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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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탁연(尹卓然)

서지사항
항목명윤탁연(尹卓然)
용어구분인명사전
분야정치·행정가
유형인물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총론]
[1538년(중종 33)∼1594년(선조 27) = 57세.] 조선 중기 명종~선조 때 활동한 문신. 선조 때 ‘8대 문장가[八文章]’ 중 한 사람. 행직은 호조 판서이고, 봉작은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 칠계군(漆溪君)이고, 시호는 헌민(憲敏)이다. 자는 상중(尙中)이고, 호는 중호(重湖)이다. 본관은 칠원(漆原)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우봉현령(牛峰縣令) 윤이(尹伊)이고, 어머니 안동 김씨(安東金氏)는 김윤선(金胤先)의 딸이다. 홍문관(弘文館) 직제학(直提學)윤석보(尹碩輔)의 증손이고, 감사(監司)윤풍형(尹豊亨)의 조카이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명종 ~ 선조 시대 활동]
1558년(명종 13) 사마시(司馬試)에 생원(生員)으로 합격하였고, 7년이 지나 1565년(명종 20) 알성시(謁聖試) 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28세였다. 처음에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에 보임되었고 춘추관(春秋館) 사관(史官)을 겸임하였다. 1567년(명종 22) 승정원(承政院) 주서(注書)에 임명되었다. 이때 영의정 이준경(李浚慶)을 따라서 내전(內殿)으로 들어가서 명종의 유언인 유교(遺敎)를 직접 글로써 받아 적었다.

1568년(선조 1) 성균관(成均館) 전적(典籍)으로 승진하였고,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을 역임하였다. 천추사(千秋使)의 서장관(書狀官)에 임명되어 중국 명(明)나라 북경(北京)에 다녀왔다. 1570년(선조 3) 홍문관에 들어가서, 부수찬(副修撰) · 수찬(修撰)으로 승진하였는데, 항상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 또 경연(經筵) 검토관(檢討官)이 되어 춘추관 사관을 겸임하였는데, 이때 『명종실록(明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예조와 병조의 좌랑(佐郞) · 정랑(正郞)을 각각 역임하였다. 1571년(선조 4)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에 임명되었고, 1573년(선조 6) 사간원 헌납(獻納)으로 전임되었다. 1573년(선조 6) 조선 조정에서 <종계변무(宗系辨誣)>를 명나라에 요청하는 주청사(奏請使) 이후백(李後白)을 파견할 때, 그 서장관(書狀官)에 임명되어, 부사(副使)윤근수(尹根壽)와 함께 중국 북경에 가서 명나라 예부(禮部)와 교섭하였다. 그리하여 새로 수정 증보(增補)하는 『대명회전(大明會典)』을 발간할 때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가계(家系)에 대하여 수정해서 바로잡아 주겠다는 확답을 받아서 돌아왔다.[『유천차기(柳川箚記)』] 그는 그 공로로 승품(陞品)하고 전지(田地)를 하사받았으며, 사헌부 지평에 임명되었다.

1574년(선조 7) 사헌부 장령(掌令)으로 승진되었다가, 홍문관 교리(校理)로 전임되었다. 다시 내섬시(內贍寺) 첨정(僉正)종부시(宗簿寺) 첨정을 거쳐, 의정부(議政府)의 검상(檢詳) · 사인(舍人)으로 승진하였다. 1575년(선조 8) 외직으로 나가서 동래 부사(東萊府使)가 되었는데, 이듬해 부친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였다. 상례가 끝난 후, 상주목사(尙州牧使)에 임명되어, 선정(善政)을 베풀었으므로, 선조가 표리(表裏) 한 벌을 하사하였다. 그가 서울로 돌아온 뒤에 상주 사람들이 송덕비(頌德碑)를 세워서 그의 덕을 기리었다.[『호곡집(壺谷集)』 권18 「호조판서 윤공묘갈명(戶曹判書尹公墓碣銘)」]

1580년(선조 13) 좌승지(左承旨)에 발탁되었다. 이 해에 경회루(慶會樓)에서 실시한 중시(重試)에서 장원하여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품(陞品)되고, 도승지(都承旨)로 영전되었으며 다음해에는 예조 참판에 임명되었다. 1582년(선조 15) 영남 지방에 흉년이 들자, 선조가 윤탁연을 경상도 관찰사에 특별히 임명하였는데, 그가 영남 지방의 백성들을 기근에서 구원하여 내외의 칭찬이 자자하였다. 그해 다시 예조 참판으로 돌아와서 1583년(선조 16) 형조 참판으로 전임되었는데, 형조의 낭청(郎廳)에서 죄인을 심문하다가, 임산부를 장형(杖刑)으로 때려서 낙태시켜 죽게 만든 사건이 일어났으므로, 참판 윤탁연과 판서 강섬(姜暹)이 낭관들과 함께 파직되었다.[『선조실록(宣祖實錄)』 선조 16년 4월 21일]

1585년(선조 18) 경기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으로 승진하였다. 1587년(선조 20) 형조 판서가 되었고, 1589년(선조 22) 호조 판서에 임명되었다가, 다시 형조판서로 옮겼다. 그때 사은사(謝恩使)에 임명되어 중국 명나라 북경에 가서, 명나라에서 『속수 대명회전(續修大明會典)』에서 <종계변무>를 바로잡아 고쳐준 것을 사례하였다. 그 전해 1588년(선조 21) 명나라 예부에서 『속수 대명회전』을 사은사 편에 보내주었기 때문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윤탁연은 제 1왕자 임해군(臨海君)을 모시고 함경도에서 근왕병(勤王兵)을 모집하였으나, 호응이 없어서 실패하였다.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이끄는 왜군(倭軍)이 북상(北上)하자, 임해군 일행은 회령(會寧)으로 피난하고, 윤탁연은 삼수(三水)의 별해보(別害堡)에 남게 되었다. 함경도 회령의 아전 국경인(鞠景仁) 등이 반란을 일으켜서 임해군과 순화군(順和君) 등을 체포하여 왜장 가토에게 넘겨주었다. 당황한 선조는 윤탁연을 함경도 관찰사에 임명하였다. 뒤이어 특별히 윤탁연을 함경도 도순찰사(咸鏡道都巡察使)에 임명하여, 의병(義兵)과 관군을 모아서 가토의 왜군을 물리치고 두 왕자를 구출하도록 명하였다. 윤탁연은 관군과 의병을 이끌고 개마고원의 산중에서 왜적과 싸웠다. 그런데 길주(吉州)에서 일어난 정문부(鄭文孚)의 의병과 힘을 합하여 왜적을 물리치지 못한 점은 매우 아쉽다. 그해 겨울에 선조는 순찰사 윤탁연의 야영 생활이 오래된 것을 염려하여 양털 옷 한 벌을 하사하며 그 노고를 위로하였다. 1593년(선조 26) 3월 왜장 카토가 왜군을 서울로 철수하였으므로, 윤탁연은 함흥의 감영(監營)으로 돌아왔다. 1594년(선조 27) 5월 28일 오랜 야영 생활에 피로가 쌓여서, 이것이 병이 되어 함흥의 감영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享年)이 57세였다. [『호곡집』 권18 「호조판서 윤공묘갈명」]

[임진왜란 때 함경도 관찰사 윤탁연의 활동]
1592년(선조 25) 4월 14일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4월 27일 삼도 체찰사(三道體察使) 신립(申砬)이 북상하는 왜군을 충청도 충주(忠州) 탄금대(彈琴臺)에서 막다가 패배하였다. 이러한 보고를 듣고, 4월 29일 좌의정(左議政) 유성룡(柳成龍)과 도승지(都承旨)이항복(李恒福) 등이 건의하기를, “일의 형세가 여기에 이르렀으니, 임금의 거가(車駕)가 잠시 평양(平壤)에 머물면서 명나라에 군사를 청해서 국력의 회복을 도모해야 합니다.” 하고, 이어서 왕자들을 여러 도에 나누어 보내 근왕병을 일으켜서 국력의 회복을 도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평양으로 피난 갈 것을 결심한 선조는 제 1왕자 임해군 이진(李珒)을 함경도로 보내면서 김귀영(金貴榮) · 윤탁연 등에게 수행하도록 하고, 제 6왕자 순화군 이보(李*)를 강원도로 보내면서 장계 부원군(長溪府院君) 황정욱(黃廷彧)과 그 아들 황혁(黃赫) 등에게 수행하도록 하였다.[『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선조 25년 4월 14일] 그해 5월 1일 윤탁연은 임해군을 모시고 그의 장인 김귀영과 함께 함경도로 가게 되었다. 순화군은 승지 황혁의 사위였으므로 황정욱 · 황혁 부자가 순화군을 수행하였다.

제 1왕자 임해군 일행은 함경도 함흥(咸興)으로 가서 근왕병을 모집하였으나, 호응하는 사람들이 없어서 실패하였다. 그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이끄는 왜군이 철령(鐵嶺)을 넘어서 함경도로 빠르게 북상하자, 겁을 먹은 임해군은 서둘러 북쪽으로 도망하여 마천령(摩天嶺)을 허겁지겁 넘어갔으므로, 윤탁연은 미처 일행을 따라가지 못하고 함경도 삼수의 별해보에 남게 되었다.[『호곡집』 권18 「호조판서 윤공묘갈명」]

한편 함경도 회령에 도착한 제 1왕자 임해군은, 강원도에서 왜적을 피해서 도망쳐 회령에 뒤늦게 들어온 제 6왕자 순화군과 함께 작당(作黨)하여, 회령의 토호(土豪)들에게 행패를 부리고, 부녀자들을 강탈하였으므로, 회령의 주민들이 분노하여 임금을 원망하였다. 그해 7월 1일 회령의 아전 국경인이 회령의 주민과 병사들을 선동하여 기갑병 5천 명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켜서, 두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을 비롯하여 그들을 호종한 대신들을 사로잡았다. 왜장 가토가 왜군들을 이끌고 왕자를 추격하여 마천령을 넘어 회령으로 진군하였다. 국경인은 왜장 가토에게 글을 보내어 보고하자, 가토가 군사를 이끌고 회령에 이르러, 성 밖에 진을 치고 혼자 성 안으로 들어가서 두 왕자와 여러 신하들을 돌아본 뒤에, 국경인을 꾸짖기를, “이 분들은 바로 너희 국왕의 친아들이고, 너희 조정의 대신들인데, 어떻게 이렇게까지 곤욕을 보이는가?” 하고, 결박을 풀게 하고 군중(軍中)에 모시도록 하여 후하게 대접하였다.[『선조수정실록』 선조 25년 7월 1일]

이리하여 국경인은 사로잡은 두 왕자 임해군 · 순화군과 그들을 호종한 김귀영과 황정욱 · 황혁 부자, 북도 병사 한극함(韓克緘), 회령부사 이영(李瑛), 온성 부사 이수(李銖) 등을 가토의 왜군 진영에 넘겼다. 7월 10일 당황한 선조는 삼수에 있던 윤탁연을 함경도 관찰사에 임명하였고, 7월 12일 선조는 특명(特命)으로 다시 감사 윤탁연에게 함경도 도순찰사(都巡察使)를 겸임하게 하였는데[『선조수정실록』 선조 25년 7월 10일 · 7월 12일] 이것은 남병사와 북병사를 아울러 통솔하고 관군과 의병(義兵)을 모두 동원하여 가토의 왜군을 물리치고 빨리 두 왕자를 구출하라는 무언의 명령이었다. 이때 도순찰사 윤탁연은 장남 윤경원(尹慶元)을 행재소(行在所)에 보내어 함경도에 별시(別試) 무과(武科)를 임시로 시행해 무사(武士)를 선발하여 관군과 의병을 지휘하도록 하자고 건의하고, 선조에게 위로하는 편지를 올리기를, “적군을 토벌하지 못하면 나라의 수치를 씻을 길이 없을 것입니다. 대대로 나라에 은총을 받았으니 무엇으로 보답하겠습니까? 죽음만 있을 뿐이니, 맹세코 구차하게 살려고 아니합니다.” 하였다.[『호곡집』 권18 「호조판서 윤공묘갈명」] 행재소의 허락을 받고 무과를 실시하여 유응수(柳應秀) · 이유일(李惟一) · 한인제(韓仁濟) 등 1백 명의 무사를 뽑아서 의병 부대를 편성하였다. 유응수 · 이희록(李希祿) 등은 의병 1천여 명을 모아서 기천(岐川)에서 왜적을 방어하였고, 한인제는 생원(生員) 한경상(韓敬商)과 함께 의병 3천 2백여 명을 모아서 함관령(咸關嶺) 아래에서 왜군을 대파하였다. 특히 함흥 출신 유응수 · 이유일 · 한인제의 의병 활동이 두드러져서, 사람들이 그들을 ‘함흥 3걸(咸興三傑)’이라고 불렀다.[『북방 충의록(北方忠義錄)』] 관찰사 윤탁연의 장남 윤경원은 관군을 이끌고 의병과 함께 왜적과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하였다.

회령을 점령한 왜장 카토는 마침내 군사를 인솔하여 두만강(豆滿江)을 건너 건주여진(建州女眞)의 오랑캐 부락(部落)을 점령하였는데, 이때 국경인의 안내로 3일 동안 깊숙이 들어가서 누르하치의 본거지 성(城)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누르치의 전략에 말려들었는데, 매복한 오랑캐 군사가 사방에서 일어나서 요격하여, 왜군의 사졸(士卒)들이 사상자가 많이 발생하였다. 이에 카토는 왜군의 진로를 바꾸어 종성(鍾城)의 문암(門岩)을 경유하여 두만강을 건너 온성(穩城) · 경원(慶源) · 경흥(慶興) 등 6진(鎭)을 차례로 점령하고 해변의 좁은 길을 따라 경성(鏡城)으로 돌아왔다. 이때 여러 진(鎭)과 보(堡)토병(土兵)들이 모두 자기 상관이나 수령을 붙잡아 왜적에게 넘기고 항복하였으므로, 왜인들은 칼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함경도 땅을 모두 점령하게 되었다. 국경인의 숙부인 경성의 아전 국세필(鞠世弼)과 명천(明川)의 아전 정말수(鄭末守) 등이 국경인의 반란군에 가담하여 자기 고을의 수령을 잡아서 왜적에게 넘겨주었다. 국경인은 자칭 ‘북병사(北兵使)’라고 일컫고 반란군을 지휘하였는데, 왜장 가토는 국경인을 ‘판형사제북로(判刑使制北路)’에 임명하여 함경도의 북병사처럼 함경도의 치안과 방어를 담당하게 하였다.[『기재사초(寄齋史草)』 하권] 왜장 카토는 안변부(安邊府)로 돌아와 웅거하니, 함경남도의 주(州) · 진(鎭)이 모두 카토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선조수정실록』 선조 25년 7월 1일] 왜장 가토는 포로가 된 두 왕자 일행을 직접 심문하고, 그들을 안변의 토굴에 가두었다.

국경인이 반란을 일으켜서 병영의 관리와 고을의 수령을 체포하자, 북평사(北評事)정문부(鄭文孚)는 산골짜기로 도망가서, 최배천(崔配天) · 이붕수(李鵬壽) 등 6ㆍ7명의 고을 수령들과 협의하여 군사를 일으키려고 계획하면서 사태를 관망하였다. 마침 조정에서 방문(榜文) 한 장을 보냈는데, 8도의 의병과 관군이 곳곳에서 왜적을 무찌르고, 명나라 원병(援兵) 10만 명이 조만간 평양에 도착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이 방문을 읽어본 함경도 백성들은 매우 두려워하였다. 그해 11월 5일 정문부 등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명천과 길주에서 군사를 일으키니, 군사가 1천여 명에 이르렀다. 부대를 편성하고 군율을 엄하게 세우자, 반란군에 가담하였던 백성들이 의병에 참가하는 자가 많았다. 정문부는 이들의 전과를 따지지 않고 모두 받아들이자, 사람들이 기꺼이 그를 따랐다. 성해응(成海應)의 『북방충의록(北方忠義錄)』에서는 국경인의 숙부 국세필도 자진하여 의병에 참가하였으므로, 정문부가 일단 그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단천 군수(端川郡守) 강찬(姜璨)도 군사를 일으켜서 정문부의 의병을 후원하여 군사의 사기를 돋우었다. 정문부는 그때 28세였는데, 의병대장((義兵大將)으로 추대되었다. 종성 부사 정현룡(鄭見龍)과 경원 부사 오응태(吳應台)이 차장(次將)이 되고, 경성(鏡城) 사람 강문우(姜文佑)가 전방 돌격대를 맡았다. 각 진(鎭)의 수장(守將)들과 세력을 합쳐서 의병을 편성하였다. 정문부의 격문을 받은 회령의 유생 신세준(申世俊)과 오윤적(吳允迪)은 국경인을 유인하여 참살(斬殺)하였다.

정문부의 의병은 명천 · 길주에 주둔한 왜군과 장덕산(長德山)에서 싸워 대승하였는데, 이것을 <장덕산 대첩>이라고 한다. 그해 12월 쌍포(雙浦) 전투와 1593년(선조 26) 1월 백탑교(白塔郊) 전투에서 왜군을 크게 무찔러서 관북지방을 완전히 수복하였다.[『북관 대첩비(北關大捷碑)』] 백탑교 싸움에는 남관(南關)의 의병대장 한인제(韓仁濟)가 좌위장(左衛將)이 되어, 북관(北關)의 의병과 함께 왜적과 싸워서 전공을 세웠다. 여기서 함경도 남쪽의 남관 의병과 함경도 북쪽의 북관 의병은 서로 협력하여 왜군과 싸워서 승리한 것을 알 수 있다.[『북방 충의록』] 남관과 북관의 의병들이 곳곳에서 왜적을 공격하여 승리하자, 1593년 3월 카토는 함경도에 주둔한 왜군을 거두어 서울로 철수하였다. 포로로 잡은 임해군 · 순화군과 대신 등을 안변에서 서울 근교로 옮겼다. 그해 4월 명나라와 일본의 화의가 성립되어, 그해 7월 두 왕자 일행은 부산에서 석방되었다.

1593년 봄에 비로소 함흥의 감영(監營)으로 돌아온 관찰사 윤탁연은 북관의 의병을 거느린 정문부와 손을 잡지 못하고 서로 알력이 생겼다. 이는 당시 경상도 관찰사 김성일(金誠一)이 의병을 다독거려, 김시민(金時敏)의 <제 1차 진주성(晉州珹) 싸움>에 의병장(義兵將) 곽재우(郭再祐)를 투입하여 대첩(大捷)을 거둔 것과 서로 대비된다. 처음에 정문부가 직급이 낮은 6품의 북평사로서 스스로 의병대장이라 일컫고 2품의 관찰사 윤탁연에게 관문(關文)을 보내왔다. 윤탁연은 그 문투가 대등한 입장에서 맞상대하려는 느낌을 받고, “평사(評事)는 일개 막료의 관직이니, 마땅히 감사의 지휘를 받아야 한다.”고 엄명하였으나, 젊은 정문부는 그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 이리하여 정문부가 전후로 세운 전공(戰功)을 윤탁연이 모두 사실과 다르게 조정에 보고하였다. 그때 윤탁연은 56세였고, 정문부는 28세였으므로, 윤탁연는 정문부의 아버지뻘 되는 사람이었다. 정문부의 성격이 고집이 세고 사교성이 없었던 탓도 있었다.

어느 날 정문부의 부하가 왜적의 수급(首級: 목)을 베어 가지고 관남을 지나갔는데, 순찰사 윤탁연이 모두 빼앗아 자기 부하들에게 나누어주어 전공으로 삼게 하고, 조정에 아뢰기를, “정문부의 행동은 매우 불궤(不軌)합니다.”고 하였다. 또 어느 날 의병대장 정문부가 왜적을 추격하여 함흥에 이르렀으나, 관찰사 윤탁연을 만나보지 않고 돌아갔다. 윤탁연이 크게 노하며 전령(傳令)을 보내어 정문부를 뒤쫓아 가서 말하기를, “평사가 왜적을 놓아서 내보낸 죄를 지금 당장 따져 물어야 하겠으니, 속히 돌아오라.” 하니, 정문부가 그 전령에게 대답하기를, “순찰사가 왜적을 놓아서 들여보냈기 때문에 의병장도 적을 놓아서 내보낸 것뿐이니, 따져 물을 만한 이유가 없다.” 하였다. 그때 관찰사 윤탁연은 대노하여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조정에 보고하기를, “정문부는 함부로 발호(跋扈)하는 자입니다.”고 하였다.[『선조수정실록』 선조 26년 1월 1일]

1593년(선조 26) 1월 1일 행재소에서 사신을 함경도에 보내어 그 실상을 조사하였는데, 모두 관찰사 윤탁연을 옹호하고 의병대장 정문부의 공을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다. 조정에서 단안을 내려 전공을 정현룡에게 돌려서 그를 함경도병마사에 올려서 임명하고, 정문부는 단지 당상관(堂上官)으로 올려서 길주부사(吉州府使)에 임명하였다. 『북관 대첩비(北關大捷碑)』에서는, “그때 관찰사 윤탁연은 정문부가 자기의 지휘를 받지 않는 것에 분노하고, 의병의 공적이 자기의 공적보다 많은 것을 싫어하여, 조정에 보고할 때 대개 무고하거나 엄폐하였기 때문에 정문부가 포상(褒賞)을 받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현종 때 함경도 관찰사 민정중(閔鼎重)과 북평사 이단하(李端夏)가 사실을 자세히 조사하여 조정에 보고하여, 정문부를 찬성(贊成)에 증직하고, 경성의 어랑리(漁郞里)에 창렬사(彰烈祠)를 건립하고 『북관 대첩비』를 세웠다. 창렬사는 정문부 등 북관의 의병장(義兵將)들을 모시고 제사지내는 사당이다. 『북관 대첩비』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에게 약탈당하여 일본의 야스쿠니신사[靖國神祠]에 방치되었다가, 2005년에 대한민국에 반환되었다. 2006년 대한민국에서는 『북관 대첩비』를 북한에 돌려보내 경성의 어랑포에 있는 창렬사의 제자리에 다시 세웠다. 『북관 대첩비』의 반환으로 말미암아 오늘날 정문부의 의병 활동이 재조명되어 그 업적을 높이 평가 받게 되었다.

[종계변무(宗系辨誣)와 윤탁연]
‘종계(宗系)’는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왕가(王家)의 가계(家系)’를 말하고, ‘변무(辨誣)’는 ‘잘못 무고(誣告)된 것을 바로잡는다’는 뜻이다. 중국 명나라의 율령(律令) 체제의 근간인 『대명회전(大明會典)』에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고려의 권신 이인임(李仁任)의 아들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조선에서는 2백여 년에 걸쳐 30여 회 이상 주청사(奏請使)를 보내어 이것을 바로잡아 달라고 명나라에 요청하였으나, 명나라에서는 『대명회전』을 마음대로 고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대명회전』에 태조 이성계가 어찌하여 고려 권신 이인임의 아들로 기록된 것인가에 대해서는, 먼저 고려에서 이성계의 반대파가 무함하였을 가능성도 있고, 다음으로 조선 초기 명나라와 관계가 나빴던 시기에 명나라에서 의도적으로 잘못 기록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고려 말엽에 이성계가 최영과 함께 권신 이인임과 염흥방(廉興邦)을 제거하였으므로, 이성계와 이인임은 원수 간인데, 부자 관계로 기록된 것은 숨겨진 사연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고려 공양왕 때 이성계 일파가 정권을 잡고 우왕(禑王)ㆍ창왕(昌王) 부자를 죽이자, 1390년(공양왕 2) 윤이(尹彛)ㆍ이초(李初)가 몰래 명나라로 가서 이성계 일당을 징벌해 달라고 요청하였는데, 이때부터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은 권신 이성계가 자기 임금을 죽이고 왕이 되려고 한다고 매우 불신하였다. 1392년 조선이 건국한 이후에 양국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는데, 1394년(태조 3) 명나라의 고유제(告由祭)의 축문 가운데, “고려 배신(陪臣) 이인임의 아들 이성계”라는 구절이 있었다.

1400년 태종 이방원(李芳遠)이 왕위에 오르면서 명나라와의 관계가 정상화되었다. 당시 중국 명나라에서도 태조 주원장이 죽고, 그의 제 4자 연왕(燕王) 주체(朱棣)가 조카 건문제(建文帝)를 몰아내고 1402년(태종 2) 황제 곧 성조(成祖) 영락제(永樂帝)가 되었다. 조선의 태종과 명나라 영락제는 서로 제위에 오르기 전에 알고 지내던 사이로서 양국 관계가 급속히 가까워졌으나, <종계변무> 문제에 관해서 명나라에서는 이것이 선대 명나라 『태조실록』과 주원장의 ‘조훈(祖訓)’ 등에 실려 있어서 마음대로 고칠 수가 없다고 하였다.

1502년(연산군 8) 명나라 효종(孝宗) 홍치제(弘治帝)가 내각(內閣) 태학사(太學士) 이동양(李東陽) · 초방(焦芳) 등에게 『대명회전』 180권을 편찬하게 하였는데, 「외이(外夷) 조선전(朝鮮傳)」에 ‘조훈’의 기록을 그대로 옮겨 실었다. 이때부터 조선 측에서 <종계변무>를 위한 주청사를 거듭 보내서 정정해 주도록 요청하였으나, 명나라 측에서는 태조의 조훈(祖訓)을 마음대로 고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1518년(중종 13) 예조판서 이계맹(李繼孟)이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책봉을 요청하는 주청사로서 북경에 갔을 때, 명나라 측에서 『대명회전』 가운데 조선전의 항목에서 종계가 무고를 받은 사정을 물어왔다. 이때 명나라에서 『대명회전』의 속편을 편찬하려고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1519년(중종 14) 이조판서 남곤(南袞)을 긴급히 주청사로 보내자, 명나라 예부에서 세종(世宗) 가정제(嘉靖帝)의 황지(皇旨)를 전하였다. 이 황지에는, 종계가 이인임의 후손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태종(太宗) 문황제(文皇帝)의 조지(詔旨)를 받들어 개정하도록 하였다”라는 내용과 이성계가 고려의 공민왕(恭愍王)ㆍ우왕ㆍ창왕ㆍ공양왕의 4왕을 죽였다는 악명(惡名)은,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서 분명하게 ‘공민왕 왕요(王瑤)가 혼미하여 이성계가 대중에게 추대를 받아서 왕이 되었다.’라고 고쳤다”라는 내용이 있었다. 명나라 태종 문황제는 성조 영락제이다.

이때부터 명나라에서 『대명회전』의 속편을 편찬하는 것을 알고, 조선의 중종과 명종은 <종계변무>를 위한 주청사를 잇달아 파견하였다. 1539년(중종 34) 주청사 권벌(權橃) 등을 보내어 본국의 종계와 태조의 악명에 대한 두 가지 일을 상세히 고증하여 자세히 전말을 『대명회전』에 실어 달라고 요청하였고, 1563년(명종 18) 김주(金澍) 등을 보내어, 종계변무의 전후 사정을 속간(續刊)하는 『대명회전』에 자세히 기록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1567년 선조가 즉위하자, 그때 명나라에서는 『대명회전』의 속편을 편찬하는 작업을 거의 마무리하는 단계에 있었다. 선조는 조종조에서 2백여 년 동안 명나라와 교섭하여 이룩하지 못한 『대명회전』에 조선 태조 이성계의 세계(世系)를 수정하는 일을 자기 당대에 반드시 이룩하리라고 굳게 결심하였다. 이리하여 선조는 거듭 주청사를 보내어 명나라 예부에 종계변무를 간청하였다. 당시 율곡(栗谷) 이이(李珥)는 “종계가 무함(誣陷)을 당하였는데도 오랫동안 이를 소명하여 해결하지 못한 것은 사신다운 사람을 얻지 못한 탓이다.”고 하였다. 선조 시대 <종계변무>는 시대적 절대 과제였던 것이다.

1573년(선조 6) 조선에서는 종계변무를 간청하려고 주청사를 명나라에 보냈는데, 서장관 윤탁연이 정사(正使) 이후백과 부사 윤근수 등을 모시고 명나라 북경(北京)에 갔다. 이때 윤탁연은 명나라 예부를 찾아가서, 종계변무 등의 전후 사정을 『속수 대명회전』에 자세히 기록하여 넣어 달라고 간청하니, 예부 상서 육수성(陸樹聲)이 신종(神宗) 만력제(萬曆帝)의 황지를 전하기를, “종계(宗系)는 각각 본원(本源)이 다르므로 이미 ‘이인임과는 같지 않다’고 기록하고, 또 나라의 태조가 된 것은 여러 사람의 추대(推戴)에서 나온 것이므로, ‘왕씨(王氏)를 시해하였다는 것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고 기록하였다. 우리 황조(皇祖)의 대훈(大訓)은 본디 한때의 잘못 전해진 소문에서 나온 것이다. 그 후손들의 변론하는 말은 실로 일념(一念)의 효성에서 나온 것이니, 염려할 것 없다.” 하였다. 여기서 황조의 대훈이라는 것은 명태조 주원장의 조훈을 말한다. 또 황제의 칙서(勅書)에 이르기를, “그대 나라 시조 태조(太祖) 이단(李旦)이 오랫동안 옳지 않은 누명을 쓰고 있었는데, 우리 열성조(列聖祖)께서 굽어 살피심으로 이미 깨끗이 의혹을 씻어 내고 고쳐서 바로잡았다.” 하였다. 칙서 속의 이단은 이성계이다.

주청사 이후백 · 윤근수와 서장관 윤탁연은 1573년(선조 6) 2월 28일 중국 북경으로 떠났다가 그해 9월 16일에 돌아왔으니, 그 사행(使行)은 무려 6개월 보름이나 걸리는 길고긴 여정(旅程)이었다. 돌아오자마자, 선조가 전교하기를, “주청사 이후백에게는 가자(加資)하고 전지 30결(結)과 외거노비(外居奴婢) 5구(口)를 아울러 내려주고, 부사 윤근수에게는 가자하고 전지 20결과 노비 3구를 아울러 내려주고, 서장관 윤탁연에게는 가자하고 전지 15결을 내려주라.” 하였다.[『선조실록』 선조 6년 9월 16일]

1576년(선조 9) 『속수 대명회전』 228권이 완성되었는데, 종계와 악명이 모두 조선 측의 요구대로 개정되었다. 그러나 선조는 개정된 『대명회전』의 조선전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려고 거듭 사신을 보내어 수정된 『대명회전』 완질을 보내달라고 요청하였다. 1581년(선조 14) 주청사 김계휘(金繼輝)를 보내어 수정된 『대명회전』 완질을 보내달라고 요청하였으나, 명나라 예부에서 『속수 대명회전』이 아직 반포되지 않았다고 하여 거절하였다. 1584년(선조 17) 주청사 황정욱이 역관 홍순언(洪純彦)과 함께 명나라에 가서 개정된 『대명회전』을 반포해 주도록 요청하니, 신종이 반포되는 날 바로 보내주겠다고 약속하였다. 1588년(선조 21) 주청사 유홍(兪泓)이 중국에 가서 개정된 『대명회전』을 반포하여 주기를 요청하니, 예부에서 아직 황제가 열람하지 않았다고 하여 새로 간행된 『대명회전』을 주지 않았다. 1590년(선조 23) 사은사 윤근수가 북경에서 돌아올 때 신종 만력제가 개정된 『대명회전』 전체 한 질을 보내주었다. 선조는 『속수 대명회전』을 읽어보고 너무나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면서, “내가 이제야 조상들께 할 말이 있게 되었다.” 하고, 황제가 보내준 망의(蟒衣)를 입고 친히 종묘에 가서 고유제(告由祭)를 지내고, 태평관(太平館)에서 사신으로 갔던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상촌고(象村稿)』 권23 「수충익모수기광국공신 숭정대부 익성군 홍공묘지명(輸忠翼謨修紀光國功臣崇政大夫益城君洪公墓誌銘)」]

1591년(선조 24) <종계변무>를 위하여 그 동안 주청사로서 중국 명나라에 왕래한 사람들을 책훈할 때 윤탁연은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에 책훈되었다. 윤탁연은 정2품상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승품되고, 칠계군(漆溪君)으로 봉해졌으며, 특별히 비변사(備邊司) 유사당상(有司堂上)에 임명되었다.

[성품과 일화]
윤탁연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호곡집』 권18 「호조판서 윤공묘갈명」] 그는 생김새가 방정하고 위엄이 있었으며, 마음가짐은 항상 즐겁고 편안하였다. 평생토록 남과 교유(交遊)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아니하였고, 사람들과 편당(偏黨)짓는 것을 즐겨하지 않았다. 그는 효도와 우애를 타고나서, 부모를 정성껏 모시고 아우들을 사랑하였다. 조상의 제사는 하나같이 살아있는 사람을 섬기듯이 정성스럽게 하고, 아침저녁으로 반드시 사당(祠堂)에 배알하였다. 작은 아우가 집이 없어 고생하는 것을 보고, 가산을 팔아서 집을 마련하여 주었다. 그가 집안에서 하는 행동은 다른 사람이 따라가지 못할 점이 많았다.

어려서부터 문학에 소질이 있어서 시문(詩文)을 잘 짓는다고 세상에 소문이 널리 났었다. 커서는 문장이 아름답다는 소문이 퍼져, 당시 문장을 잘하는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와 구봉(龜峯) 송익필(宋翼弼) 등이 찾아와서 교유하기를 간청하였다. 선조 때 ‘8대 문장가[八文章]’는 윤탁연을 비롯하여 이산해 · 최립(崔岦) · 최경창(崔慶昌) · 백광홍(白光弘) · 송익필 · 이이 · 이순인(李純仁)이다.[『선조수정실록』 선조 17년 2월 1일, 『선조수정실록』 선조 22년 12월 1일] 그들은 젊었을 때 매일 서울 근교의 경치 좋은 숲속에 모여서 시(詩)를 짓고 술을 마시면서 문학을 논하였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들을 ‘8문장(八文章)’이라고 불렀다. 모두 시문에 능하여, 선조 때 크게 출세하였는데, 선조가 문학을 좋아하여 그들을 특별히 아끼고 사랑하였기 때문이다.

윤탁연은 문장을 지을 때에 억지로 글을 꾸며서 쓰지 아니하고 자연스럽게 뜻이 통하게 하였으므로, 문맥이 부드럽고 아름다웠다. 그러므로 그의 시를 사랑하여 전송(傳誦)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사람들은 모두 그가 문형(文衡), 곧 홍문관 대제학이 되지 못한 것을 유감스럽게 여겼다. 윤탁연이 일찍이 절구(絶句)의 시(詩) 한 수를 지어 자기의 숨은 뜻을 나타냈는데, 그 시에 보면, “평생에 동과 서로 난 두 갈래 길을 미워하여[生憎岐路有東西], 구름과 함께 떠다니고 학과 더불어 깃들고 싶었다네[雲與同行鶴與棲]. 흥이 나면 술에 흠뻑 취하게 되는 때도 있으나[乘興有時成大醉], 취한 얼굴로 어느 편 사람을 향하여 허리를 구부릴꼬[醉顏何處向人低].”하였다.[『호곡집』 권18 「호조판서 윤공묘갈명」] 이 시는 동서(東西) 분당(分黨)으로 나누어 당파 싸움을 하던 시대에 향배(向拜)를 정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윤탁연의 심정을 읊은 것인데, 당시 선비들이 애송(愛誦)하던 유명한 시다. 윤탁연은 당파가 없었기 때문에 서인과 동인들의 공격을 끊임없이 받아서, 실록의 사평(史評)에서 온갖 비난을 당하고, 험담을 받았다.

1567년 6월 명종이 오랜 지병을 앓다가, 34세의 나이로 운명할 때, 영의정 이준경이 내전에서 유교를 받았는데, 승정원 주서 윤탁연을 불러들여 18자가 되는 명종의 유언을 글로 받아쓰게 하였다. 이때 윤탁연은 명종의 후사(後嗣)를 “덕흥군(德興君)의 셋째 아들” 하성군(河城君) 이균(李畇)이라고 쓰면서 ‘석 삼(三)’자를 ‘석 삼(參)’자로 써서 다른 사람이 가필(加筆)하지 못하도록 하니, 사람들이 그 민첩한 기지에 감탄하였다. 그때 사람들이 임기응변의 재능에 뛰어난 사람을 꼽을 때 윤탁연과 그 동료인 황대수(黃大受) 두 사람을 나란히 일컬었다.[『호곡집』 권18 「호조판서 윤공묘갈명」]

1570년(선조 3) 홍문관 수찬으로 있을 때 경연 검토관이 되어, 경연에서 선조의 그릇된 점을 바로잡으려고 직간(直諫)하다가, “이런 일은 진(晉)나라 간문제(簡文帝)도 하지 아니한 바입니다.” 하였다. 이에 선조가 화를 내어 큰소리로 말하기를, “네가 어찌 나를 간문제에게 비교하는가.” 하니, 윤탁연이 당황하지 않고 천천히 대답하기를, “허물을 고치면 요(堯)임금 · 순(舜)임금과 같은 좋은 임금이 될 것이지만, 허물을 고치지 아니하면 걸(桀)임금· 주(紂)임금과 같은 나쁜 임금이 될 것이니, 어찌 특별히 간문제처럼 어리석은 임금이 될 뿐이겠습니까?” 하였다. 선조의 노여움이 더욱 심해졌으나, 정승 홍섬(洪暹)의 도움을 받아서 선조의 노여움을 가까스로 풀게 하여, 겨우 징벌을 면할 수가 있었다.[『호곡집』 권18 「호조판서 윤공묘갈명」] 젊었을 때 윤탁연은 선조에게 직언(直言)하기를 서슴지 않았고, 죽음을 불사하였던 강직한 신하였던 것이다.

1589년(선조 22) 호조 판서에 임명되었다가, 다시 형조 판서로 옮겼을 때였다. 특진관(特進官) 윤탁연이 승지 윤국형(尹國馨)과 같이 경연에 나가려고 빈청(賓廳)에 대기하고 있다가, 당시 왕자들의 횡포가 점점 심해졌으므로, 윤탁연은 왕자들이 뇌물을 받고 형옥(刑獄)을 좌지우지한다고 극단적으로 비판하였다. 승지 윤국형이 입대하여 이것을 아뢰었는데, 선조가 그 말을 누구에게 들었느냐고 묻자, 윤탁연에게 들었다고 대답하였다. 선조가 윤탁연을 돌아보고 물었는데, 윤탁연이 임금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혹시 임금의 뜻을 거스를까 두려워하여 자기는 모르는 일이라고 대답하였다. 선조가 크게 노하여 승지 윤국형을 상주목사(尙州牧使)로 내쫓았다. 그때 우의정 심수경(沈守慶)이 물러나와 윤탁연을 나무라기를, “그대가 왕자들의 일을 극단적으로 비판하는 말을 나도 들었는데, 그대가 어찌 그것을 잊었다는 말인가?” 하니, 윤탁연이 얼굴을 붉히면서 대답하지 못하였다. 윤탁연은 선조를 20여 년 이상 섬기면서 그 불같은 성격을 잘 알기 때문에 직언하기를 망설였던 것이다. 그때 제 1왕자 임해군과 제 6왕자 순화군의 비행을 직언하여 그들의 전횡을 미리 막았더라면, 후일 임진왜란 때 함경도에서 두 왕자 때문에 여러 사람들이 고통을 겪는 일을 미리 막았을지도 모른다.[『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18]

1582년(선조 15) 6월 사간원이 아뢰기를, “경상도 감사 윤탁연은 몸가짐과 일처리에 있어서 물의가 많고, 본직에 제수되고서도 삼가지 않아서 ‘속목 감사(贖木監司)’라는 비난을 받습니다.” 하니, 선조가 대답하기를, “윤탁연은 재간이 있어서 직책을 맡긴 것이다. 풍문으로 듣고 사람을 탄핵하는 것은 반드시 사실이 아니라고 여긴다. 이른바 속형(贖刑)으로 받은 포목(布木)을 어찌 감사가 자기 집으로 가져다가 이것을 쓰겠는가? 이 말은 더욱 타당치 않다.” 하였다.[『선조실록』 선조 15년 6월 8일] ‘속목 감사’란 그가 경상도 관찰사로 있을 때 죄인이 속형으로 바친 포목, 즉 속목(贖木)을 자기 집으로 가져다가 썼다고 받은 비난이다.[『선조실록』 선조 27년 10월 16일] 선조는 윤탁연의 정직을 믿고 그 문장을 아껴서 끝까지 보호하여 주었다.

[묘소와 후손]
1711년(숙종 37) 나라에서 시호를 헌민(憲敏)이라고 내려주었다. 묘소는 경기도 광주(廣州) 세동(細洞)의 선영(先塋)에 있는데, 호곡(壺谷) 남용익(南龍翼)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호곡집』 권18 「호조판서 윤공묘갈명」] 1797년(정조 21) 함흥의 창의사(彰義祠)에 남관 의병장 12명과 함께 합향(合享)되었다. 함흥의 창의사는 임진왜란 직후에 함흥 사람들이 남관에서 의병을 거느리고 활동한 의병장을 제향하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12명의 의병장 중에서 함경도 관찰사 윤탁연이 별시 무과에서 선발하여 임명한 비장(裨將)이 절반을 넘었는데, 관찰사와 비장을 함께 제향할 수 없다고 하여 처음에는 윤탁연을 제외하였다. 그 뒤 2백여 년이 지나서 정조 때 승지 이익운(李益運)이 아뢰기를, “함흥 사람 판서 문덕교(文德敎)의 『임진록(壬辰錄)』을 고찰하면, ‘윤탁연이 의사(義士)를 모집하여 의병 부대를 편성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사우(祠宇)를 건립할 때에 당연히 함경도 감사 윤탁연을 함께 모셔야 하였으나, 감사와 비장을 아울러 모시는 것이 모양새가 나쁘다고 하여 함께 제향하지 않았으니, 일체로 합쳐서 제사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정조가 그 의견에 따라서 합향하게 하였다.[『정조실록(正祖實錄)』 정조 21년 6월 1일]

윤탁연의 첫째 부인 여산 송씨(礪山宋氏)는 중추부 동지사 송맹경(宋孟璟)의 딸인데, 자녀는 2남을 두었다. 장남 윤경원(尹慶元)은 한성부윤(漢城府尹)을 지냈는데, <임진왜란> 때 나라를 위해 죽었으므로,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차남 윤길원(尹吉元)은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檢閱)과 승지를 지냈다. 둘째 부인 전의 이씨(全義李氏)는 현감 이염(李念)의 딸인데, 자녀는 3남 2녀를 두었다. 3남은 윤희원(尹喜元)이고, 4남은 윤상원(尹祥元)이며, 5남은 윤영원(尹榮元)이다. 장녀는 현감 이유심(李幼深)의 처가 되었고, 차녀는 현령 남석(南錫)의 처가 되었다.

[참고문헌]
■ 『명종실록(明宗實" 錄)』
■ 『선조실록(宣祖實錄)』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정조실록(正祖實錄)』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
■ 『상촌고(象村稿)』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호곡집(壺谷集)』
■ 『북관 대첩비(北關大捷碑)』
■ 『북방 충의록(北方忠義錄)』
■ 『계갑일록(癸甲日錄)』
■ 『기재사초(寄齋史草)』
■ 『기축록(己丑錄)』
■ 『난중잡록(亂中雜錄)』
■ 『문소만록(聞韶漫錄)』
■ 『부계기문(涪溪記聞)』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월정만필(月汀漫筆)』
■ 『유천차기(柳川箚記)』
■ 『임하필기(林下筆記)』
■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
■ 『조천기(朝天記)』
■ 『청성잡기(靑城雜記)』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혼정편록(混定編錄)』
■ 『강좌집(江左集)』
■ 『강한집(江漢集)』
■ 『고담일고(孤潭逸稿)』
■ 『구봉집(龜峯集)』
■ 『농포집(農圃集)』
■ 『도곡집(陶谷集)』
■ 『도암집(陶菴集)』
■ 『동강집(東岡集)』
■ 『동호집(東湖集)』
■ 『면암집(勉菴集)』
■ 『묵수당집(嘿守堂集)』
■ 『미암집(眉巖集)』
■ 『사류재집(四留齋集)』
■ 『서계집(西溪集)』
■ 『서하집(西河集)』
■ 『소재집(穌齋集)』
■ 『송자대전(宋子大全)』
■ 『약봉유고(藥峯遺稿)』
■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
■ 『연천집(淵泉集)』
■ 『옥봉집(玉峯集)』
■ 『외재집(畏齋集)』
■ "『월사집(月沙集)』
■ 『율곡전서(栗谷全書)』
■ 『은봉전서(隱峯全書)』
■ 『이계집(耳溪集)』
■ 『이암유고(頤庵遺稿)』
■ 『인재집(忍齋集)』
■ 『장암집(丈巖集)』
■ 『중봉집(重峰集)』
■ 『지천집(芝川集)』
■ 『지퇴당집(知退堂集)』
■ 『지호집(芝湖集)』
■ 『초당집(草堂集)』
■ 『학봉전집(鶴峯全集)』
■ 『호음잡고(湖陰雜稿)』

■ [집필자] 이현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