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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50년(명종 5)∼1608년(광해군 즉위) = 59세.] 조선 중기 선조~광해군 때의 문신. 영의정(領議政)을 지냈고, 전양부원군(全陽府院君)에 봉해졌다. 소북(小北)의 영수로서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대북(大北)에 의하여 참화를 당하였다. 자는 선여(善餘)이고, 호는 춘호(春湖)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참봉(參奉)유의(柳儀)이고, 어머니 교하 노씨(交河盧氏)는 노첨(盧僉)의 딸이다. 노첨은 우찬성(右贊成) 노공필(盧公弼)의 손자이다. 이조 참판(參判)유세린(柳世獜)의 손자이고, 예조 참판 유영길(柳永吉)의 동생이다. 전주 유씨(全州柳氏)는 시조를 달리하는 유혼파(柳渾派) · 유습파(柳濕派) · 유지파(柳池派) 3파가 있는데, 유영경은 시조 유습의 9대손이다.
[선조 시대 활동]
1572년(선조 5) 춘당대시(春塘臺試)에서 15명을 뽑을 때 10등으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23세였다.[『방목』] 춘당대시는 이때 처음으로 시행되었는데, 창경궁 춘당대에서 보이던 정시(庭試)의 하나이다.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에 보임되었다가, 여러 참하관(參下官)을 거쳐, 성균관(成均館)전적(典籍)이 되었다. 1580년(선조 13) 의정부에서 홍문록(弘文錄)을 선록(選錄)할 때, 유영경을 비롯하여 한효순(韓孝純) · 홍여순(洪汝諄) · 이항복(李恒福) · 이정암(李廷馣) 등 17인이 뽑혔다. 그 뒤에 그는 대간(臺諫)의 정언(正言) · 감찰(監察)로서 활동하다가, 1583년(선조 16) 서장관(書狀官)에 임명되어, 명(明)나라 북경(北京)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그는 동인(東人)의 언관(言官)으로 활동하다가, 서인(西人)에 의하여 함경도 고산 찰방(高山察訪)으로 좌천되었다. 안변(安邊)의 고산역(高山驛)은 함경도 북로(北路)의 6진(六鎭)으로 가는 출발 지점인데, 역마(驛馬)와 역졸(驛卒)이 매우 피폐하였으므로, 유영경은 새로운 법규를 만들어 이를 개선하였다.[「유영경 유사(柳永慶遺事)」]
1588년(선조 21) 8도(道)에 암행어사(暗行御史)를 보내어 민정(民情)을 살필 때 유영경은 한효순 · 우성전(禹性傳) 등과 함께 차출되었는데[『선조실록(宣祖實錄)』 선조 21년 7월 5일], 그는 암행어사로서 함경도의 민정을 염찰(廉察)하고 돌아와서 보고하였다. 1589년(선조 22) 의정부(議政府)에서 홍문록을 선록할 때, 유영경을 비롯하여 한준겸(韓俊謙) · 윤승훈(尹承勳) · 정경세(鄭經世) 등 9명이 뽑혔다.[『선조실록』 선조 22년 4월 4일] 홍문록은 의정부에서 당대의 훌륭한 학식과 인품을 갖춘 젊은 인재를 추천 받아서 엄선하여 기록하기 때문에 대개 한번만 선록되더라도 큰 영광인데, 유영경은 두 번이나 홍문록에 선록된 것을 보면, 그가 당대에 얼마나 뛰어난 인재였던가를 알 수 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서북 지역으로 피난 가는 선조를 따라서 가다가, 도중에 사간원(司諫院)사간(司諫)에 임명되었다. 또 초유어사(招諭御史)에 임명되어 황해도에서 의병(義兵)을 모집하고 왜군과 싸워 6백여 명을 섬멸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그 공으로 호조 참의에 임명되었다가, 곧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다. 1592년 12월 명나라 동정제독(東征提督) 이여송(李如松)이 원병 4만여 명을 거느리고 들어오자, 조선에서는 명나라 군사들에게 군량미를 공급해야 했다. 이에 1593년(선조 26) 승지 유영경을 황해도 순찰사(黃海道巡察使)에 임명하여 조도 어사(調度御使)들과 함께 황해도에서 군량미를 확보하여 명나라 군사들에게 공급하도록 하였다. 순찰사 유영경이 군량미를 수집하여 수송하는 일을 차질 없이 수행하자, 선조가 그를 신임하여 황해도 관찰사로 임명하였다.[『선조실록』 선조 25년 7월 17일 · 7월 24일] 유영경이 명나라 군사에게 군량미를 조달하는 데에 큰 공적을 세운 것은 그가 재상의 반열에 오르는 계기가 되었다.
1594년(선조 27) 사간원에서 황해도 관찰사 유영경은 나라가 어려운 때에 손님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주전(廚傳)이 사치스럽고, 또 가족을 도내(道內)에 데리고 있으면서 폐단을 끼치는 일이 많다고 탄핵하여, 유영경은 황해도 관찰사에서 파직되었다.[『선조실록』 선조 27년 1월 6일 · 2월 7일] 평안도 의주(義州)로 피난갔던 선조가 그해 10월 서울로 환도하자, 1595년(선조 28) 유영경은 형조 참판에 임명되었다가, 1596년(선조 29) 5월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
그 동안 명나라 심유경(沈惟敬)과 일본의 고니시 유키나카[小西行長] 사이에 강화(講和) 회담이 진행되어, 전쟁은 소강상태에 있었다. 1597년(선조 30) 1월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자, 그해 6월 명나라 총독(總督) 형개(刑玠)와 경리(經理) 양호(楊鎬)가 10만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들어왔다. 이때 유영경은 호군(護軍)으로 있다가, 명나라 군사들에게 군량미를 공급하는 양향사(糧餉使)의 일을 다시 맡게 되었다. 조정에서 양향사를 3로(三路)로 나누어 보내어 경상도와 전라도에서 각각 군량미를 수집하게 하고, ‘남정 양향사(南征糧餉使)’라고 일컬었다. 유영경은 중영(中營)을 맡아서 경상좌도에서 군량미를 조달하였다. 그때 사헌부에서 유영경이 국가의 위급함은 생각하지 않고 먼저 자기 가족들을 피난시켰다고 탄핵을 하였다. 그러나 유영경은 양향사로 그대로 머물면서 경상좌도에서 군량미를 최대한 모아서 울산의 도산성(島山城)에 집결한 명나라 군사에게 신속하게 보내니, 명나라 장수들이 크게 그를 칭찬하였다.[「유영경 유사」]
그 공으로 1598년(선조 31) 병조 판서에 임명되었는데, 유영경이 일을 추진하는 역량이 있었으므로, 선조는 왜란의 마무리 작업을 그에게 맡겼다. 관군과 의병들이 명나라 원군과 힘을 합쳐서 울산의 도산성에 주둔한 왜군을 공격하여 공방전이 격화되었다. 그때 일본의 도요토미가 죽고 왜군이 모두 철수하자, 7년 동안의 전쟁이 끝났다. 그해 12월 유영경은 전라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는데, 마침 이조 판서의 후보자를 물색 중이었으므로 좌의정(左議政)윤두수(尹斗壽)과 우의정(右議政) 이항복이 그를 천거하였다. 그러나 대북의 정인홍(鄭仁弘) 일파가 반대하여 대북의 이기(李墍)가 이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1601년(선조 34) 3월 유영경이 형조 판서로 있을 때, 그가 형조의 당상관들에게 신속하게 판결하도록 독려하니, 감옥 안에 많았던 죄수가 없어져서 감옥이 거의 텅텅 비게 되었다고 한다.[「유영경 유사」] 1602년(선조 35) 2월 이조 판서에 임명되자, 소북과 대북의 인사들뿐만 아니라 남인(南人)과 서인의 인사들도 골고루 등용하였다. 이때부터 유영경이 선조의 신임을 받아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니, 소북 일파가 정권을 잡은 시대가 7년 동안 계속되었다. 그해 3월 의정부 우의정으로 승진되었다가, 1604년(선조 37) 5월 좌의정이 되었다.[『선조실록』 선조 37년 5월 22일] 그해 6월 <임진왜란> 때 의주까지 선조의 어가(御駕)를 모셨다고 하여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봉되었고, 전양부원군(全陽府院君)에 봉해졌다. 1604년(선조 37) 12월 남인 윤승훈의 뒤를 이어 영의정이 되었는데[『선조실록』 선조 37년 12월 6일], 선조 말기 소북의 정권을 이끌면서 전후의 복구와 민생의 안정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1604년(선조 37)년 2월 선조의 계비(繼妃) 인목왕후(仁穆王后) 김씨가 적자(嫡子) 영창대군(永昌大君) 이의(李㼁)를 낳았는데, 그때 선조는 53세였고, 인목왕후는 겨우 21세였다. 선조는 늦은 나이에 얻은 막내아들 영창대군을 왕세자로 삼고자 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이미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였기 때문에 선조는 섣불리 세자를 바꾸겠다는 말을 꺼내지 못하였다. 그때 유영경의 손자 유정량(柳廷亮)이 선조의 부마로서 궁중을 출입하면서 선조가 세자를 바꾸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알자, 영의정 유영경은 적통론(嫡統論)을 주장하면서 공개적으로 적자(嫡子) 영창대군을 세자로 추대하는 운동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대북의 정인홍은 이에 반대하고 세자 광해군이 <임진왜란> 때 분조(分朝)를 이끌면서 나라에 크게 이바지하였다고 하면서 세자 광해군을 적극적으로 옹호하였다. 그때부터 소북의 영수 유영경과 대북의 영수 정인홍은 두 사람의 운명을 건 당파 싸움을 전개하였다.
1606년(선조 39) 6월 선조의 왕위 즉위 40주년 행사를 성대히 거행하였는데, 영의정 유영경은 백관들을 거느리고 선조에게 하례를 드리고, 이를 축하하는 증광시(增廣試)를 시행하였다.[『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18 「유영경전」] 이때 대북의 정인홍과 이이첨(李爾瞻)은 영의정 유영경이 서둘러 1년을 앞당겨 하례식을 거행한다고 비난하였다. 유영경은 선조의 건강이 갑자기 나빠져서 다음해 왕위 즉위 40주년을 맞이할 때까지 선조가 생존할 수가 없다고 판단하여 1년을 앞당긴 것이다. 영의정 유영경은 약방(藥房) 도제조(都提調)가 되어, 어의(御醫) 허준(許浚) 등과 함께 밤낮 주야로 선조의 곁에서 병환을 구료하였다. 1607년(선조 40) 10월 선조는 자신의 병이 낫지 않자, 광해군에게 ‘대리 청정(대리聽政)’을 하라는 교서(敎書)를 내렸으나, 공표되기도 전에 영의정 유영경의 강력한 만류로 인하여 바로 취소하였다. 그때 낙향해 있던 정인홍은 선조에게 장문의 상소문을 올려서 영의정 유영경을 규탄하고 광해군을 옹호하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평안도 영변(寧邊)에 유배되었다.[『선조실록』 선조 41년 1월 18일 · 1월 26일]
1608년(선조 41) 2월 1일 선조가 찹쌀밥을 먹다가 갑자기 기(氣)가 막혀서 위급한 상태가 되었다. 약방 도제조 유영경과 어의 허준이 황급히 내전으로 들어가서 선조를 진맥하였으나, 소생할 가망성이 없었다. 어의 허준이 극약(劇藥)을 처방하여 선조의 의식이 잠시 돌아오자 영의정 유영경은 내관(內官) 민희건(閔希騫)에게 선조의 모필(毛筆)을 흉내 내어 선조의 유언인 유교(遺敎)를 받아쓰도록 하여 세자 광해군과 왕비 인목왕후에게 내리는 글을 2통 만들었다.[『광해조일기(光海朝日記)』 권1 광해군 즉위년] 이날 오후에 선조가 내전에서 돌아갔는데, 향년이 57세였다. 그때 영창대군은 겨우 나이가 5세 밖에 안 되었으므로, 도저히 왕위를 이을 수가 없었다. 그날 세자 광해군에게 내리는 봉함된 유교를 대신들과 세자가 모인 빈청(賓廳)에서 개봉하였는데, 선조는 세자 광해군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부탁하기를. “내가 살아 있을 때처럼 형제들을 사랑하라.” 하였다.[『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광해군 즉위년 2월 1일] 또 다음날 인목왕후에게 비밀히 유교 1통을 내렸는데, 그 겉봉투에 쓰기를 “유영경 · 한응인(韓應寅) · 박동량(朴東亮) · 서성(徐渻) · 신흠(申欽) · 허성(許筬) · 한준겸 등 제공(諸公)에게 유교한다.”고 하였다. 선조가 인목왕후를 통하여 7인의 최측근에게 영창대군을 부탁하기를, “내가 죽은 뒤에 만일 궁중에 사악한 말이 나오거든, 제공들이 영창대군을 적극 보호하여 목숨을 부지해 주기 바란다.” 하였다. 유영경 등 7인의 신하들이 선조의 유교를 받았으므로, 이들을 ‘유교 7신(遺敎七臣)’이라고 한다.[『광해군일기』 광해군 즉위년 2월 2일, 『계해정사록(癸亥靖社錄)』]
1608년 2월 2일 광해군이 즉위하자, 영의정 유영경은 사직하는 상소를 거듭 올렸다. 귀양을 갔던 정인홍과 이이첨 등이 조정으로 돌아와서, 이른바 ‘유교 7신’ 등 선조의 측근들을 모두 축출하였다.[『미수기언(眉叟記言)』 별집 권25] 그때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합계(合啓)하여 유영경의 관작을 삭탈하고 문외(門外)로 출송(黜送)시킬 것을 청하니, 광해군이 유영경을 함경도 경흥(慶興)으로 정배하였다.[『광해군일기』 광해군 즉위년 3월 18일] 유영경은 두만강변에 있는 경흥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가 9월 1일 자진(自盡)하라는 명이 내려지자[『광해군일기』 광해군 즉위년 9월 1일 · 9월 5일], 9월 16일 경흥부(慶興府)의 유배소에서 사약(賜藥)을 마시고 자진하였는데, 향년이 59세였다.[「유영경 유사」]
[<왜란> 때 명나라 군사의 군량미 조달]
일본의 센고쿠 시대[戰國時代]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30만 명의 군사를 징발하고, “명나라를 치는 길을 빌려달라[征明假道]”는 요구를 거절한 조선을 정벌하기 위하여 선봉대 9부대 15만 명을 조선에 보내고, 나머지 군사는 대마도(對馬島)에 주둔시켰다. 1592년(선조 25) 4월 14일 동래의 부산포(釜山浦)를 점령한 다음 동래에서 서울까지 진군하는 길을 3로(三路)로 나누었는데,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제 1군은 중로를,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제 2군은 좌로를,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의 제 3군은 우로를 따라서 빠르게 북상(北上)하여 보름 만에 한강에 육박해 왔다. 선조는, 서울을 사수하자고 주장하는 민중의 눈을 피해서, 그달 4월 29일 그믐날 밤 캄캄한 한밤중에 서울을 빠져나와 서북 지방으로 피난을 떠났다. 대다수 관료들은 임금을 따라가지 못하였으나, 유영경은 다행히 선조를 모시고 피난을 가다가, 그해 5월 중도에서 사간원 사간에 임명되었다.[「유영경 유사」]
이때 민심이 흉흉하여 임금의 수레에 돌팔매질하는 백성들도 있었다. 중추부(中樞府)지사(知事)최흥원(崔興源)이 일찍이 황해도 관찰사로 있을 때 선정(善政)을 베풀어서 민심을 얻었기 때문에 최홍원을 먼저 보내 임금의 피난길을 미리 준비하도록 하였다.[『선조실록』 선조 25년 5월 6일] 또 선조는 유영경을 초유어사에 임명하여, 관찰사 최흥원과 함께 황해도에서 백성들을 초유(招諭)하고 황해도에서 의병을 일으키게 하였다.[『선조실록』 선조 25년 6월 16일, 『연려실기술』 권15] 유영경이 황해도에서 민심을 안정시키고 의병을 모집하여 황해도에 침범하는 왜군을 크게 무찔렀다. 그 공으로 그해 7월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승품(陞品)되고 호조 참의에 임명되었다가,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다.[『선조실록』 선조 25년 7월 10일 · 7월 17일]
1592년 5월 조선에서 중국 명나라에 원병을 요청하였는데, 처음에는 5천 명을 요청하였다가, 나중에는 5만 명으로 증원하여 요구하였다. 명나라는 국력이 쇠퇴하여 조선에 구원병을 보낼 형편이 되지 못하였으나, 병부 상서(兵部尙書) 석성(石星)이 “조선이 망하면 중국의 요동(遼東)이 위험해진다”는 이른바 ‘순망치한(脣亡齒寒)’을 극력 주장하여, 명나라 신종(神宗) 만력제(萬曆帝)가 3차에 걸쳐 대규모 원병을 파견하였다. 명나라의 제 1차 동정군(東征軍)으로 1592년 7월에 요양(遼陽) 부총병(副摠兵) 조승훈(祖承訓)이 요동(遼東) 군사 5천여 명을 이끌고 먼저 도착하였다. 명나라의 제2차 동정군(東征軍)으로 1592년 12월에 동정제독(東征提督) 이여송(李如松)이 만주에 주둔한 4만 2천 명의 대군을 거느리고 들어왔다. 이 틈을 타서 건주좌위(建州左衛) 누르하치가 여진족을 통일하여 후금(後金)을 세우게 된다. 조선 측에서는 명나라 군사들에게 공급할 군량미를 확보하는 일이 큰 문제였다. 그해 7월 비변사(備邊司)에서 아뢰기를, “황해도에서 군량미를 수집하여 수송할 일이 너무나 시급한데, 당상관 중에서 심희수(沈喜壽)는 중국 명나라 장수들을 접대하는 소임을 맡았고, 이곽(李*)은 지금 병중에 있습니다. 동부승지 유영경이 이 일을 감당할 만하니 차견(差遣)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군관 4명도 대동하고 가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선조가 허락하고, 그 직함을 순찰사(巡察使)라고 일컫게 하였다.[『선조실록』 선조 25년 7월 17일] 이리하여 유영경은 황해도 순찰로 전란 중에 군량미를 각 고을의 창고에서 수집하여 평안도로 수송하는 중대한 역할을 맡았다. 유영경은 성품이 엄격하고 주도면밀(周到綿密)할 뿐만 아니라, 일을 맡으면 온갖 궁리를 다하여 위기에 잘 대응하였다. 그리하여 순찰사 유영경이 군량미를 수집하는 일과 수송하는 일을 제때에 차질 없이 수행하자, 선조가 그를 더욱 신임하고[「유영경 유사」] 그 공으로 황해도 관찰사에 임명하였다.[『선조실록』 선조 25년 7월 24일]
1593년(선조 26) 유영경이 황해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조도 어사(調度御使)를 각 고을에 보내어 곡식을 징발하여 명나라 군사들에게 군량미를 제때에 공급해 주자, 명나라 측에서 매우 만족하게 여겼다. 그 공으로 유영경은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품되었다. 그해 9월 사간원과 사헌부에서 관찰사 유영경 등에게 가자(加資)한 것을 취소하도록 계청(啓請)하였으나, 선조가 따르지 않았다.[『선조실록』 선조 26년 9월 12일 · 9월 13일 · 9월 14일] 1594년(선조 27) 1월 사간원에서 아뢰기를, “황해도 감사 유영경은 나라의 일이 어려운 때를 당하여 주전(廚傳)이 너무 사치스럽고, 또 가속(家屬)을 도내(道內)에 데리고 있으면서 폐단을 끼치는 일이 많습니다. 자기 자신은 한 도(道)를 안찰(按察)하는 직임에 있으면서 먼저 스스로 법을 범하고 있으니, 어떻게 한 도(道)를 규찰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고, 관찰사 유영경의 비행을 비난하였다. 여기서 주전은 손님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것이고, 가속은 가족을 뜻한다.[『선조실록』 선조 27년 1월 6일] 그해 4월 사간원에서 또 아뢰기를, “황해도 감사 유영경은 중국의 명나라 군사들이 나온다고 핑계하고, 각 고을의 창고 곡식을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지 못하게 하였기 때문에, 수령들이 감히 손을 쓸 수가 없어서, 농민들이 밭을 갈고 씨를 뿌리는 시기를 놓치게 되어서, 온 도의 백성들이 말할 수 없이 원망하고 있으니, 그를 잡아다가 추고하소서.”라고 하니, 선조가 그대로 따랐다.[『선조실록』 선조 27년 4월 17일] 이리하여 유영경은 황해도 관찰사에서 파직되어, 가족과 함께 피난하였다가, 서울로 돌아왔다.
선조는 평안도 의주로 피난하면서, 제 2왕자 광해군을 세자(世子)로 책봉하여 전주(全州)로 보내서 분조(分朝)를 세우고 임시로 국정을 맡아서 처리하게 하고, 제 1왕자 임해군(臨海君) 등 왕자들을 각 도에 나누어 보내어 근왕병(勤王兵)을 모집하게 하였다. 또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서 관군과 함께 왜군을 격퇴하고, 명나라 이여송(李如松)의 원병이 조선의 관군과 힘을 합쳐서 평양성(平壤城)을 공격하여 수복하자, 왜군이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1594년(선조 27) 10월 선조는 서울로 돌아왔는데, 1년 반 만에 나라가 조금 안정되었다. 1595년(선조 28) 6월 유영경은 형조 참판에 임명되었다가, 1596년(선조 29) 5월 대사간이 되었다. 그 동안 명나라 심유경(沈惟敬)과 일본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사이에 강화 회담(講和會談)이 진행되어, 전쟁은 소강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1596년(선조 29) 9월 일본의 관백(關伯)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강화 회담의 결과에 크게 실망하여, 1597년(선조 30) 1월 다시 14만 명의 왜군을 조선에 파병하여 전쟁이 일어났는데, 이것이 <정유재란>이다.
<정유재란> 때 전쟁 상황이 위급해지자, 조선은 다시 명나라에 원병을 요청하였다. 1597년 6월 명나라는 제 3차 동정군(東征軍)을 파견하였는데, 총독(總督) 형개(刑玠)와 경리(經理) 양호(楊鎬)가 10만 명 정도의 군사를 이끌고 들어왔다. 명나라 측에서 <임진왜란> 때에는 만주에 주둔한 요동의 군사를 주로 보냈으나, <정유재란> 때에는 중국 강남과 버마 · 타이 등지의 수전(水戰)에 경험이 풍부한 남방 군사들을 보냈다.[『연려실기술』 권15] 그 뒤에 명나라의 수사제독(水使提督) 진린(陳璘)이 수군(水軍) 5천명을 별도로 이끌고 들어와서 3도 수군 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 이순신(李舜臣) 진영에 합세하여, 1598년 11월 이순신이 본국으로 철수하는 왜군을 맞이하여 노량(露梁)에서 대첩(大捷)을 거두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다.
1597년(선조 30) 7월 유영경은 호군(護軍)으로 있다가, 명나라 군사들에게 군량미를 공급하는 양향사(糧餉使)의 일을 다시 맡게 되었다. 처음에 조정에서 양향사를 삼로(三路)로 나누어 보내어 경상도와 전라도에서 각각 군량미를 수집하여 수송하는 일을 관장하게 하였다. 유영경은 중영(中營)을 맡아서 경상좌도에서, 윤승훈은 좌영(左營)을 맡아서 전라도에서, 성영(成泳)은 우영(右營)을 맡아서 경상우도에서 각각 군량미를 조달하였는데, 그 명칭을 ‘남정 양향사(南征糧餉使)’라고 일컬었다. 그런데 그해 8월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호군 유영경, 우윤(右尹)유자신(柳自新), 지평(持平) 장만(張晩) 등은 모두 재상과 시종(侍從)의 신하로서 국가의 위급함은 생각하지 않고 먼저 자기 가속(家屬)들을 피난시켰으니, 추고하여 치죄하소서.” 하니, 선조가 그대로 따랐다.[『선조실록』 선조 30년 8월 16일]
그런데도 유영경은 경상좌도에 머물면서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군량미를 대규모로 모아서 울산의 도산성(島山城)에 집결한 명나라 군영으로 보내니, 명나라 장수들이 크게 기뻐하고 그를 칭찬하였다.[「유영경 유사」] 그 공으로 1598년(선조 31) 1월 병조 판서에 임명되었다가, 그해 2월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다. 명나라 대군(大軍)이 집결한 울산으로 군량미를 신속하게 수송한 공적을 평가하여, 중영의 유영경, 좌영의 윤승훈, 우영의 성영의 순으로 그 등급을 정하고 각각 포상하였다. 삼로의 양향사 중에서 유영경이 경상좌도에서 거둔 곡식의 수량이 가장 많았다. 선조가 이르기를, “윤승훈은 특별히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승진시켰으니 지금 가자(加資)하기가 어렵다. 유영경과 성영에게는 각각 한 자급(資級)씩 올리도록 하라” 하였다.[『선조실록』 선조 31년 2월 29일] 이리하여 유영경은 정2품하 자헌대부로 승품되었고, 이어서 판서와 재상의 반열(班列)에 오르게 되었다.
왜란 7년 동안 명나라는 3차에 걸쳐 대규모의 원군을 보냈으나, 중국에서 육로나 해로를 통하여 조선으로 군량미를 운반하는 것이 불편하였으므로, 은전(銀錢)을 보내어 조선에서 곡물을 사서 먹도록 하였다. 1593년(선조 26) 명나라는 원래 군사 1인에게 하루 군량미를 1.5되[升]씩 지급하였으므로, 조선에 주둔한 명나라 군사에게 월료(月料)를 은화(銀貨)로써 환산하여 3냥(兩) 6전(錢)의 은전(銀錢)을 지급하였는데[『선조실록』 선조 26년 8월 10일], 10만여 명의 명나라 군사들에게 1년간 지급한 은화는 4백 30만 냥 정도였다.중국 『무비지(武備志)』에 의하면, 명나라 경략 형개의 제3차 동정군이 1597년(만력 25)에 출정하여 1600년(만력 28)에 철수할 때까지 약 4년 동안 지출한 은화는 약 8백 만 냥이었다고 한다.[『무비지』 권239 「조선고(朝鮮考)」] 이를 보면, 왜란 7년 동안에 명나라에서 조선으로 유입(流入)된 은화는 적어도 1천만 냥 이상에 이르렀던 것으로 추측된다.[『양조 평양록(兩朝平讓錄)』 권4]
명나라 시대 광주(廣州)의 국제무역을 통하여 서양의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은화가 대량으로 중국에 유입되었는데, 명나라 말엽에 중국에서 유통된 은화의 총량이 1억만 냥 정도였다고 한다. 왜란 때 명나라는 총통화량의 10% 이상에 해당하는 은화를 전쟁비용으로 소모하였기 때문에 명나라는 재정이 궁핍해졌고 결국 농민 반란으로 멸망하게 되었다. 7년 왜란 동안 명나라에서 조선으로 은전이 1천 만 냥 이상 유입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유영경이다. 당시 은화는 본위 화폐로서 돈의 액수와 은의 가격이 같았다. 그러나 조선후기 사회에서 은화가 중국처럼 통화 수단으로 일반화되지 못한 것은 무엇 때문이며, 그 많은 양의 은전이 조선후기 사회가 경제적으로 발전하는 데에 원동력이 되지 못한 것은 무엇 때문인지 등의 문제들은 앞으로 역사학계에서 밝혀야 할 과제의 하나이다.
[소북의 영수 유영경의 적통론(嫡統論)]
1598년(선조 31) 정유왜란의 전쟁이 끝나갈 무렵, 명나라 경략(經略) 정응태(丁應泰)가 조선이 일본과 내통하여 명나라를 공격하려고 한다고 본국 명나라에 무고(誣告)하였다. 북인(北人)의 신진 세력인 김신국(金藎國) · 남이공(南以恭) 등은 영의정 유성룡(柳成龍)이 직접 명나라에 가서 사건의 진상을 해명하지 않는다고 강력히 탄핵하였다. 1598년(선조 31) 12월 선조는 동인(東人) 유성룡의 관직을 삭탈(削奪)하여 추방하고, 북인과 서인(西人)들을 대거 등용하였다. 그때 인사를 총괄하는 이조 판서의 인선을 어렵게 여겨서, 이조에서 아뢰기를, “본조 판서에 의망(擬望)할 사람이 부족하니, 지금 부임하지 않고 있는 감사도 아울러 포함하여 의망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의정부 대신들의 뜻도 또한 이와 같습니다.” 하니, 선조는 교지(敎旨)를 받고도 아직 부임하지 않고 있던 전라도 관찰사 유영경과 경상도 관찰사 한효순에게 현지에 부임하지 말라고 명하였다.[『선조실록』 선조 31년 12월 18일]
그때 의정부의 좌의정 윤두수(尹斗壽)와 우의정 이항복(李恒福)은 북인 중에 온건한 유영경을 이조 판서로 추천하려고 하였다. 유영경은 비록 북인에 속하였으나, 동인의 영수 유성룡과 서인의 거두 윤두수 · 이항복 등을 존경하여 그들의 신임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정국을 주도하던 북인의 실권자 정인홍(鄭仁弘) · 이이첨(李爾瞻) · 홍여순(洪汝諄) 등은 온건파의 유영경을 배척하고 강경파의 이기(李墍)를 추천하여 기어이 이조 판서로 만들었다. 이때부터 유영경과 정인홍의 관계는 정적(政敵) 관계로 발전하게 되었다.
1599년(선조 32) 3월 이조 판서 이기가 자기파의 홍여순을 대사헌으로 추천하자, 이조 정랑 남이공이 동료 김신국 등과 함께 이에 강력히 반대하였다. 그러나 그해 12월 북인의 신진 세력인 김신국 · 남이공은 북인의 중진 이이첨 · 정인홍에 의하여 관직을 삭탈당하고 쫓겨났다. 이때부터 대북 가운데 실권을 잡은 중진파와 신진 세력인 소장파로 나누어졌는데, 중진파를 대북(大北)이라고 부르고, 소장파를 소북(小北)이라고 불렀다. 대북은 이이첨 · 정인홍 · 이경전(李慶全) · 기자헌(奇自獻) · 허균(許筠) · 홍여순 등인데, 이경전은 이산해(李山海)의 아들이다. 소북은 유영경 · 김신국 · 남이공 · 유희분(柳希奮) · 박승종(朴承宗) 등이다. 유영경은 홍문록에 두 번이나 선록(選錄)될 정도로 조야(朝野)의 신임과 사림(士林)의 존경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북인의 신진 세력들이 유영경을 추대하여 소북의 영수로 삼았다. 유희분은 광해군의 처남으로서 처음에 소북파에 속하였으나, 나중에 유영경이 적통론을 주장하고 선조의 적자(嫡子) 영창대군을 옹립하려고 하자, 소북에서 이탈하여 대북과 손을 잡고 광해군이 즉위한 다음에 유영경과 소북 일파를 숙청하는 데에 앞장서게 된다. 서인들은 <인조반정(仁祖反正)>을 일으켜서, 인조 즉위 후에, 대북의 정인홍과 이이첨 등을 모두 극형에 처하게 된다.
원래 북인은 동인이었는데, 선조 때 일어났던 <기축옥사(己丑獄事)>를 일으킨 서인들에 대한 처벌 문제로 갈라지게 되었다.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의 모역 사건>을 심문할 때 서인 정철(鄭澈)과 송익필(宋翼弼) 등이 동인 이발(李潑) · 최영경(崔永慶) 등 1천여 명 이상을 정여립의 반역에 연루시켜서 죽이거나 귀양 보냈는데, 이것을 <기축옥사(己丑獄事)>라고 한다. 민순(閔純)의 제자 이발은 정여립을 이조 정랑[銓郞]에 추천하였다고 하여 심문을 받다가 장살(杖殺)되었는데, 이때 그의 82세의 노모와 8세의 어린 아들도 아울러 죽음을 당하였다. 또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제자 최영경은 수염이 길었기 때문에 정여립의 편지에 나오는 ‘수염이 길고 키가 큰 길삼봉(吉三峯)’이라고 무고를 당하여 극형에 처해졌다. 1591년(선조 24) 좌의정 정철이 세자를 세우는 문제로 선조의 노여움을 사 파직되어 함경도 명천(明川)으로 귀양가게 되면서 서인들이 쫓겨나고 동인들이 정권을 잡았다. 이때 동인들은 <기축옥사>를 잘못 처리한 정철과 서인 일당을 극형에 처벌해야 한다는 강경파와 그 처벌 범위를 최소화하려던 온건파로 나뉘어졌다. 강경파 이산해 · 정인홍 등은 온건파 유성룡 · 김성일(金誠一) · 우성전 등의 태도에 불만을 품고 동인에서 분당하였는데, 이들이 이른바 북인(北人)이다. 동인에 그대로 남은 사람들은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제자 유성룡 · 김성일 · 우성전 등이고, 동인에서 갈라진 북인은 남명 조식의 제자 정인홍 · 김우옹(金宇顒) 등과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의 계열 이산해(李山海) · 이발 등이다.
일찍이 이발이 우성전의 부친상에 문상을 갔다가 우성전의 평양 기생 출신 첩이 머리를 풀고 상주 노릇을 하는 것을 보고 비난하였는데, 나중에 사헌부 장령(掌令)이던 정인홍이 이 일로 우성전을 탄핵하였다. 당시 이발은 북악산 아래에 살고, 우성전은 남산 아래 살아서, 이발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북인이라고 하고, 우성전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남인이라고 불렀다. 처음에 동인이 북인과 남인으로 분당할 때 동인에 남은 사람들을 동인 또는 남인이라고 불렀는데, 나중에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나누어지면서 4색 당파가 이루어지자, 자연스럽게 남인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젊은 시절에 유영경은 동암(東巖) 이발과 함께 공부하면서 활달한 이발을 좋아하여 가깝게 지냈는데, 서인들의 이발 모자를 참혹하게 죽이는 것을 보고 격분하여, 마침내 북인이 되었다. 또 정인홍은 조식의 문하에서 최영경과 함께 동문수학하면서 가깝게 지냈는데, 최영경의 죽음으로 인하여 서인에게 적대 감정을 깊이 품게 되었다. 유영경이 선조 말년에 7년 동안 정권을 잡았는데, 도량이 넓었던 유영경은 소북의 영수로서 남인과 서인들을 포용하였기 때문에 선조는 유영경을 매우 신임하였다. 유영경은 선조보다 두 살 위로, 선조는 죽을 때 유영경에게 어린 영창대군을 부탁하는 유교를 남길 정도로 믿고 의지하였다. 정인홍은 광해군 시대 14년 동안 정권을 잡았는데, 소북의 유영경 일당을 모조리 숙청하였을 뿐만 아니라, <계축옥사(癸丑獄事)>를 일으켜서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아버지인 김제남(金悌男)과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폐위하여 서궁(西宮)에 가두었으며, 이에 반대하는 서인들을 모두 숙청하였다.
원래 유영경과 이발이 가까운 친구였고, 정인홍과 최영경이 서로 동문수학한 절친한 친구였는데, <기축옥사> 때 죽은 이발과 최영경도 서로 둘도 없는 친구 사이였다. 그러므로 유영경 · 이발 · 최영경 · 정인홍은 원래 가까운 친구 사이였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모두 지식과 능력을 갖춘 걸출한 인물이었으므로, 북인이 소북 · 대북으로 분열되지 않고 서로 힘을 모았다면,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더 큰 일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영경과 정인홍은 비슷한 점이 많아 오히려 서로 화합할 수 없었다. 유영경이 득세할 때 정인홍은 권좌에서 밀려나서 유배되었고, 정인홍이 득세할 때 유영경은 유배되어 사사(賜死)되었다. 두 사람은 마지막에 모두 역적으로 내몰려 극형을 받았는데, 정인홍은 산 채로, 또 유영경은 죽은 시체로 저자거리에서 능지처참(陵遲處斬)을 당하였다.
유영경이 일을 추진하는 역량이 있었으므로, 선조는 왜란의 마무리 작업을 그에게 맡겼다. 1598년(선조 31) 1월 전쟁이 끝나갈 무렵에 선조가 특별히 그를 병조 판서에 임명하여, 명나라 원군에게 군량미를 원활하게 공급하고, 우리 관군이 명나라 원군과 연합하여 울산의 도산성(島山城)에 주둔한 왜군을 공격 · 격퇴하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왜군이 모두 물러가고 전쟁이 끝나자, 그해 12월 유영경은 전라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다. 1599년(선조 32) 8월 좌의정 후보자를 천거할 때, 재상을 천거하는 명단인 ‘복상 단자(卜相單子)’에 들어갔으나, 대북의 정인홍 · 기자헌의 강력한 반대로 재상에 임명되지 못하였다. 당시 재상에 천거된 명단을 보면, 대북의 이산해 · 이기와 서인의 이원익(李元翼) · 이항복과 소북의 유영경 등이다. [『선조실록』 선조 32년 8월 10일 · 9월 12일] 이들은 왜란 이후 조선 중기의 정계를 이끌어갈 각 당파의 중심인물이었다.
1601년(선조 34) 3월 유영경이 형조 판서가 되었다가, 1602년(선조 35) 2월 이조 판서가 되었다. 이조 판서 유영경은 선조에게 글을 올려 붕당(朋黨)을 혁파하고 인재를 골고루 등용할 것을 청하니, 선조가 더욱 그를 신임하게 되었다.[「유영경 유사」] 이때부터 유영경이 선조의 신임을 받아서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니, 소북 일파가 정권을 잡은 시대가 7년 동안 계속되었다. 그해 3월 유영경은 의정부 우의정으로 승진되었다가, 1604년(선조 37) 5월 좌의정이 되었다.[『선조실록』 선조 37년 5월 22일] 1604년(선조 37) 12월 남인 윤승훈의 뒤를 이어 영의정이 되었는데[『선조실록』 선조 37년 12월 6일], 선조 말기 소북의 정권을 이끌면서 전후의 복구와 민생의 안정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1607년(선조 40) 영의정 유영경은 자기 심복을 정부의 핵심 부서에 앉혔는데, 한효순이 이조 판서를, 박홍로(朴弘老)가 병조 판서를 각각 맡아서 문무의 인사권을 장악하였다.[『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선조 40년 3월 1일] 이에 불만을 품은 대북과 서인 · 남인은 유영경이 뇌물을 받고 벼슬을 준다고 비난하였다.[『선조실록』 선조 41년 1월 26일, 『연려실기술』 권18]
유영경은 당쟁에 휩쓸리지 않고 중립을 지키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1602년(선조 35) 7월 나이 51세의 선조가 19세의 인목왕후 김씨를 계비(繼妃)로 맞아들여 1604년(선조 37)년 2월 적자(嫡子) 영창대군 이의를 낳자, 1592년 <임진왜란> 때 세자(世子)로 책봉된 서자(庶子) 광해군의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소북과 대북 사이에 당쟁(黨爭)이 벌어졌다. 선조는 늦게 얻은 영창대군을 왕세자로 삼고 싶어 하였으나, 광해군은 <임진왜란> 때 분조를 이끌고 왜군과 싸워서 그 공적이 있었으므로 세자 광해군의 입지는 상당히 확고하였다. 이때 소북의 유영경은 영창대군을 지지하여 적통론을 내세워서 적자가 왕통을 계승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대북의 정인홍과 기자헌 등은 이에 적극 반대하고 광해군을 지지하여 후사왕(後嗣王)으로 옹립하려고 하였다.
선조는 14남 11녀의 자녀를 두었는데, 인목왕후가 낳은 영창대군과 정명공주(貞明公主)를 제외하면, 모두 궁녀가 낳은 서출(庶出)이었다. 적자 영창대군이 태어나기 전까지 조정 대신들은 서출 가운데 김공빈(金恭嬪)이 낳은 제 1왕자 임해군 이진(李津)과 제 2왕자 광해군 이혼(李渾) 중에서 한 사람을 왕세자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선조는 김인빈(金仁嬪)이 낳은 5남 4녀 중에서 제 4왕자 신성군(信珹君) 이후(李珝)를 세자로 삼으려고 생각하였다. 군신(君臣)의 생각이 달랐기 때문에 누구도 감히 세자를 세우는 문제[建儲問題]를 제기하지 않았다. 선조는 왕가의 번영과 자녀의 안정을 위하여 서출 왕자와 왕녀를 모두 조정의 유력한 대신의 자녀와 정략적 혼인을 시켰다. 유영경의 손자 유정량(柳廷亮)은 김인빈이 낳은 막내딸 정휘옹주(貞徽翁主)와 혼인하였다.
1591년(선조 24) 영의정 이산해 · 좌의정 정철 · 우의정 유성룡이 세자를 세우는 문제, 이른바 ‘건저 문제(建儲問題)’를 의논하고, 정철이 먼저 선조에게 ‘건저 문제’를 거론하였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정철이 명천(明川)으로 귀양 가고 서인들이 실각하였다. 이때 의정부 3의정은 광해군을 세자로 세우도록 선조에게 건의하기로 합의하였는데, 제 1왕자 임해군은 성격이 포악하고 제 2왕자 광해군은 자질이 우수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속설에는 당파가 다른 3의정이 ‘건저 문제’를 자기 당파에 유리하도록 철저히 이용하였다고 한다. 북인 출신 영의정 이산해는 신성군의 외삼촌 김공량(金公諒)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었고, 김인빈은 오빠의 말을 듣고 선조에게 울면서, “정철이 우리 모자를 죽이고 광해군을 세자로 세우려고 한다.”라고 하소연하였다. 3의정이 선조에게 건의하기로 약속한 날, 영의정 이산해가 일부러 불참하였으므로, 서인 출신 좌의정 정철이 경연에서 세자를 세우자고 건의하였는데, 선조가 엄청 진노하여, “내가 살아 있는데, 그대가 세자를 세우자고 청하는 것은 나보고 죽으란 말이냐.” 하였으나, 동인 출신 우의정 유성룡은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정철이 귀양 가고, 서인이 쫓겨나자, 동인이 정권을 잡고, 유성룡이 좌의정이 되었다. 다음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마지못하여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여 전주(全州)의 분조로 내려 보냈다. 광해군은 영특하였으나, 아버지 선조의 비위를 맞추지 못하였으므로, 선조는 광해군을 싫어하여 아들의 혼정성신(昏定星辰)도 거절하였다.
영창대군이 태어나자, 선조는 광해군을 세자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고, 어린 영창대군을 세자로 세우고 싶어 하였다. 영의정 유영경은 손자 유정량을 통하여 선조가 광해군을 싫어하여 세자의 문안도 받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적통론을 내세워서 적자 영창대군을 세자로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대북의 정인홍과 이이첨은 세자 광해군을 적극 감싸면서 소북 유영경의 적통론을 비판하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1608년(선조 41) 1월 정인홍은 평안도 영변(寧邊)으로, 이이첨은 함경도 갑산(甲山)으로 유배되었다.[『선조실록』 선조 41년 1월 18일 · 1월 26일]
[유교 7신(遺敎七臣)]
선조는 중종의 9남 11녀 중에서 적자 인종(仁宗)과 명종(明宗)을 제외하고 서출 왕자 가운데 막내아들 덕흥군(德興君)의 제 3자였다. 명종이 죽을 때 그를 후사왕(後嗣王)으로 지명하여, 뜻하지도 않게 나이 16세 때 갑자기 임금이 되었다. 그는 세자로서 왕위를 계승하는 수련 기간을 거치지 않고 임금이 되었기 때문에 왕위에 40여 년 이상 있으면서 시행착오를 많이 범하였다. 왜란의 국난을 극복하였으므로, 그 업적이 나라를 창업한 임금과 같다고 하여, 그의 묘호(廟號)를 선종(宣宗)에서 선조(宣祖)로 바꾸었으나, 그는 인사 행정에 실패하여 그의 재위 기간에 사색당파가 형성되었다.
1575년(선조 8) 동서 분당(東西分黨)이 일어나서 조정이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고, 1589년(선조 22) <정여립의 모역 사건>이 일어나서, 동인이 1천여 명 이상 화(禍)를 입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7년 동안 전란 중에 있었으나, 동인과 서인의 당파 싸움은 격화되어, 그 말년에는 소북과 대북, 그리고 서인과 남인으로 사색당파의 골격이 이루어졌다. 정여립의 공초(供招) 중에는 선조의 임금 자질을 비판한 내용이 있었으므로, 왜란 때부터 선조는 어느 당파에 기울지 않고 골고루 인물을 기용하였다. 특히 세자를 세우는 문제가 당파 싸움과 얽히는 것을 피하려고 세자 책봉을 왜란 때까지 미루었다.
전쟁이 일어나자, 선조는 서북단에 있는 평안도 의주로 피난하였는데, 세자가 3남 지방에서 임시로 군사를 지휘하고 국정을 통솔할 필요성이 있어서, 전쟁 중에 광해군을 세자로 세우고, 전주의 분조(分朝)로 내려 보냈다. 전주의 분조는 왜군이 전라도를 침범하지 않았기 때문에 설치할 수 있었으나, 언제 왜군의 침략을 받을는지도 모르는 위험한 곳이었다. 광해군이 3남 지방의 관군과 의병을 지휘하여 전세를 역전시키고, 선조를 대신하여 지방의 행정을 무난히 통솔하였다. 그러므로 조야의 모든 사람들이 광해군이 선조의 뒤를 이어서 다음 임금이 되리라고 믿었다.
1604년(선조 37)년 2월 계비 인목왕후 김씨가 적자 영창대군 이의를 낳았다. 그때 영의정 유영경은 세종 때에 왕자가 탄생하면 백관들이 하례(賀禮)를 드린 전례를 본떠서, 백관들을 거느리고 선조에게 하례를 드리자, 선조가 크게 기뻐하였다. 그러나 반대 당파는 유영경이 선조의 뜻을 맞추어서 자기의 지위를 굳히려는 술책이라고 비난하였다.[『하담파적록(荷潭破寂錄)』] 선조는 나이 53세 때에 얻은 막내아들 영창대군을 왕세자로 삼고자 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세자로 책봉한 광해군이 있었기 때문에 섣불리 세자를 바꾸겠다는 말을 신하들에게 꺼내지 못하였다. 그때 유영경의 손자 유정량이 선조의 부마가 되어 대궐을 자주 출입하면서 왕실의 소식을 전하였는데, 유영경은 그를 통해 선조가 세자를 바꾸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영의정 유영경은 광해군이 아직 중국 명나라로부터 세자 책봉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영창대군을 새로 왕세자로 세우더라도 중국 명나라의 책봉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소북의 유영경은 공개적으로 영창대군을 세자로 추대하려고, 적통론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대북의 정인홍과 기자헌 등은 이에 반대하고 세자 광해군을 적극 옹호하였다. 그때 선조는 영창대군이 너무 어리기 때문에 세자의 교체를 마음대로 단행할 수가 없었다.
1606년(선조 39) 6월 선조의 왕위 즉위 40주년 행사를 맞이하여 영의정 유영경은 백관들을 거느리고 선조에게 하례를 드리고, 이를 축하하는 증광시를 시행하였다. 이때 반대 당파의 사람들은 유영경이 1년을 앞당겨 하례식을 거행한다고 맹렬히 비난하였다.[『연려실기술』 권18 「유영경전」] 그러나 왕위 즉위 40주년 행사를 1년을 앞당겨서 거행한 것은 선조의 건강이 나빠졌기 때문이었다. 선조가 오래도록 병환 중에 있었으므로, 영의정 유영경이 약방 도제조가 되어, 어의 허준 등과 약의 제조를 상의하고 감독하면서 선조의 병환을 구료하였다. 1607년(선조 40) 10월 선조는 자신의 병이 낫지 않자, 광해군에게 전섭(傳攝) 곧 대리 청정을 명하는 교서(敎書)를 내렸다. 당황한 영의정 유영경은 원임 대신(原任大臣)들을 대궐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시임 대신(時任大臣)만을 불러서 서로 모의한 다음에 중전(中殿) 인목왕후로 하여금 언서(諺書)의 글을 쓰도록 하기를, “금일의 전교(傳敎)는 실로 뜻 밖에 나온 것이므로, 명령을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하고, 즉시 회계(回啓)하게 하고, 대간과 승정원과 사관(史館)들이 이 사실을 알지 못하게 하였다.[『선조실록』 선조 40년 10월 10일 · 10월 11일]
그해 11월 선조의 병환이 오래도록 낫지 않자, 여러 사람의 의논이 모두 허준이 어의로서 약을 알맞게 쓰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시끄럽게 떠들었다. 대간(臺諫)에서 허준을 탄핵하고 그 죄를 약방 도제조 유영경에게까지 미치게 하려고 하였다. 1608년(선조 41) 2월 1일 선조가 입맛이 없어서 점심 때 찹쌀밥을 먹다가 갑자기 기(氣)가 막혀서 위급한 상태가 되었다.[『광해군일기』 광해군 즉위년 2월 1일] 약방 도제조 유영경과 어의 허준이 황급히 들어가서 진맥을 하였으나, 소생할 가망성이 없었다. 유영경은 선조의 유교에 따라서 후사왕을 결정해야만 하므로, 선조의 의식이 반드시 돌아와야 한다고 생각하여, 어의 허준에게 임금의 의식을 잠간만이라도 돌아오게 하도록 부탁하였다. 그러자 어의 허준은 주저하다가 극약 처방을 하여 선조의 의식을 잠시 돌아오게 만들었다. 유영경은 내관 민희건에게 선조의 유교를 받아쓰도록 하여, 세자 광해군과 왕비 인목왕후에게 내리는 글을 2통 만들었다. 이날 오후에 선조가 내전에서 돌아갔는데, 향년이 57세였다.
대신들과 세자가 빈청(賓廳)에 모여서 내전에서 봉함된 유교를 개봉하였는데, 선조는 세자 광해군에게 왕위를 넘긴다고 유언하고, 부탁하기를, “내가 살아 있을 때처럼 형제들을 사랑하라. 참소하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부디 그 말을 따르지 말라. 모쪼록 나의 뜻을 깊이 새겨서 유념하기 바란다.”라고 하였다.[『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광해군 즉위년 2월 1일] 또 선조는 내전(內殿)에 은밀히 유교 1통을 내렸는데, 그 겉봉투에 쓰기를, “유영경 · 한응인 · 박동량 · 서성 · 신흠 · 허성 · 한준겸 등 제공(諸公)에게 유교한다.”고 하였다. 선조가 인목왕후를 통하여 7인의 측근에게 부탁한 유교의 내용은, “부덕한 내가 왕위에 있으면서 신민(臣民)들에게 죄를 지었으므로, 이제 갑자기 중병(重病)에 걸렸다. 수명의 장단(長短)은 운명이 정해져 있는 것이어서, 낮이 가면 밤이 오는 것처럼 감히 어길 수 없는 것이다. 단지 영창대군이 어린데 미처 장성하는 것을 보지 못하게 되었으니, 매우 한스럽다. 내가 불행하게 된 뒤에 혹시라도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기 어려울 것이니, 만일 사설(邪說)이 궁중에 있게 되거든, 제공들이 대군을 애호하고 부지(扶持)하기 바란다. 감히 이를 부탁한다.” 하였다. 유영경 등 7인은 모두 선조의 왕자와 공주가 혼인을 맺은 당대의 명신들이었다. 이처럼 선조의 유교가 특별히 일곱 신하에게 따로 내려졌으므로, 이들을 ‘유교 7신’이라고 한다.[『광해군일기』 광해군 즉위년 2월 2일 기사, 『계해정사록』] 나중에 광해군 시대에 대북이 집권하자 이이첨 등이 내관 민희건 등을 심문하였는데, 민희건은 당시 영의정 유영경이 선조의 유교를 조작하고 자신은 선왕의 친필처럼 모사하여 받아썼다고 자백하였다.[『광해군일기』 광해군 5년 5월 15일] 그러나 이는 대북일파가 소북의 영수 유영경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우기 위해 허위자백을 시킨 것이므로, 그의 증언에 신빙성이 없다고 할 수 있다.
1608년 2월 2일 광해군이 즉위하자, 영의정 유영경은 사직하는 상소를 거듭 올렸다. 귀양을 갔던 정인홍과 이이첨 등이 조정으로 돌아와서, 이른바 ‘유교 7신’ 등 선조의 측근들을 모두 축출하였다.[『미수기언』 별집 권25] 어의 허준도 극약을 처방하였다고 하여 유배되었으나, 광해군이 특별히 사면하였다. 그때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합계(合啓)하여 유영경의 관작을 삭탈하고 문외로 출송시킬 것을 청하니, 광해군이 유영경을 함경도 경흥으로 귀양 보내도록 하였다.[『광해군일기』 광해군 즉위년 3월 18일] 충훈부에서는 공신 녹권(功臣錄券)에서 유영경과 여러 아들의 성명을 삭제하고, 유영경의 영정(影幀)을 불살라버렸다. 또 관리의 명단인 사판(仕版)과 유생의 명단인 청금록(靑衿錄)에서도 유영경의 이름을 영구히 삭제하여버렸다. 유영경은 두만강변에 있는 경흥에 위리안치되었는데, 그 아들 5형제도 아버지를 따라가서 함께 귀양살이 하였다. 1608년(광해군 즉위) 9월 16일 유영경은 함경도 경흥부의 위리안치된 임시 거처에서 사약을 마시고 자진하였다.[「유영경 유사」]
[성품과 일화]
유영경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풍채가 좋아서 인품이 당당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성품이 유교의 법도와 생활 준칙을 스스로 엄정하게 지켰으므로, 태도가 의연하면서도 일을 추진하는 역량이 있었다.[「유영경 유사」] 또 유영경은 두 차례나 홍문록(弘文錄)에 선임될만큼 당대의 인재로 사람들의 촉망을 받았다. 1580년(선조 13) 의정부에서 홍문록에, 유영립(柳永立)을 비롯하여 한효순 · 홍여순 · 이항복 · 이정암 등 17인을 선록(選錄)하였다.
이때 홍문록에 선록된 서인 이정암과 동인 유영경의 관계를 실록에서 살펴볼 수 있는데, 두 사람이 서로 경쟁 의식을 가지고 왜란 때 나라를 구하는 방법을 각자 달리 모색한 것은 그들이 당파가 달랐기 때문이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황해도 관찰사 유영경와 황해도 초토사 이정암이 함께 황해도에서 일을 하다가 서로 의견이 충돌하였다. 그해 11월 대간에서 황해도 관찰사 유영경이 황해도 초토사 이정암의 왜적 토벌을 지연시킨 죄를 논하고 교체시키도록 청하였으나, 좌의정 윤두수가 그를 변호하여 그대로 유임되었다. 이는 동인 유영경은 서인 이정암과 뜻이 맞지 않아서 일어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초토사 이정암이 의병을 모집하여 관군과 연합하여 왜장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의 군사를 공격하려고 하자, 유영경이 명나라 군사에게 군량미를 공급하는 것이 더욱 급한 일이라고 주장하여, 이를 거절하였다. 그때 서인의 영수 좌의정 윤두수가 아뢰기를 “근래 의병이 사방에서 일어나 관군과 까닭 없이 취합(聚合)하려고 하므로 유영경이 그들의 소행에 격분하여 거절하는 편지를 보낸 것이니, 그대로 유임시키소서.” 라고 하였다.[『선조수정실록』 선조 25년 11월 1일, 『선조실록』 선조 25년 11월 18일]
또 1593년(선조 26) 1월 사간원에서 유영경이 군량미를 제대로 준비하지 않았다고 탄핵을 하자 비변사(備邊司)에서 아뢰기를, “황해도 감사 유영경을 파직하는 것은 참으로 불가할 것이 없습니다. 다만 명나라 군사가 바야흐로 본도에 주둔하고 있는데, 다른 사람으로 교체하는 때가 바로 명나라 군사가 황주(黃州)를 지나가는 날과 서로 겹칠 것이니, 적합한 시기가 아닌 듯합니다.”라고 하니, 선조가 그대로 유임하게 하였다.[『선조실록』 선조 26년 1월 20일 · 1월 21일] 서인의 영수 윤두수는 나라를 위하여 동인 유영경을 비호하고 서인 이정암을 나무랐다. 그러나 황해도 초토사 이정암은 연안성(延安珹)에서 기어이 의병과 관군의 연합군을 거느리고 구로다의 대군(大軍)을 맞아서, 4일 동안 밤낮으로 싸워서 크게 승리하였다. 1594년(선조 27) 1월 사간원에서 황해도 관찰사 유영경이 가족을 도내(道內)에 데리고 있으면서 폐단을 끼치는 일이 많다고 탄핵하자, 선조는 황해도 관찰사 유영경을 파직하였다.[『선조실록』 선조 27년 1월 6일 · 2월 7일] 그리고 황해도 초토사 이정암을 그의 후임으로 황해도 관찰사 겸 순찰사에 임명하였다.
1589년(선조 22) 의정부 홍문록을 선발할 때, 유영경을 비롯하여 한준겸 · 윤승훈 · 정경세 등 9명을 뽑았다.[『선조실록』 선조 22년 4월 4일] 서인 한준겸은 ‘유교 7신’의 하나로 그의 딸이 인조의 왕비 인열왕후(仁烈王后)이다. 최영경의 셋째딸이 한준겸의 둘째 아들 한소일(韓昭一)에게 시집갔다. 소북의 영수 유영경은 오히려 서인의 원로들과는 사이가 아주 나쁘지 않았으나, 동인의 원로들과는 사이가 나빴던 것 같다. 동인 윤승훈과 정경세는 모두 정승과 판서가 되었는데, 선조 말년에 영의정 윤승훈과 좌의정 유영경은 선조에게 존호(尊號)를 올리는 문제로 서로 대립하다가, 윤승훈이 물러나고 유영경이 영의정이 되었다.
광해군 시대 유영경은 대역(大逆) 죄인으로 몰려서 참화(慘禍)를 당하였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자, 바로 신원(伸寃)이 되고, 복작(復爵)되었다. 그때 동인 유성룡의 수제자 판서 정경세는 유영경의 신원에는 찬성하였으나, 복작에는 반대하였다. 1623년(인조 1) 참찬관(參贊官) 정경세가 아뢰기를, “광해군 때 유영경이 역모를 하였다는 이유로 추형(追刑)까지 당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다 억울하다고 합니다. 반정(反正)한 뒤에 그의 억울함을 풀어 준 것은 좋으나 복직까지 시킨 것은 옳지 못합니다.” 하니, 인조가 이르기를, “이미 억울하게 죽었는데, 복직시키는 것이 무엇이 나쁜가?” 하였다.[『인조실록(仁祖實錄)』 인조 1년 9월 11일] 이때 우복(愚伏) 정경세가 그 이유를 설명하기를, “유영경이 끝내 역모(逆謀)를 꾀하였다는 하여 추형을 받았는데, 사람들이 모두 억울하게 죄를 받았으니 원통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가 권력을 전횡하여 당파를 심고 충성스럽고 어진 사람들을 몰아내어 조정을 혼탁하게 하고 어지럽힌 죄가 어찌 전혀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반정한 뒤에 반역을 하였다는 원통한 죄목을 벗겨 주고 관작을 회복시켜 주었는데, 지난날 그의 죄는 실로 추탈(追奪)하기에 충분합니다. 국가가 형벌의 전장(典章)에서 이와 같이 조처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우복집(愚伏集)』 별집 권3]
대북의 허균(許筠)이 소북의 영수 유영경과 동인의 영수 유성룡을 비교하여 비판하기를, “ 유성룡과 유영경은 각기 첩(妾)을 얻었는데, 첩들이 형제여서 동서 사이가 되었다. 두 사람이 모두 영상이 되었다가, 유성룡은 선조 때 배척을 받아서 파직되어 고향에 돌아가서 죽었고, 유영경은 광해군 때 죄를 짓고 외방으로 유배되어, 자진(自盡)하였다. 성도 같은 유씨이고, 벼슬도 같은 영상이었지만, 훈(薰)과 유(蕕)의 구분이 있었으니,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라고 하였다.[『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권23] 훈(薰)은 향기나는 풀을, 유(蕕)는 악취나는 풀을 뜻한다. 이와 같이 유영경을 매도한 허균도, 광해군 때 같은 대북의 영의정 기자헌(奇自獻) 부자와 권력 다툼을 벌이다가 저자 네거리에서 능지처참(陵遲處斬)을 당하였다.
1608년(선조 41) 1월 전 공조 참판 정인홍이 병환이 몹시 위독한 선조에게 상소하기를, “신이 보건대, 전하의 부자(父子)를 해치는 자도 유영경이고, 전하의 종사(宗社)를 망치는 자도 유영경이며, 전하의 나라와 백성을 해치는 자도 또한 유영경입니다. 아, 참으로 세자(世子)가 당초부터 선택되어 사자(嗣子)가 되지 않았더라면, 광해군도 또한 한 명의 왕자일 뿐입니다. 어찌 세자를 동요시키고 위태롭게 하는 걱정을 여기에까지 이르도록 합니까. 이것은 전하께서 처음에는 세자를 선택하여 사자로 세우고, 끝내는 그를 불측(不測)한 곳으로 들여보내는 것이니, 전하께서 일개 흉악한 신하를 내치는 데에 무슨 어려움이 있어서, 장차 어진 사자 광해군에게 화(禍)를 끼치는 일을 면하지 못하게 합니까?” 하니, 선조가 ‘계(啓)’자를 찍지 않고 도로 승정원에 내려 보냈다.[『선조실록』 선조 41년 1월 18일]
이처럼 소북의 영수 유영경에 대하여 대북의 영수 정인홍을 비롯하여 대북의 허균과 동인 정경세 등의 비판이 혹독하였다. 그러나 당파 싸움에서 본다면, 그는 대북의 영수 정인홍과 동인의 영수 유성룡과 맞먹는 거물이었기 때문에 혹독한 비판을 받은 것이다. 또 선조가 만년에 유영경에게 영창대군을 부탁하면서 너무 의존한 것도 반대파가, “유영경이 선조에게 너무 아부하였다.”고 비난한 원인이 되었다. 유영경의 집권 7년 동안에 그에게 빌붙어서 정권을 전횡한 소북의 인사들이 뇌물을 받고 나쁜 짓을 많이 하였으나, 그들이 저지른 모든 죄악은 나중에 대역 죄인으로 처형당한 유영경과 이홍로(李弘老) · 김대래(金大來) 등에게 돌아왔다.
소북의 영수 유영경이 광해군 때 처형을 당할 때 소북의 인사 중에서 대북의 실권자와 혼인을 맺은 사람들은 모두 법망을 빠져나갔다. 예컨대, 최영경의 심복이 되어 인사권을 행사하는 전형(銓衡)의 자리만을 차지한 대사헌(大司憲)최천건(崔天健)은 대북의 정창연(鄭昌衍)과 혼인을 맺은 집안이기 때문에 귀양을 가서 죽음을 면하였고, 대북의 정인홍 등을 탄핵하고 공격하는 데에 앞장섰던 영의정 박승종은 대북의 이이첨과 혼인을 맺은 집안이어서 관직의 삭탈과 문외 출송(門外黜送)을 면하였다. 직제학(直提學) 김대래는 늦게 관계에 진출하여 잠시 등용되었는데, 집안이 외롭고 한미하였기 때문에 그를 변명하거나 비호해 주는 사람이 없어서 유영경의 소북일파로 몰려서, 죽음을 당하였다. 그 뒤에 <계축옥사> 때 영의정 유영경과 경기도 관찰사 이홍로와 직제학 김대래 등은 추형(追刑)을 당하였는데, 그 시신을 무덤에서 꺼내어 도성의 저자 네거리에서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다시 능지처참하도록 했다.『광해군일기』 광해군 4년 6월 25일] 연산군 때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부관참시(剖棺斬屍)보다 더욱 끔찍한 형벌을 당하였으므로, 당시 식자(識者)들이 그들을 마음속으로 깊이 애도하였다.[「유영경 유사」]
1608년(광해군 즉위) 9월 16일 유영경이 함경도 경흥부에서 사약을 마시고 자진할 때, 조정의 사신이 유배소로 와서 마침내 자진하라는 어명을 전하였으나, 유영경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옆에서 모시던 자제(子弟)들과 더불어 말을 하고, 또 평상시와 같이 밤이 새도록 편안하게 잠을 잤다. 다음 날 아침이 밝자, 관대(冠帶)를 갖추어 입고 침착한 안색으로 조용하게 사약을 마시고 죽음을 맞이하였다.[「유영경 유사」] 그가 평상시에 학문을 닦고, 또 오랜 정치 경륜을 쌓으면서 충서(忠恕) 사상과 극기(克己) 정신을 터득하지 못하였다면 이와 같이 태연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묘소와 후손]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직후에 관작(官爵)이 회복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덕송리 전주 유씨 5대 봉군 묘역에 있다. 처음에 유배된 경흥에서 유영경이 사약을 마시고 자진하자, 자손들이 경기도 양주(楊州)의 선영(先塋)으로 반장(返葬)하였다.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대북의 정인홍과 이이첨 등이 영창대군을 옹립하려고 하였던 유영경의 죄를 추형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죽은 유영경의 시신을 무덤에서 파내어 도성 안의 군기감(軍器監) 앞에서 능지처참을 시행하고, 그 시신을 8도에 순행시켰다. 또 유영경의 살던 집을 헐고 그 집터를 파서 연못으로 만들었다. 그 뒤에 손자 유정량(柳廷亮)이 그 시신의 일부를 수습하여 경기도 양주 도봉산 기슭에 안장(安葬)하였는데, 1633년(인조 11) 부인 황씨(黃氏)가 84세로 돌아가자, 그 남편의 무덤에 합장하였다. 그때 강원도 관찰사 유항(柳恒)이 유영경의 유사(遺事)를 지었는데, 유항은 유영경의 조카였다. 1892년(고종 29) 그의 12대손 유대수(柳大秀)가 일찍이 관찰사 유항이 지은 유사를 돌에 새겨서 묘역 입구에 비(碑)를 세웠다.[「유영경 유사」]
부인 창원 황씨(昌原黃氏)는 중추부 동지사(同知事)황응규(黃應奎)의 외동딸인데[「유영경 유사」] 남편과 아들 5형제가 모두 참화를 당한 뒤에도 손자 유정량과 정휘옹주에 의지하여 20년 이상을 더 살았다. 자녀는 5남 3녀를 두었다. 장남 유열(柳悅)은 현감(縣監)을 지냈고, 3남 유업(柳*)은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 좌랑을 지냈으며 4남 유제(柳悌)는 무과에 급제하여 현감을 지냈는데, 아들 5형제는 1612년(광해군 4) <김직재(金直哉) 옥사>에 연루되어 모두 참화를 당하였다. 장녀는 사헌부 장령 유수증(兪守曾)에게, 차녀는 관찰사 이핵(李翮)에게, 3녀는 한준겸의 둘째 아들 한소일에게 각각 시집갔다. 맏손자 유정량은 유영경이 득세할 때 선조의 제 6왕녀 정휘옹주와 혼인하였기 때문에 참화를 겨우 면하여 귀양살이하다가, <인조반정> 직후에 풀려나서 정1품에 승품되고 전창군(全昌君)에 봉해졌다.[「유영경 유사」] 증손자 유심(柳淰)은 문과에 급제하여 참판(參判)을 지냈다. 유영경의 손주며느리 정휘옹주는 인조의 고모였고, 유영경의 막내 사위 한소일은 인조의 처남이었다. 그래서 인조는 유영경을 신원하고 복작한 다음에 그 손자 유정량을 의친(議親)으로서 최고의 대우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