갈명」]

[성품과 일화]
신한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어려서부터 기골(氣骨)이 준수하여 보통 아이들과 달랐고 미목(眉目)이 그림과 같이 아름다워서 그를 아 바라볼 때 신선 속의 사람 같았다. 나이 12세에 어머니를 여의자 외조부 좌찬성(左贊成) 박건이 데려다가 외갓집에서 길렀다. 모습이 단정하고 행실이 곧았으며 명문의 가문에서 낳고 자라 학문에 연원이 있었다. 평소에 성실하여 말을 잘 하지 못한 것 같았으나 일을 맡아서 단안을 내릴 적에는 확고하여 흔들림이 없었다. 비록 한 겨울이나 한 여름에도 의관(衣冠)을 정제하고 꿇어앉아 나태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아침에 관아에 나갔다가 저녁에 돌아오면 반드시 먼저 집안을 살펴보았는데, 하루도 거른 적이 없었다. 벼슬살이할 때 정도(正道)를 지켜서 사람들이 감히 사사로운 일로 청탁하지 못하였다. [『양곡집』 권11 「판결사 신공 묘갈명」]

언제나 신한은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겨서 늙도록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문장과 학식이 높았을 뿐만 아니라, 이문(吏文)도 곧잘 해독하였던 것 같다. 이문(吏文)은 명나라 궁중(宮中)에서 사용되던 속어(俗語)인데, 황제의 말을 문어(文語) 곧 한문으로 바꾸면, 혹시 그 뜻을 왜곡할 수 있기 때문에 중국과 왕래하던 외교 문서인 표문(表文) · 전문(箋文)에 많이 사용되었다. 당시 최세진(崔世珍)이 『이문집람(吏文輯覽)』을 편찬하여 이문학관(吏文學官)들에게 이문을 가르쳤다. 1540년(중종 35) 신한이 성절사가 되어서 표문을 받들고 중국 명나라 북경으로 갔는데[『중종실록』 중종 35년 9월 1일], 성절사 신한은 중국에서 명나라 조정의 풍속과 예절을 보고 명나라 정세의 변화를 듣고, 중요한 것을 기록하여 선래 통사(先來通事) 배감(裴瑊)에게 부쳐서 중종에게 보고하였다. 승정원에 이것을 『문견등록(聞見謄錄)』에 올리고, 중종에게 바쳤다. 중종이 이것을 읽어보고, 문견에 들어 있는 이문으로 자세히 알 수가 없으므로, 이문학관을 불러 질정해서 다시 아뢰도록 하였다.[『중종실록』 중종 35년 10월 13]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 금촌리(金村里)에 있는데, 양곡(陽谷) 소세양(蘇世讓)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양곡집(陽谷集)』 권11 「판결사 신공 묘갈명(判決事申公墓碣銘)」] 부인 풍천 임씨(豊川任氏)는 중추부 첨지사 임맹영(任孟瑛)의 딸인데, 2남 4녀를 낳았다. 장남 신여주(申汝柱)는 부여현감(夫餘縣監)이고, 차남 신여량(申汝樑)은 장례원 사의(司議)이다. 장녀는 장례원 사평(司評) 최금(崔嶔)에게 시집가고, 차녀는 김돈(金暾)에게 시집가고, 3녀는 승정원(承政院) 정자(正字)이순효(李純孝)에게 시집가고, 4녀는 구효연(具孝淵)에게 시집갔다.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명종실록(明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양곡집(陽谷集)』
■ 『명재유고(明齋遺稿)』
■ 『이요정집(二樂亭集)』
■ 『쌍봉집(雙峯集)』

■ [집필자] 최양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