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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수근(愼守勤)

서지사항
항목명신수근(愼守勤)
용어구분인명사전
분야왕족
유형인물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총론]
[1450년(세종 32)∼1506년(연산군 12) = 57세]. 조선 중기 성종~연산군 때의 문신. 좌의정을 지냈고, 봉작(封爵)은 익창 부원군(益昌府院君)이며 시호는 신도(信度)다. 자는 경지(敬之) 또는 근중(勤仲)이고, 호는 소한당(所閒堂)이다. 본관은 거창(居昌)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영의정(領議政)신승선(愼承善)이고, 어머니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세종(世宗)의 아들 임영대군(臨瀛大君) 이구(李璆)의 딸이다. 그의 막내 누이가 연산군에게 시집가서 연산군 왕비가 되었으므로 연산군과 처남매부 사이였고, 그의 둘째딸이 진성대군(晉城大君)에게 시집가서, 중종(中宗)의 잠저(潛邸) 때 부인 신씨(愼氏: 단경왕후)가 되었으므로 중종의 장인이 된다. 박원종(朴元宗)의 <중종반정(中宗反正)>에 반대하다가, 신수근의 형제 3인이 모두 피살당하였다.

[성종 시대 활동]
1475년(성종 6) 성종이 동대문 밖의 선농단(先農壇)에 나아가서 제사를 지낼 때 25세의 신수근은 제사상을 차리는 관리인 수조관(受俎官)으로 제사를 도왔기 때문에, 한 자급이 승품(陞品)되었다.[『성종실록(成宗實錄)』 성종 6년 1월 25일] 여기서 신수근은 음보(蔭補)로서 참하관(參下官)의 여러 관직을 지냈던 것을 알 수 있다. 아버지 신승선이 세종의 넷째아들 임영대군의 사위였으므로, 그 집안 배경에 의하여 과거에 급제하지 않고도 청요직(淸要職)에 올라갈 수 있었다. 1484년(성종 15) 신수근은 마침내 정3품하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승품하여 행(行)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에 임명되었다. 그때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신수근과 한건(韓健)은 자기 집안 세력을 믿고서 교만하고 방종하였다.”라고 하였다.[『성종실록』 성종 15년 6월 23일] 신수건과 한건은 모두 왕가와 혼인 관계를 맺은 외척 집안 출신이었는데, 연산군 초기에 신수근의 아버지 신승선은 영의정이 되었고, 한건의 아버지 한치형(韓致亨)은 좌의정이 각각 되었다. 그러므로 사림파(士林派) 사관(史官)들이 그들을 훈구파(勳舊派)로 몰아서 아울러 헐뜯었다.

1486년(성종 17) 사헌부 장령을 겸임하였다.[『성종실록』 성종 17년 12월 3일] 이때부터 대간(臺諫)에서 활동하였으나, 『성종실록(成宗實錄)』에서 그 활동한 기록이 없는 것을 보면, 그 반대파 사관들이 실록을 편찬할 때 그의 활동을 사료(史料)에서 뽑아서 실록에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으로 추측된다. 1487년(성종 18) 3월 그의 누이동생 신씨(慎氏)가 세자빈(世子嬪)으로 간택되었는데, 그때 신씨는 16세였고, 연산군은 12세였다. 성종과 성종의 어머니 인수대비(仁粹大妃)가 병조 판서 신승선의 딸을 세자빈으로 뽑은 것은 임영대군의 외손녀로서 이씨 왕가의 혈통이라는 점을 고려하였기 때문이다. 신승선의 딸 신씨가 세자빈으로 간택된 것은 거창 신씨(居昌愼氏) 가문의 큰 영광이었다. 그것이 나중에 신수근에게 누이와 딸 두 사람 중에서 누구를 선택해야 할는지 기막힌 운명에 처하게 만들 줄은 아무도 몰랐다. 1487년(성종 18) 7월 아버지 신승선은 정2품상 정헌대부(正憲大夫)로 승품되어, 그해 9월 의정부 좌참찬(左參贊)이 되었으나, 신수근 3형제의 승진에 대한 기록은 없다. 신수근 3형제의 승진도 있었던 것이 분명하지만, 사림파 사관들이 실록 기록에서 이를 누락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1489년(성종 19) 11월 아버지 신승선이 예조 판서가 되었다가, 1491년(성종 22) 12월 이조 판서가 되어, 문관(文官)의 인사행정을 도맡게 되었다. 1492년(성종 23) 2월 신수근은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진하였는데, 그때 성종이 신수근을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하였다.[『성종실록』 성종 23년 2월 9일] 그해 6월 신수근은 우부승지(右副承旨)로 승진하였다가, 9월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옮겼으나, 찾아온 친구와 승정원 협방(夾房)에서 술을 몇 잔 마셨다고 하여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서 파직되었다.[『성종실록』 성종 23년 10월 4일] 1493년(성종 24) 윤5월 서반(西班)으로 옮겨서 정3품상 절충장군(折衝將軍) 중추부(中樞府) 첨지사(僉知府事)에 임명되었다가, 그해 6월 동반(東班)으로 돌아와서 정3품상 통정대부 호조 참의에 임명되었다.[『성종실록』 성종 24년 6월 27일]

1494년(성종 25) 11월 아버지 신승선은 마침내 정1품상 대광보국 숭록대부(大匡輔國崇綠大夫)로 승품되어, 의정부 우의정(右議政)이 되었다. 성종 말년에 영의정 윤필상(尹弼商), 좌의정 노사신(盧思愼), 우의정 신승선이 의정부의 3의정을 맡아서, 세 사람이 성종을 도와서 세종 시대 황희(黃喜) · 맹사성(孟思誠) · 허조(許稠)가 이룩한 업적과 비견할 만한 치적을 남겼다.

[연산군 초기 시대 신수근 부자의 활동]
1494년 12월 성종이 38세로 승하하고, 연산군이 19세로 즉위하였을 때 신수근은 호조 참의였고, 아버지 신승선은 의정부 우의정이었는데, 처음에 나이 어린 연산군을 처가의 장인 신승선과 처남 신수근 3형제에게 모든 것을 의지하였다. 1495년(연산군 1) 1월 연산군의 왕위 계승을 책봉(冊封)하는 중국 명(明)나라 사신이 오게 되었는데, 승정원에서 아뢰기를, “중국 사신의 접대에 쓸 물자를 각도로 하여금 미리 준비하게 하소서.” 하였다. 그때 20세의 연산군은 모든 일을 결정할 때 먼저 처남 신수근에게 비밀히 물어보고 전교하기를, “백성들이 바친 물자가 모두다 사옹원(司饔院)에 있으니, 필요한 숫자를 참작해 줄여서 배정하여 민폐(民弊)가 없도록 하라.” 하였다. 원래 소심한 연산군은 정사를 볼 때마다 처남 신수근에게 하나하나 물어보고 신수근의 의견에 따라서 결정하였으므로, 초기에는 어느 임금 못지않는 훌륭한 정치를 하였다. 그러나 실록에서 초기 연산군의 정사를 기록하기를, “당시에 왕이 가부를 결재할 일이 있으면, 비밀리 사람을 보내어 신수근에게 물어보고 결정하였으므로, 사람들은 말하기를, ‘왕의 명령은 모두 신수근에게서 나온다.’고 비난하였다.” 하였다.[『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연산군 1년 1월 7일] 1495년(연산군 1) 3월 아버지 신승선이 좌의정(左議政)이 되었는데, 그때 영의정 노사신과 우의정 정괄(鄭适)이 함께 의정부의 3의정을 맡았다. 초기에 연산군을 보필한 윤필상 · 노사신 · 어세겸(魚世謙) · 한치형 등은 나중에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생사를 불문하고 모두 극형을 받아서 그 집안이 완전히 멸망하였다.

1495년(연산군 1) 5월 연산군은 처남 신수근을 좌부승지로 임명하여 측근에 두고 어려운 정사를 직접 돕게 하였다. 그해 9월 중국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기 위하여 좌부승지 신수근을 선위사(宣慰使)로 임명하여 평안도로 보냈는데, 신수근이 선위사로 평안도에 갔다가 돌아와서 역로(驛路)를 지나면서 당장 개정하면 ‘편의할 4가지 일[便宜四事]’을 건의하였다. 그 내용을 보면, “첫째, 경기도 · 황해도 · 평안도의 역로가 피폐하니, 금년도에 한하여 역둔전(驛屯田)의 세금을 받지 말 것. 둘째, 평안도 압록강 강변에 수자리 사는 군사들이 가난하여 방어 장비를 스스로 갖추지 못하니, 군기시(軍器寺)의 낡은 갑옷과 본도의 목장에서 키우는 말들을 적당하게 나누어 줄 것. 셋째, 목책(木柵)을 지키는 권관(權管)을 학식과 무재(武才)가 있는 사람으로 임명하여 보낼 것. 넷째, 압록강 강변에서 오랑캐를 정탐하는 사람들의 수고가 많으니, 예전대로 녹용(錄用)할 것.” 등이었다. 모두 개선해야 할 내용이었으므로, 연산군이 원상(院相)들에게 의논하도록 명하니, 윤필상은, “신수근의 아뢴 4조목은 해당 부서로 하여금 그 편부(便否)를 검토하여 보고하게 한 다음에 다시 의논함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윤호(尹壕)는, “신수근의 4조목이 모두 다 쓸 만합니다.” 하니, 연산군이 윤호의 의견에 따라서 당장 개선하게 하였다.[『연산군일기』 연산군 1년 9월 15일] 윤호는 성종의 계비 정현왕후(貞顯王后)의 아버지인데, 그때 연산군은 윤호를 자기의 친 외조부(外祖父)로 알고 있었다.

그해 10월 신수근의 아버지 신승선이 영의정이 되었는데, 영의정 신승선, 좌의정 정괄, 우의정 어세겸이 3의정을 맡아서 연산군을 보필하였다. 1496년(연산군 2) 3월 신수근은 우승지(右承旨)가 되었다가, 1497년(연산군 3) 2월 좌승지(左承旨)가 되었다. 1497년(연산군 3) 2월 승지 표연말(表沿沫)이 병으로 사직하니, 연산군이 승지 강귀손(姜龜孫) · 신수근 · 송일(宋軼)에게 각각 한 자급씩 올려주었다.[『연산군일기』 연산군 3년 2월 20일] 이리하여 신수근은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품되었다. 그해 4월 아버지 신승선이 영의정에서 물러나서 거창부원군(居昌府院君)으로 봉해지고 경연(經筵) 영사(領事)를 겸임하게 되었다. 그해 6월 신수근은 승정원 도승지(都承旨)로 영전되었는데, 아버지 신승선이 비록 영의정에서 물러났으나, 아들 신수근이 도승지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해 12월 연산군의 왕비 신씨가 그토록 바라던 세자(世子) 이황(李*)을 낳았으므로, 거창 신씨 가문의 영광은 더할 나위 없이 드높았다. 그때 도승지 신수근이 홍귀달(洪貴達) 등과 함께 하례를 드리니, 연산군이 그들에게 각각 한 자급씩 올려주게 하였다. 이리하여 도승지 신수근은 정2품하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품되었다.[『연산군일기』 연산군 3년 12월 18일 · 12월 25일 · 12월 27일]

1498년(연산군 4) 7월 도승지 신수근이 사양하기를, “신은 왕명(王命)의 출납을 말아볼 뿐인데, 이와 같이 등급을 초월하여 발탁하시니, 공론(公論)이 무어라고 말할는지 진실로 두렵습니다.” 하니, 연산군이 전교하기를, “하늘이 주는 것이니, 경이 사양하려고 하더라도 사양할 수 없을 것이다.” 하였다.[『연산군일기』 연산군 4년 7월 27일] 신수근이 도승지에 임명되었을 때 사림파 대간들이 외척이 권력을 잡는 것은 옳지 않다고 극력 반대하여, 신수근이 사림파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기 전까지 도승지 신수근과 영의정 신승선이 연산군을 잘 보필하여 연산군은 비교적 착한 임금노릇을 하였다.

[<무오사화>와 연산군의 폭군화]
1483년(성종 14) 길재(吉再)의 제자 김숙자(金淑滋)의 아들 김종직(金宗直)이 승지로 등용되어 성종의 신임을 받게 되자, 그 제자들이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홍문관 · 사헌부 · 사간원의 3사(三司)에 자리를 잡고, 세조의 <계유정란(癸酉靖亂)>에 공훈을 세운 훈구파의 인물들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성종 말년에 훈구파와 사림파가 대립하여 서로 반목하였다. 일찍이 김종직이 함양군수(咸陽郡守)가 되었을 때 관찰사 유자광(柳子光)이 현판(懸板)에 쓴 시(詩)를 없애버렸기 때문에 두 사람의 감정이 나빴다. 또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金馹孫)춘추관(春秋館)사관(史官)이 되어, 훈구파 이극돈(李克墩)의 비행을 낱낱이 사초(史草)에 기록하자, 김일손과 이극돈의 사이가 나빠졌다.

1498년(연산군 4) 실록청(實錄廳)이 개설되어, 『성종실록』을 편찬할 때 당상관(堂上官) 이극돈은 편수관(編修官) 김일손이 기초한 사초에서 그 스승 김종직(金宗直)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발견하고, 「조의제문」을 단종을 죽인 세조를 비방한 글이라고 단정하였다. 이리하여 훈구파 유자광과 이극돈이 손을 잡고 연산군에게 김종직과 김일손 등을 무고하여, 1498년(연산군 4) 7월 <무오사화>를 일으켜서 이미 죽은 김종직을 부관참시(剖棺斬屍)하고, 김일손 · 권오복(權五福) · 권경유(權景裕)을 능지처참(陵遲處斬)하고, 이목(李穆) · 허반(許磐)을 참형(斬刑)에 처하고, 강겸(姜謙) · 표연말 · 홍한(洪瀚) · 정여창(鄭汝昌) 등 20여 명을 유배하였다. 이때 도승지 신수근은 원상(院相) 윤필상 · 노사신 · 한치형 등과 추국청(推鞫廳)의 당상관이 되어 사림파의 죄인들을 심문하는 데에 참여하였으나, 유자광과 이극돈이 주도하는 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 신승선은 영의정이었으나, 추국청에 참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아들 신수근에게 조심하라고 훈계하고 아예 조정에 발걸음을 끊어버렸다.

사림파를 싫어하던 연산군은 유자광과 이극돈의 사주를 받아 무고한 사람을 많이 죽였는데, 이때부터 연산군은 정치에 흥미를 잃고, 주색잡기(酒色雜技)에 몰두하였다. 연산군은 ‘채홍준사(採紅駿使)’를 전국 8도에 보내어 미인(美人)과 준마(駿馬)를 가려 뽑아서 궁중의 궁녀와 내구마(內廐馬)로 만들었다. 양가(良家)의 딸은 물론 공천(公賤) · 사천(私賤)의 여자를 가리지 않고 미인을 뽑아서 그 숫자가 1만 명에 이르렀다. 또 ‘채청녀사(採靑女使)’를 보내어 노래와 춤을 잘하는 미녀(美女)들을 따로 뽑아서 이들을 ‘흥청(興靑)’이라는 불렀다. 연산군은 밤낮으로 미인들과 사랑에 빠져서 정치를 돌보지 않았으며, 미인과 흥청을 거느리고 사냥터에 나가서 말을 달리면서 사냥을 하기도 하고, 술을 마시면서 가무(歌舞)를 즐기기도 하였다. 또 사방에서 빨리 달리는 준마(駿馬)와 사냥을 잘하는 매와 개[鷹犬]를 각각 1천 마리씩 궁중에 모아서 이를 관리하는 특별 관청과 관원을 두었다. 연산군은 사냥할 때마다 좋은 말을 골라서 타고 매를 어깨에 메고 사냥개를 앞세워서 유렵(遊獵)하고 술을 마시고 놀았다.[『연산군일기』 연산군 12년 9월 2일]

연산군은 정치에서 멀어지면서부터 주색잡기(酒色雜技)에 빠져 점차 포악한 임금으로 변해갔다. 이를 만류하던 신수근의 누이 왕비 신씨가 연산군으로부터 말할 수 없는 능욕을 당하자, 도승지 신수근이 연산군에게 간곡히 간하였으나, 연산군은 처남 신수근의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처남들을 견제하고 처갓집을 멀리 하였다. 그해 7월 신수근은 이조 판서에 임명되었는데, 그가 연산군에게 직언(直言)을 하자, 연산군은 그를 견제하려고 대간으로 하여금 이조 판서 신수근을 국문(鞫問)하도록 명하였다가 바로 석방하였다. 1499년(연산군 5) 8월 사헌부 지평(持平) 김효간(金效侃)이 아뢰기를, “옛사람이 말하기를, ‘법이 시행되지 않는 것은 귀근(貴近)으로부터 비롯된다.’ 하였는데, 신수근은 죄가 있는데도 국문하지 않고, 또 체임하지 않으니, 그가 장차 어떻게 징계되겠습니까.” 하니, 연산군이 그를 변호하기를, “나는 그가 딴 뜻이 없음을 알고 있으나 대간이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를 국문하도록 명하여 대간으로 하여금 그가 무죄한 것을 알도록 하고자 한 것이다.” 하고, 궤변을 늘어놓았다.[『연산군일기』 연산군 5년 8월 28일] 1500년(연산군 6) 3월 이조 판서 신수근이 병이라고 핑계하고 사직하는 글을 올리자, 연산군이 그를 체직시키고, 아무 실권이 없는 돈녕부(敦寧府) 판사(判事)에 임명하였다가, 그해 4월 우찬성(右贊成)으로 승진시켰다.[『연산군일기』 연산군 6년 3월 11일 · 4월 11일]

1501년(연산군 7) 6월 둘째왕자 창녕대군(昌寧大君) 이인(李仁)이 태어나자, 외삼촌 신수근이 안태사(安胎使)에 임명되어 아기의 태(胎)를 명산(名山)에 묻었는데[『연산군일기』 연산군 7년 6월 10일] 왕자의 태를 명산에 묻는 것은 샤머니즘에서 사람이 죽으면 다시 어머니의 태로 돌아간다고 믿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1502년(연산군 7) 5월 아버지 신승선이 67세로 돌아갔는데, 신수근은 동생 신수겸(愼守謙) · 신수영(愼守英)과 함께 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경기도 양주에서 여묘살이를 하였다. 1502년(연산군 8) 9월 연산군이 전교하기를, “신수근 · 신수영 3형제에게 지금 특별히 녹봉(祿俸)을 똑같이 주도록 하라.” 하였다. [『연산군일기』 연산군 8년 9월 28일] 그때 신수근 3형제가 부친 상중(喪中)에 있어서 벼슬에서 물러나서 3년 동안 무덤의 여막(廬幕)에서 지냈기 때문이다.


구수영(具壽永)은 세종의 여덟째아들 영응대군(永膺大君)의 사위로서 흥청을 뽑아서 노래와 춤을 가르쳐서 연산군의 주색잡기를 도왔기 때문에 연산군은 구수영을 매우 신임하여, 사돈 관계를 맺었으나, 연산군은 처남 신수근 3형제를 멀리 하였다. 1503년(연산군 9) 3월 연산군과 왕비 신씨 사이에 태어난 딸 휘순공주(徽順公主)를 구수영의 둘째아들 구문경(具文璟)에게 시집보내고, 연산군은 사위와 딸을 위하여 호화스러운 집을 짓고, 노비 60구와 벼 8천 석을 하사하였다. 의금부(義禁府) 판사(判事) 구수영의 세도가 오히려 신수근 3형제를 능가할 정도였다. 당시 연산군의 주색잡기를 도왔던 사람들은 구수영 · 임숭재(任崇載) · 강혼(姜渾) 등 여러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연산군의 주위를 둘러싸고 온갖 나쁜 짓을 다하였다. 사람들은 신수근이 이를 막지 못한다고 욕설을 퍼부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신수근도 연산군을 끼고 나쁜 짓을 한다고 비난하였으나, 신수근 3형제는 매부 연산군을 제지할 방도가 없었다.

[<갑자사화>와 신수근의 충의]
연산군은 생모 윤씨(尹氏)가 폐비(廢妃)된 사실을 모르고, 진성대군의 어머니 정현왕후를 친어머니인 줄로 알고 지냈다. 1504년(연산군 10) 3월 임사홍(任士洪)이 연산군에게 생모 윤씨가 폐출(廢黜)당하여 사사(賜死)된 경위를 자세하게 밀고(密告)하자, 극도로 흥분한 연산군은 생모 윤씨를 시기하여 죽게 만든 엄숙의(嚴淑儀)와 정숙의(鄭淑儀)를 잡아다가 때려죽이고, 윤씨를 폐출시킨 인수대비(仁粹大妃)를 찾아가서 머리로써 대비의 몸을 들이 받아서 절명하게 만들었다. 당시 폐출 논의에 참여하고 성종의 명령을 받들어 윤씨를 폐출시킨 신하들을 모두 대역죄로 추죄(追罪)하고, 그 자제(子弟)들까지 연좌시켰다. 연산군은 윤필상 · 한치형 · 한명회(韓明澮) · 정창손(鄭昌孫) · 어세겸 · 심회(沈澮) · 이파(李坡) · 김승경(金升卿) · 이세좌(李世佐) · 권주(權柱) · 이극균(李克均) · 성준(成俊)을 ‘12간신(奸臣)’이라고 지목하고, 모두 극형에 처하였다. 당시 윤필상 · 이극균 · 이세좌 · 권주 · 성준 5명은 아직 살아 있었으므로 본인들이 죽음을 당하였으나, 그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죽었으므로 부관참시를 당하였는데, 그 관을 쪼개어 송장의 목을 베고 골을 부수어 바람에 날려 보내거나 시체를 강물에 던졌다. 또 그 자제들을 모두 죽이고 부인은 종으로 삼았으며, 그들이 살던 집을 허물고 연못을 만들었다. 이것이 <갑자사화>인데, 이때 화(禍)를 당한 사람들이 1백여 명이나 되었다. 이때 신수근 부자도 그 죄에 연좌되었으나, 연산군은 신수근이 왕비 신씨의 오빠라고 하여 특별히 용서하여 주었다.

1504년(연산군 10) 7월 연산군이 전교하기를, “신수근 · 신수영 · 신수겸 3형제를 서용(敍用)하라.” 하였는데,[『연산군일기』 연산군 10년 7월 10일] 아버지의 3년상을 끝마쳤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신수근은 돈녕부(敦寧府) 첨정(僉正)에 임명되었다. <갑자사화> 때 겨우 죽음을 면한 이조 참판 성희안(成希顔)과 평성군(平城君) 박원종은 연산군을 몰아내기 위한 반정을 계획하였는데, 성희안이 세부 계획을 세우고 박원종이 동조 세력을 비밀히 포섭하였다. 박원종의 누이가 성종의 친형 월산대군(月山大君)에게 시집갔는데, 연산군이 과부가 된 큰 어머니 월산대군 부인을 범하였다. 월산대군 부인이 부끄러움을 참지 못하여 자결하면서 오빠 박원종에게 원수를 반드시 갚아달라고 부탁하였다고 한다. 박원종과 성희안은 성종의 적자(嫡子) 진성대군을 옹립하기로 결정하고 이조 판서 유순정(柳順汀) · 우의정 강귀손 · 무령군(武寧君) 유자광 등을 동조 세력으로 끌어들이는 한편, 진성대군의 장인 신수근을 끈질기게 설득하였다.

박원종이 우의정 강귀손을 시켜서 좌의정 신수근에게 넌지시 그 뜻을 묻기를, “누이와 딸 중 어느 쪽이 더 정이 가는가?” 하니, 신수근이 얼른 그 뜻을 알아차리고 정색을 하면서 대답하기를, “다만 세자(世子)의 영명(英明)함을 믿을 뿐이다.” 하였다. 그 말을 전해들은 박원종이 직접 신수근을 만나서 여러 가지 말로써 설득하고 은근히 그의 뜻을 탐색하였다. 일찍이 신수근이 호조 참의로 있을 때 박원종은 병조 참의로서 서로 친하게 지냈는데, 1495년(연산군 1) 3월 항거왜인(恒居倭人)이 어량(魚梁)을 불태우고 도망갔을 때 두 사람이 뜻을 모아서 대마도주(對馬島主)에게 그 범인들을 체포하여 보내게 하자고 합계(合啓)하였을 정도였다. 이때 신수근은 박원종의 제의를 거절하기를, “내가 이미 임금으로 섬겼는데, 매부를 폐위하고 사위를 세우는 일은 나는 못하겠다.” 하였다. 다음 날 박원종이 신수근을 찾아가서 함께 장기를 두다가, 일부러 장(將)을 집어서 궁(宮) 자리에 놓았는데, 궁은 임금을 뜻하므로, 장기판에서 장(將)으로써 궁(宮)을 바꾸는 것은 박원종의 임금을 바꾸자는 뜻을 은연중에 내비친 것이다. 그러나 신수근이 장기판을 밀치고 벌떡 일어나면서, “차라리 내 목을 잘라라.” 하니, 박원종이 신수근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고 판단하고 돌아섰다.[『서당사재(西堂私載)』 권11 「좌의정 신공 시장(左議政愼公諡狀)」]

1505년(연산군 11) 6월 연산군은 왕비 신씨에게 왕후의 옥책(玉冊)을 내리고, 그해 8월 왕비의 아버지 신승선에게 포장(褒奬)하는 은전을 성대하게 베풀었다. 그해 9월 연산군은 신수근의 집으로 예조 참판을 보내어 왕비의 아버지 신승선에게 제사를 지냈는데, 예절이나 제물이 마치 임금이 종묘(宗廟)에 제사지내는 것처럼 성대하였다.[『연산군일기』 연산군 11년 6월 7일· 『연산군일기』 연산군 11년 8월 27일·『연산군일기』 연산군 11년 9월 7일] 신수근은 전문(箋文)을 올려서 연산군에게 사은(謝恩)하였다. 그해 8월 명나라 무종(武宗) 정덕제(正德帝)가 즉위하자, 하등극사(賀登極史) 강귀손이 중국으로 가다가 종기가 나서 북경(北京)에 갈 수가 없었으므로, 연산군이 신수근을 우의정으로 승진시킨 다음 사신에 임명하여 강귀손 대신 중국 북경(北京)에 보냈다.[『연산군일기』 연산군 11년 8월 17일] 황제의 등극을 하례하는 경우에는 반드시 정승이 사신으로 가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이다. 1506년(연산군 12) 2월 하등극사 신수근이 북경에서 돌아와서 복명하니, 연산군이 승지 권균(權鈞) · 강혼 등에게 명하여 신수근을 맞이하게 하고, 손수 어제시(御製詩)를 지어서 신수근에게 내려주었다.[『연산군일기』 연산군 12년 2월 12일] 그때 연산군의 음란한 행실과 잔혹한 행위를 비방하는 언문 벽보가 거리에 나붙였다. 연산군은 격분하여, “이것은 죄를 받은 자들의 친족들이 한 짓이다.” 하고, <갑자사화> 때 겨우 목숨을 부지하여 유배되었던 사람들을 잡아다가 장을 치고 참혹하게 고문하였다. 또 연산군은 온 나라에 방문을 붙여서 언문(諺文)을 쓰지 못하게 하였다.[『동각잡기(東閣雜記)』]

[<중종반정>과 신수근 3형제의 죽음]
1506년(연산군 12) 9월 2일 <중종반정>이 일어나서 연산군은 폐위되고 중종이 즉위하였다. <중종반정>은 성희안이 계획을 세우고, 박원종이 이조 판서 유순정을 끌어들여, 세 사람이 대장(大將)이 되어 이리저리 군사를 모았으나, 거사하기 위해서 모이기로 약속한 9월 1일 밤에 훈련원(訓練院) 앞에 집결한 사람의 숫자는 불과 1백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유자광의 계획에 따라서 군사의 편대를 짰는데, 박원종이 총대장이 되어서 지휘하였다. 밤 3경에 박원종 · 성희안 · 유순정의 세 대장이 군사를 나누어 거느리고 돈화문(敦化門) 앞에 나가서 진을 쳤다. 군사들이 횃불을 밝히고 연산군이 거처하던 창경궁(昌慶宮)을 포위 공격하려고 하자, 거사의 소식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달려왔다. 그때 세 대장은 사람을 가리지 않고 누구든지 받아들였으므로, 처음에 세 대장이 제거하기로 결정한 돈녕부 판사 구수영과 도승지 강혼 등도 반정에 참여하여, 나중에 정국공신(靖國功臣)이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 그들이 옹립하려던 진성대군과 그 어머니 자순대비(慈順大妃: 정현왕후)도 사전에 전혀 협의가 없었기 때문에, 거사 당일 진성대군은 다른 집으로 피신하였다가, 그를 모시러 간 성종의 13자인 운천군(雲川君) 이인(李*) 등에게 왕위에 오르기를 거듭 사양하였고, 자순대비는 허락을 받으러 간 박원종 등에게 연산군의 세자 이황을 왕으로 삼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였다. 1623년(광해군 15) 3월 12일 밤중에 <인조반정(仁祖反正)>을 일으켰던 최명길(崔鳴吉)의 치밀한 계획과 비교하면 이때 성희안의 계획은 엉성하기 그지없었다. 거사를 앞당겨서 준비가 미쳐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워낙 연산군이 폭정으로, 기치를 올리자 민중들의 열렬한 호응을 받아서 반정에 성공할 수 있었다.

박원종은 심복 신윤무(辛允武)를 시켜서 자객 이심(李*) 등 10여 명을 거느리고 가서, 먼저 형조 판서 신수영을 죽이고, 그 다음에 좌참찬 임사홍를 죽이고, 마지막으로 좌의정 신수근을 죽이게 하였다. 신윤무는 밤중에 신수영과 임사홍의 집을 찾아가서 각각 집밖으로 불러내어 죽인 다음에, 새벽녘에 이심의 무리를 이끌고 좌의정 신수근의 집을 찾아갔다. 신윤무는 별감(別監) 한 사람을 시켜서 임금이 부른다는 소집 신패인 명패(命牌)를 가지고 가서 신수근에게 빨리 입궐(入闕)하도록 재촉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철퇴를 가지고 길 왼쪽에 숨어 있게 하였다. 신수근이 말을 타고 종들을 앞세워 황급히 대궐로 들어가는데, 이심의 무리가 수각교(水閣橋)를 건너던 신수근을 철퇴로 힘껏 내려쳐서 말에서 떨어뜨렸다. 신수근이 철퇴에 맞아서 땅에 떨어지자, 종 하나가 그 위에 엎드려 자기 몸으로 철퇴를 막다가 마침내 함께 죽였다. 신수근이 비명횡사(非命橫死)한 날이 <중종반정>이 일어나던 1506년 9월 2일 새벽녘이었는데, 향년이 57세였다.[『서당사재』 권11 「좌의정 신공 시장」]

9월 2일 아침에 거사의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자진하여 돈화문 앞으로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아침에 출사(出仕)하던 백관들도 대부분 반정군에 가담하였다. 처음에 대궐 안에서는 밖에 변고가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연산군은 입직한 도총관(都摠管) 민효증(閔孝曾)과 입직 승지 이우(李堣) 등을 불러서, “이 같이 태평한 때에 어찌 다른 변고가 있겠는가?” 하고, 열쇠를 가지고 대궐문을 돌아다니면서 점검하게 하였다. 그러나 창덕궁을 지키던 군사들은 혹은 수구(水口)로 빠져 나가기도 하고 혹은 밧줄을 타고 담벽을 넘어가기도 하여, 앞을 다투어 반정군의 진영으로 달려갔다. 입직한 도총관과 병조 참지와 승지 등도 차례로 모두 도망해버렸다. 당황한 연산군은, <인조반정> 때 광해군이 사다리를 타고 궁중 뒷담을 넘어서 도망한 것처럼 스스로 도망가지도 못하고, 내전(內殿)으로 달려가서 왕비 신씨를 붙잡고, 밖으로 함께 나가서 반정군에게 목숨만 살려달라고 빌어보자고 간청하였다. 박승종 등은 승지 한순(韓洵)과 내관 서경생(徐敬生)을 창덕궁으로 들여보내 연산군에게 옥새를 달라고 요구하자, 연산군은 옥새를 순순히 내주었다. 이리하여 반정군은 자순대비의 명령을 받들어 그 아들 진성대군을 임금으로 추대하여, 중종이 즉위하였다.

그때 신수근의 첫째아우 신수겸은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있었는데, 반정하기 전에 박원종 등이 심복을 보내어 같이 거사할 것을 권유했으나, 신수겸은 거절하기를, “우리 형제의 마음이 정해진 지가 이미 오래되었으니, 내 형에게 물어보라.” 하였다. 이내 문을 닫고 권유하는 사람을 물리치려고 10여 일 동안 정무를 보지 않았다. 반정에 성공한 다음에 9월 4일 박원종은 역사(力士) 이심 등을 시켜서 소매 속에 철퇴를 숨기고 가서 금오랑(金吾郞)이라고 일컫고 관사의 내실인 내아(內衙)로 들어가서 신수겸을 척살(擲殺)하였는데, 유모 예덕(禮德)이 쫓아 나와서 철퇴를 막다가 함께 죽었다.[『거창 신씨 족보(居昌愼氏族譜)』] 자객 이심은 네 사람을 죽일 때 튀긴 피가 얼굴에 가득히 묻고 의복도 전부 붉게 물들었으나, 자기 공로를 남들에게 보이려고 며칠이 지나도록 일부러 낯을 씻지도 않고 옷을 갈아입지도 않았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를 더럽고 추하게 여겼다고 한다.[『음애일기(陰崖日記)』]

<중종반정>이 성공하자, 박원종은 연산군을 강화도 교동(喬洞)으로 유배보내고, 왕비 신씨(愼氏)를 폐비(廢妃)하여 성종의 후궁들이 거처하는 정청궁(貞淸宮)으로 내보내고, 세자 이황과 창녕대군 이인 등은 모두 귀양 보냈다가, 곧 사사(賜死)하였다.[『국조보감(國朝寶鑑)』] <중종반정>을 일으키던 날 9월 2일 오시(午時) 중종이 경복궁(景福宮) 근정전(勤政殿)에서 즉위식을 거행할 할 때 신수근의 딸도 함께 왕비(王妃)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신수근을 척살하였다는 보고를 받은 박원종 · 성희안 등은 뒷날 화(禍)가 자기들에게 미칠까 두려워하여, “죄인의 자식은 국모(國母)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중종을 협박하여 9월 9일 왕비 신씨를 폐출(廢黜)시키고, 윤여필(尹汝弼)의 딸을 새로 책봉하여 왕비로 삼았는데, 그녀가 바로 장경왕후(章敬王后)다.[『서당사재』 권11 「좌의정 신공 시장」] 장경왕후의 어머니 박씨는 박원종의 누이이다. 신수근의 딸 신씨는 왕비에 책봉된 지 7일 만에 폐출되었다. 이것은 성희안과 박원종의 반정 계획이 얼마나 짜임새 없이 허술하게 진행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의 하나이다. 그러므로 5년 뒤에 1510년(중종 5) 장경왕후가 인종을 낳다가 돌아가자, 사림파의 김정(金淨)박상(朴祥) 등이 폐출된 신씨를 다시 왕비로 모실 것을 주장하면서, 훈구파의 박원종과 성희안 등을 공격하였다.

중종의 폐비(廢妃) 신씨(愼氏)는 처음에 하성위(河城尉) 정현조(鄭顯祖)의 집으로 쫓겨났다가, 다시 본가로 돌아왔는데, 이미 정청궁으로 쫓겨났던 연산군의 왕비 신씨가 본가 친정으로 돌아와서 있었으므로, 신승선 · 신수근의 옛집에서 폐출된 두 왕비가 한 집안에서 같이 살게 되었다. 또 반정 공신이 된 구수영이 자기 아들 구문경으로 하여금 연산군의 딸 휘순공주와 강제 이혼하게 하고, 며느리를 자기 집에서 좇아냈으므로, 휘순공주도 신수근의 집으로 쫓겨왔다. 남자들은 모두 죽거나 귀양가고 없는 폐가(廢家)에서 여자들만이 남아서 살게 되었다. 휘순공주는 2년 뒤에 다시 구문경과 재결합하여, 능성 구씨(綾城具氏) 집안으로 돌아갔다. 민담(民譚)에 의하면, 신수근의 딸 중종의 폐비 신씨는 매일같이 인왕산(仁王山)에 올라가서 큰 바위에 치마를 걸쳐놓고, 임금이 된 남편 중종이 궁전에서 혹시라도 그녀를 쳐다보기를 바랐는데, 지금도 그 바위를 ‘치마바위[裳巖]’이라고 한다. 중종도 그녀를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였는데, 조광조(趙光祖) · 김정 · 박상 등의 사림파가 신씨의 왕비 복위를 주장하자, 중종도 이에 동조하였다. 그러나 훈구파 남곤(南袞) · 심정(沈貞) · 홍경주(洪景舟) 등이 이에 반대하다가, 정변을 일으켜서 조광조 · 김식 · 박상 등 사림파 신진 세력을 일망타진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기묘사화(己卯士禍)>다.

[성품과 일화]
일반적으로 실록에 인물의 기록이 부족하면, 신도비나 시장(諡狀) · 묘지문(墓誌文) 등에서 보충하면 서로 보완할 수 있다. 그러나 신수근의 시장은 당대에 쓰여진 것이 아니라 250여 년이 지나서 영조 시대 신수근의 시호(諡號)를 청할 때, 서당(西堂) 이덕수(李德壽)가 신수근의 8대손인 신후담(愼後聃)이 유사(遺事)를 모아 지은 가장(家狀)에 의하여 지었던 것이므로, 당시 자세한 관력(官歷)이나 성품 일화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아마도 <중종반정> 때 신수근 3형제가 박원종에 의하여 참화(慘禍)를 당하고 그 집안이 몰락하면서, 그 시문이나 집안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성품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중종반정> 때 박원종이 그를 설득하려고 무척 노력하였으나, 그는 끝내 이것을 거절하였는데, 여기에서 그의 성품이 대쪽같이 강직하고, 또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는 대담성이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또 박원종 일파를 고발하여 반정을 막을 수도 있었으나, 반정의 필연성을 공감하고 고변(告變)하지 않았던 것을 보면, 역사의식에 투철한 유학자의 양심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이었다고도 생각된다. 그는 두 차례의 사화(士禍)를 겪고 나서 또 큰 옥사(獄事)가 일어나는 것을 원치 않았을 것이다.

대제학 이덕수가 신수근의 시장에서 그를 평가하기를, “신수근은 아버지와 아들 양대(兩代)에 걸쳐 정승이 되어서 가문(家門)이 고귀해지고 집안이 번성하였을 뿐만 아니라, 아울러 왕실의 외척이 되었으므로, 자기가 원하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었다. 그러나, 신수근은 산업(産業)에 조금도 관심을 기울이지 아니하여, 그가 자식들에게 재산을 분배할 때 재산이라고는 겨우 노비 몇 명뿐이었으니, 여기에서 신수근의 사람됨을 알 수 있지 않겠는가? 신수근이 만약 박원종의 뜻을 따랐다면 정국공신(靖國功臣) 1등이 되고, 또 국구(國舅)의 존귀한 자리에 올라서, 그 부귀영화가 도리어 눈부시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신수근은 피차(彼此)의 목숨을 바꾸지 않고, 끝내 자기 자신이 죽음으로써 일을 마무리하면서도 후회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신수근의 죽음은 연산군을 위해서 죽은 것이 아니라, 만세(萬世)에 영원할 군신(君臣)의 의리를 지키기 위하여 죽음을 선택하였던 것이다.” 하였다.[『서당사재』 권11 「좌의정 신공 시장」]


『연산군일기』의 「신승선 졸기」를 보면, “신승선에게 아들 세 사람이 있었다. 신수근은 성질이 음험하여 남을 해치고 세력을 믿고서 거만하여 자기에게 거슬리는 사람이 있으면 문득 배척하고, 남의 재물을 자기 것처럼 빼앗고, 심지어 남의 가옥 · 전답 등을 빼앗고도 뻔뻔스럽게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신수겸은 용렬하고 경망하며 무식하였다. 신수영은 욕심이 많고 방종하며 음험하고 교활함이 신수근과 비슷한데, 성질을 내고 남을 해치는 짓은 신수근보다도 더하였다.” 하였다.[『연산군일기』 연산군 8년 5월 29일] 박원종 · 성희안 등이 <중종반정> 이후에 신수근 3형제가 연산군의 처남으로서 권력을 전횡하여 나쁜 짓을 많이 하였다고 헐뜯어서 그들이 신수근 3형제를 죽인 행위를 정당화하려고, 역사의 기록마저 조작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를 편찬한 서인(西人)의 사관(史官)들은 광해군의 처남 유희분(柳希奮)의 전횡을 비난하였으나, 『연산군일기』에서 훈구파의 사장파(詞章派) 사관들이 연산군의 처남 신수근 3형제를 헐뜯은 것처럼 치졸하기 그지없는 사평을 하지는 않았다.

신수근은 어릴 때부터 귀 뒤에 종기를 앓았는데, 그 종기가 낫지 않고 평생을 괴롭혔다.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보덕(輔德)조지서(趙之瑞)가 경연의 시독관(侍讀官)을 겸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경연에서 조지서가 의서(醫書)에서 종기에 잘 듣는 약방문을 찾아서 성종에게 자세히 아뢰었다. 그때 세자가 종기병을 오랫동안 앓고 있었으므로, 세자 보덕 조지서가 세자의 종기병을 고치기 위하여 일부러 약방문을 처방한 것이다. 성종은 매우 기뻐하여 그 약초가 생산되는 진주(晉州)에서 특별히 종기약을 제조하여 바치게 하고, 평소 종기를 앓고 있는 신수근을 불러다가 먼저 종기약을 시험해 보도록 명하였다. 1493년(성종 24) 8월 성종이 호조 참의 신수근을 불러서 묻기를, “들으니, 그대의 귀 뒤에 종기[瘡]가 있다고 하는데, 정말 그런가.” 하니, 신수근이 아뢰기를, “신의 나이 열 살 전에 종기가 터져서 구멍이 났는데, 깊이가 겨우 2푼(分)이고 그 구멍이 바늘 크기와 같으나, 아프지도 않고 가렵지도 않았습니다. 의원의 말을 듣고 뜸질[灸]한 뒤에도 구멍은 예전과 같은데, 지금도 때때로 혹간 흰 즙(汁)이 나오기도 하고, 혹간 누른 즙이 나오기도 합니다.” 하였다. 성종이 전교하기를, “내약방(內藥房)으로 하여금 진주에서 바친 약을 신수근에게 주어서 이를 시험해 보도록 하라.” 하였다. 진주 목사(晉州牧使) 허황(許篁)이 세자 보덕 조지서의 약방문에 의거하여 그 약재를 구해서 종기약을 제조하여 바치면서, 성종에게 아뢰기를, “황국사(黃菊沙) · 임하부인(林下婦人) · 와거경(萵苣莖)의 세 가지 약재를 빻아서 고운 가루로 만들고, 꿀에 타서 종기 부위[瘡口]에 붙이면 효력이 있습니다. 황국사는 묵정밭[陳田]에서 잘 난다고 합니다.” 하였다.[『성종실록』 성종 24년 8월 3일 · 『성종실록』 성종 24년 8월 27일] 호조 참의 신수근은 임금을 위하여 기꺼이 약재의 시험에 응하였다. 조지서는 세자 보덕으로 있으면서 연산군에게 학문을 강요하여 연산군이 그를 매우 싫어하였다. <갑자사화> 때 연산군은 고향에 은거하고 있던 조지서를 기어이 잡아다가 끔찍한 형벌을 더하여 죽였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신도(信度)이다. 묘소는 양주(楊州) 서산(西山) 장흥리(長興里)의 언덕에 있고, 서당(西堂) 이덕수(李德壽)가 지은 시장(諡狀)이 남아 있다.[『서당사재(西堂私載)』 권11 「좌의정 신공 시장(左議政愼公諡狀)」] 이 시장에 따르면, 사림파를 등용한 인종 때 신수근과 그의 딸 폐비 신씨의 억울함이 신원(伸寃)되었고, 관직과 봉작(封爵)도 회복되었다. 또 탕평책(蕩平策)을 쓰던 영조 때 신수근의 평가가 다시 이루어져서, 신수근을 영의정으로 추증하고, 시호를 내려 주었다. 영조는 특히 신수근의 유학자적 양식(良識)과 역사의식을 높이 평가하였다. 1739년(영조 15) 영조는 신수근의 딸 폐비 신씨를 단경왕후(端敬王后)로 책봉하고, 그 아버지 신수근에게 영의정(領議政)으로 추증하고 익창 부원군(益昌府院君)에 봉하고, 그 어머니 한씨(韓氏)에게 청원 부부인(淸原府夫人)을 추증하였다.[『영조실록(英祖實錄)』 영조 15년 3월 28일 ·『영조실록(英祖實錄)』 영조 15년 3월 30일] 또 영의정으로 추증한 익창 부원군 신수근에게 신도(信度)라는 시호를 내려주었다.[『영조실록(英祖實錄)』 영조 15년 5월 13일] 1775년(영조 51) 영조가 손수 “옛날이나 지금이나 충성은 똑같다.[古今同忠]”라는 4글자를 써서 신수근의 후손들에게 내려주며 말하기를, “신수근은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와 그 충성과 의리가 똑같도다.” 하고, 호조에 명하여 그 무덤에 사당(祠堂)을 지어주고 그 곁에 비각(碑閣)을 세워서 “고금동충(古今同忠)”이라는 네 글자를 새겨서 걸도록 하였다.[『영조실록』 영조 51년 8월 24일] 1799년(정조 23) 학문을 좋아하던 정조는 신도공(信度公) 신수근의 마을 앞에 정문(旌門)을 세워서 그 충성과 의리를 표창하였다.[『정조실록』 정조 23년 5월 28일]

첫째 부인 안동 권씨(安東權氏)는 좌의정 권람(權擥)의 딸인데, 일찍 죽었고, 자녀는 없었다. 둘째 부인 청주 한씨(淸州韓氏)는 중추부 동지사(同知事) 한충인(韓忠仁)의 딸이고, 자녀는 4남 3녀를 낳았다. 아들은 사평(司評) 신홍보(愼弘輔) · 봉사(奉事) 신홍필(愼弘弼) · 군수(郡守) 신홍조(愼弘祚) · 신홍우(愼弘祐)이고, 딸은 장녀가 현감(縣監) 신공섭(申公涉)에게 시집갔고, 차녀가 곧 중종의 첫번째 부인 폐비 신씨이고, 3녀가 조세충(趙世忠)의 처가 되었다.[『서당사재』 권11 「좌의정 신공 시장」] <갑자사화> 때 신수근의 장인 한충인이 연좌되었는데, 신수근의 부인 한씨(韓氏)가 연산군에게 아버지의 목숨만을 살려달라고 애원하였으나, 연산군은 거절하고 그를 처형하였다.

[참고문헌]
■ 『성종실록(成宗實錄)』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중종실록(中宗實錄)』
■ 『영조실록(英祖實錄)』
■ 『정조실록(正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서당사재(西堂私載)』
■ 『약산만고(藥山漫稿)』
■ 『국조보감(國朝寶鑑)』
■ 『거창 신씨 족보(居昌愼氏族譜)』
■ 『음애일기(陰崖日記)』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간이집(簡易集)』
■ 『기묘록 별집(己卯錄別集)』
■ 『기묘록 속집(己卯錄續集)』
■ 『농암집(農巖集)』
■ 『동각잡기(東閣雜記)』
■ 『명재유고(明齋遺稿)』
■ 『사가집(四佳集)』
■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 『수당집(修堂集)』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임하필기(林下筆記)』
■ 『허백정집(虛白亭集)』
■ 『용재집(容齋集)』
■ 『해동야언(海東野言)』
■ 『해동잡록(海東雜錄)』
■ 『홍재전서(弘齋全書)』
■ 『용헌집(容軒集)』
■ 『대봉집(大峯集)』
■ 『남계집(藍溪集)』
■ 『일두집(一蠹集)』
■ 『목계일고(木溪逸稿)』
■ 『수헌집(睡軒集)』
■ 『송재집(松齋集)』
■ 『이평사집(李評事集)』
■ 『눌재집(訥齋集)』
■ 『충암집(冲庵集)』
■ 『무릉잡고(武陵雜稿)』
■ 『금호유고(錦湖遺稿)』
■ 『지퇴당집(知退堂集)』
■ 『은봉전서(隱峯全書)』
■ 『도곡집(陶谷集)』
■ 『번암집(樊巖集)』
■ 『입재집(立齋集)』

■ [집필자] 이현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