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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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숙주(申叔舟)

서지사항
항목명신숙주(申叔舟)
용어구분인명사전
분야정치·행정가
유형인물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총론]
[1417년(태종 17)∼1475년(성종 6) = 59세.] 조선 초기 세종~성종 때의 문신 · 학자. 영의정(領議政)을 지냈으며 봉작은 고령부원군(高靈府院君)이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정난공신(靖難功臣) · 좌익공신(佐翼功臣) · 익대공신(翊戴功臣) · 좌리공신(佐理功臣)이다. 자는 범옹(泛翁)이고, 호는 희현당(希賢堂)인데, 만년의 자호는 보한재(保閑齋)다. 본관은 고령(高靈)이고, 거주지는 서울인데, 전라도 나주(羅州) 출신이다. 아버지는 집현전(集賢殿) 부제학(副提學)신장(申檣)이고, 어머니 나주 정씨(羅州鄭氏)는 성주 지사(成州知事) 정유(鄭有)의 딸이다. 공조 참의(參議)신포시(申包翅)의 손자이고, 좌의정(左議政)신용개(申用漑)의 조부다. 아버지 친구 청향당(淸香堂) 윤회(尹淮)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성균관(成均館)에 입학하여 권근(權近)의 제자 송정(松亭) 김반(金伴)에게 경학(經學)의 이론을 배웠다. 집현전 학사(學士)로 있을 때 성삼문(成三問) · 박팽년(朴彭年) · 이개(李塏) 등과 절친한 사이였다.

[세종 시대 활동]
1438년(세종 20)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는데, 초시(初試)복시(覆試)에서 연달아 장원하였다. 1439년(세종 21) 9월 친시(親試) 문과(文科)에서 세종이 몸소 책문(策問)을 내어서 시험을 보였는데, 급제자 10명 중에 3등을 차지하였다.[『방목』] 처음에 전농시(典農寺) 직장(直長)에 보임되었는데, 나라 제사를 맡아보는 집사(執事)를 맡았다가 아랫사람의 실수로 인하여 파직되었다.[『보한재집(保閑齋集)』 부록(附錄) 「비명(碑銘)」] 그때 늙은 아전이 실수한 것을 젊은 신숙주가 대신하여 뒤집어쓰고, 그 늙은 아전을 구해주었다. 1440년(세종 22) 세종은 신숙주를 발탁하여 함길도 도관찰사(咸吉道都觀察使) 김종서(金宗瑞)의 종사관(從事官)에 임명하여, 김종서의 문필(文筆) 업무를 도우면서 6진(六鎭)을 개척하는 실무를 담당하게 하여, 문무(文武)를 겸전한 인물이 되게 하였다. 1441년(세종 23) 주자소(鑄字所) 별좌(別坐)가 되었다가, 가을에 집현전에 들어가서 부수찬(副修撰)에 임명되어,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 1442년(세종 24) 군기시(軍器寺) 주부(主簿)가 되었다가, 훈련원(訓練院) 주부로 옮겼다.

이때 세종은 젊은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집현전 학사들에게 장기간 휴가를 주어서 전공 분야의 책을 읽고 주제를 선정하여 공동으로 연구 토론할 기회를 마련하여 주었는데, 이것이 이른바 사가독서(賜暇讀書)이다. 신숙주는 성삼문 · 이개 등과 함께 장기간 집을 떠나서 조용한 삼각산(三角山)의 진관사(津寬寺)에서 여러 책을 읽고, 집현전 제학(提學)의 지도 아래 때때로 함께 모여서 읽은 책을 토론하고 가끔 시험도 보았다. 사가독서를 통하여 26세의 신숙주는 같은 연배의 성삼문 · 박팽년 · 이개 등과 학문 친구로서 깊이 사귀게 되었다.

1443년(세종 25) 2월 오위(五衛)의 부사직(副司直)이 되었는데, 세종이 신숙주를 일본 통신사(通信使) 변효문(卞孝文)의 서장관(書狀官)에 임명하여, 일본의 교토[京都]의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의 새로운 다이쇼군[大將軍] 아시카가 요시카츠[足利義勝]를 축하하도록 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대마도주(對馬島主) 소오 사다모리[宗貞盛]를 설득하여 <계해약조(癸亥約條)>를 맺었다. 당시에 많은 일본의 사행선이 조선의 3포(三浦)로 몰려왔기 때문에 대마도주가 서계(書契)를 발급하여 일본의 사행선(使行船)을 중간에서 통제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일본의 대소 영주(領主)들이 한해에 보내는 배[歲遣船]의 숫자를 50척으로 제한하고, 배를 타고 오는 뱃사람[格軍]의 숫자를 대선(大船)은 40명, 중선(中船)은 30명, 소선(小船)은 20명으로 한정하였다. 이들에게 조선에서 식량을 지급하되, 일본인이 우리나라 3포에 머물 수 있는 기일을 20일로 정하였다. <계해약조>의 교역 체제는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 때까지 계속되는데, 다만 중중 때 <3포 왜란(三浦倭亂)>으로 세견선과 세사미(歲賜米)를 반으로 줄였을 뿐이다.

1444년(세종 26) 2월 집현전 교리(集賢殿校理) 최항(崔恒) · 부교리 박팽년, 부수찬 신숙주 · 이현로(李賢老: 이선로) · 이개, 돈녕부(敦寧府) 주부(注簿)강희안(姜希顔) 등에게 명하여 의사청(議事廳)에 나아가 언문(諺文)으로 『운회(韻會)』를 번역하게 하고 동궁(東宮: 문종)과 진양 대군(晉陽大君) 이유(李瑈) · 안평 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으로 하여금 그 일을 관장하게 하였다.[『세종실록』 세종 26년 2월 16일] 1445년(세종 27) 1월 세종은 신숙주와 성균관 주부 성삼문과 행(行) 사용(司勇) 손수산(孫壽山)과 함께 중국 요동(遼東)으로 보내 명(明)나라의 음운(音韻) 학자 황찬(黃瓉)을 만나 운서(韻書)에 대해 질문하도록 하였다.[『세종실록』 세종 27년 1월 7일] 신숙주와 성삼문 · 손수산이 중국어에 능통하였는데 특히 신숙주는 황찬의 말을 들으면 쉽게 해득(解得)하고 털끝만큼도 틀리지 않았다. 명나라의 한림 학사(翰林學士) 황찬은 신숙주의 현명한 지혜에 감탄하여, 세상에 보기 드문 현명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희현당(希賢堂)’이란 호를 지어주었다. 그때 마침 황찬이 요동 지방에 유배와서 있었으므로, 신숙주와 성삼문은 우리나라 사신 일행을 따라서 요동까지 여러 차례 왕래하였는데 그 횟수가 무려 8~13차례였다고 한다. 1446년(세종 28) 9월 훈민정음(訓民正音)이 반포하고, 그 해설서인 『훈민정음 해례본(訓民正音解例本)』을 간행하였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훈민정음 창제의 취지를 밝힌 세종의 서문(序文)과 예의(例義), 신숙주 · 최항 · 성삼문 · 박팽년 · 이개 · 이현로 · 정인지(鄭麟趾) 등 집현전 학사들과 강희안이 쓴 해례(解例), 정인지가 쓴 해례 서(解例序)로 되어 있다.

1447년(세종 29) 8월 문신(文臣)들에게 보이는 중시(重試)에 합격하였다. 그때 합격자 20명 가운데 8명이 우수하여 그 우열을 가리기가 어려웠으므로, 세종이「팔준마(八駿馬)」란 글제를 내어서 다시 시험을 보였다. 팔준마는 태조 이성계가 탔던 명마를 뜻한다. 세종이 직접 성삼문을 장원으로, 신숙주를 3등으로 뽑았다. 신숙주는 집현전 응교(應敎)에 임명되어, 예문관(藝文館) 응교와 지제교를 겸임하였다. 그해 9월 『동국정운(東國正韻)』 6권이 완성되었는데, 신숙주 · 최항 · 성삼문 · 박팽년 · 이개 · 강희안 · 이현로 · 조변안(曺變安) · 김증(金曾) 등이 편찬에 참여하였다. 『동국정운』은 새로 만든 훈민정음을 가지고 15세기 우리나라에서 쓰이던 한자음을 바로잡은 것이다. 이때 집현전 응교 신숙주가 『동국정운』의 서문을 쓴 것을 보면, 『동국정운』을 편찬하는 데에 신숙주가 주된 구실을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448년(세종 30)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우익선(右翊善)이 되었다. 1449년(세종 31) 춘추관(春秋館) 사관(史官)에 임명되어, 기주관(記註官)을 겸임하였다. 1450년(세종 32) 윤1월 명나라 사신 한림 시강(翰林侍講) 예겸(倪謙)과 급사중(給事中) 사마순(司馬恂) 등이 우리나라에 와서 황태자(皇太子: 영종)의 책봉을 선포하였는데, 세종이 집현전 학사들에게 사신 일행을 접대하게 하였다. 사신 일행이 태평루(太平樓)에 오르다가, 예겸이 「설제등루부(雪霽登樓賦)」라는 시(詩)를 지어서 접반사(接伴使) 정인지에 건네주었다. 신숙주와 성삼문도 예겸을 따라가다가, 즉석에서 그 운(韻)에 맞추어 각각 시를 지어서 화답하니, 명나라의 대시인 예겸이 신숙주의 시를 보고 깜짝 놀라서 신숙주를 ‘동방의 거벽(巨擘)’이라고 칭찬하였다.[『보한재집』 부록 「비명」] 예겸은 당시 명나라의 유명한 시인인데, 명나라에 돌아가서 『조선기사(朝鮮紀事)』를 지어서 세종 때 조선의 문물을 소개하였다. 예겸은 신숙주의 사부(詞賦)가 중국 초(楚)나라 굴원(屈原)과 송옥(宋玉)의 수준과 맞먹을 정도라고 극찬하여, 신숙주의 문명(文名)이 중국에까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해 6월 사헌부(司憲府)에 들어가서, 장령(掌令)이 되었다가, 집의(執義)로 승진하였다. 또 그해 가을에 과거 시험을 관장하여 권람(權擥) 등을 뽑았는데, 당시 과거의 급제자는 시관(試官)을 스승처럼 받들어 모셨다. 단종 때 신숙주가 세조의 편에 가담하게 되는 것은 수양대군(首陽大君: 세조)의 심복 권람이 거듭 찾아와서 부탁하였기 때문이었다.

[문종 · 단종 시대 활동]
1450년 2월 세종이 54세의 나이로 승하하고, 맏아들 문종이 37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는데, 11월 신숙주는 사헌부 수 집의(守執義)가 되었다.[『문종실록』 문종 즉위년 11월 1일] 세종은 집현전 학사들이 집현전에서 학문만을 연구하도록 다른 관직으로 옮기는 것을 막았으나, 문종은 이를 막지 않았다. 1451년(문종 1) 신숙주는 다시 집현전에 돌아와서 직제학(直提學)이 되었는데, 지제교를 겸임하였다. 또 세자시강원 우보덕(右輔德)이 되어, 세자(世子: 단종)에게 글을 가르쳤다. 세자는 궁녀 권씨(權氏)가 낳았으므로, 세종의 둘째 아들 수양대군과 셋째 아들 안평대군은 그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이에 불안을 느낀 문종은 가까운 측근 성삼문 · 신숙주 · 박팽년 등에게 어린 세자를 부탁하였다. 신숙주는 춘추관 사관에 임명되어, 『세종실록(世宗實錄)』을 편찬하는 기주관(記註官)이 되었고, 1452년(문종 2) 김종서 · 정인지가 기전체(紀傳體) 『고려사(高麗史)』를 다시 편찬할 때 그 열전(列傳)을 맡아서 찬술(撰述)하였다.

1452년 5월 문종이 39세의 나이로 승하하고, 12세의 어린 단종이 즉위하였다. 이때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이 서로 권력 다툼을 벌였다. 안평대군은 서화(書畵)에 뛰어나서 많은 문인(文人)들이 그 주변에 모여들었다. 수양대군은 무사다운 기질이 있어서 그 주변에 많은 무사와 낭인(浪人)들이 모였으나, 문인은 드물었다. 수양대군이 주청사(奏請使)를 자청하여 명나라에 가서 단종의 고명(誥命)을 받아오겠다고 하여 북경(北京)에 다녀오게 되었다. 처음에 수양대군은 세종 때 명상 허조(許稠)의 아들 허후(許詡)와 함께 북경으로 가려고 하였으나, 허후가 그 기미를 알고 이를 완강히 거절하였다. 수양대군은 신숙주를 설득하여 서장관으로 임명하고, 북경에 함께 갔다. 이것은 수양 대군 일파가 정국의 주도권을 잡으려는 속셈이었다. 그해 8월 집현전 직제학 신숙주가 말을 타고 수양대군 저택 앞을 지나가는데, 수양대군이 이것을 보고 신숙주를 집안으로 불러 들여서, “어찌 과문불입(過門不入)하는가?” 하고, 함께 술을 마시면서 농담으로 말하기를, “옛 친구를 어찌 찾아와서 보지 않는가? 그대와 이야기하고 싶은 지 오래되었다. 사람이라면, 비록 헛되게 죽지는 않아야 하지만, 사직(社稷)을 위해서는 죽어야 안 되겠는가?” 하였다. 신숙주가 대답하기를, “대장부가 편안히 아녀자의 손 안에서 죽는다면, 그것은 ‘재가부지(在家不知)라고 할 만합니다.” 하므로, 수양대군이 신숙주의 손을 잡고, “그렇다면 나와 함께 중국에 갑시다.” 하였다.[『단종실록』 단종 즉위년 8월 10일] 이리하여 신숙주는 주청사의 서장관이 되었다.

그해 10월에 주청사의 정사 수양대군과 부사 민신(閔伸)과 서장관 신숙주가 50여 명의 사신 일행을 거느리고 가서 고명을 받아 가지고 이듬해 2월에 돌아왔다. 사신 일행이 4~5개월 정도 풍찬노숙(風餐露宿)하면서 같이 여행하였으므로 이 기간에 수양대군은 반대파 사람을 충분히 설득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이때 주청사 일행의 숫자가 일반 사신 일행의 규모인 약 35명보다 15명 정도나 많았다. 수양대군의 심복 권람 · 한명회(韓明澮) 등이 이름난 젊은 문인 신숙주 · 서거정(徐居正) 등을 사신 일행으로 끌어들여, 결국 수양대군 편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병조 판서 민신은 주청사의 부사로 따라갔으나, 수양대군의 설득을 끝내 뿌리쳤다.

1453년(단종 1) 2월 신숙주는 주청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 북경에 갔다가 돌아와서, 상호군(上護軍)에 임명되어 병조 지사(知事)를 겸임하였다. 곧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어, 우부승지(右副承旨)를 거쳐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옮겼다. 안평대군은 영의정 황보인(皇甫仁) · 좌의정 김종서 등과 손을 잡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심복 이현로를 통하여 집현전 학사 성삼문 · 박팽년 · 이개 등 젊은 학사들을 안평대군 편으로 끌어들였다. 이에 격분한 수양대군은 이현로를 붙잡아 공개적으로 매질하여 말썽이 일어났다. 특히 수양대군은 황보인 · 김종서 등의 ‘황표 정사(黃標政事)’를 반대하여 왕권(王權)의 강화를 주장하였는데, ‘황표 정사’는 단종이 어려서 정사를 판결하기가 어려웠으므로, 김종서 · 황보인 등이 먼저 의논하여, 어린 단종이 결재할 곳에 미리 황표(黃標) 곧 황색 표식을 붙여서 임금이 그곳에다 도장을 찍도록 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수양대군과 안평대군 사이에 세력 다툼은 더욱 팽팽하게 전개되어 조정의 긴장을 고조시켰다.

1453년 10월 10일 새벽에 수양대군이 심복 권람 · 한명회 · 홍달손(洪達孫)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켰다. 먼저 김종서를 찾아가서 그 집에서 죽이고, 황보인 · 이양(李穰) · 조극관(趙克寬) 등 조정의 반대파 정승 · 판서를 궁중으로 불러들여 철퇴로써 때려죽였다. 또 안평대군 부자를 붙잡아 강화도로 귀양보냈다가 곧 사사(賜死)하고, 문종의 현릉(顯陵)에서 공사를 감독하던 병조 판서 민신을 목 베었다. 그때 마침 신숙주는 능침(陵寢)을 돌보기 위하여 외방(外方)에 나가 있었으므로, 정변에 직접 참가하지는 않았다. <계유정난>은 우리 역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가장 참혹한 궁중 정변이다. 수양대군은 왕권의 강화를 주장하였으나, 김종서는 ‘황표 정사’를 통하여 신권(臣權)의 강화를 도모하였다. 그러나 <계유정난>이 일어나서 세종이 집현전을 통하여 길러낸 수많은 인재를 모두 잃어버리는 국가의 불행을 가져왔다. 정변이 성공한 직후에 신숙주는 정난공신(靖難功臣) 2등에 책봉되었고, 얼마 뒤에 좌승지(左承旨)로 승진되었다. 1454년(단종 2) 1월 신숙주는 도승지(都承旨)로 영전되었는데,[『보한재집』 부록 「비명」] 당시 수양대군이 영의정으로서 권력을 장악하였으므로, 도승지는 오히려 단종과 그 주변 인물들을 감시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우승지(右承旨) 성삼문은 예방(禮房) 승지(承旨)로 옥새를 맡아서 관리하였는데, 수양대군 일파가 이를 탈취할까봐 노심초사(勞心焦思)하였다.

1455년(단종 3) 2월 『홍무정운 역훈(洪武正韻譯訓)』 16권을 간행하였는데, 이는 명나라 운서인 『홍무정운(洪武正韻)』에 훈민정음으로 표음(表音)하고 주석을 붙여 만든 것으로 중국에 대한 한글 주음 운서이다. 신숙주 · 성삼문 · 김증 · 손수산 · 조변안(曺變安) 등이 이를 편찬하였는데, 신숙주가 그 서문(序文)을 지었다. 원(元)나라 때 몽고족이 중국 글자[한자]에 대한 음을 고쳤으므로, 명나라 태조 때 이를 바로잡아 『홍무정운』을 간행하였다. 우리나라에서도 고려 말엽에 원나라에서 쓰던 음을 받아들여 조선 초기에 그대로 사용하였다. 세종은 한자의 음을 바로잡으려고 신숙주와 성삼문을 보내어 명나라의 음운 학자 황찬에게 운서를 질정(質正)하였다. 또 사신으로 온 명나라 한림학사 예겸에게도 신숙주와 성삼문이찾아가서 운서를 질정하였다고 한다.[『조선기사』]

1455년 윤6월 어린 단종은 수양대군 일파의 강압에 못이겨서 왕위를 세조(수양대군)에게 넘겨주고 상왕(上王)이 되어 수강궁(壽康宮)으로 옮겼다. 그때 도승지 신숙주는 수양대군이 왕위에 즉위하는 의식을 적극적으로 주선하였으나, 우승지 성삼문은 옥새를 넘길 때 남몰래 옥새를 부여잡고 통곡하였다고 한다.[『연려실기술』 권6] 신숙주는 국가의 장래를 위하여 강력한 수양대군이 왕위에 올라서 백성들의 삶을 보다 윤택하게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였으나, 성삼문은 충절을 지키기 위하여 세종과 문종의 유언을 반드시 받들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것은 두 사람의 국가관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세조 시대 활동]
1455년(세조 1) 윤6월 세조가 성대한 즉위 의식을 거행한 뒤에 도승지 신숙주에게 표리(表裏) 1필(匹)을, 영의정 정인지에게는 안장(鞍粧) 갖춘 말을 하사하고, 즉위식 때 집사(執事)한 종3품 이하의 관원들에게 모두 가자(加資)하였다.[『세조실록』 세조 1년 8월 5일] 세조는 즉위하자마자, 매일 침전(寢殿)으로 도승지 신숙주를 불러들여 나라의 정책을 자문하였는데, 신숙주는 고금(古今)의 역사적 사실을 인용하여 그 장단점을 일일이 지적하니, 세조가 칭찬하기를, “만약 다시 경과 같은 자를 한 사람만 더 얻을 수 있다면 내가 무엇을 걱정하겠는가?” 하였다.[『보한재집』 부록 「비명」] 그때 세조와 신숙주는 동갑으로서 39세였다. 뒤이어 세조가 즉위하는 데에 공로가 많은 44명을 좌익공신(佐翼功臣)에 책봉하였는데, 권람 · 신숙주 · 한명회 등 7명을 1등으로, 정인지 · 이사철(李思哲) 등 12명을 2등으로, 이징석(李澄石) · 정창손(鄭昌孫) · 성삼문 등 25명을 3등으로 책훈(策勳)하였다.[『세조실록』 세조 1년 9월 5일] 그해 9월 예문관 대제학(大提學)에 임명되고, 고령군(高靈君)에 책봉되었다. 이때부터 신숙주는 문형(文衡)이 되어 중국과의 외교문서를 도맡아서 처리하였다. 그해 10월 주문사(奏聞使)에 임명되어 중국 명나라에 가서 세조의 고명을 주청(奏請)하였는데, 그때 맏아들 신주(申澍)도 사신 일행이 되어서 아버지를 따라서 중국으로 갔다.[『보한재집』 부록 「행장」]

1456년(세조 2) 1월 부인 무송 윤씨(茂松尹氏)가 막내를 낳다가 갑자기 돌아갔는데, 그때 신숙주는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아직 돌아오지 못하였으므로, 부인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하였다. 40세 때 상처한 신숙주는 부인 윤씨를 못내 잊지 못하고 8남 1녀를 키우면서 재혼하지 않았다. 그해 2월 신숙주가 세조의 고명을 받고 중국에서 돌아오니, 세조가 매우 기뻐하여 토지와 노비를 하사하고, 중추원(中樞院) 판사(判事)로 승진시켜서 병조 판서를 겸임하게 하였다.[『보한재집』 부록 「비명」, 『세조실록』 세조 2년 2월 4일]

그해 6월 <사육신(死六臣)> 사건이 일어났는데, 집현전 학사 출신 성삼문 · 박팽년 · 하위지(河緯地) · 이개 · 유성원(柳誠源)이 단종의 외삼촌 권자신(權自愼)과 연락하고, 무장 유응부(兪應孚) · 박쟁(朴崝) 등과 은밀히 내통하여, 명나라 칙사(勅使) 윤봉(尹鳳)을 연회하는 자리에서 세조를 죽이고 상왕(上王: 단종)을 복위시키려고 하였다. 또 병조 정랑 윤영손(尹鈴孫)이 특별히 병조 판서 신숙주를 맡아서 죽이기로 계획하였다. 김질(金礩)이 그의 장인 정창손을 설득하여 거사 직후에 상왕의 복위를 주창하게 하려고 하였으나, 도리어 김질이 그 장인 정창손에게 설득당하였다. 정창손과 김질 두 사람이 세조에게 밀고하여, 성삼문 · 박팽년 등이 모두 체포되어 수백 명이 죽음을 당하였다. 사건에 연루된 단종은 상왕에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되고, 다음해 강원도 영월(寧越)로 귀양가서 죽음을 당하였다. 이때 세조는 집현전이 반역의 소굴이라고 하여, 집현전을 36년 만에 폐지하고, 그 대신에 홍문관(弘文館)을 설치하였다.

그해 10월 신숙주는 의정부 우찬성(右贊成)에 임명되어 병조 판서와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을 겸임하였다. 1457년(세조 3) 1월 춘추관 감사(監事)가 되어, 세조의 명령을 받고, 권람 · 강맹경(姜希孟) 등과 함께 『국조보감(國朝寶鑑)』을 편찬하였는데, 태조 · 태종 · 세종 · 문종의 4왕조의 역사 중에서 귀감이 될 만한 내용을 뽑아서 편년체로 엮었다. 그해 3월 양녕대군(讓寧大君) 이제(李禔)가 어전(御前)에서 조카 세조에게 말하기를, “신숙주는 서생(書生)이지만, 현명하고 재능이 많습니다.” 하니, 세조가 말하기를, “다만 서생일 뿐만 아니라 지장(智將)이므로, 신숙주는 곧 나의 위징(魏徵)입니다.” 하고, 사관(史官)을 돌아보고 사초(史草)에 “신숙주가 세조의 위징”이란 말을 기록하도록 명하였다.[『세조실록』 세조 3년 3월 15일] 위징은 당(唐)나라 태종(太宗) 때 중국의 율령제(律令制)를 완성하여 3성(三省) 6부(六部) 제도와 5형(五刑) 제도를 만들어 동양의 정치 제도와 형률 제도를 마련한 명신(名臣)이다.

그해 6월 노산군을 강원도 영월로 귀양보내자, 경상도 순흥(順興)에 유배되었던 세종의 제 6왕자 금성대군(錦城大君)이유(李瑜)가 단종을 복위시키려고 꾀하다가, 중추원 판사 이징석의 고발에 의하여 발각되었다.[『세조실록』 세조 3년 6월 27일] 그해 7월 신숙주는 의정부 좌찬성(左贊成)에 임명되었다. 그 해 9월 세자 이장(李暲)이 20세의 나이로 갑자기 죽었는데, 그가 바로 세조의 맏아들 도원군(桃源君: 덕종)이고, 또 성종의 아버지다. 세조와 정희왕후(貞熹王后)가 몹시 비통해 하자, 좌찬성 신숙주가 세조 앞에 나아가서 홀로 아뢰기를, “금성대군 이유는 대역(大逆)의 죄를 범하였으니, 결단코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또 지난해 이개 등이 노산군을 명분으로 내세우고 거사하려고 하였는데, 이제 금성대군 이유도 노산군을 끼고 난역(亂逆)을 일으키려고 하였으니, 노산군도 역시 편히 살게 할 수는 없습니다.” 하였다.[『세조실록』 세조 3년 9월 10일] 신숙주는 왕권의 안정을 위하여 노산군을 살려둘 수 없다고 판단한 것 같다. 이리하여 영의정 정인지 · 좌의정 정창손 · 이조 판서 한명회 등이 문무백관들을 거느리고 금성대군과 노산군을 죽이자고 청하였고, 양녕대군과 효령대군(孝寧大君)도 종친들을 거느리고 노산군과 금성대군의 처벌을 3차례나 상소하였다. 그해 10월 노산군은 영월에 유배된 지 4개월 만에 죽음을 당하였고, 금성대군도 순흥에서 처형되었다. 반역에 가담하였다고 하여 순흥부를 없애고 풍기군(豊基郡)에 합쳐버렸다.[『세조실록』 세조 3년 8월 2일 · 10월 9일] 그해 12월 세조의 둘째 아들 해양대군(海陽大君) 이황(李晄)을 세자로 책봉하였는데, 그가 바로 예종이다.

1458년(세조 4) 9월 평안도 체찰사 · 황해도 체찰사에 임명되어, 서북 지방의 방어 체제를 점검하고 돌아왔다. 그해 12월 우의정(右議政)에 임명되고, 고령부원군에 책봉되었다. 1459년(세조 5) 1월 함길도도체찰사(咸吉道都體察使)에 임명되어 함길도 지방의 여진 방어 체제를 점검하고 돌아왔다. 그해 11월 좌의정에 임명되고, 세자(世子: 예종) 사부(師傅)가 되었다. 1460년(세조 6) 1월 모련위(毛憐衛) 오랑캐 추장 낭아비거(浪阿比車)가 여러 종족의 여진족 1천 5백여 명을 규합하여 회령(會寧)을 침입하였으므로, 세조가 좌의정 신숙주를 불러서 오랑캐를 정벌할 계획을 의논하고, 그해 2월 좌의정 신숙주를 함길도 도체찰사에 임명하여 두만강 변의 5진(五鎭)의 피해를 점검하게 하였다. 그해 7월 세조가 도체찰사 신숙주를 강원도 · 함길도 도체찰사에 임명하여 오랑캐를 정벌하게 하였다, 체찰사 신숙주는 홍윤성(洪允成) · 이극배(李克培) 등과 함께 강원도와 함길도의 여러 고을에서 군사 4천 명을 징발하여, 중군과 좌군 · 우군의 3위(三衛)로 나누어 모련위 오랑캐의 본거지 동량북(東良北) 일대를 공격하여, 오랑캐 4백 30여 명을 죽이고, 오랑캐 막사 9백여 채를 불태우고, 우마(牛馬) 1천여 마리를 노획하였다.[『세조실록』 세조 6년 7월 27일 · 8월 15일 · 9월 11일] 1461년(세조 7) 3월 신숙주가 오랑캐를 정벌한 기록을 정리하여 『북정록(北征錄)』을 편찬하여 세조에게 바치니, 세조가 이극감(李克堪) 등에게 그 내용을 교정하도록 명하고, 『북정록』을 수백 부 간행하여, 일선 지휘관들에게 나누어 주었다.[『세조실록』 세조 7년 3월 24일]

그해 7월 충청도 도체찰사에 임명되어, 충청도의 시설을 점검하고, 태안(泰安)의 굴포(堀浦)에 운하를 뚫어서 조운(漕運)을 편리하게 하자고 계청(啓請)하였으나, 끝내 시행되지 못하였다. ‘굴포 운하’는 태종 때 하륜(河崙)이 처음으로 계획한 것인데, 너무 공역(工役)이 험난하였기 때문에 태종도 세조도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1462년(세조 8) 5월 영의정에 승진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46세였다. 1463년(세조 9) 12월 세조의 명령을 받들고 병서(兵書)의 구결(口訣)을 정하였으며, 1464년(세조 10) 5월 세조가 원각사(圓覺寺)를 창건하였는데, 영의정 신숙주가 도제조(都提調)가 되어서 이를 총감독하였다. 1465년(세조 11) ‘병조선(兵漕船)’을 건립할 때, 영의정 신숙주가 전함사(典艦司) 제조(提調)에 임명하여, 중국 · 일본 · 유구(琉球) 등 여러 나라의 선박 제도를 널리 조사하여, 이를 절충해서 병선 모양의 조운선(漕運船)을 만들어 왜구(倭寇)의 약탈을 방지하도록 하였는데, 신숙주가 그 배의 이름을 ‘병조선’이라고 붙였다.[『만기요람』 군정편 권4]

1466년(세조 12) 4월 신숙주는 스스로 호를 ‘보한재(保閑齋)’라고 일컫고 관직에서 사임하기를 간절히 원하여, 영의정이 된 지 4년 만에 벼슬에서 물러나서, 한강 하류의 마포에 ‘담담정(淡淡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문인들과 교유하였다. 이때 신숙주가 완강하게 벼슬을 사양한 것이 세조의 의심을 샀던 것 같다. 1467년(세조 13) 1월 함길도에서 <이시애(李施愛)의 반란>이 일어났는데, 그때 함길도 관찰사로 있던 차남 신면(申㴐)이 이시애의 반란군에게 피살되었다. 또 이시애가 사람을 능성군(綾城君) 구치관(具致寬)에게 보내어 무고하기를, “신숙주와 한명회가 신면과 손을 잡고 반역을 도모하려고 한다.” 하였으므로, 구치관이 급히 세조에게 밀계(密啓)하였다. 세조가 신숙주 · 한명회 등과 그 가족들을 하옥(下獄)하고 엄중히 심문하다가 마침내 무고인 것이 밝혀져서 열흘 만에 석방하였다. 그해 9월 신숙주는 다시 영의정에 임명되어, 예조 판서를 겸임하였는데, 이때부터 8년 동안 일본과의 외교 문서를 관장하였다. 1468년(세조 14) 1월 신숙주가 다시 영의정에서 물러나서 조용히 살기를 원하였으나, 세조가 허락하지 않았다. 그해 9월 세조가 52세의 나이로 승하하자, 신숙주가 국장도감(國葬都監) 제조가 되어 세조를 광릉(光陵)에 장사지냈다.

[예종~성종 시대 활동]
1468년 9월 세조의 둘째아들 예종이 즉위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19세였다. 세조의 왕후 정희왕후가 수렴청정(垂簾聽政)하면서 자성대비(慈聖大妃)라고 일컬었다. 자성대비가 세조의 공신 신숙주 · 한명회 · 정인지 등을 원상(院相)으로 삼아서, 날마다 번갈아 승정원에 나아가서 모든 정무를 대신들과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였다. 그때 유자광(柳子光)이 고변(告變)하기를, “병조 판서 남이(南怡)가 반역을 도모하려고 한다.”고 하였으므로, 원상들이 <남이 옥사(獄事)>를 심문하여, 남이와 강순(康純) 등을 처형하였다. <남이 옥사>를 다스린 공으로 신숙주 · 한명회 · 유자광 등 36명이 익대 공신(翊戴功臣)에 책봉되었으나, 사관(史官)들은 신숙주를 비난하기를, “<남이 옥사>를 다스릴 때 형정(刑政)의 공정함을 잃었는데도 이를 바로잡아 억울한 죄인들을 구원하지 못하였다.”고 하였다.[『성종실록』 성종 6년 6월 21일 「신숙주 졸기」] 그러나 나이 어린 예종이 왕위에 올라서 왕권이 약화되었는데, 젊은 남이가 세조의 고종 4촌으로서 <이시애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그 용맹을 떨치고 병조 판서가 되어 병권을 잡아서 왕권의 위협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때 역적으로 몰려 죽은 병조 판서 남이의 묘소가 지금 춘천시 남산면 방하리 남이섬 안에 있다고 하는데, 지금 관광지로 개발되었다.

1469년(예종 1) 2월 원상 신숙주는 춘추관 영사(領事)를 겸임하고, 한명회 · 최항 등과 함께 자성대비의 명령을 받들고 실록청(實錄廳)에서 『세조실록(世祖實錄)』을 편찬하는 업무를 지휘하였다.[『예종실록』 예종 1년 4월 1일] 그때 신숙주와 정인지는 선왕(先王)의 묘호를 ‘세조(世祖)’라고 올리고, 실록의 명칭도 『세조실록』이라고 붙였다. 묘호법에서는 창업한 군주에게만 ‘-조(祖)’를 붙이고, 수성(守成)의 군주에게는 ‘-종(宗)’을 붙이는 것이 원칙이다. 시호를 세조라고 붙인 것은 묘호법을 따르지 않은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세조의 <계유정난>이 태조의 창업만큼 어려웠다고 자화자찬(自畵自讚)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해 7월 신숙주는 정현조(鄭顯祖) · 최항 등과 함께 『무정보감(武定寶鑑)』을 교정하였다. 그해 11월 병약한 예종이 20세의 나이로 갑자기 승하하니, 조정의 안팎이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하였다. 그때 원상 신숙주가 홀로 자성대비에게 건의하기를 “빨리 상주(喪主)를 정하여 인심을 안정시켜야 합니다.” 하고, 자성대비와 함께 의논하여 의경 세자(懿敬世子: 덕종)의 둘째 아들 잘산군(者乙山君)을 임금으로 추대하니, 그가 바로 성종이다. 그때 성종은 나이가 13세였으므로, 세조의 왕비 자성대비가 대왕대비(大王大妃)로서 수렴청정하고, 원상 신숙주가 적극적으로 이를 보필하였다. 그해 12월 원상 신숙주는 경연(經筵) 영사를 겸임하고, 경연에서 어린 성종을 가르칠 사목(事目)을 정하여, 성종을 엄하게 가르쳤다.

1470년(성종 1) 5월 자성대비가 신숙주를 고령 부원군에 다시 책봉하고, 토지와 노비를 하사하였다. 그해 6월 가뭄이 들자, 신숙주는 진휼사(賑恤使)가 되어 실농한 여러 도(道)에 굶주리는 백성들을 구제하였다. 1471년(성종 2) 3월 성종이 즉위하는 데에 공로가 많았던 신숙주를 좌리공신 1등에 책봉하였다. 그해 10월 신숙주가 다시 영의정에 임명되었고, 12월 『세조실록』과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를 완성하였다. 『해동제국기』는 1443년(세종 25) 서장관으로 일본에 갔다가 돌아와서 그 초고를 만들었다. 1467년(세조 13) 다시 영의정에 임명되어 예조 판서를 겸하였다. 신숙주는 8년 동안 일본과의 외교 문서를 맡아서 처리하면서 일본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였는데, 초고를 다시 개정하고 보충하여 이때에 『해동제국기』 7권을 완성하였다. 1472년(성종 3) 5월 『예종실록(睿宗實錄)』이 완성되었고, 7월 자성대비가 화공(畫工) 최경(崔涇)과 안귀생(安貴生)으로 하여금 세종의 왕비 소헌왕후(昭憲王后)와 세조 · 예종의 어진(御眞)을 모사(模寫)하게 하여 선원전(璿源殿)에 봉안하고, 신숙주로 하여금 그 일을 기록하게 하고 『영모록(永慕錄)』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해 9월 『영모록』기사(記事)를 지었고, 1473년(성종 4) 1월 『영모록』의 서문을 썼다.

1474년(성종 5) 4월 성종의 첫째 왕비 공혜왕후(恭惠王后) 한씨(韓氏)가 1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신숙주가 국장도감 도제조가 되어 장례를 총지휘하였다. 공혜왕후는 한명회의 딸이다. 이때 원상 신숙주가 자성대비에게 봉상시(奉常寺) 판관(判官)윤기무(尹起畝)의 딸을 성종의 후궁으로 추천하여, 숙의(淑儀)로 삼았다. 1476년(성종 7) 11월 윤숙의(尹淑儀: 제헌왕후)는 원자(元子) 연산군(燕山君)을 낳고 성종의 둘째 왕비로 책봉되었으나, 성종의 다른 후궁에게서 아들들이 태어나자, 질투하다가 왕비에서 폐위되어 사사(賜死)되었다. 폐비 윤씨의 어머니 신씨(申氏)는 신평(申枰)의 딸로 신숙주의 4촌 누이다. 아버지 윤기무가 일찍 죽자 윤씨는 시장에서 비단을 짜서 팔아서 어머니와 두 남동생을 봉양한 착한 처녀였다고 한다. 성종의 셋째 왕비 정현왕후(貞顯王后) 윤씨(尹氏)도 신숙주가 후궁으로 함께 추천하였는데, 숙의가 되었다가 나중에 중종을 낳고 왕비로 책봉되었다.

1475년(성종 6) 3월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완성하여 나라에 바쳤다. 세종이 좌의정 허조에게 『오례의(五禮儀)』를 편찬하게 하였는데, 허조는 명나라의 『홍무예제(洪武禮制)』를 본 따서 길례(吉禮) · 흉례(凶禮) · 가례(嘉禮) · 빈례(賓禮) · 군례(軍禮)의 다섯 가지 예제를 상세히 규정하여, 궁중의 예법과 사대부의 풍속을 바로잡았다. 그러나 세조가 강희맹(姜希孟)에게 명하여 『오례의』 중에서 우리나라의 실정에 맞고 실행하기에 편리한 것만을 뽑아서 도식(圖式)을 만들게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원상 신숙조가 정척(鄭陟)과 함께 『오례의』를 산삭(刪削)하여 『국조오례의』 8권 8책을 완성하였다.

영의정 신숙주의 병이 위독해지자, 자성대비가 좌승지 유지(柳輊)를 보내어 병의 예후를 살펴보고, 국가의 장래에 대한 신숙주의 충언(忠言)을 물어보게 하였는데, 신숙주의 넷째 아들 도승지 신정(申瀞)이 만류하기를, “아직 정신이 안정되지 못하여 서로 만나볼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또 대비의 말을 전해들은 신숙주가 말하기를, “아뢸 만한 일이 있지만, 신이 어찌 갑자기 죽겠습니까? 마땅히 병이 낫기를 기다려서 친히 아뢰겠습니다.” 하였다. 그러나 신숙주는 병이 더욱 악화되어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였다. 신정이 아버지 신숙주의 병이 위독하다고 하여 사직하고, 아버지 병을 구료하였다.[『성종실록』 성종 6년 6월 15일 · 6월 17일] 1475년(성종 6) 6월 21일(무오) 신숙주는 병으로 본댁(本宅)의 정침(正寢)에서 돌아가니, 향년이 59세였다. 신숙주의 유명은, “검소하게 장례를 치르고, 부도(浮屠)의 법을 쓰지 말며, 서적(書籍)을 함께 묻어 달라.”고 하였다.[『성종실록』 성종 6년 6월 21일 「신숙주 졸기」]

신숙주가 지은 책은 야인을 정벌한 『북정록(北征錄)』과 일본을 소개한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가 있으며, 그의 시문(詩文)은 『보한재집(保閑齋集)』에 수록되어 있다. 『보한재집』은 4남 신정 · 5남 신준(申浚) 등이 그 유고를 모아서 편찬하였는데, 1487년(성종 18) 성종이 이를 간행하도록 명하였다. 1644년(인조 22)에 7대 후손인 신속(申洬)이 『보한재집』을 수정 보충하여 1645년(인조 23)에 중간(重刊)한 『보한재집』 17권 4책이 지금 규장각(奎章閣)에 소장되어 있다.

[집현전 학사 출신 신숙주의 문학과 학문의 형성 배경]
신숙주는 학문을 익히는 과정을 ‘농사짓기와 길쌈하기’에 비유하여 설명하기를, “벼를 심지 않으면 벼 싹이 자라지 않을 것이고, 누에를 치지 않으면 누에고치가 생기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학문을 하다가 중도에 포기하면 닥쳐오는 결과에 대하여 설명하기를, “모를 이미 심어서 싹이 났더라도 만약 김매는 일을 그만둔다면, 그 싹은 가라지풀로 뒤덮일 뿐이고, 누에를 이미 쳐서 누에고치가 생겼더라도 만약 실을 뽑지 않는다면, 그 고치에서 나방이 나올 뿐이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벼를 거두고 비단을 짜기를 바라겠는가? 또한 끝내 굶주림과 추위가 있을 뿐이다.” 하였다. 학문을 하는 목적을 설명하기를, “선비가 학문을 하는 것도 이와 같다. 학문에 뜻을 두는 것은 벼를 심고 누에를 치는 일이고, 학문에 부지런 하는 것은 김을 매고 실을 켜는 일이다.[志于學者 種與蠶也 勤于學者 耘與絲也] 그리하여 덕(德)을 이루어 이름을 날리는 경지에 이르러, 그 업무에 자기 학문을 활용하면 그게 바로 벼를 거두고 비단을 짜는 것이다.” 하였다.[『보한재집』 권16 「가직설(稼織說)」] 이것은 그의 동방(同榜) 친구 윤자영(尹子濚)에게 보낸 글이다.

신숙주의 문장과 학문의 형성에 크게 영향을 미친 사람은 아버지 암헌(巖軒) 신장(申檣) · 처조부 청향당(淸香堂) 윤회(尹淮) · 성균관 대사성 송정(松亭) 김반(金伴)이다. 1417년(태종 17) 6월 13일 전라도 나주의 북쪽 15리쯤에 있는 금안리(金安里)의 외가에서 태어나 자랐는데, 이곳에서 신숙주의 5형제가 태어나서 모두 유명한 인물이 되었으므로, 당시 오룡동(五龍洞)이라고 일컬었다. 지금도 나주 노안면(老安面) 금안리는 호남 지방의 훌륭한 인물을 배출한 3대 명촌(名村)의 하나로 꼽힌다. 신숙주의 집안은 고려 때부터 유명한 명문가였다. 증조부 신덕린(申德隣)은 고려의 전의 판서(典儀判書)로서 이색(李穡) · 정몽주(鄭夢周) 등과 가까웠던 유명한 서화가(書畵家)였다. 고려가 멸망하자, 전라도로 내려와서 은거하였다. 조부 신포시는 고려 우왕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고려가 망하자 벼슬하지 않고 전라도 남원(南原)에서 살다가, 세종 때 좌사간(左司諫) · 공조 참의를 지냈다. 아버지 신장은 춘정(春亭) 변계량(卞季良)의 제자로서 문과에 급제하여, 1420년(세종 2) 세종이 집현전을 설치할 때 집현전 직제학에 임명되었다. 신장의 조상 7대가 연달아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조선이 건국할 때 그 집안의 굴곡이 조금 있었던 것 같다. 신숙주는 일찍부터 아버지 신장에게서 굴원의 ‘초사(楚辭)’와 한유(韓愈) · 소식(蘇軾) 등의 ‘당송 팔대가(唐宋八代家)’의 문장을 익혔다.

신숙주의 처조부인 청향당 윤회는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1등 개국공신(開國功臣) 윤소종(尹紹宗)의 아들이다. 윤회는 문과에 급제하여 1422년(세종 4) 집현전 부제학에 임명되어 직제학 신장과 함께 초기 집현전 학사들을 총괄하였다. 윤회와 신장은 서로 존경하는 사이였으므로, 신숙주는 7세 때 상경(上京)하여 윤회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432년(세종 14) 16세의 나이로 윤회의 맏아들 윤경연(尹景淵)의 딸과 혼인하여, 윤회의 손녀사위가 되었다. 세종은 당시 신장과 윤회를 조선 초기 대문장가 변계량의 뒤를 이을 당대의 문장가라고 평가하였다. 1423년(세종 5) 6월 세종이 두 사람의 관계를 논하기를, “옛날에 하륜과 권근이 문사(文詞)를 맡았을 때에 변계량이 그 문하에 내왕하면서 문예를 익혔으며, 지금 집현전 부제학 신장은 변계량의 문하에 내왕하면서 문예를 익혔다. 처음에 태종이 변계량에게 묻기를, ‘경의 뒤를 이어서 문한(文翰)을 맡을 자가 누구인가?’ 하니, 변계량이 신장이라고 대답하였다. 당시 윤회의 문예가 신장보다 우월하였으므로, 이때부터 두 사람의 사이가 나빠졌다.” 하였다.[『세종실록』 세종 5년 6월 23일] 신숙주가 윤회의 제자로서 그 손녀딸과 혼인하여 신장과 윤회의 문장이 신숙주로 계승되었다. 그리하여 신숙주는 서거정과 함께 조선 전기 훈구파(勳舊派)의 사장파(詞章派)를 형성하는 원훈(元勳)이 되었다.

신장과 윤회는 문장의 라이벌 관계였으나, 사실은 두 사람이 사돈 관계를 맺을 만큼 친밀하였고, 또 서로 어울려서 술을 많이 마셨다. 세종이 그들의 건강을 걱정하여 “술을 3잔 이상 마시지 말라”고 엄명하였으나, 두 사람은 말술[斗酒]로써 3배(盃)만을 하였다는 유명한 일화가 전한다. 1433년(세종 15) 2월 8일 아버지 공조 참판 신장이 52세의 나이로 돌아가자, 경기도 교하(交河)에 장사지냈다. 그때 신숙주의 나이가 17세였는데, 두 형 신맹주(申孟舟) · 신중주(申仲舟)와 함께 여묘살이 하면서 홀로된 어머니 정씨를 모시고 서울에서 살았다. 1436년(세종 18) 처조부 윤회마저 57세의 나이로 돌아가자, 신숙주는 20세 때에 아버지와 스승을 모두 잃었다. 신장과 윤회는 세종의 걱정한 대로 술로 인하여 일찍 돌아간 것 같다. 두 사람은 집현전에 있을 때 세종의 명을 받고 『8도 지리지(八道地理志)』를 편찬하였는데, 지금 규장각(奎章閣)에 『경상도 지리지(慶尙道地理志)』만 남아 있다. 『세종실록』에 부록된 유명한 『세종실록 지리지』는 신장과 윤회가 편찬한 『8도 지리지』를 요약한 것이다. 신숙주는 아버지와 스승을 잃고 생활이 어려웠으나 결코 학문을 포기하지 않고, 동생 신송주(申松舟) · 신말주(申末舟)를 격려하여, 나중에 3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다.

1438년(세종 20) 22세 때 진사시에 장원 급제하고, 성균관에 입학하여 사성 김반의 강론을 들으면서 성리학(性理學)의 실용적인 이론을 나름대로 정립하였다. 김반은 양촌(陽村) 권근의 제자로서 당시 성균관에서 유생들의 존경을 받던 숙유(宿儒) ‘3김(三金)’의 한 사람이었다. 세종 시대 성균관의 숙유는 김반 · 김말(金末) · 김구(金鉤)의 ‘3김’과 윤상(尹祥) 등이 있었는데, 당시 유생들이 윤상의 강론을 많이 추종하였으나, 신숙주는 ‘3김’ 중에서 김반의 실용적 이론을 좋아하였다. 세종 때 신숙주가 집현전에 들어가서, 『훈민정음 해례본』 편찬하는 데에 경학의 실용적인 이론을 활용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또 세조 때 신숙주가 영의정이 되어서 ‘굴포 운하’를 파고 ‘병조선’을 건립하여 조운을 편리하게 만들자는 구상도 유교의 실용(實用) 후생(厚生)의 이론에서 나온 것이다. 신숙주의 문집 『보한재집』을 보면, 성리학의 공리(空理) 공담(空談)에 해당하는 유학(儒學)의 잡설(雜說)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이로써 보면, 신숙주는 유교의 명분(名分)보다 실용을 중시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신숙주는 아버지 신장과 처조부 청향당 윤회로부터 문장을 짓는 법을 배우고, 성균관 대사성 김반에게서 학문하는 방법을 터득하였다. 그의 문장은 쓸데없이 화려한 수사(修辭)를 버리고 중국 굴원과 한유 등의 작품처럼 느낀 감정을 그대로 표현하여 알찬 내용을 강물 흐르듯이 써내려갔다. 그가 쓴 문장은 모두 가슴 속에서 우러나왔고, 문장을 지을 때 첨삭(添削)하는 일을 하지 않았다.[『성종실록』 성종 6년 6월 21일 「신숙주 졸기」] 또 그의 학문은 경전(經典)의 장구(章句)를 외우는 데에서 벗어나 경전의 깊은 뜻을 알려고 힘썼다. 그는 나라의 큰일을 의논할 때 항상 대체(大體)를 지키고 자질구레한 작은 일에 얽매이지 않았다.[『보한재집』 부록 「비명」] 서거정은 『보한재집』 서문에서 그의 문장을 평하기를, “문장은 호방(豪放)하고 웅후(雄厚)하며 뜻을 잘 표현하여 선양하고 찬양하는 글에 능하였으나 문사(文詞)를 수식하여 잘 짓기를 추구하지 않고, 엄격하게 격식을 추구하여 예스럽게 짓기를 추구하지 않으니, 문장이 평이한 부분은 좋은 벼와 특이한 보리처럼 아주 좋은 맛이 저절로 배어 있으며, 문장이 빛나고 화려한 부분은 상서로운 구름과 경사스런 별처럼 스스로 빛을 감추지 못하여 사람의 이목을 놀라게 한다.” 하였다.[『보한재집』「서」, 『사가집(四佳集)』 권5]

1439년(세종 21) 9월 성균관 유생 신숙주는 23세 때 친시 문과에 급제하여, 1441년(세종 23) 가을 25세 때 아버지 신장과 스승 윤회가 일찍이 실무 책임자로 있었던 집현전에 들어가서, 부수찬에 임명되어 지제교와 경연의 사경(司經)을 겸임하여, 세종과 자주 만나게 되었다. 세종은 신숙주의 조부 신포시와 아버지 신장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자식과 같은 신숙주에 대하여 관심과 애정이 남달랐다. 신숙주는 집현전에 들어가서 평소에 볼 수 없던 장서(藏書)를 보고 여러 분야의 책들을 두루 읽어서 자기 학문의 세계를 더욱 넓혀나갔다. 이때 그는 중국어는 물론, 일본어 · 여진어 · 몽고어까지 익혔던 것 같다.[『보한재집』 부록 「행장」] 신숙주는 일부러 동료들을 대신하여 숙직하기를 자청하며 밤새도록 늦게까지 집현전에서 불을 켜고 책을 읽었는데, 세종은 이 광경을 보고 그를 기특하게 여겼다. 어느 날 밤 늦게까지 신숙주가 책상머리에 단정히 앉아서 책을 보다가 그대로 엎드려 잠이 들자, 세종이 입고 있던 돈피갓옷[御衣]을 벗어 어린 환관을 시켜서 잠이 든 그를 덮어주게 하였다는 일화는 매우 유명하다.[『연려실기술』 권6]

집현전은 1420년(세종2) 세종이 젊은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설치하였는데, 부제학 · 직제학으로부터 직전(直殿) · 응교 · 교리(校理) · 부교리 · 수찬(修撰) · 부수찬 · 박사(博士) · 저작(著作) · 정자(正字)까지 정원이 10명 내외였으나, 각 품마다 두 사람까지 둘 수 있으므로, 최대 정원이 20여 명이었다. 신숙주의 아버지 신장은 최초의 집현전 직제학이었는데, 나중에 부제학으로 승진하였고, 스승 윤회도 집현전 부제학을 지냈다. 신숙주는 처음에 부수찬에 임명되어, 교리 · 응교 등을 거쳐 부제학 · 대제학까지 승진하였다. 1456년(세조2) <사육신> 사건이 집현전 학사 성삼문 · 박팽년 · 이개 등을 중심으로 일어나자, 세조가 집현전을 반역의 소굴이라고 하여 폐지하여 버렸다. 집현전은 1420년부터 1456년까지 존속한 36년 동안 집현전 학사로 활동하였던 사람들은 모두 90여 명이었고, 집현전에서 편찬한 책은 무려 35종이었다. 집현전 학사들은 모두 전문 분야를 나누어 연구하였는데, 신숙주는 동연배의 성삼문 · 박팽년 · 이개 등과 함께 음운학 분야를 주로 연구하였다.

신숙주는 12년 동안 집현전에 근무하면서 세종을 받들고 정인지 · 최항 · 성삼문 · 신숙주 · 강희안(姜希顔) · 이개 · 이선로(李善老: 이현로) 등과 함께 세종의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창제를 돕고 『훈민정음 해례본(訓民正音解例本)』를 저술하여, 훈민정음을 만든 원리를 과학적으로 상세히 설명하였다. 음운학 분야에 여러 집현전 학사들과 함께 『동국정운』 · 『홍무정운 역훈(洪武正韻譯訓)』을 편찬하였는데, 신숙주가 서문을 썼으므로 그 작업을 주도하였다고 볼 수 있다. 또 역사학 분야에 『국조보감』을 비롯하여『고려사』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등을 편찬하는 데에 참여하였다. 또 예학(禮學) 분야에 세종 때 허조가 편찬한 『오례의』를 산삭(刪削)하여 세조 때 『국조오례의』를 완성하여 궁중의 의례(儀禮)를 간소화하고, 사대부의 예속(禮俗)을 바로잡아서, 유교의 의례를 일상생활에서 실천하게 만들었는데, 이것이 조선 후기 서인(西人) 김장생(金長生)의 예학파(禮學派)가 등장하는 배경이 되었다.

신숙주가 혼자서 저술한 책은 국방 외교사 분야의 『북정록』 · 『해동제국기』이다. 신숙주가 북방의 모련위 오랑캐를 직접 정벌하고, 그 과정을 『북정록』에 기록하여 항상 북방의 오랑캐의 침입에 대비하게 하였다. 또 일본의 대마도주와 <계해약조>을 맺어서 일본과 3포 교역(交易)의 체제를 구축하여, 남방의 왜구의 침입을 근절시켰다. 『해동제국기』를 저술하여 일본의 ‘천황(天皇)’과 막부(幕府)의 ‘대장군[國王]’, 대마도주와 66주(州)의 대소 ‘영주[酋長]’, 일본의 문화와 풍속 · 언어 등을 자세히 소개하여 일본 왜구의 본질과 일본인의 침략성을 일깨워주었다,

[신숙주의 요동행]
훈민정음(訓民正音)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인데, 세종이 직접 붙인 이름이다. 세종은 1420년(세종 2)에 집현전을 설치하였으나, 1443년(세종 25)에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1446년(세종 28)에 반포하였다. 이처럼 훈민정음 창제가 늦게 이뤄진 까닭은 세종의 통치 철학이 1433년(세종 15)을 기점으로 하여, 그 이전과 그 이후가 크게 바뀌어졌기 때문이다. 전반기에는 세종은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고 불교를 배척하였으나, 후반기에는 내불당(內佛堂)을 두고 불교를 신봉하였으므로, 대간(臺諫)의 강력한 비판을 받았다. 전반기에 박연(朴堧)이 중국의 아악(雅樂)을 발전시켰으나, 후반기에 우리나라의 속악(俗樂)을 장려하였으므로, 박연이 실록에서 사라졌다. 이와 마찬가지로 후반기에 우리말에 맞는 우리 글자가 필요하다 여겨 훈민정음을 창제하게 되었다. 이것은 전반기의 사대부 양반(兩班)을 위주로 한 정치가 후반기의 일반 백성, 즉 농민을 위주로 한 정치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1442년(세종 24) 신숙주가 집현전에 들어온 다음해 1443년(세종 25) 집현전의 사가독서할 젊은 학사로 뽑혔다. 그때 세종은 집현전의 신진 학사 성삼문 · 박팽년 · 신숙주 · 이개 · 하위지 · 이석형(李石亨) 6명에게 장시간 휴가를 주어서 삼각산 진관사에서 책을 읽고 사가독서하도록 명하였다. 그때 신숙주는 26세였는데, 박팽년과 이개가 신숙주와 동갑이었고, 성삼문은 한 살 적은 25세였다. 하위지와 이석형은 나이가 조금 많아서 하위지가 31세이고, 이석형이 28세였으나, 두 사람은 모두 과거에 장원 급제한 사람들이었다. 세종은 그들에게 여러 책을 읽고, 때때로 함께 모여서 읽은 책을 토론하게 하였다. 6명의 학사들은 조용한 산사(山寺)에서 몇 달을 함께 지내면서 학문을 토론하다가 서로 친구로서 사귀게 되었다. 신숙주는 특히 성삼문과 학문 친구로 깊이 사귀게 되었다. 나중에 <사육신> 반역 사건이 일어났을 때 전라도 관찰사로 있던 이석형은 사육신의 절의를 기리는 시를 지어서 익산(益山)의 동헌(東軒)에 남겼다가, 발각되어 죽을 뻔하였다. 1443년(세종 25) 세종은 훈민정음 28자(字)를 만들어 자음 17자와 모음 11자를 조합하여 수많은 글자를 만들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 글자로 모든 우리말을 적을 수 있는지를 시험해볼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바로 반포하지 않고 그 글자의 해설서인 『훈민정음 해례본』의 저술을 그 해 12월에 집현전 학사들에게 맡겼고,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짓게 하였다.

또 한자의 음을 정확히 훈민정음으로 표기하여, 당시 혼란하게 사용되던 한자의 음을 바로잡고자 하였다. 1444년(세종 26) 2월 세종은 집현전 학사들에게 명하여 비밀리 궁중의 의사청에 나아가서, 새로 만든 훈민정음을 가지고 원나라 웅충(熊忠)이 편찬한 『고금운회거요(古今韻會擧要)』 곧 일명 『운회(韻會)』를 훈민정음으로 번역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 일은 집현전의 중진 학사 최만리 등에게는 당시 우리나라에서 사용되던 한자의 음운 체계를 일대 개편하려는 작업으로 인식되었다.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등이 이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서 훈민정음의 창제를 반대하자, 세종은 크게 노하여, 최만리를 하옥하고 “그대가 음운을 아는가?”고 반박하고, “내가 만일 이 운서(韻書)를 바로잡지 않는다면, 누가 바로잡을 수 있겠는가?”고 반문하고, 그를 파직하여 내쫓아버렸다. 집현전의 최만리 등 중진 학사들뿐만 아니라, 당시 한자에 익숙한 조정의 모든 신하들이 반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세종은 소신을 굽히지 않고 집현전 학사들을 독려하여 훈민정음을 검증하였다.

이러한 작업을 통하여 당시 혼란스럽던 우리나라 한자의 음운 체계를 바로잡아 나갔는데, 한자의 음운을 바로잡는 작업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마침 명나라의 유명한 음운 학자 황찬이 중국 요동 지방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었는데, 1445년(세종 27) 1월 세종은 집현전에서 중국어에 능통한 신숙주와 성삼문을 선발하여, 요동의 황찬에게 보내어 운서 대해 질문하고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았다. 그때 신숙주는 황찬의 말을 들으면 쉽게 해득(解得)하고 조금도 틀리지 않았으므로, 중국의 한림학사 황찬은 젊은 신숙주의 현명한 지혜에 감탄하여, ‘희현당’이라는 호를 지어주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신숙주는 성삼문과 함께 요동을 왕래한 것이 모두 8~13차례였다. 동8참(東八站)은 길이 험난하여 호위병 없이 왕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의주(義州)까지 1천여 리이고, 의주에서 동8참을 거쳐 요동의 요양(遼陽)까지 3백 80리인데, 서울에서 요동까지 왕복하는 데에만 적어도 2~3개월이 걸렸으므로, 13차례 왕복하였다는 것은 그만큼 질정할 한자의 음운이 많았던 것을 뜻한다. 이때 성삼문이 신숙주에게 지어준 시를 보면, “우리나라 서북 땅은 바로 의주인데[三韓西北是義州], 긴 강은 만고토록 성 아래 흐른다[長江萬古城下流]. 청춘에 이곳을 지나는 것이 벌써 두 번째인데[靑春過此己云再], 다음 세 번째 행차는 가을철에 있을 것 같다[第三行色如在秋].”라고 하였으니[『해동잡록』 권4], 1년에 봄과 가을 두 번씩 요동에 갔더라도 13차례 왕복하려면, 여러 해가 걸렸을 것이다.

신숙주는 성삼문과 함께 여러 차례 요동으로 여행하였는데 약 3천여 리의 먼 길을 몇 달씩 풍찬노숙하며 서로 시를 지어주고 받으면서 위로하고 격려하였을 만큼 두 사람은 남다른 우정(友情)을 쌓았다. 신숙주가 성삼문에게 지어준 시를 보면, “치음(齒音) · 설음(舌音) · 아음(牙音) · 순음(脣音) · 후음(喉音)이 아직 정밀치 못하여[齒舌牙唇尙未精], 중국 요동에 쓸데없이 질정하러 가는데[中原虛作問奇行], 한밤중의 초승달은 고향 꿈을 꾸게 하지만[三更新月生鄕夢], 한 침대의 훈훈한 바람이 나그네 마음을 움직이네[一榻薰風動客情]” 하여,[『해동잡록』권4] 두 사람이 요동으로 왕복하면서 서로 훈훈한 정을 나누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성삼문이 “나의 학문이 그대처럼 정밀치 못함이 부끄럽다.[慙余學未似君精]” 하니, 신숙주는 “거칠고 졸렬한 내 재주로써 그대의 기이한 칼날과 맞서다니[欲將荒拙當奇鋒]” 하여 사양하고, 한림학사 예겸에 의하여 신숙주의 명성이 중국에 널리 알려진 것에 대하여, “명성이 중국에 떨치는 것이 어찌 나의 힘이겠는가[名動中華豈我力] 예의지국(禮儀之國) 우리 왕국에 힘입은 것이라네.[禮義每賴吾王國]” 하였다.[『해동잡록』 권4] 이처럼 두 사람은 요동의 먼 길을 같이 동행(同行)하면서 우정을 깊이 다졌다.

[성품과 역사적 평가]
신숙주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천성이 고매하고 명석하며, 인품이 관대하고 후덕하였다. 도량은 누구나 용납할 수 있을 만큼 넓었고, 재주는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을 만큼 많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머리가 명석해서 경사(經史)를 한번 읽으면 반드시 기억할 정도였으며, 특히 글재주가 뛰어났다.[『보한재집』 부록 「행장」] 커서는 평소 사람을 상대할 때 온화하고 친절하게 대하고 예의를 잃지 않았으며, 세상의 일을 처리할 때 넉넉하고 여유가 있었으나, 소신(所信)을 변하지 않았다.[『보한재집』 부록 「비명」] 경사에 두루 정통하여, 시비(是非)를 역사적 사실에 의거하여 정확하게 구분하였다. 그러므로 나랏일을 의논할 때 항상 대체를 지키고 자질구레한 일에 얽매이지 아니하였으며, 큰일을 결단할 때 강물을 터놓은 것과 같이 막힘이 없이 처리하였으므로, 조야(朝野)의 사람들이 그에게 의지하고 그를 소중하게 여겼다.[『성종실록』 성종 6년 6월 21일 「신숙주 졸기」]

그는 세종부터 성종까지 여섯 임금을 받들면서 여러 분야에 빛나는 업적을 남겼고, 백관(百官)의 우두머리가 되어서 자기 한 몸으로써 국가의 안위(安危)를 책임진 것이 거의 20년이었다. 군국(軍國)의 중대사가 앞에 쌓여 있더라도, 좌우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결단을 내리는데 마치 물이 흐르듯이 처리하고 애를 쓰는 것 같지 않았다. 사람들은 처음에 국사를 소홀하게 처리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였으나, 나중에 그 시행되는 결과를 보면 모두 사리에 합당하였으므로, 모두 감탄하였다. 언제나 조정에서 큰 정책을 논의할 때에 사람들이 각자 자기 의견이 옳다고 주장하여 중론(衆論)이 분분하면, 신숙주는 역사적 사실에 의거하고 현실을 참작하여, 적당하게 절충하여 중론을 하나로 통일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승복하고 불평하지 않았다.[『보한재집』 부록 「비명」]

수십 년 동안 신숙주는 문형을 맡아서 사대교린(事大交隣)의 업무를 관장하였다. 중국에 보내는 표문(表文) · 전문(箋文)과 일본에 보내는 외교 문서가 모두 그의 손끝에서 나왔다.[『보한재집』 부록 「비명」] 또 신숙주는 오랫동안 인사 행정을 담당하였는데, 사람에게 한 가지 장점만 있어도 반드시 그 재능에 따라서 추천하였다. 항상 그는 사람을 천거할 때마다 임금에게 건의하기를, “사람이란 현명하고 어리석은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임금이 무슨 일을 맡겨서 그를 부리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하였다.[『보한재집』 부록 「비명」] 14차례나 과거를 주관하여 4~5백여 명의 인재를 뽑았는데, 그 중에서 조정의 정승 · 판서에 오른 자가 많았다. 이것은 신숙주가 얼마나 사람을 정확하게 관찰하는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다. 경연에서 진강(進講)할 적마다 시정(時政)에 관계되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여러 차례 반복 되풀이하여 개진(開陳)해서 임금이 깨달을 수 있도록 하였다. 그가 일찍이 아뢰기를, “교화(敎化)를 일으키는 근원은 학교(學校)에 있습니다.” 하고, 임금이 성균관에 거둥하여 선성(先聖) 곧 공자(孔子)를 배알하고 경전을 펴놓고 어려운 부분을 유생들에게 질문하도록 권하였다. 또, “백성을 기르는 근본은 농상(農桑)에 있습니다.” 하고, 임금이 선농단(先農壇)에 나아가서 몸소 쟁기를 잡고 밭을 갈도록 권하였다.

세종은 문종에게 신숙주를 추천하기를, “신숙주는 큰일을 맡길 만한 사람이다.” 하였는데, 그가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를 돕고, 『동국정운』 편찬을 맡아서 훌륭하게 완성하였기 때문이다. 세조는 그를 역사적 인물과 비교하기를, “제(齊)나라 환공(桓公)에게 관중(管仲)이 있었고, 한(漢)나라 고조(高祖)에게 장량(張良)이 있었고, 당나라 태종에게 위징이 있었는데, 지금 나에게 신숙주가 있다.” 하였다.[『보한재집』 부록 「비명」] 이것은 제 환공이 관중의 도움으로 춘추전국 시대 제후의 패권(覇權)을 차지하였고, 한나라 고조가 장량의 도움으로 초(楚)나라 항우(項羽)를 이기고 천하를 통일하였고, 당 태종이 위징의 도움으로 율령 체제를 완성하여 당나라를 안정시켰던 것처럼, 세조는 신숙주의 도움으로 왕위에 올라서 나라의 제도를 완성하고, 국가를 안정시켰다는 것이다. 1455년(세조 1) 세조가 즉위하여 종래의 모든 정책을 개혁할 때 신숙주가 정책을 자문하면서 조용하게 부드러운 말로 항상 풍유(諷諭)하였을 뿐이고 직언(直言)을 하여 세조의 불편한 심기(心氣)를 건들이지 않았다. 이리하여 사관(史官)의 사평(史評)에서 그를 비난하기를, “신숙주가 세조를 섬길 때에 왕명을 받들고 순종하기에만 힘을 썼을 뿐이니, 이것이 그의 단점이다.” 하였다.[『성종실록』 성종 6년 6월 21일 「신숙주 졸기」]

1456년(세조 2) 6월 1일 <사육신>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때 병조판서 신숙주는 도승지 박원형(朴元亨) · 좌참찬 강맹경 · 좌찬성 윤사로(尹師路) 등과 함께 의금부(義禁府) 제조 윤암(尹巖) · 이인손(李仁孫) · 어효첨(魚孝瞻)과 대간 등을 도와서 국문(鞫問)에 참여하였다. 6월 2일 성균관 사예(司藝) 김질이 그 장인 우찬성 정창손과 함께 사정전(思政殿)에서 고변(告變)할 때 좌부승지 성삼문이 그 자리에 있다가 바로 체포당하였다. 그때 성삼문은 한 동안 하늘을 우러러보다가, 김질과 대면하기를 요구하였다. 그 자리에서 분노에 가득 찬 세조의 심문을 받고 성삼문은 숨김이 없이 바로 주모자들을 모두 자백하였다. 당시 수백 명의 사람들이 옥사(獄事)에 연루되어 감옥에 갇혔는데, 의금부 제조 신숙주가 그 정상을 참작해서 세조에게 잘 보고하여, 온전하게 살아난 자가 많았다고 한다[『보한재집』 부록 「비명」]. 6월 8일 성삼문 · 이개 · 하위지 등 수십 명이 군기감(軍器監) 앞에서 처형되었는데, 박팽년은 이미 감옥에서 곤장을 맞다가 죽었다. 성삼문 등 집현전 학사들이 죽을 때 신숙주의 마음도 몹시 괴로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한명회 · 권람 등 몇몇 대신들과 함께 힘을 합쳐서 세조에게 협력하여 극도로 불안감에 사로잡힌 세조를 위로하고, 또 왕권이 위태롭다고 여기는 인심을 다독거려서 그때의 어려운 정국을 해쳐 나갔던 것이다.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의 『육신전(六臣傳)』에 의하면, “성삼문 등이 단종을 복위시키려 꾀하다가 일이 발각되자, 세조가 쇠를 달구어 그의 다리를 지졌으나 항복하지 않았다. 그때 신숙주가 앞에 있었는데, 성삼문이 신숙주에게 말하기를, ‘내가 그대와 같이 집현전에 있을 때 세종이 날마다 왕손(王孫: 단종)을 안고 나와서 우리들 학사들에게, 「내가 죽고난 뒤에 경들에게 모름지기 이 아이를 부탁한다.」고 하신 말씀이 아직도 귀에 쟁쟁한데, 그대가 혼자 잊었다는 말인가.’ 하니, 신숙주가 제대로 성삼문을 쳐다보지 못하였다. 그 뒤에 다시 성삼문을 문초할 때 세조가 신숙주에게 자리를 피하도록 명하였다.” 하였다.[『추강집』, 『해동잡록』 권4] 남효온의 『육신전』은 명종 초에 윤해평(尹海平)이 간행한 야사(野史)인데,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도 말하기를, “추강 남효온의 『육신전』은 전해들은 말을 기록하였기 때문에 오류를 면치 못한다.” 하였고[『연려실기술』 권4], 1576년(선조 9) 6월 선조도 남효온이 지은 『육신전』을 보고 말하기를, “지금 『육신전』을 보니, 매우 놀랍다. 내가 처음에는 이와 같을 줄은 생각지도 못하고 남효온이 잘못 기록한 것이라고 여겼는데, 직접 그 글을 보니 춥지 않은 데도 몸이 벌벌 떨린다.” 하였다.[『선조실록』 선조 9년 6월 24일] 지금 남효온의 『육신전』을 『세조실록』의 기록과 대조해 보면 다른 부분이 많다.

세조가 <계유정난>을 일으켜서 김종서 · 황보인 등을 죽이고 단종마저 폐위시키고 왕위에 즉위하자, 성삼문 · 박팽년 · 이개 등 ‘사육신’은 죽음으로써 세조에게 저항하였고, 김시습(金時習) · 성담수(成聃壽) · 남효온 등 ‘생육신(生六臣)’은 벼슬하지 않고 세조에게 반항하였다. 그러나 대다수 관료들은 세조 시대 그대로 벼슬하면서 나랏일을 돌보았으나, 사림파(士林派)의 유학자들은 유독 신숙주와 정인지를 지목하여 비난하였다. 이것은 정인지와 신숙주가 집현전 학사로서 세종의 사랑을 받고, 문종의 부탁을 받았기 때문이다. 1498년(연산군 4) 김종직(金宗直)의 제자 김굉필(金宏弼) 등은, 세조가 조카 단종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簒奪)한 사실을 사초(史草)에 기록하려다가, 유자광 · 이극돈(李克墩) 등이 고발하여 훈구파가 <무오사화(戊午士禍)>를 일으켜서, 수많은 사림파의 선비들이 도륙(屠戮)되었다. 그러므로 세조 시대 수상(首相)이 되어서 세조의 개혁 정치를 보필하였던 훈구파의 원로 정인지와 신숙주는 더욱 사람들의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무오사화> 이후 콩인지와 숙주나물에 대한 민담(民譚)이 만들어졌는데, 정인지는 콩인지이고, 신숙주는 숙주나물이라는 말장난에 불과한 민담이 지금까지 전해져 온다. 대개 민담은 권력자를 부정적으로 표현하기 때문에 숙주나물이 신숙주의 이름과 일치하는 데에서 만들어진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당시 민담에서는 백성들이 신숙주의 변절을 미워하여 녹두나물을 숙주나물이라고 불렀는데, 숙주나물로써 만두 속을 만들 때 짓이겨서 넣기 때문에 신숙주를 숙주나물 짓이기듯이 하라는 뜻이 담겨 있다고 이용기(李用基)는 『조선 무쌍신무 요리제법(朝鮮無雙新武料理製法)』(영창서관, 1943)에서 언급하였다. 그러나 이성우(李盛雨)의 『고려 이전 한국 식생활사 연구(高麗以前 韓國食生活史硏究)』(향문사, 1978)에 의하면, “녹두의 싹을 내어 먹는 나물인데, 숙주나물은 원나라 때의 문헌인 『거가필용(居家必用)』에 두아채(豆芽菜)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두아채는 녹두를 깨끗이 씻어서 물에 침지시켜 불린 뒤에 항아리에 넣고 물을 끼얹는다. 싹이 한 자쯤 자라면 껍질을 씻어내고 뜨거운 물에 데쳐 생강 · 식초 · 소금 · 기름 등을 넣고 무친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였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숙주나물은 원나라와 교류가 많았던 고려 말에 들어온 것임을 알 수 있는데, 이때 이미 두아채에서 숙주나물이란 이름이 생기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조선시대에는 봄철이나 여름철에 어른의 생신 날 아침상에 주로 숙주나물이 올랐고, 또 아이 돌날 점심에 손님들이 받는 국수상에 올리던 반찬이었다. 옥소산인이 쓴 「어원 2제-"숙주나물"과 "춘부장(春府丈)」(『한글』 8권 8호, 조선어학회, 1940)을 보면, “신숙주가 평소에 녹두나물을 즐겨하여 밥상에 이 나물 반찬이 끊일 때가 없었다. 그러자 세조가 장난삼아 녹두나물을 숙주나물이라 명명하여 오늘날에 이른 것이라고 한다.” 하였다. 이를 본다면, 숙주나물이 세조에 의하여 그 이름이 생긴 것이라고도 생각된다. 민담에서 백성들이 신숙주의 변절을 미워하여 녹두나물을 숙주나물이라고 불렀다는 것은 조금 억지에 가까운 이야기이므로, 앞으로 숙주나물의 어원에 대한 철저한 연구가 필요하다.

사림파의 원조 점필재(佔畢齋) 김종직도 『보한재집』의 서문에서 신숙주의 문장을 칭송하기를, “그가 문장을 지으면, 글이 모두 인의(仁義)와 충신(忠信)에 바탕을 두므로, 글의 내용이 넉넉하고 부드럽고 뛰어나고 넓어서, 글의 형식이 번거롭게 먹줄을 대서 깎고 다듬지 않아도 저절로 법도에 잘 맞는다. 그의 글은 중국 전한(前漢) · 후한(後漢) 문장가의 오묘한 글과 당(唐)나라 · 송(宋)나라 문장가의 뛰어난 작품을 읊조리거나 외우는 것과 똑같다. 비록 그가 장난삼아 붓을 잡고 글을 갑작스레 짓더라도 또한 유덕(有德)한 사람의 말씀처럼 진실하다.” 하였다. 그러나 사림파 김종직의 제자들은 신숙주와 서거정을 훈구파 중에 사장파의 원훈이라고 비난하였다.

조선 전기에 4대 사화(士禍)를 거치면서 사림파는 훈구파의 탄압을 받았으나, 선조 이후에 마침내 사림파가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조선 후기에 사림파는 기호학파(畿湖學派)와 영남학파(嶺南學派)로 나누어져서 동서(東西) 분당(分黨)이 일어났고, 영조 · 정조 때 4색(四色) 당파 싸움을 전개하였다. 효종 · 현종 이후에 송시열(宋時烈)의 노론(老論)이 집권하면서, 주자(朱子)의 성리학에 의하여 의리와 명분(名分)을 중요시하면서, 역사상 충절을 지키다가 죽음을 당한 사육신과 생육신을 높이 평가하게 되었다. 숙종 시대 단종을 복위(復位)하고, 김종서 · 황보인의 역적 누명이 벗기고, 또 사육신과 생육신을 신원(伸寃)하여 단종의 장릉(莊陵)에 배향하였다. 이때 성삼문과 박팽년 등 사육신의 후손을 찾아서 포상하였으나, 신숙주와 정인지 등은 의리를 저버린 유학자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계유정난> 이후에 2백여 년 동안 상삼문 등이 역사의 반역자로서 탄압을 받았으나, 숙종 이후에 2백여 년 동안 신숙주 등이 역사의 변절자로 낙인이 찍혀서 비판을 받았다. 이것은 역사를 보는 관점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공자(孔子)의 ‘천명(天命) 사상’에서 보면, 세종의 유명(遺命)을 받고 단종에게 충성한 사육신과 생육신의 충절(忠節)을 높이 평가도지만, 맹자(孟子)의 ‘혁명(革命) 사상’에서 보면, 민생(民生)을 위하여 세조의 강력한 지도력이 단종의 나약한 ‘황표 정사’보다 낫다고 생각한 정인지와 신숙주의 판단이 높게 평가될 수도 있다.

민간의 ‘야사’에서도 재상으로 출세한 신숙주의 변절을 부각시키려고 그 부인 윤씨의 절의를 내세워서, 신숙주 집안의 숨은 이야기를 만들어 야사 책에 기록하고 이를 수세기에 걸쳐 신숙주 집안을 괴롭혔다. 부인 윤씨는 집현전 대제학 윤회(尹淮)의 손녀딸로서 절의를 지키기 위하여 남편 신숙주를 대신하여 목을 매어 자결하였다고 하여, 유교의 명분을 저버린 신숙주가 아녀자보다 못하다고 그의 변절을 매도하였다. 이것은 부인 윤씨의 죽은 해와 <사육신> 사건이 일어난 해가 1456년(세조 2) 병자년으로 일치하기 때문에 만들어낸 이야기에 불과하다. 16세기 말엽 선조 때 대제학 이기(李墍)의 『송와잡설(松窩雜說)』에서 처음으로 이러한 야사를 기록하였는데, 그 뒤에 몇 종류의 야사 책에서도 이러한 내용이 소개되었다. 18세기 강화학파 이긍익(李肯翊)의 유명한 야사 전집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에서도 이기의 『송와잡설』을 그대로 옮겨 실었다. 그러나 부인 윤씨는 1456년 1월 23일에 막내를 낳다가 세상을 떠났고, 1456년 6월 1일에 <사육신>의 옥사가 일어났으므로, 윤씨 부인은 <사육신> 사건이 일어나기 4~5개월 전에 이미 돌아갔다. 신숙주는 맏아들 신주와 함께 중국에 사신으로 갔으므로, 부자가 함께 그녀의 임종을 지켜보지도 못하였다. 그때 신숙주는 40세였는데, 부인의 죽음이 자기의 탓이라고 생각하여, 재혼하지 않고 19년을 더 살면서 8남 1녀를 모두 훌륭하게 키워냈다. 그러나 조선 후기 사림파의 주류를 형성한 서인의 노론 · 소론이 유교의 명분론을 내세워서, 훈구파 중에 사장파의 원로 신숙주를 야사에서마저 매도하여, 신숙주의 집안 이야기가 여러 사람들의 입에 조롱거리로 회자(膾炙)되었다.

일제시대에 작자 미상의 신소설 『만고의열 신숙주 부인전』이 영창서관에서 간행되었는데, 그 내용은, ‘집현전 학사 성삼문과 박팽년 등이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새남터로 끌려갔다는 말을 듣고, 베를 짜던 부인 윤씨는 남편 신숙주를 따라서 죽을 준비를 하였는데, 남편 신숙주가 죽기는커녕 오히려 대신이 되어 돌아오는 것을 보고, 부인 윤씨는 크게 실망하여 대들보에 목을 매어 자살하였다.’는 것이다. 『만고의열 신숙주 부인전』은 선조 때 사림파 예조 판서 이기의 『송와잡설』에 근거하여 창작한 신소설인데, 출세를 하기 위하여 변절한 남편 신숙주를 대신하여 뼈대 있는 집안 출신 윤씨 부인을 내세워서 끝내 자결하게 함으로써 신숙주의 변절을 매도하였다. 그 뒤에 박종화는 1923년 『백조(白鳥)』에서 근대 역사소설의 효시로 알려진 단편소설 「목 메이는 여자」를 발표하였는데, 그 내용은, ‘남편 신숙주의 변절에 고심하던 부인 윤씨가 남편 신숙주를 대신해서 죽음으로써 죄를 대속하였다.’는 것이다. 뒤이어 이광수도 1928년 11월부터 1년에 걸쳐 동아일보에 역사소설 『단종애사(端宗哀史)』를 연재하여 독자들의 열광을 받았는데, 그 내용 중에 ‘신숙주의 부인 윤씨가 사육신 사건에 가담하지 않은 남편 신숙주에 실망해서 목을 매어서 자살하였다.’는 것이 있다. 모두 조선 후기 사림파의 야사를 근거로 창작한 현대 역사 소설인데, 역사적 사실과는 전혀 다른 창작물이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성종의 묘정에 배향(配享)되었다.[『연려실기술』 권6] 묘소는 경기도 양주목(楊州牧) 송산리(松山里)에 있는데, 삼탄(三灘) 이승소(李承召)가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삼탄집(三灘集)』 권13 「유명조선 수충 협책 정난 동덕 좌익 보사 병기 정난 익대 순성 명량 경제 홍화 좌리 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고령부원군 문충공 묘비명(有明朝鮮輸忠協策靖難同德佐翼保社秉機定難翊戴純誠明亮經濟弘化佐理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高靈府院君文忠公[申叔舟]墓碑銘)」, 『보한재집(保閑齋集)』 부록 「비명(碑銘)」]. 또 영의정 강맹경(姜孟卿)이 지은 행장(行狀)과 제자 이조 참판 이파(李坡)가 지은 묘지명(墓誌銘)이 『보한재집(保閑齋集)』에 실려 있다[『보한재집』 부록]. 지금 무덤은 의정부시 고산동 산 53-7번지에 있는데, 신숙주와 부인 윤씨 내외가 나란히 묻힌 쌍분이다. 경기도 기념물 제 88호로 지정되어 있다. 무덤 앞에 1971년 한글학회에서 건립한 한글 창제 사적비가 있는데, ‘문충공 고령 신숙주 선생 한글 창제 사적비’라고 쓰여져 있다.

또 신숙주 생가터는 전라남도 나주시 노안면 금안리 277번지에 있는데, 호남의 유명한 인물을 배출한 3대 명촌의 하나다. 생가터에는 ‘신숙주 선생 생가’라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는데, 2000년 11월 신숙주선생 생가공원화 추진위회가 세운 것이다. 생가 공원화 추진위회에서 생가터(165㎡)에 생가를 복원하고, 그 주변 1만여㎡의 땅에 기념관을 짓고 공원화 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한다.

부인 무송 윤씨(茂松尹氏)는 경상좌도 수군 절제사 윤경연(尹景淵)의 딸인데, 자녀는 8남 1녀를 두었다. 장남 신주(申澍)는 통례문(通禮門) 봉례(奉禮)를 지냈고, 차남 신면(申㴐)은 함길도 관찰사를 지냈으나, 1467년(세조 12) 이시애의 반란 때 순직(殉職)하였고, 3남 신찬(申澯)은 황해도 관찰사를 지냈고, 4남 신정(申瀞)은 문과에 급제하여 도승지를 지냈는데. 어보(御寶)를 위조하였다고 하여 1482년(성종 13) 사사(賜死)되었다. 5남 신준(申浚)은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병조 참의를 지냈는데, 성종이 즉위할 때 신정(申瀞)과 함께 좌리공신에 책봉되었다. 6남 신부(申溥)는 절충 장군(折衝將軍) 행(行) 사과(司果)를 지냈고, 7남 신형(申泂)은 문과에 급제하여 사섬시(司贍寺) 정(正)을 지냈고, 8남 신필(申泌)은 행 사과를 지냈다. 외동딸은 사맹(司猛) 신명수(申命壽)에게 출가하였다.[『보한재집』 부록 「비명」]

장남 신주는 한명회의 딸과 혼인하였는데, 신주는 신숙주보다 먼저 죽었다. 차남 신면은 <이시애 반란> 때 함경도 관찰사로 있다가 죽었는데, 신면은 승지로서 5년이나 있으면서, 세조의 물음에 대답하는 것이 매우 자상하고 명확하였다고 한다. 신면은 죽을 때 나이가 30세였는데, 아들이 둘이 있었으니, 신용관(申用灌)과 신용개(申用漑)였다[『세조실록』 세조13년 5월 22일]. 신숙주는 40세 때 부인 윤씨가 막내를 낳다가 돌아가자, 재혼하지 않고 홀로 8남 1녀를 키웠는데, 신숙주는 항상 먼저 떠난 아내와 아들의 죽음이 자신의 탓이라 생각하고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다가, 마침내 죽은 뒤에 아내 윤씨의 옆으로 가서 나란히 묻혔다.

신숙주의 어록(語錄)을 보면, 그는 일찍이 말하기를, “사람과 교제하는 것이 쉬운 일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아주 어려운 것이다.[與人交際 似易而實難]. 오직 지극한 정성만이 남을 감동시킬 수 있다.[唯至誠 可以感動].” 하였다. 또 가훈(家訓)을 지어 딸에게 교훈하기를, “규방(閨房) 안에서 남편의 사랑[私恩]은 의리(義理)를 가리는 법이므로 친숙해지기 쉽다. 친숙한 마음이 생기면, 남편을 공경하고 조심하는 마음이 느슨해지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교만하고 질투하여 방자한 짓을 하지 못하는 것이 없게 되는데, 부부 사이에 틈이 벌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였다.[『해동잡록』 권4]

[참고문헌]
■ 『세종실록(世宗實錄)』
■ 『단종실록(端宗實錄)』
■ 『세조실록(世祖實錄)』
■ 『예종" 실록(睿宗實錄)』
■ 『성종실록(成宗實錄)』
■ 『보한재집(保閑齋集)』
■ 『북정록(北征錄)』
■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
■ 『훈민정음해례본(訓民正音解例本)』
■ 『동국정운(東國正韻)』
■ 『홍무정운역훈(洪武正韻譯訓)』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간이집(簡易集)』
■ 『견한잡록(遣閑雜錄)』
■ 『계곡집(谿谷集)』
■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고봉집(高峯集)』
■ 『국조보감(國朝寶鑑)』
■ 『기재잡기(寄齋雜記)』
■ 『난중잡록(亂中雜錄)』
■ 『동각잡기(東閣雜記)』
■ 『동문선(東文選)』
■ 『동사강목(東史綱目)』
■ 『동사록(東槎錄)』
■ 『동사일기(東槎日記)』
■ 『동춘당집(同春堂集)』
■ 『동환봉사(東還封事)』
■ 『만기요람(萬機要覽)』
■ 『매천집(梅泉集)』
■ 『명재유고(明齋遺稿)』
■ 『몽경당일사(夢經堂日史)』
■ 『묵재일기(黙齋日記)』
■ 『문견별록(聞見別錄)』
■ 『미수기언(眉叟記言)』
■ 『봉사일본시문견록(奉使日本時聞見錄)』
■ 『부계기문(涪溪記聞)』
■ 『부상록(扶桑錄)』
■ 『북저집(北渚集)』
■ 『불우헌집(不憂軒集)』
■ 『사가집(四佳集)』
■ 『사계전서(沙溪全書)』
■ 『사상록(槎上錄)』
■ 『삼봉집(三峯集)』
■ 『상촌집(象村集)』
■ 『서계집(西溪集)』
■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 『성호사설(星湖僿說)』
■ 『소문쇄록(謏聞瑣錄)』
■ 『송와잡설(松窩雜說)』
■ 『송자대전(宋子大全)』
■ 『수당집(修堂集)』
■ 『순암집(順菴集)』
■ 『신고령봉사시작(申高靈奉使時作)』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아계유고(鵝溪遺稿)』
■ 『약천집(藥泉集)』
■ 『역대요람(歷代要覽)』
■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 『용재총화(慵齋叢話)』
■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
■ 『월정만필(月汀漫筆)』
■ 『응천일록(凝川日錄)』
■ 『일본행록(日本行錄)』
■ 『임하필기(林下筆記)』
■ 『장빈거사호찬(長貧居士胡撰)』
■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
■ 『전후사행비고(前後使行備考)』
■ 『점필재집(佔畢齋集)』
■ 『조천기(朝天記)』
■ 『종묘의궤(宗廟儀軌)』
■ 『죽창한화(竹窓閑話)』
■ 『증정교린지(增正交隣志)』
■ 『청성잡기(靑城雜記)』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추강냉화(秋江冷話)』
■ 『추강집(秋江集)』
■ 『택당집(澤堂集)』
■ 『패관잡기(稗官雜記)』
■ 『포저집(浦渚集)』
■ 『표해록(漂海錄)』
■ 『필원잡기(筆苑雜記)』
■ 『학봉전집(鶴峯全集)』
■ 『해동악부(海東樂府)』
■ 『해동야언(海東野言)』
■ 『해동역사(海東繹史)』
■ 『해동잡록(海東雜錄)』
■ 『해사록(海槎錄)』
■ 『해사일기(海槎日記)』
■ 『홍재전서(弘齋全書)』
■ 『경재집(敬齋集)』
■ 『단계유고(丹溪遺稿)』
■ 『불우헌집(不憂軒集)』
■ 『식우집(拭疣集)』
■ 『태허정집(太虛亭集)』
■ 『눌재집(訥齋集)』
■ 『저헌집(樗軒集)』
■ 『성근보집(成謹甫集)』
■ 『삼탄집(三灘集)』
■ 『사숙재집(私淑齋集)』
■ 『허백정집(虛白亭集)』
■ 『대봉집(大峯集)』
■ 『나재집(懶齋集)』
■ 『추강집(秋江集)』
■ 『매계집(梅溪集)』
■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 『성재집(性齋集)』
■ 『환재집(瓛齋集)』
■ 『면암집(勉菴集)』
■ 『연재집(淵齋集)』
■ 『송사집(松沙集)』
■ 『명미당집(明美堂集)』
■ 『무송헌집(撫松軒集)』
■ 『서포집(西浦集)』
■ 『해월집(海月集)』
■ 『금남집(錦南集)』
■ 『충재집(冲齋集)』
■ 『모재집(慕齋集)』
■ 『호음잡고(湖陰雜稿)』
■ 『인재집(忍齋集)』
■ 『미암집(眉巖集)』
■ 『국간집(菊磵集)』
■ 『이암유고(頤庵遺稿)』
■ 『옥계집(玉溪集)』
■ 『지천집(芝川集)』
■ 『문봉집(文峯集)』
■ 『월정집(月汀集)』
■ 『백암집(柏巖集)』
■ 『일송집(一松集)』
■ 『지퇴당집(知退堂集)』
■ 『만취집(晩翠集)』
■ 『어우집(於于集)』
■ 『한음문고(漢陰文稿)』
■ 『월사집(月沙集)』
■ 『이재유고(頤齋遺藁)』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홍재전서(弘齋全書)』
■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
■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

■ [집필자] 최양규, 김구진, 박종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