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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91년(선조 24)∼1663년(현종 4) = 73세.] 조선 중기 광해군~효종 때의 문신이자 선조의 부마(駙馬).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도총관(都摠管)을 지냈고, 시호는 효정(孝靖)이다. 자(字)는 자룡(子龍)이고, 호는 소한당(素閒堂)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현감(縣監)유열(柳悅)이고, 어머니 전의 이씨(全義李氏)는 첨지(僉知) 이위(李韡)의 딸이다. 영의정 전양부원군(全陽府院君) 유영경(柳永慶)의 손자이고, 사헌부(司憲府)헌납(獻納) 유성(柳惺)의 5촌 조카이다. 전주 유씨(全州柳氏)는 시조를 달리하는 유혼파(柳渾派) · 유습파(柳濕派) · 유지파(柳池派) 3파가 있는데, 유정량은 시조 유습의 11대손이다
[선조 · 광해군 활동]
1604년(선조 37) 나이 14세 때에 선발되어 선조의 딸인 정휘옹주(貞徽翁主)와 혼인하였고, 전창위(全昌尉)에 봉해졌다.『동주집(東州集)』 문집(文集) 권10 「전창군 유공 묘갈명(全昌君柳公墓碣銘)」, 『선조실록(宣祖實錄)』 선조 37년 9월 12일] 그때 할아버지 유영경이 영의정이 되어, 선조의 신임을 받았는데, 선조는 왕가의 안전을 위하여 유력한 신하들과 혼인 관계를 맺었다. 선조는 14남 11녀의 자녀를 두었는데, 정휘옹주는 제 6왕녀였고, 어머니는 김인빈(金仁嬪)이었다. 김인빈은 선조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아서, 4남 5녀를 낳았는데, 셋째 아들 원종(元宗)은 좌찬성 구사맹(具思孟)의 딸과 혼인하여 인조(仁祖)를 낳았다. 세째딸 정숙옹주(貞淑翁主)는 대장군 신립(申砬)의 아들 신익성(申翊聖)과 혼인하였고, 그 막내딸 정휘옹주는 영의정 유영경의 손자 유정량과 혼인하였다. 유정량과 정휘옹주의 혼인은 이른바 정략적 결혼이었으므로, 당파 싸움에 휘말려서 우여곡절을 겪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선조는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날 때까지 왕세자를 책립하지 않았는데, 김공빈(金恭嬪)이 낳은 제 1왕자 임해군(臨海君)이 광폭(狂暴)하였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중에 제 2왕자 광해군(光海君)을 갑자기 세자로 책봉하였는데, 왕조의 안전을 위하여 분조(分朝)를 설치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선조가 김제남(金悌男)의 딸 인목왕후(仁穆王后)를 계비(繼妃)로 맞아서, 1606년(선조 39) 적자(嫡子)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얻자, 선조는 광해군을 폐위하고 영창대군을 세자로 세우고자 하였다. 그때 정권을 잡고 있던 북인(北人) 중에서 대북(大北)의 정인홍(鄭仁弘) · 이이첨(李爾瞻) 등은 광해군의 폐위를 반대하였고, 소북(小北)의 유영경 · 남이공(南以恭) 등은 영창대군의 세자 책립을 찬성하였다. 그러나 선조가 미쳐 왕세자를 바꾸지 못하고, 1608년 2월 갑자기 돌아갔는데, 선조는 운명할 때 영의정 유영경 등 7명의 가까운 신하를 불러서 어린 아들 영창대군을 부탁하였다. 이들이 이른바 선조의 유언을 부탁받은 ‘유교 7신(遺敎七臣)’이다.
1608년(선조 41) 광해군이 즉위하자, 정권을 잡은 대북의 이이첨 · 정인홍 등은 소북의 영수 유영경을 비롯하여 ‘유교 7신’을 숙청하였다. 이때 유영경은 함경도 경흥(慶興)에 유배되었다가, 그 아들 유열 5형제와 함께 죽음을 당하였다. 당시 나이 18세의 유정량은 부마라고 하여 겨우 죽음을 면하여 남부(南部) 성명방(誠明坊)에 있는 집에서 칩거하였다. 이 집은 아버지 유열의 외4촌 승지 황시(黃是)가 전쟁 이후에 특별히 마련해 준 집이었다. 그러나 이이첨 등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영창대군을 죽이려고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癸丑獄事)>를 일으켜서 영창대군의 외조부 김제남을 죽였다. 그리고 죽은 유영경의 무덤을 파헤쳐서 그 시신을 도성(都城)에서 능지처참(陵遲處斬)하고, 그 나누어진 시체를 각각 전국에 순회시켰다.[『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광해군 4년 6월 25일] 유정량은 유영경의 죄에 연좌되어 전라도 고부(古阜)에 유배되었다.[『광해군일기』 광해군 4년 7월 20일] 유영경이 평소 살던 동부(東部) 숭교방(崇敎坊)의 집을 헐고 연못을 팠는데, 유정량과 정휘옹주가 살던 남부 성명방의 집은 문서상 아직 황시의 집으로 남아 있었으므로, 정휘옹주가 시할머니와 시어머니 등 남은 시집 식구를 정성껏 모시고 그대로 머물러 살았다.[『광해군일기』 광해군 4년 7월 1일]
당시 나이 22세의 유정량은 전라도 고부의 토담집에 갇혀서 하늘을 쳐다보지 않고, 항상 눈물을 많이 흘려서 시력을 거의 잃을 뻔하였다. 1619년(광해군 11) 유정량의 유배지를 경상도 양산군(梁山郡) 기장(機張)으로 옮겼는데. 당시 호남 지방에서 장차 역적들의 변란이 일어날 것이라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이다.[『광해군일기』 광해군 11년 5월 17일] 이리하여 유정량은 광해군 시대 10년 동안 귀양살이 하였는데, 전라도 고부에서 6년, 경상도 양산에서 4년을 보냈다.
[인조 · 효종 시대 활동]
1623년 3월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자, 즉시 소환되어 관작(官爵)이 회복되었다. 선대(先代)의 훈공을 그대로 승습하여 전창군(全昌君)에 봉해지고,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겸임하였다.[『동주집』 문집 권10 「전창군 유공 묘갈명」] 정휘옹주의 어머니 김인빈이 그의 손자 인조에게 즉일로 역마를 보내어 유정량을 서울로 데려올 것을 간절히 부탁하였기 때문이다. 인조 시대 유정량은 정휘옹주와 행복하게 살면서 부마로서 품위를 지키려고 노력하였다. 관직에 나아가지 못하고 사사로이 자기 집안의 일을 가지고 가끔 물의를 일으켜서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았으나, 인조가 끝까지 비호하여 주었다.
1624년(인조 2) 10월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전창군 유정량이 자기 빚을 받아내려고 하다가, 외방 사람을 타살하였습니다. 잡아다가 국문하여 정죄(定罪)하소서.” 하니, 인조가 처음에는 파직하고 체포하여 심문하도록 명하였다가, 얼마 되지 않아서 의빈(儀賓)이라고 하여 특별히 보석으로 석방할 것을 명하였다. 이때 승정원과 사헌부에서도 타당치 못하다고 그 죄를 논하여 아뢰었으나 인조가 따르지 않았다. 1625년(인조 3) 종1품하 숭덕대부(崇德大夫)로 승품(陞品)되었고[『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인조 3년 2월 4일] 1628년(인조 6) 정1품하 숭록대부(崇祿大夫)로 승품되었다.(『인조실록(仁祖實錄)』 인조 6년 9월 26일]
1632년(인조 10) 전창군 유정량이 남의 딸을 강탈하여 첩으로 삼았는데, 사간원(司諫院)에서 관작을 삭탈할 것을 청하니, 인조가 단지 먼저 파직시키고 나중에 추고하라고 명하였다.[『인조실록』 인조 10년 12월 25일] 1633년(인조 11) 의금부에서 아뢰기를, “유정량의 죄상을 율문에서 상고하니, 강간한 자는 교형(絞刑)에 해당합니다.” 하니, 인조가 사형을 감하여 조율하도록 명하였다.[『승정원일기』 인조 11년 3월 1일] 이리하여 유정량은 한 동안 파직되어 벼슬하지 않고 칩거하였다.
1646년(인조 24) 유정량은 사은사(謝恩使)에 임명되어, 청(淸)나라의 새로 옮긴 서울 연경(燕京) 곧 북경에 가서, 청나라의 순치제(順治帝)와 섭정왕(攝政王) 도르곤에게 사은(謝恩)하였다. 그때 중국 강남(江南) 지방에서 명(明)나라 반항 세력을 진압하는 데에 청나라의 군대와 식량을 운반하는 선박을 조선에서 차출하지 않고 면제해 준 것과 청나라 섭정왕 도르곤이 명나라를 위하여 싸우다가 포로가 된 의주부윤(義州府尹) 임경업(林慶業)을 그 전해에 석방하여 돌려보내 준 것에 대하여 청나라에 사례하였다.[『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별집 권5]
효종 시대 그는 청나라 연경에 사신으로 오가면서 중국에서 보고 듣고 한 사실을 효종에게 자세히 보고하였다. 1651년(효종 2) 진향사(進香使)가 되고, 1655년(효종 6) 사은사가 되고, 1658년(효종 9) 사은사가 되어, 각각 청나라 연경에 다녀왔다.[『효종실록(孝宗實錄)』 효종 2년 1월 21일 · 3월 2일, 효종 6년 1월 15일 · 4월 12일, 효종 9년 8월 14일] 1651년 3월 진향사로 연경으로 가다가, 도중에 중국 우가장(牛家庄)에 당도하여 섭정왕(攝政王) 도르곤이 역모를 일으킨다는 소문을 듣고 급히 알려왔다.[『효종실록』 효종 2년 3월 2일] 이처럼 그는 사신으로 왕래하면서 청나라의 사정을 효종에게 즉시 보고하여, 효종의 북벌(北伐) 사업을 도왔다.
유정량은 원래 몸이 강건(剛健)하여 병이 없었는데, 만년에 종기를 앓으면서 몸이 파리해져서, 집에 칩거한 지 13년 만에 1663년(현종 4) 4월 돌아가니, 향년이 73세였다.[『동주집』 문집 권10 「전창군 유공 묘갈명」]
[성품과 일화]
유정량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바라보면 엄하게 생겼으나 가까이 가면 온화한 사람이었다. 기국이 중후하고 도량이 컸으며, 지혜가 깊고 생각이 주도면밀하였다. 도승지 이민구(李敏求)는 그의 묘갈명(墓碣銘)에서, “부마(駙馬)는 관직에 나아갈 수 없었는데, 그가 만약 벼슬에 나아갈 수 있었더라면, 삼공(三公)의 지위에 올라서, 반드시 나라를 위하여 큰일을 하였을 것이다.” 하였다.[『동주집』 문집 권10 「전창군 유공 묘갈명」]
유정량은 벼슬길에 나아가서 자신의 기량을 발휘할 수가 없자, 자기 집안에서 능력을 발휘하여 상당히 짜임새가 있는 씨족 사업을 추진하였다. 집안의 잘 사는 사람들에게 의곡(義穀)을 거두어서 집안의 가난하게 사는 내외의 친족들을 도와주었는데, 매달마다 일정한 곡식을 나누어주었으므로, 가난한 친족들은 모두 이 곡식에 의지하여 생계를 꾸려갔다.[『동주집』 문집 권10 「전창군 유공 묘갈명」] 유정량은 돈을 만드는 데에도 남다른 재능이 있어서, 물건의 비싸고 헐한 시세를 미리 알아보는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집 하인들에게 지시하여 값이 쌀 때 물건을 사서 창고에 재어두었다가, 값이 비쌀 때 내다 팔게 해서 큰 이익을 남겼다. 이리하여 쌀과 베를 저축하여 두었다가 친족 가운데 궁핍한 자를 구제하였는데, 매달마다 식량을 공급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친족의 혼인과 상사(喪事)에도 그 비용을 도와주었다. 그리하여, 친척 중에서 그의 덕으로 끼니를 잇는 자가 거의 70여 호나 되었다. 유정량은 그 이익을 도모하는 것이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으나, 그를 비방하는 사람들은 그가 재물을 탐하여 빚을 독촉하다가 사람을 죽였다고 욕하였다.[『연려실기술』] 그의 형제자매 가운데 배씨(裴氏)에게 출가한 서출 누이가 있었는데, 자식은 많고 집안이 가난하여 몹시 고생하였으므로 전지(田地)와 가산(家産)을 마련해 주었다. 또 아비가 없는 5촌 조카딸을 데려다가 자기 자식처럼 키워서 출가시켰다.[『동주집』 문집 권10 「전창군 유공 묘갈명」]
우리나라의 담배는 <임진왜란> 이후에 처음으로 전파되었는데, 17세기 초기에 우리나라에 널리 퍼져서, 남녀노소 구분 없이 누구나 장죽(長竹)의 담뱃대를 물고 담배를 피웠다. 젊었을 때 정휘옹주도 장죽을 물고 줄곧 담배를 피웠으므로, 유정량은 담배 연기에 아이들이 기침을 하는 것을 보고, 옹주에게 담배를 피우지 말라고 핀잔을 주었다. 부마는 공주나 옹주와 혼인하면, 함부로 말을 할 수도 없었고, 또 무례한 행동을 할 수 없었다. 화가 난 옹주는 대궐로 들어가서, 아버지 선조에게 부마가 불경한 말을 하였다고 하소연하였다. 선조는 당장 부마 유정량을 대궐로 불러 들였다. 유정량은 봇짐에다 짚신 두 죽을 꿰어차고 궁중으로 들어갔다. 선조가 유정량의 봇짐과 짚신을 보고 그 까닭을 물으니, 유정량이 대답하기를 “신은 이미 불경한 말을 옹주에게 하였으니, 유배를 면하기 어렵게 되었으므로, 그 준비를 하고 왔습니다.”라고 하였다. 선조가 묻기를, “귀양 가는 사람이 짚신 한 죽이면 족할 터인데, 두죽은 무엇에 쓰려고 하는고?” 하니, 유정량이 대답하기를, “여필종부(女必從夫)라고 하였으니, 옹주와 함께 떠나려고 합니다.” 하자, 선조는 박장대소(拍掌大笑)하고, 오히려 옹주를 나무라고 유정량을 따라서 사위집으로 돌아기도록 명하였다.
유정량은 성격이 활달하고 무사(武士)다워서, 평소 말타기를 좋아하였다. 어릴 때부터 그가 즐겨 타고 다니던 표동(飇動)이라는 말이 있었는데, 그가 18세 때 조부 유영경이 참화를 당하여, 전가족이 모두 죽음을 당하고, 유정량은 부마이기 때문에 겨우 목숨을 부지하여 전라도 고부로 유배되었다가, 경상도 양산군 기장으로 옮겨서 귀양살이를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표동이가 서울에서 경상도 양산의 기장 앞바다까지 주인을 찾아왔다. 참화를 당할 때 역적 유영경의 살던 집을 파헤쳐서 연못으로 만들었는데, 그때 포졸들이 표동이를 관마(官馬)로 압수하여 끌고 갔었다. 주인을 그리워하던 표동이가 관청의 마굿간에서 몰래 뛰어나와, 주인을 찾아서 경상도 양산군 기장까지 무려 6백여 리 길을 달려 온 것이다. 유정량은 애마 표동을 만나서 같이 바닷가를 내달리면서 고달픈 귀양살이를 견뎠다. 1623년 3월 12일 아침에 표동이 갑자기 두 앞발굽을 모아서 하늘로 치켜세우고 갈기를 휘날리면서 힘차게 울었는데, 바로 그날 서울에서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났다. 이튿날 기장의 역졸이 찾아와서, 빨리 서울로 돌아오라는 인조의 어명을 전달하였다. 유정량과 표동은 유배지에서 풀려나서 서울로 돌아와서, 유정량은 항상 애마 표동을 타고 다녔다. 표동은 40여 년 동안 주인을 모시다가, 유정량보다 먼저 죽었다. 유정량은 애마 표동을 후하게 장사지내고, 그 무덤을 ‘용마총(龍馬塚)’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묘소와 후손]
시호(諡號)는 효정(孝靖)이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 도봉산(道峯山)에 있었는데, 그보다 10년 먼저 세상을 떠난 부인 정휘옹주가 묻힌 무덤에 합장되었다. 동주(東州) 이민구(李敏求)가 지은 묘갈명이 남아 있다.[『동주집(東州集)』 문집(文集) 권10 「전창군 유공 묘갈명(全昌君柳公墓碣銘)」] 1979년 그의 후손들이 경기도 남양주군 별내면 덕송리로 이장하였다.
부인 정휘옹주는 선조의 제 6왕녀인데, 김인빈(金仁嬪)의 소생 4남 5녀 중에서 막내딸이다. 자녀는 2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 유심(柳淰)은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 참판을 지냈고, 차남 유흡(柳潝)은 진사(進士)로서 군수(郡守)를 지냈으며, 장녀는 진사(進士) 이중규(李重揆)에게 출가하고, 차녀는 학유(學諭) 정화제(鄭華齊)에게 출가하였다.[『동주집』 문집 권10 「전창군 유공 묘갈명」] 손자 유이복(柳以復)은 문과에 급제하여, 관찰사를 지냈고, 증손자 유술(柳述)은 문과에 급제하여, 참의(參議)를 지냈고, 증손자 유운(柳運)은 문과에 급제하여, 세자시강원 문학(文學)을 지냈다.[『전주 유씨 족보(全州柳氏族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