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총론]
[1463년(세조 9)∼1519년(중종 14) = 57세.] 조선 전기 성종~중종 때의 문신. 좌의정(左議政)을 지냈고,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자는 개지(漑之)이고, 호는 이요정(二樂亭) · 송계(松溪) · 수옹(睡翁)이다. 본관은 고령(高靈)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함길도 관찰사 신면(申㴐)이고, 어머니 영광 정씨(靈光丁氏)는 우군 사용(右軍司勇) 정호(丁湖)의 딸이다. 영의정 신숙주(申叔舟)의 손자이고, 이조 판서 신준(申浚)의 조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었으므로, 그가 살아 있을 때에는 훈구파를 억제하여 조광조(趙光祖)의 사림파(士林派)를 보호하였다. 영의정 정광필(鄭光弼)과 절친한 사이였다.
[성종 시대 활동]
1483년(성종 14) 사마시(司馬試)에 생원과(生員科) · 진사과(進士科) 양과에 모두 급제하였고, 5년 뒤에 1488년(성종 19) 알성시(謁聖試)문과(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26세였다.[『방목』] 처음은 승정원(承政院) 권지 정자(權知正字)에 보임되었다가, 1490년(성종 21) 홍문관(弘文館)정자(正字)가 되었다. 1491년(성종 22) 이조 좌랑(佐郞)이 되었는데, 이듬해 성종이 문신들에게, 공자(孔子)가 ‘구이(九夷)에 살고 싶다’고 한 사실에 대하여 논술하게 하여, 문신 30명을 뽑았는데, 이조 좌랑 신용개가 1등을 차지하였다.[『성종실록(成宗實錄)』 성종 23년 5월 13일] 이때부터 4년 동안 경연(經筵)에서 시강(侍講)하였는데, 성종이 그가 강론(講論)을 잘한다고 몸소 어의(御衣)를 벗어서 그에게 입혀주었다.[『용재집(容齋集)』 권10 「의정부 좌의정 신공 신도비명(議政府左議政 申公神道碑銘)」]
1492년(성종 23) 홍문관 수찬(修撰)이 되어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성종이 용산(龍山)의 폐사(廢寺)를 수리하여 독서당(讀書堂)이라고 이름하고, 신용개 등 당대의 젊은 인재들을 뽑아서 휴가를 주어 학문에 힘쓰게 하였다.[『용재집』 권10 「의정부 좌의정 신공 신도비명」] 1494년(성종 25) 정6품상 승의랑(承議郞)으로 승품(陞品)하여 사헌부(司憲府) 수 지평(守持平)이 되었다.[『성종실록』 성종 25년 6월 23일] 여러 종친의 왕자들과 간통한 존금(存今)의 동생을 가까이하여 그 집에 왕래하다가, 대간(臺諫)에서 존금의 문제를 논죄할 때 동료들에게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다고 하여, 평시서(平市署)영(令)으로 좌천되었다.
[연산군 시대 활동]
1495년(연산군 1) 이조 정랑에 임명되었는데, 영접 도감(迎接都監)의 낭청(郎廳)이 되어 중국 명(明)나라 조사(詔使)를 맞이하여 접대하는 일을 맡아보았다.[『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연산군 1년 6월 6일] 1496년(연산군 2) 이조에서 사가독서할 사람을 선발하였는데, 신용개를 비롯하여 김전(金銓) · 김일손(金馹孫) · 강혼(姜渾) · 남곤(南袞) · 정희량(鄭希良) · 홍언충(洪彦忠) · 박은(朴誾) 등 14명이 뽑혔다.[『연산군일기』 연산군 2년 12월 15일] 박은은 그의 맏사위였는데, <갑자사화(甲子士禍)> 때에 화(禍)를 당하였다. 1497년(연산군 3) 의정부 검상(檢詳)에 임명되었다가, 모친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였다. 3년 상례(喪禮)를 끝마치고, 1499년(연산군 5) 홍문관에 들어가서 교리(校理)를 거쳐 응교(應敎)로 승진되어, 예문관(藝文館) 응교까지 겸임하였다. [『용재집』 권10 「의정부 좌의정 신공 신도비명」]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자, 김종직의 문인이라 하여 체포당하여 심문을 받았다. 김일손의 공초(供招)에 그의 이름이 거론되었으나, 영의정 윤필상(尹弼商)이 적극적으로 구원해 주었고, 또 연산군도 신숙주의 손자라고 하여 특별히 석방하여, 화(禍)를 면하였다. 1500년(연산군 6) 사헌부 장령(掌令)을 거쳐, 사간원 사간(司諫)이 되었다가, 홍문관 직제학(直提學)에 임명되었다. 1501년(연산군 7) 동부승지(同副承旨)에 발탁되어, 우부승지(右副承旨)를 거쳐, 좌부승지(左副承旨)가 되었다.[『연산군일기』 연산군 7년 2월 10일 · 윤7월 20일 · 9월 29일]
1502년(연산군 8) 우승지(右承旨)로 승진되어, 좌승지(左承旨)를 거쳐, 도승지(都承旨)로 영전되었다.[『연산군일기』 연산군 8년 1월 5일 · 6월 4일 · 8월 10일] 2년 동안 신용개가 강직하게 일을 처리하고, 임금은 뜻을 잘 따르지 않았으므로, 연산군이 그를 매우 못마땅하게 여겨서, 충청도 수군절도사(忠淸道水軍節度使)로 내보냈는데, 비록 품계를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로 높였으나 사실은 좌천시킨 것이다. 신용개는 부임한 지 1년 만에 병으로 사임하였으나, 1503년(연산군 9) 연산군이 갑자기 형조 참판(參判)에 임명하였고, 얼마 뒤에 예조 참판으로 옮겼다.[『연산군일기』 연산군 9년 10월 25일 · 11월 1일]
1504년(연산군 10) 여름에 성절사(聖節使)에 임명되어, 중국 명나라 북경(北京)에 가서 명나라 효종(孝宗) 홍치제(弘治帝)의 생신을 축하하고 돌아오다가, <갑자사화>가 일어나서, 국경에 도착하기 전에 체포되어 직첩(職帖)을 빼앗기고 전라도(全羅道) 영광(靈光)으로 유배되었다.[『용재집』 권10 「의정부 좌의정 신공 신도비명」, 『연산군일기』 연산군 10년 8월 20일] 신용개는 성절사로서 명나라에 다녀오면서 본 것을 기록하여 연산군에게 치계(馳啓)하였는데, 그 서장(書狀) 안에 중국 명나라의 상장(喪葬) 제도에 대한 것이 들어 있었다.[『연산군일기』 연산군 10년 7월 23일]
[중종 시대 활동]
1506년(중종 1) 형조 참판에 임명되어 경연(經筵)동지사(同知事)를 겸임하였다.[『중종실록(中宗實錄)』 중종 1년 9월 26일] 1507년(중종 2) 홍문관 대제학(大提學)에 임명되어, 예문관 대제학을 겸임하였다. 그때 춘추관(春秋館) 일을 겸임하여,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를 감수(監修)하였다.[『중종실록』 중종 2년 2월 4일 · 2월 17일] 1507년(중종 2) 중국 명나라에 중종의 고명(誥命)을 주청(奏請)하는 주문사(奏聞使)를 보낼 때, 그 부사(副使)로 임명되어 정사(正史)성희안(成希顔)과 함께 중국에 가서 고명을 받아 가지고 돌아오니, 원종공신(原從功臣)의 칭호를 내려주었다.[『중종실록』 중종 2년 7월 22일 · 9월 7일, 중종 3년 2월 3일] 공조 판서에 임명되어, 홍문관 · 예문관 의 대제학을 겸임하였다.[『중종실록』 중종 2년 11월 27일]
1508년(중종 3) 의정부 우참찬(右參贊)이 되었다가, 예조 판서를 거쳐, 의정부 좌참찬(左參贊)이 되었다.[『중종실록』 중종 3년 1월 22일 · 7월 4일 · 11월 10일] 1509년(중종 4) 이조 판서가 되었는데[『중종실록』 중종 4년 1월 18일] 이듬해 대간에서 아뢰기를, “이기(李芑) 형제는 이조와 병조에 모두 상피(相避)할 사람이 있는데 이조 판서 신용개가 이들을 서용할 것을 주장하니, 신용개를 추국(推鞫)하고, 또 이기 등의 관직을 바꾸소서.” 하였으나, 중종이 허락하지 않았다.[『중종실록』 중종 5년 2월 12일]
1513년(중종 8) 대사헌(大司憲)에 임명되었다가, 병조 판서가 되었다. 그때 병조 판서 신용개가 자기 자신은 변방을 방어하는 일을 잘 알지 못하고 자기의 기량이 병조 판서에 합당치 못한데다가 귀와 눈에 병이 있다고 핑계하고, 병조 판서와 특별히 가자(加資)한 정3품상 정헌대부(正憲大夫)를 사양하였으나, 중종이 윤허하지 않았다.[『중종실록』 중종 8년 5월 21일 · 6월 27일] 그해 우찬성(右贊成)에 임명되고[『중종실록』 중종 8년 10월 27일], 1514년(중종 8) 의금부(義禁府)동지사(同知事)를 겸임하였다.[『중종실록』 중종 8년 12월 11일]
1516년(중종 11) 좌찬성(左贊成)에 되었다가, 정1품상 대광보국(大匡輔國) 숭록대부(崇祿大夫)로 승품되어 우의정(右議政)에 임명되어, 홍문관 대제학을 겸임하였다.[『중종실록』 중종 11년 1월 25일 · 4월 20일] 1518년(중종 13) 의정부 좌의정(左議政)으로 영전되었다.[『중종실록』 중종 13년 1월 5일] 중종은 신용개를 좌의정으로 승진시켜서, 영의정 정광필과 함께 나라의 일을 좌우로 나누어 총괄하도록 하였다. 신용개와 정광필은 원래 막역한 친구 사이였는데, 신용개가 정광필보다 결단성이 있고, 또 통솔력이 있어 사림파(士林派)와 훈구파(勳舊派)의 대립을 잘 조정하여 정국의 안정을 이룩하였다.
좌의정 신용개는 부종(浮腫) 증세에다 고창(鼓脹) 증세가 겹쳐서 일어나 몸을 지탱하지 못할 만큼 몸이 쇠약해져서 관직을 사양하였다. 그러나 중종은 허락하지 않고, 승정원 주서(注書)윤구(尹衢)를 보내어 신용개를 위로하기를, “경은 병으로 사직하였으나, 집에서 몸조리를 하도록 허락하니, 안심하고 병을 치료하라.” 하니, 신용개가 아뢰기를, “성은은 지중하나, 신은 용렬한데다가 병까지 들었으니, 관직에 그대로 있는 것이 마땅치 않습니다.” 하였다.[『중종실록』 중종 14년 7월 11일] 그때 좌의정 신용개와 영의정 정광필 두 정승이 동시에 병이 들어 출사하지 못하였는데, 조정에서 사림파와 훈구파가 서로 극단적으로 대립하여 폭발하기 직전에 있었기 때문에 중종은 위기를 수습할 사람이 없어서 애를 태우고 있었다. 영의정 정광필은 병이 위독하였으나 곧 회복되었다. 그러나 신용개는 점차 위독하여져서 사직하기를 빌었으나, 중종은 끝내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좌의정 재임 기간 중에, 1519년(중종 14) 10월 3일 서울의 본가에서 돌아갔는데, 향년이 57세였다.[『중종실록』 중종 14년 10월 3일 「신용개 졸기」]
신용개는 몸소 모든 일들을 총괄하였고, 마음을 다해 중종을 보필하였으므로, 사림파와 훈구파가 모두 그에게 크게 의지하였는데, 그가 돌아간 지 한 달 열 이틀 만인 11월 15일 훈구파의 남곤 · 심정(沈貞) 등이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켜서 조광조 일파를 도륙하였다. 좌의정 신용개가 살아 있을 때에는 영의정 정광필과 함께 남곤 · 심정 · 홍경주 등을 억압하여 그들이 날뛰지 못하도록 억제하였다. 그가 좀 더 오래 살았더라면, <기묘사화>를 충분히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저서에는 『이요정집((二樂亭集)』이 있고, 편저에는 『속동문선(續東文選)』 · 『속삼강행실도(續三綱行實圖)』 등이 있다.
[무오사화 · 갑자사화와 신용개]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가 일어나서,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의 사초(史草)에 관련된 사림파 인물을 모두 잡아다가 심문하여 죽이거나 유배하였다. 그때 연산군이 전교하기를, “김종직의 제자를 끝까지 추궁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내가 그 사람됨을 알고자 하니, 모조리 써서 아뢰도록 하라.”하였다. 영의정 윤필상(尹弼商) 등이 아뢰기를, “김종직의 제자는 이미 김일손의 사초에 모두 기록되어 일찍이 대내(大內)로 들어갔습니다.” 하니, 연산군이 전교하기를, “그 사초에 기록된 김종직의 제자 신종호(申從濩) 등 약간 명도 과연 모두가 김일손처럼 수업(受業)을 받았는가, 그렇지 않는 자도 있는가. 또 그의 말에 ‘나머지 사람도 오히려 많다.’ 하였는데, 누구인지를 물어보라.” 하였다. 이에 영의정 윤필상 등이 김일손에게 물으니, 김일손이 대답하기를, “신종호는 김종직이 서울에 있을 적에 수업하였고, 조위(曺偉)는 김종직의 처제(妻弟)로서 젊어서부터 수업하였고, 채수(蔡壽) · 김전 · 최보(崔漙) · 신용개 · 권경유(權景裕) · 이계맹(李繼孟) · 이주(李胄) · 이원(李黿)은 제술(製述)하여 과차(科次)를 받았고, 정석견(鄭錫堅) · 김심(金諶) · 김흔(金訢) · 표연말(表沿沫) · 유호인(兪好仁) · 정여창(鄭汝昌)도 역시 모두 수업하였는데, 어느 시기에 수업했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김굉필(金宏弼)은 김종직이 상(喪)을 만났을 때에 수업했습니다. 그 나머지도 오히려 많다고 한 것은, 이승언(李承彦) · 곽승화(郭承華) · 장자건(莊姉健) 등입니다.” 하였다.[『연산군일기』 연산군 4년 7월 17일]
영의정 윤필상 등이 이의무(李宜茂) · 신용개 · 김전 · 정희량을 석방하도록 간청하였는데, 연산군이 명하여 신용개만을 석방하게 하였다.[『연산군일기』 연산군 4년 7월 22일] 이리하여 <무오사화> 때 신용개는 김종직의 제자인 것이 밝혀져서 죽음을 당할 뻔 하였으나, 연산군은 신용개를 살려주었다. 연산군이 신용개만을 살려준 배경에는 일찍이 원상(院相) 신숙주가 자성대비(慈聖大妃: 정희왕후)를 도와서 성종을 옹립하였을 뿐만 아니라,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를 후궁으로 추천하여, 연산군을 낳고 왕비가 되도록 했기 때문이다. 또 외손자 연산군에게 폐비 윤씨가 죽을 때 피를 토한 수건을 가져다가 바쳐서 <갑자사화>를 일으키게 만든 폐비 윤씨의 어머니 신씨(申氏)는 신평(申枰)의 딸로 신숙주의 4촌 누이라고 한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가 일어나서, 성종 때 연산군의 생모 윤비(尹妃: 제헌왕후)를 폐위시킬 때에 연루된 신하들을 모두 체포하여, 가혹한 심문을 하고 극형(極刑)에 처하였다. 그때 연산군은 폐비 사건과 관계 없으나 평상시에 그의 비위를 거슬렀던 사람들도 모두 잡아다가 심문하고 처벌하였다. 이보다 앞서 1501년(연산군 7) 신용개는 신수영(愼守英) · 한위(韓偉) 등과 연산군의 승지(承旨)로 있었는데, 승전 내관(承傳內官) 김새(金璽)가 임금의 전지(傳旨)를 늦게 전달하였다고 그에게 죄주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연산군의 노여움을 샀는데, 승전 환관 김새가 연산군의 사랑을 받는 자였기 때문이다.
또 승검초[辛甘菜]를 먹는 일로 연산군에게 미움을 받은 일도 있었는데, <갑자사화> 때 이 일을 다시 거론하여 그를 죄주고자 하였다. 연산군이 전교하기를, “전일에 신용개가 승검초를 먹는 일을 말하였는데, 잡아다가 장형에 처하여 먼 외방으로 정배하도록 하라.” 하였다.[『연산군일기』 연산군 10년 12월 11일] 승검초는 맛이 새큼하여 입 안이 개운해지므로 식욕을 돋워 주므로, 신용개가 승검초를 가지고 궁궐에서 오신반(五辛盤) 곧 승검초 · 파 · 마늘 · 달래 · 부추를 버무린 음식을 수라상에 올리게 하였다. 연산군은 이것을 역하다고 먹지 않고, 도리어 먹지 못하는 음식을 바쳤다고 화를 냈었다.
1504년(연산군 10) 5월 연산군이 승정원에 명령하기를, “고관이 되면 곧 교만 방종하여 꺼리는 것이 없으니, 임금을 능멸하는 풍습을 지금 통렬히 고쳐야 하겠으니, 이 일은 반드시 심문해야 한다.” 하였다. 신용개는 성절사로 북경에 갔고, 한위는 왕릉을 지키고 있었고, 연산군의 막내처남 신수영(辛守英)은 상중에 있었다. 연산군이 전교하기를, “북경에 사신으로 간 사람 신용개 같은 자는 할 수 없지만, 한위는 왕릉을 지키고 신수영은 상중에 있더라도 역시 잡아다가 국문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신수영과 한위는 각각 장 80을 속바치고 고신(告身) 3등을 빼앗으며, 신용개는 돌아온 뒤에 국문하라.” 하였다.[『연산군일기』 연산군 10년 5월 18일] 1505년(연산군 11) 2월 신용개가 북경에서 돌아오자, 연산군이 전교하기를, “신용개 등은 장(杖) 80대를 때려서 외방(外方)으로 출송(出送)하라.” 하였다.[『연산군일기』 연산군 11년 2월 7일] 이리하여 신용개는 장 80대를 맞고 전라도 영광(靈光)으로 유배되었다.
[신용개의 업적]
신용개는 문장과 학식에 뛰어났다. 어릴 때부터 일찍이 아버지 신면이 비명횡사(非命橫死)하고 할아버지 신숙주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자랐다. 어릴 때부터 보한재(保閑齋) 신숙주의 문장을 배우고, 또 13세 때 할아버지 신숙주가 돌아가자, 점필재(佔畢齋) 김종직의 문하에서 학문을 수련하였다. 1483년(성종 14) 21세 때 사마시에 생원 · 진사 양시(兩試)에 모두 급제하였다. 이때부터 그의 문장이 크게 발전하여 한때 동료들이 ‘문장의 거벽(巨擘)’이라고 추대하여 감히 그에게 맞서는 자가 없었다.[『용재집』 권10 「의정부 좌의정 신공 신도비명」] 그의 문장은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것을 멀리하였으므로 조금도 더럽고 저속한 면이 없었으며 또 당송(唐宋)의 팔가문(八家文)의 정통을 따라서 힘이 있고 간고(簡古)하였다고 한다.
1490년(성종 21) 나이 28세 때 홍문관 정자(正字)가 되었을 때 성종이 문신들을 인정전(仁政殿) 뜰에 모아서 악부 가사(樂府歌辭)를 짓게 하였는데, 홍문관 정자 신용개가 수석을 차지하였다.[『성종실록』 성종 21년 1월 25일] 성종은 신용개에게 붉은 색 겹철릭을 1벌을 상으로 하사하였다. 당시 복식(服飾) 제도에 의하면 당하관은 붉은 색, 당상관은 남색(藍色)을 착용하였다.
1491년(성종 22) 나이 28세 때 이조 좌랑이 되었는데, 이때부터 4년 동안 경연(經筵)에서 시강(侍講)하였다. 젊은 신용개가 학식이 깊어서 경전(經典)을 논리적으로 해석하였으므로, 성종이 연석(宴席)에서 여러 유신(儒臣)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가 강론을 잘한다고 칭찬하고 입었던 어의(御衣)를 벗어서 몸소 그에게 입혀주었다.[『용재집』 권10 「의정부 좌의정 신공 신도비명」] 이를 보더라도 신용개가 학문의 조예가 깊었던 것을 알 수 있다.
1507년(중종 2) 홍문관 대제학에 임명되어, 춘추관 일을 겸임하여, 『연산군일기』를 감수하였다. 연산군 시대에 혐의가 없는 사람을 골라서 편수관에 임명하였는데, 성희안이 총재관(摠裁官)으로 되고, 신용개와 김전이 도청 당상(都廳堂上)이 되고, 색승지(色承旨)는 안당(安瑭)이 되었다.[『중종실록』 중종 2년 2월 17일 · 4월 11일] 또 중종은 신용개가 문장에 뛰어나다고 하여 서거정(徐居正)의 『동문선(東文選)』과 설순(偰循)의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를 보충하여 다시 편찬하게 하였다. 이에 신용개는 중종의 명을 받들고 1518년(중종 9) 『속삼강행실(續三綱行實)』을, 1514년(중종 13) 『속동문선』 21권을 편찬하여 중종에게 바쳤다. 특히 『속동문선』은 신용개가 찬집청(撰集廳) 당상(堂上)으로 있으면서 김전 · 남곤 등과 함께 성종 이후 중종 때까지 명문(名文)을 엄선하여 보충하였다.
1499년(연산군 5) 홍문관에 들어가서 교리를 거쳐 응교로 승진되어, 예문관 응교까지 겸임하였다. 당시 나라의 제도에서는 단 1명만이 예문관 응교를 겸임하게 하였는데, 곧 장차 대제학에 임명하여 문형(文衡) 곧 대제학을 맡길 인물을 먼저 한 사람을 물색하여 응교에 임명하였기 때문이다.[『용재집』 권10 「의정부 좌의정 신공 신도비명」] 그 뒤에 8년이 지나서, 1507년(중종 2) 홍문관 대제학에 임명되어, 예문관 대제학을 겸임하였다.
그때 문한(文翰)을 맡아보는 대제학 후보에 강혼과 신용개가 추천되었는데, 우의정 유순(柳洵)은 강혼을 천거하기를, “강혼과 신용개는 재주와 인품이 모두 문형의 소임을 감당할 만합니다만, 강혼이 이미 숭품(崇品)에 올라 있으니, 대제학의 직분에 더욱 적당합니다.” 하였다. 좌의정 박원종(朴元宗)은 신용개를 추천하기를, “강혼과 신용개는 그 인품에 있어서는 한 가지입니다만, 그 재주의 상하는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 만일 신용개의 재주가 강혼보다 더 낫다면, 문형의 소임이 매우 큰 만큼 승품하여 제수하는 것이 합당한가의 여부를 의논할 것조차 없습니다.” 하였다. 그때 강혼은 이미 정2품의 숭품(崇品)에 올라 있었으므로 대제학의 직급에 맞았으나, 신숙주는 그보다 아래 직품이었다. 그해 2월 중종이 이조에 전교하기를, “참판 신용개의 자품(資品)을 높여서 홍문관 대제학에 임명하라.” 하였다.[『중종실록』 중종 2년 윤1월 28일 · 윤1월 30일 · 2월 4일] 이어 공조 판서에 임명되었으나, 홍문관 · 예문관의 대제학을 겸임하였다.[『중종실록』 중종 2년 11월 27일] 이때부터 1519년(중종 14) 좌의정으로 있다가 돌아갈 때까지 12년 동안 문형을 맡아보았다.
신용개는 예론(禮論)에 정통하여, 할아버지 신숙주의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계승 발전시켜서, 조선 후기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예학(禮學)이 성립하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다. 1508년(중종 3) 신용개가 의정부 우참찬과 예조 판서를 거쳐 좌참찬이 되었을 때, 사간원 정언(正言)홍언필(洪彦弼)이 아뢰기를, “신용개는 젊은 나이에 예론을 잘 아니, 예조에 적합하며, 장순손(張順孫)은 형옥(刑獄)과 사송(詞訟)을 잘 처결하니 형조에 적합한데, 모두 그 직무에 오래 있지 아니하고 갑자기 의정부로 옮겼습니다. 삼재(三宰)와 사재(四宰)는 실지로 할 일이 없는 자리이니, 이러한 사람들을 마땅히 육조에 시용(試用)하여야 합니다.” 하였으나, 중종이 비답(批答)하지 않았다.[『중종실록』 중종 3년 11월 10일 · 11월 11일] 이를 보면 신용개는 젊어서부터 예론에 정통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삼재는 좌참찬을 사재는 우참찬을 가리킨다.
1504년(연산군 10) 여름에 성절사 신용개가 북경에 있으면서 보고 들은 중국의 예절을 기록하여 예부(禮部)의 자문(咨文)을 함께 치계하기를, “태황태후(太皇太后)가 붕서(崩逝)하여 발인(發靷)하기 전에는 황제가 소관복(素冠服)으로 서각문(西角門)에 앉아서 조참(朝參)을 받고, 발인한 후에는 흑포(黑袍)를 입고 조참(朝參)을 받으며, 삭망(朔望)의 대조회(大朝會)에도 정전(正殿)에 오르지 않고 봉천문(奉天門)에 앉고 고취(鼓吹)를 연주하지 않고 백관(百官)들이 모두 오사모(烏紗帽)에 흑단령·품대(黑團領品帶)를 하고, 예부가 주청(奏請)하여 전례에 따라 성지(聖旨)를 내려서 성절(聖節) · 천추(千秋)의 경하례(慶賀禮)를 행하는 것을 면제하였습니다.” 하였다.[『연산군일기』 연산군 10년 7월 23일] 이처럼 중국의 상장 예절을 채록하였다.
신용개는 중종 때 <3포 왜변(三浦倭變)>과 같은 왜적의 변란을 걱정하여 관청의 쓸데없는 비용을 줄여서 국방을 튼튼하게 하려고 노력하였다. 그가 좌의정이 되기 전까지 각 부서의 책임자로 있으면서 필요 없는 관원 곧 용관(冗官)을 많이 줄였으므로, 아랫 관원들로부터 원망을 들었다. 그가 대제학으로 있으면서 당시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하던 사가독서 제도를 폐지하려고 하다가 사림(士林)의 비난을 받았다. 대제학 신용개가 왜변(倭變)을 걱정하여 쓸데없는 비용 곧 용비(冗費)를 절약하기 위하여 임시로 독서당을 폐지하기를 청하니, 중종이 그대로 따랐다. 이때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세종이 나이 젊고 글 잘하는 선비를 뽑아 휴가를 주어 글을 읽게 하였고, 성종도 젊은 선비들에게 명하여 용산의 폐사를 독서당으로 삼았으며, 금상(今上) 초년에도 이것을 정업원(淨業院)으로 옮겼다가, 또 동호(東湖)에 옮겼다. 선발하는 인원이 10여 명에 불과하여 그 비용도 많지 않은데, 신용개가 갑자기 왜변을 걱정하여 폐지하기를 청하니, 당시 의논이 이것을 좀스럽다고 여겼다.” 하였다.[『중종실록』 중종 5년 5월 1일]
[신용개의 복수]
『북저집(北渚集)』을 보면, “성종 때에 신용개는 아버지 신면이 이시애(李施愛)의 무리에게 살해당했는데, 신용개가 그 아버지의 원수를 만나서 백주 대낮에 도성 안에서 칼로써 머리를 베어서 들고 대궐로 나아가서 왕의 처분을 바라니, 성종이 마침내 무죄로 용서하여 주었다.” 라는 기록이 있다. [『북저집』,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별집 권13] 1467년(세조 12) 5월 <이시애 반란> 때 반란군이 갑자기 관사를 덮치자, 함길도 관찰사 신면이 미쳐 몸을 피하지 못하고 2층 다락방에 몸을 숨겼다. 반란군이 쳐들어와서 관청의 아전을 위협하고 감사를 찾으니, 그 아전이 눈으로 다락방에 숨은 감사 신면을 가리켜주어서, 마침내 신면이 붙잡혀 죽었다. 그 뒤에 성종 때 그 아전이 마침 서울에 볼일이 있어서 도성 안으로 들어오자, 밤중에 신용개가 힘센 친구를 데리고 아전이 묵고 있는 여사(旅舍)로 찾아가서 그를 불러내어 컴컴한 어둠 속에서 도끼로 그 머리를 찍어서 죽였으나, 아무도 알지 몰랐다. 그러나 야사에서는 신용개가 백주 대낮에 저자 한복판에서 칼로써 아전의 머리를 베어서 들고 대궐로 나아가서 성종에게 복수한 사실을 고하고 처분을 바라니, 성종이 무죄로 용서해 주었다고 한다.
이 사건은 조선 시대 효자 아들이 아버지의 원수를 갚은 무용담으로서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렸다. 그의 비문에는 이 일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그는 항상 아버지의 죽음을 원통하게 여겨서, 일찍이 대궐에 상소를 올려 북방으로 보내 원수들에게 복수하게 해주기를 청하였으나, 조정에서는 끝내 이 상소를 들어주지 않았다. 그런데 마침 그 원수가 도성에 들어와서 있다는 사실을 첩자[詗者]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신용개는 한 밤중의 어둠을 이용해서 그 원수를 노상에서 격살하였다. 이에 신용개는 이를 삼성(三省)에 아뢰고 죄인으로서 국문(鞠問)을 받으려고 하였다. 그때 어머니가 울며 신용개를 말렸고 또한 조정에서도 끝내 이 일을 불문에 부쳤다.[『용재집』 권10 「의정부 좌의정 신공 신도비명」]
1495년(연산군 1) 도총부(都摠府) 도사(都事) 신용관(申用灌)과 이조 정랑 신용개 형제가 상소하기를, “신의 아비 신면이 지난 함길도 관찰사로 있었을 적에, 역적 이시애가 함길도 사람들을 선동하여 반란군을 이끌고 조정에서 임명한 관원들을 모두 죽였는데, 신의 아비도 역시 해를 입었습니다. 세조가 군사를 동원하여 토벌하고 친히 정벌하려고까지 하였는데, 역적의 무리가 주륙(誅戮)되고 그 당여(黨與)도 모두 처단되었습니다. 그때 신들의 나이 겨우 5, 6세로써 아직 아비의 원수를 알지 못하였고, 역적의 무리가 이미 처형을 당하고, 원수의 붙이 중에서 남아 있는 자가 없다고 생각하였는데, 지금 신의 아비를 해친 자가 도망쳐서 아직까지도 남아서, 신과 함께 같은 하늘 아래 있을 줄이야 어찌 생각하였겠습니까. 신들이 이 말을 들으니, 통분함을 스스로 참을 수 없었습니다.” 하였다. 그때 영안도(永安道)에 사명(使命)을 받들고 나갔던 이적(李績)이 이시애의 여당(餘黨) 가운데 직접 관찰사 · 절도사 · 수령(守令)을 죽인 자들이 도망쳐서 목숨을 온전히 보전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추적하여 유수명(劉守明) · 유보룡(劉甫龍) 등을 체포하여 조정에 보고하였다. 신용개 형제는 유수명 · 유보룡 등을 처형할 것을 주장하였고, 그들 형제가 영안도에 사명을 받고 나가겠다고 자원하였다. 그러나 승정원에서 아뢰기를, “자식의 마음으로서야 그 정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한 번 그 길을 열게 되면, 신용관 형제 등에만 그치지 않을 것이니, 일일이 추적하여 잡아낼 수도 없는 일입니다. 지금 신용관 형제의 정상을 보건대, 만일 영안도에 사명을 받들고 나가게 되면, 반드시 친히 사람을 잡아 죽일 것이니, 신용관 형제를 본도에 차견(差遣)하지 말기를 청합니다.” 하니, 연산군이 전교하기를, “과연 아뢴 말과 같겠다.” 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연산군일기』 연산군 1년 11월 23일 · 11월 24일 · 11월 26일]
이 일에 관하여 그의 졸기(卒記)에서 다음과 같은 사신의 논평을 볼 수 있다. 신용개는 고령 부원군(高靈府院君) 신숙주의 손자인데, 성품이 남에게 얽매이지 않고 협기(俠氣)가 많았다. 그 아버지 신면이 함길도 관찰사로 있다가 이시애가 난 때에 죽었는데, 그때 신용개는 나이가 아직 어렸으나 분연히 반드시 보복하려는 뜻을 가지고 와신 상담(臥薪嘗膽)하면서 잊지 않았는데, 가해(加害)한 사람을 수색하다가 도성(都城) 아래에서 만나자, 역사(力士)를 동원해서 기어코 죽이고야 말았다. 사람들이 그 의리에 감복하여, 신용개는 기개(氣槪)가 있는 사람이라고 이름이 났고, 사림(士林) 중에서 교유(交遊)한 사람은 모두다 한때의 뛰어난 사람들이었다.[『중종실록』 중종 14년 10월 3일 「신용개 졸기」]
[성품과 일화]
신용개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의 자질은 호탕하고, 인품은 너그러우며 태도는 의연하였다. 만약 자기가 할 수 없는 일에 부딪쳤을 때에는 부드럽게 넘어갔으며, 비록 아래의 천한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라도 그들과 더불어 호흡을 맞추어 환심을 얻었다. 관직에 있을 때에는 조금도 부정한 일이 없었으므로, 사람들도 또한 감히 사사로운 부탁을 할 수 없었다. 그는 처음에 벼슬에 뜻을 두지 않는 듯하였으나, 일단 관직에 나가자, 오로지 일에만 힘을 기울여서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왜냐하면, 그가 타고난 성품이 그러하였기 때문이다. 기품이 높고 총명하여 문명을 떨쳤을 뿐만 아니라, 활쏘기 등 무예에도 뛰어나 문무(文武)를 겸비하였다. 인품도 또한 꿋꿋하여, 남들이 범하지 못할 점이 있어서 당대 선비들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신용개는 활을 쏘고 말을 타는 사어(射御)에도 또한 출중하니, 비록 유신(儒臣)의 관복을 입고 있었으나, 신용개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후일에 장상(將相)이 될 재목이라고 존경하였다.[『용재집』 권10 「의정부 좌의정 신공 신도비명」]
1463년(세조 9) 신용개가 태어날 무렵, 아버지 신면은 도승지였고, 할아버지 신숙주는 영의정이었다. 할아버지 신숙주가 ‘백산악(白山岳)에서 산신(山神)이 자기 집으로 내려오는 꿈[嶽降神]’을 태몽으로 꾸었기 때문에 아명을 ‘백악(白岳)’이라고 지었다. 이때 영의정 신숙주의 저택 북쪽에 백악산이 있었다. 어려서부터 기품이 아주 뛰어나고 보통 아이들과는 어느 모로 보더라도 다른 점이 많았으므로, 할아버지 신숙주가 몸소 어루만지며 귀여워하고, 또 글을 가르치고 이끌어 주었다. 글을 가르쳐 주면 바로 글을 모두 외웠기 때문에 신숙주가 기특히 여겨서, 이름의 자를 백악에서 재유(纔踰)로 바꾸었다.[『용재집』 권10 「의정부 좌의정 신공 신도비명」]
『해동잡록(海東雜錄)』에는 그의 성품을 알 수 있는 일화 두 가지가 다음과 같이 전한다. 남곤이 예조 판서로 있을 때 조광조 일파가 정국공신(靖國功臣)에게 준 위훈(偉勳)을 삭제하자고 청하였는데, 남곤이 사림파의 공격을 피하기 위하여 능헌관(陵獻官)이 되기를 청하였다. 그 뒤에 정암(靜菴) 조광조가 들어가서 중종을 시종하면서 아뢰기를, “근래 높은 품계에 있는 육경(六卿) 중에서 능헌관을 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신하로서 몸을 아끼는 것이 이와 같으니 나머지는 볼 것도 없습니다.” 하였다. 남곤이 그때 조광조와 같이 시종하다가, 부끄럽고 황송하여 물러나와 정승 신용개의 집을 방문하였다. 신용개가 마침 병으로 휴가 중이어서 누운 방으로 들어오라 하였다. 남곤이 “요즈음 논의는 심히 과격합니다.” 하니, 신용개가 분연히 일어나서, “그대는 어찌 이런 말을 하는가. 과격하다는 말은 소인이 군자를 모함하는 말이니, 중국 후한(後漢)이 그 때문에 망한 것이다.” 하니, 남곤이 계면쩍어서 가버렸다. 또 <갑자사화> 때 연산군이 과거에 윤비를 폐위한 것에 대하여 격노하여 묻기를, “나는 강아지가 자기 어미개를 무는 미친개한테서 어미개를 구출하는 것을 보았는데, 강아지가 망령되서 그렇게 하는 것인가. 아니면, 정이 있어서 그런 것인가. 지금 일을 논의하는 사람들이 이러한 미물의 정(情)도 모르니, 어찌된 일인가.” 하니, 신용개가 이에 설명하는 장문의 글을 지어서 올렸다. [『해동잡록』 권4]
그의 졸기에서 사신들이 그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신용개는 대제학의 벼슬에 오래 있었고, 일찍부터 의정(議政)의 벼슬에 올랐는데, 청망(淸望)에 맞았다. 마음이 간사하지 않고 너그러우면서도 솔직하여 대절(大節)을 지키고 세목(細目)을 따지지 않았는데, 집에 있어서나 나라에 벼슬하거나 안팎이 한결같았다. 묘당(廟堂)에서 국사를 의논할 때에는 큰 문제만을 거론하고 작은 문제는 따지지 않았으며, 경연에서 강론을 할 때에는 중론(衆論)이 혼잡하게 나오면 신용개가 혼자 대의(大義)를 들어서 한 마디로 결단하였다. 평생에 명예나 칭찬에는 별로 얽매이지 않았으므로 성색(聲色)을 좋아하는 버릇이 자못 있었으나 남들이 이를 흠잡지 않아서 여러 사람들의 평가가 저절로 높아졌다. 남과 시비하고 인물을 헐뜯기를 좋아하지 않았고, 또 기능(技能)을 가지고 남을 깔보지 않았으며, 오직 술을 좋아하고 방일(放逸)하였으며, 재물에는 담박하였다. 명문 세가(名門世家)로서 지위와 권세가 지극하였는데도 집에는 잡된 손님이 없었으니, 그 소간(疏簡)하기가 이와 같았다. 병이 바야흐로 위급할 때에도 주상이 내관(內官)을 보내어 문병하면, 주변의 부축을 받아서 자리에서 일어나서 조정(朝廷)에 있을 때와 같이 예배(禮拜)하였으니, 그가 삼가는 것도 이와 같았다. 나라에 재상(宰相)이 있는 것은 마치 집이 기둥이나 주춧돌에 의지하는 것과 같아서 안위(安危)가 여기에 달려 있으니, 제 몸을 돌보지 않고 곧은 말을 하며 대절(大節)에 임하여 절개를 빼앗을 수 없는 사람이 아니면, 구차하게 그 지위에 있더라도 마침내 사람들의 비방을 면할 수 없다. 신용개는 평생 마음을 쓰는 것이 대장부의 도량이 있는 듯하고 그 문장에도 칭찬할 만한 데가 있었으므로 청요(淸要)의 벼슬을 두루 거쳤으나, 비난하는 사람이 없었다. 다만 궁구(窮究)하고 실천하는 학문이 부족하였으므로, 대신이 되어 사기(事機)를 제때에 잘 처리하지 못하고, 도리어 자신을 위한 계책으로 삼았다. 신용개는 속안에 불평스런 생각이 있으면 술을 취하도록 마셔서, 혹은 정신을 잃고 들것에 거꾸로 실려서 가기도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헐후(歇後)한 재상’ 이라고는 일컬었으나, 그 말 속에 반드시 무슨 비난하는 뜻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중종실록』 중종 14년 10월 3일 「신용개 졸기」]
『기묘록 별집(己卯錄別集)』에서는 다음과 같이 신용개에 관한 기록이 있다. 신용개는 영걸(英傑)스럽고 남보다 뛰어난 기상이 있어서, 젊었을 때부터 재주와 명망이 높았다. 또 성품이 너그럽고 작은 것에 얽매이지 않아서, 남과 한계를 긋지 않았으므로, 선비들과 친숙하게 지냈다. 그러나 일을 당하면 쉽게 판단하여 깊이 생각하지 않고, 마음 내키는 대로 말을 하므로, 일을 계획하는 데에 삼가지 않았는데, 이러한 점이 그가 조정으로부터 일찍이 중하게 쓰임을 받지 못하게 된 까닭이었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 동편에 금촌리(金村里)에 있는데, 용재(容齋) 이행(李荇)이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용재집(容齋集)』 권10 「의정부 좌의정 신공 신도비명(議政府左議政 申公神道碑銘)」]
부인 밀양 박씨(密陽朴氏)는 밀원 부원군(密原府院君) 박건(朴楗)의 딸인데, 자녀는 2남 2녀를 두었다. 장남 신종(申淙)은 참봉(參奉)이었으나 일찍 죽었다. 차남 신한(申瀚)은 개성부 경력(開城府經歷)을 지냈다. 장녀는 읍취헌(挹翠軒) 박은(朴誾)에게 시집갔는데 <갑자사화> 때 화(禍)를 당하였다. 차녀는 예빈시禮賓寺) 별좌(別坐) 김응청(金應淸)에게 시집갔는데 일찍 죽었다. 측실(側室)에게서 6남을 두었는데, 신청(申淸) · 신린(申潾) · 신심(申沈) · 신원(申源) 등이다.[『용재집』 권10 「의정부 좌의정 신공 신도비명」]
읍취헌 박은은 경상도 고령 출신으로 문장에 뛰어났으므로, 15세 때 대제학 신용개가 그를 사위로 삼았는데, 맏딸과 동갑이었다. 18세 때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과 수찬을 역임하였으나, 23세 때 유자광(柳子光)을 공격하다가, 파직당하여 어렵게 살던 중에, 25세 때 부인 신씨가 죽고, 이듬해 <갑자사화>가 일어나서 죽었는데, 그때 나이가 26세였다. 그 뒤에 승정원 도승지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