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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43년(세종 25)∼1527년(중종 22) = 85세]. 조선 중기 성종~중종 때의 문신. 강원도 관찰사를 지냈는데,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서예가(書藝家)이다. 자는 표직(杓直)이고, 호는 송재(松齋)다. 본관은 거창(居昌)이고, 거주지는 서울인데, 만년에 경기도 파주 교하(交河)에서 살았다. 아버지는 예조 참의(參議)신후갑(愼後甲)이고, 어머니 능성 구씨(綾城具氏)는 이천군(利川郡) 판사(判事) 구양(具揚)의 딸로 영의정을 지낸 구치관(具致寬)의 누이동생이다. 영의정 신승선(愼承善)의 5촌 조카이고, 좌의정 신수근(慎守勤)의 6촌 형이다. 세조의 공신 영의정 구치관의 조카다.
[세조~성종 시대 활동]
1459년(세조 5) 나이 17세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는데, 이때부터 명성이 널리 퍼져서 사람들이 그 걸출한 인품에 감복하였다. 세조가 대관(臺官)에 명하여 등용할 만한 유사(儒士)를 천거하게 하자, 사헌부에서 신자건을 추천하였으므로, 이조에서 등용하려고 하였으나, 신자건은 학문에 뜻을 두어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사재집(思齋集)』 권3 「강원도 관찰사 신공 묘비명(江原道觀察使愼公墓碑銘)」] 그 당시 어머니의 오빠가 세조의 공신인 영의정 구치관이었으므로, 그가 음직으로 벼슬길에 나가더라도 얼마든지 화직(華職)에 오를 수가 있었다. 그러나 과거에 급제하여 당당하게 벼슬길에 오르고 싶었던 신자건은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가서 공부를 하면서 여러 번 과거 시험에 응시했으나 번번이 낙방하였다.
신자건은 나이가 30세가 넘도록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자, 늙은 부모님과 가족을 봉양하기 위하여 음직(蔭職)으로 벼슬길에 나아갔다. 1480년(성종 11) 성종이 이조에 전지하여 신자건을 서용(敍用)하게 하였으므로.[『성종실록(成宗實錄)』 성종 11년 6월 18일] 경기도 여주(驪州)에 있는 세종의 영릉(英陵)참봉(參奉)에 임명되었다가, 이듬해 서울의 광흥창(廣興倉)봉사(奉事)로 옮겼다. 이때 외삼촌인 영의정 구치관은 이미 죽고 없었으나, 그의 5촌 당숙인 판서 신승선이 그의 뒤에 있었던 것이다. 1483년(성종 14) 상의원(尙衣院)직장(直長)을 거쳐 군자감(軍資監)주부(主簿)로 승진하였다. 이때 나라에서 군적(軍籍)을 정리하는 큰일을 시작하였는데, 신자건도 뽑혀서 이 작업에 참여하였다. 얼마 안 되어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에 임명되었다가, 곧바로 형조 좌랑(佐郞)으로 옮겼다.[『사재집』 권3 「강원도관찰사 신공 묘비명」]
군적의 정리 작업이 끝난 다음에 상의원 판관(判官)으로 옮겼다가, 1489년(성종 20) 종4품상 조산대부(朝散大夫)로 승품(陞品)되어 사헌부 지평(持平)에 임명되었다.[『성종실록』 성종 20년 2월 28일] 이조에서 신자건이 과거에 급제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학문과 덕행이 뛰어나다고 대간(臺諫)의 간관(諫官)으로 추천하였는데, 당시 이것을 남대(南臺)라고 일컫고 명예롭게 여겼다. 이때 대간의 청요직(淸要職)을 차지하였던 사림파(士林派) 간관들이 훈구파(勳舊派)의 신자건에게 남대라고 일컫는 것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 지평 신자건은 대관의 동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있었는데, 1490년(성종 21) 5촌 신승선이 대사헌(大司憲)에 임명되어 상관(上官)으로 부임하자, 자원하여 전라도 도사(全羅道都事)로 나갔다.[『사재집』 권3 「강원도 관찰사 신공 묘비명」] 조선 시대에 관리의 피혐(避嫌)하는 제도가 있었는데, 이는 가까운 친족(親族)이 같은 관청에 상관 · 하관으로 근무하는 것을 서로 피하는 것이다. 신자건이 전라도 도사로 있을 때 맏아들 신난종(愼蘭種)을 전주(全州)의 토호(土豪) 조수영(趙秀英)의 딸과 혼인시켰는데, 전라도 여러 고을 수령들에게 혼인에 쓸 혼수물자를 요구하여 부조(扶助)로서 받았다. 나주 판관(羅州判官)에게 청하여 상자와 옷 장롱[衣籠]을 받고, 또 전주 판관에게 청하여 철질려(鐵蒺蔾) 곧 말밤쇠를 받았다. 또 전라도 고관찰사에게 아들의 장인 조수영을 전주의 경기전(慶基殿)참봉(參奉)에 임명하도록 간청하였고, 세금을 거두는 차사원(差使員) 신순정(辛舜鼎)에게 조수영의 전세(田稅) 13석을 면제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때 마침 모친상을 당하여 전주에 있었던 사림파 강삼(姜參)이 이것을 보고 격분하여, 후일 성종에게 신자건이 뇌물을 받았다고 고발하여, 이른바 신자건의 <전라도 뇌물 사건>이 터지게 되었다.
1491년(성종 22) 전라도 도사의 임기가 만료된 신자건은 형조 정랑(正郞)에 임명되어 상복사(詳覆司)를 관장하게 되었다.[『사재집』 권3 「강원도 관찰사 신공 묘비명」] 상복사는 사형에 해당하는 중대한 사건의 죄안(罪案)을 다시 심리하여 그 사형 여부를 임금에게 보고하고 생사 여부를 결정하는 기관이다. 이조에서 그 인사를 신중히 시행하여 대개 과거에 급제한 문관을 임명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이때 과거에 급제하지 않은 신자건이 임명되었기 때문에 사림파 대관들은 이를 비난하였다. 사헌부 헌납(獻納) 강삼은 신자건이 전라도 도사로 있을 때 고을의 수령들로부터 많은 뇌물을 받았다고 탄핵하였다. 마침내 신자건은 파직되고, 장형(杖刑) 1백 대에 도형(徒刑) 3년에 처해졌다.
마침 나라에서 두 번이나 사면령을 내렸으나, 사헌부에서 장안(贓案) 곧 뇌물을 받은 사람의 명단을 기록한 장부에 신자건의 이름이 올랐으므로 사면을 받지 못하였다. 사림파의 대관들이 녹안(錄案) 곧 뇌물을 받은 자의 자손들을 기록한 장부에 그 자손(子孫)들의 이름을 올려서 벼슬길에 나오지 못하도록 금고(禁錮)시키려고 하였으나, 성종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당시 장죄(贓罪) 곧 뇌물죄는 『대명률(大明律)』의 「감수자도율(監守自盜律)」에 의하여, 장안에 기록하여 금고형에 처하였다. 감수자도율은 감독하고 지켜야 할 관리가 스스로 도둑질하는 범죄를 다스리는 형률을 말한다. 이 형벌을 적용한 것은 조선 시대 관리가 뇌물을 받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이를 막기 위하여 엄벌에 처하였기 때문이다. 1493년(성종 24) 신자건은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유배지에서 풀려나서 고향 교하로 돌아와서 거상(居喪) 중에 있었는데, 1494년(성종 25) 성종이 돌아갔다.
[전라도 뇌물 사건]
1491년(성종 22) 신자건은 전라도 도사의 임기가 만료되자, 형조 정랑에 임명되어 상복사를 관장하게 되었다.[『사재집』 권3 「강원도 관찰사 신공 묘비명」] 이때 과거에 급제하지 않은 신자건이 상복사에 책임자에 임명되자, 사헌부 헌납 강삼은 신자건이 전라도 도사로 있을 때 수령의 전최(殿最) 곧 고과 평정를 맡아보면서 자기 아들의 혼사를 핑계하고 각 고을의 수령들로부터 많은 뇌물을 받았다고 탄핵하였다. 마침내 신자건은 파직되고, 「감수자도율」의 중한 형률에 의해 장형 1백 대에 도형 3년에 처해졌다. 이때 그 아들 유학(幼學) 신난종이 상언(上言)하여 아버지 신자건에게 적용한 형률이 너무 무겁다고 하소연하였다. 사헌부에서 장안에 신자건의 이름을 올려서 본인이 종신토록 벼슬에 나오지 못하도록 폐고시켰을 뿐만 아니라, 녹안에 신자건의 자손들을 기록하여 그 자손(子孫)들마저 영원히 벼슬길에 나오지 못하도록 금고시키려고 하였으나, 성종이 이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조선 시대 성종과 연산군 시대 사림파와 훈구파가 대립할 때 사림파가 신자건의 사건을 훈구파의 대표적 뇌물 사건으로 몰아붙였지만, 그 뇌물로 받은 물건의 물목을 보면, 사람파의 대간이 사감(私憾)을 품고 고의적으로 부풀렸다고 생각된다. 성종 후기부터 연산군 초기까지 사림파와 훈구파가 첨예하게 대립하다가, <무오사화(戊午士禍)>가 터져서 사림파가 일망타진되었다. 신자건의 뇌물 사건은 사림파가 훈구파에게 타격을 주기 위하여 일부러 크게 부각시킨 뇌물사건이다.
1491년(성종 22) 3월 경연(經筵)에서 사헌부 헌납 강삼이 신자건을 탄핵하기를, “신이 전주에 있으면서 지방 관리가 불법(不法)을 행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도사 신자건이 가장 심하다고 하였습니다. 신자건은 아들을 위하여 그 도(道)에서 며느리를 맞았는데, 감사에게 아들의 장인을 경기전의 참봉으로 임명하도록 청하였습니다. 신이 우연히 전주부(全州府)의 감영(監營) 대청에 새로 만든 장롱 네 짝이 있는 것을 보고 전주부윤 김수손(金首孫)에게 물었더니, 그가 대답하기를, ‘이것은 도사가 나주에 청구한 물건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도사가 전문(箋文)을 받들고 서울로 올 때에 김수손에게 철질려를 청구하자, 김수손이 신에게 말하기를, ‘도사가 직접 사람을 대하여 물건을 청구하니 온당하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신자건이 전주의 토호와 혼인하기를 꾀하고 여러 고을에 혼수물자를 청구하였으므로 각 고을에서 선물을 서로 잇달아 보냈는데, 세금을 거두는 차사원에게 그 사람들의 전세를 경감해 주도록 요구하였습니다. 이런 사람은 모름지기 엄하게 징계해야 합니다.” 하였다. 성종이 말하기를, “사헌부로 하여금 끝까지 국문(鞫問)하도록 하라.”하였다.[『성종실록』 성종 22년 3월 21일]
헌납 강삼은 사림파에 속하는 전주 출신 인물이고, 전주부윤 김수손은 거창 신씨가 연산군의 세자빈(世子嬪)이 된 것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던 인물이다. 당시 혼수에 필요한 물자를 각 고을의 생산지에서 구하는 것은 양반 관료층 사회에서 일종의 부조(扶助)로서 널리 유행하였는데, 왕비나 세자빈으로 간택되면, 값비싼 물건들을 공공연히 요구하여 몇 만금의 재산을 모우지만, 신자건은 겨우 나주 칠기 장롱 몇 짝 정도를 요구한 정도였다. 더구나 철질려는 군사용으로 쓰이는 물건이므로, 신자건의 집으로 들어가는 혼수 물자도 아니었다.
그해 9월 사헌부 장령 이거(李琚)가 아뢰기를, “신자건은 도사로서 수령의 전최에 참여하여 수령들의 뇌물을 받았습니다. 원래 장오(贓汚)의 범죄는 사면령에 해당하지 않으니, 비록 장안에 들어있다고 하여 사면하지 않더라도 법률의 권위를 잃는 것이 아닙니다.” 하니, 성종이 전교하기를, “신자건의 사건은 사헌부에서 아뢴 대로 따르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성종실록』 성종 22년 9월 9일] 이리하여 신자건의 죄는 사면령을 내렸어도 용서하지 않고 그대로 집행하게 되었다. 이때 신자건의 아들 유학 신난종이 상언하기를, “신(臣)의 아버지 신자건이 범한 죄를 의금부(義禁府)에서는 원률(元律)로써 조율(照律)하였는데, 사헌부에서는 율외(律外)의 중죄(重罪)로 논의하여 보고하고 장안에 기록하기를 청하였습니다. 죄(罪)에는 대소(大小)가 있기 때문에 율(律)에도 경중(輕重)이 있습니다. 신의 아버지가 범한 죄는 「감수자도율」에 해당되지도 아니하며, 조정의 의논도, ‘이미 사면령을 내렸으니, 추론(追論)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하였는데, 그 이름을 장안에 올리고 그 자손들을 금고하니, 신은 실로 마음이 아픕니다. 이제 신의 아버지의 죄는 장형 1백 대에 도형 3년에 해당하나, 두 번의 대사면령을 거쳤으니, 사죄(死罪)를 범한 자라도 오히려 또한 용서하는 은전을 입는데, 하물며 도죄(徒罪)를 범한 자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였다.[『성종실록』 성종 22년 9월 22일]
그해 10월 경연에서 대사헌 이유인(李有仁)이 신자건의 사건을 다시 계청(啓請)하자, 성종이 좌우 근신에게 물었다. 영사(領事) 홍응(洪應)이 대답하기를, “대간의 말이 옳기는 하지만, 다만 녹안은 중대한 일입니다. 자손을 금고시키는 일에 있어서 중국은 차등을 두는데, 우리 조정의 녹안법(錄案法)은 차등이 없다고 생각됩니다. 조상 한 사람이 죄를 범한 것 때문에 후손들에게까지 그 벌을 받게 되므로, 비록 훌륭한 자손이 있다고 하더라도 종신토록 폐고되어야 하니, 그것이 무슨 죄입니까?” 하였다. 이유인이 말하기를, “만약 녹안에 올리지 않는다면, 청컨대, 본인의 고신(告身)을 빼앗고, 영구히 서용하지 않도록 하소서.” 하니, 성종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본인만 영구히 서용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성종실록』 성종 22년 10월 1일] 이리하여 신자건은 사면령을 두 번이나 거쳤으나 용서를 받지 못하고 본인의 고신을 빼앗기고, 영구히 관리로 서용되지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연산군~중종 시대 활동]
1494년 12월 연산군이 즉위하였는데, 연산군의 왕비 신씨(慎氏)는 우의정 신승선의 딸이었으므로, 신자건의 6촌 누이였다. 그때 연산군은 겨우 19세였으므로, 모든 정사는 처남 신수근이 실질적으로 처리하였다. 1496년(연산군 2) 신자건은 부친상을 끝마치자, 6촌 동생 신수근에게 부탁하여 벼슬길에 나가고자 하였다. 그러나 성종 때 전라도 뇌물 사건으로 인하여 장안에 기록되어 영구히 관리로 서용하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번번이 그의 관리 임용은 대간의 반대에 부닥쳐서 실패하였다.
1496년(연산군 2) 9월 대간이 아뢰기를, “신자건을 서용하라고 명하였는데, 신자건의 죄는 탐관오리에 해당되므로 성종께서 영구히 서용하지 못하게 특명하셨던 것이니, 지금 갑작이 서용함은 불가합니다.” 하니, 연산군이 전교하기를, “신자건의 죄는, 처음에 물건들이 자기집으로 들어간 것도 아닌데도, 대간에서 율외의 중죄라고 보고하여 성종께서 결단하셨던 것이다. 그때 대관 중에서 신자건과 사감을 가진 자가 있지 않았는가 의심되어 여러 대신들에게 의논하도록 한 것이다.” 하였다.[『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연산군 2년 9월 10일] 이때 연산군이 모든 정사를 처리할 때 일일이 신수근에게 자문하였으므로, “대관 중에 사감을 가진 자가 있었다.”라는 말은 신수근이 신자건의 말을 듣고 연산군에게 알려준 것으로 보인다. 사감을 가진 자라고 지목된 당시 사헌부 헌납 강삼과 지평 이자건이 나와서 자신들을 변명하고, 신자건의 임용을 적극적으로 반대하였다. 강삼과 이자건은 모두 사림파에 속하는 대관들이었다.
1497년(연산군 3) 6월 영의정 신승선이 신자건의 임용문제를 좌의정 · 우의정과 상의하고 계청(啓請)하니, 연산군이 이조에 특별히 명하여, 신자건을 서용하였다.[『연산군일기』 연산군 3년 6월 28일] 신자건은 왕의 특명으로 의금부 경력(經歷)에 임명되었으나, 원칙적으로 장안에 기록된 사람은 관직에 임용될 수 없었다. 그 뒤에 신자건은 여러 번 관직을 옮겨서 한성부 판관(漢城府判官)이 되었으나, 1502년(연산군 8) 1월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한성부 판관 신자건은 전날 전라도 도사로 있을 적에 탐욕한 짓을 하여 파면당하고 서용되지 않은 지 몇 해가 되었다가, 지난번에는 겨우 봉록(奉祿)이 없는 관직을 얻었는데, 갑자기 판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전곡(錢穀)을 취급하는 아문(衙門)이라도 오히려 임명될 수가 없는데, 하물며 송사(訟事)를 판결하는 관직이겠습니까. 모두 이를 고치기를 청합니다.” 하니, 연산군이 전교하기를, “신자건은 비록 한 가지의 실수가 있었지만, 어찌 끝내 벼슬시키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하고, 사헌부의 청을 들어주지 않았다.[『연산군일기』 연산군 8년 1월 13일]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일어난 직후에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강원도 관찰사 신자건은 성종 때에 죄를 지었는데도, 근래에는 초방(椒房)의 친척으로서 임사홍(任士洪)에게 빌붙어 높은 벼슬에 올랐습니다. 관찰사는 중요한 직임이니, 마땅히 속히 개정하여야 합니다.” 하였다. 이에 중종이 전교하기를, “정승에게 물어보라.” 하였다. 정승 박원종(朴元宗) 등이 아뢰기를, “대관의 말이 매우 마땅합니다.” 하니, 중종이 대간에서 아뢴 대로 신자임을 파직하였다.[『중종실록(中宗實錄)』 중종 1년 9월 4일] 이는 사헌부에서는 그가 연산군시대에 그가 곧 왕후의 친척으로 벼슬살이한 것을 탄핵한 것이다. 그때 신자건의 나이 64세였는데, 몸도 늙고 쇠약하여 스스로 벼슬을 그만두려고 하였으므로, 미련 없이 관찰사의 관직을 내버리고 고향 교하로 돌아왔다.[『사재집』 권3 「강원도 관찰사 신공 묘비명」]
그는 세상의 분란(紛亂)을 싫어하여 파주 교하로 돌아와서, 교하현 심악산(深岳山)의 남쪽에 자연의 풍광이 좋은 곳에 새로 집을 짓고 스스로 문묵(文墨)을 즐기면서 살았다. 그는 나이가 들수록 서도(書道)의 오묘한 경지에 몰입하였는데, 어떤 이웃이 그에게 농포(農圃)를 잘 경영하여 살림을 늘여볼 것을 권하자, 그는 사양하기를, “우리 집안은 구업(舊業)으로도 먹을 것이 충분한데, 그밖에 무엇을 더 구하겠는가.” 하고, 그는 오로지 붓글씨를 쓰는 데에 정진하였다.[『사재집』 권3 「강원도 관찰사 신공 묘비명」] 중종 시대 20여 년 동안 교하에서 은거생활을 하면서, 가끔씩 궁중에도 출입하였는데, 중종이 그의 글씨를 좋아하여 그를 기로연(耆老宴)에 초청하여 연회석 병풍 등에 글씨를 쓰게 하였다. 1527년(중종 22) 7월 노병으로 교하의 저택 정침(正寢)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이 85세였다.[『사재집』 권3 「강원도 관찰사 신공 묘비명」]
[조선 중기 서예가 신자건]
신자건은 젊어서부터 서예에 능하다고 하여 한 시대에 이름을 떨쳤는데, 중국 왕희지(王羲之)의 필법(筆法)을 깊이 터득하여, 송설체(松雪體)를 잘 썼다. 성종이 글씨 쓰는 것을 장려하려고 신자근에게 왕희지의 서첩(書帖)을 모두 베껴 써서 임금에게 바치라고 명하고, 신자근이 쓴 글씨를 보고 감탄한 나머지 창덕궁(昌德宮)의 경추문(景秋門) 북쪽 ‘요금문(曜金門)’의 현판 세 글자를 그에게 써서 바치라고 명하였다. 성종도 글씨와 그림에 뛰어나서 가끔 가까운 종친이나 아끼는 신하들에게 자신의 글씨와 그림을 내려 주었다가, 대간으로부터 임금이 잡기(雜技)를 좋아한다는 비판을 받았을 정도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을 보면, “창덕궁의 서쪽은 경추문이라고 하는데, 장수에게 명하여 군사를 출동할 때에 비로소 문을 열기 때문에 항상 닫아 둔다. 경추문의 북쪽을 요금문이라고 하는데, 신자건(愼自建)이 그 현판 글씨를 썼다.” 하였다.[『신증동국여지승람』 권2] 지금도 창덕궁의 요금문 편액(扁額)을 보는 사람들은 그 글씨에 탄복한다.
글씨에 뛰어난 성종이 그 글씨를 보고 감탄할 정도로 신자건은 글씨에 일가(一家)을 이루었으나, 신자건은 연산군 이후에 정계에서 은퇴하여 파주 교하의 심악산에서 20년 이상 살면서 자연과 더불어 문묵을 스스로 즐겼다. 그러므로 그의 글씨가 늙어서 더욱 정교하고 절묘한 경지에 이르러 중종도 그의 글씨를 좋아하여 궁중으로 불러서 글씨를 쓰게 하였고, 사대부 중에서 그의 글씨를 구하려고 하는 자들이 잇달아 그의 문 앞에 이르러 저자처럼 붐비었다. 글씨를 구하고 사례금으로 선물한 비단이 궤석(几席)에 가득하였는데, 신자건은 언제나 일필휘지(一筆揮之)로 붓을 휘둘러 그침이 없이 글씨를 써내려갔다고 한다.[『사재집』 권3 「강원도 관찰사 신공 묘비명」]
1522년(중종 17) 중종반정의 공신 찬성(贊成)고형산(高荊山) 등이 모두 나이 70세에 이르렀다고 벼슬에서 물러났 것을 청하였으나, 중종이 허락하지 않고 기로연을 베풀었는데, 그 뒤부터 재상이 나이 70세가 되면 으레 기로연을 베풀었다. 중종이 나이가 많은 신자건을 초청하여 8폭 병풍에 글씨를 써서 기로연의 연회장을 둘러치게 하였는데, 그때 신자건의 나이가 80세가 넘었는데도 큰 글씨로 쓴 초서(草書)가 젊었을 때에 비하여 더욱 굳세고 장중하니, 당시 연회에 참석한 재상들이 이것을 보고 대단한 필치라고 감탄하였다.[『패관잡기(稗官雜記)』 권4]
중종 때 판서 신제(申濟)가 우리나라 최치원(崔致遠) 이후 역대 명필(名筆)의 글씨를 모아서 『해동명적(海東名跡)』이라는 책을 간행하였는데, 여기에 신자건의 글씨가 들어갔으나, 사자관(寫字官) 출신 백우(伯牛) 박경(朴耕)의 글씨라고 잘못 기록되었다. 직접 글씨를 쓴 당사자 신자근이 이것을 오류(誤謬)라고 지적하여 바로잡았다. 야족당(也足堂) 어숙권(魚叔權)의 『패관잡기(稗官雜記)』를 보면, “1515년(중종 10) 내가 신자건을 만나보았는데, 신자건이 말하기를, ‘『해동명적』 가운데 박경의 글씨 한 폭은 내가 쓴 것인데, 신제 노인이 박경의 자제에게 글씨를 얻었기 때문에 진짜가 아닌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하였다. 아, 박경이 죽은 것이 명필을 모으기 겨우 10여 년 전이었고, 신제 노인도 명필을 식별하는 안목(眼目)이 있다고 이름난 사람인데도 오히려 이런 실수가 있었으니, 앞으로 백년 뒤에 태어나는 사람들이 어찌 글씨의 진짜와 가짜를 식별하리라고 보장할 수 있겠는가? 신제는 이 글씨가 해서(楷書)의 서법(書法) 상으로 전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하였지만, 신자건의 글씨를 박경의 글씨로 잘못 알고 있었으니, 그의 실수가 너무 심하다.” 하였다.[『패관잡기』 권1,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별집 권14 「서화가」] 박경은 교수청(校讐廳) 서자관(書字官) 출신으로 당대의 명필(名筆)로 이름이 났는데, 1507년(중종 2년) 김공저(金公著)와 함께 반정 공신 박원종 일당을 제거하려고 계획하다가, 도리어 체포되어 참형을 당하였다.
신자건은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서예가로서 세종 시대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의 송설체를 이어받아서, 이를 더욱 절묘하게 발전시켜서, 선조 시대 석봉(石峯) 한호(韓濩)의 사자체(寫字體)를 완성되게 만들었다. 그러므로 조선 시대 송설체의 3대가로서 안평대군 · 신자건 · 한호를 일컫는다. 지금 신자건의 유묵(遺墨)은 별로 남아 있지 않다.
[성품과 일화]
신자건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어려서부터 빼어나고 특출하며, 용모가 단정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남보다 재능이 탁월하였다. 신자건은 관리로서의 재능이 더욱 뛰어났는데, 모든 송사와 옥사(獄事)를 처결(處決)할 때 사건을 물 흐르듯이 처리하면서도 그 곡직(曲直) 곧 옳고 그름을 낱낱이 분별해 내었는데, 그 처결이 모두 사건 정황(情況)과 법(法)에 부합하였다. 성종 중기 사송(詞訟)이 적체(積滯)되어 민원(民怨)이 많았으므로, 성종이 6품 이상 관리 중에서 관리로서의 재능이 있는 자를 특별히 선발하여 소송 문안[訟案]을 나누어주고 그 처결한 사건을 임금에게 직접 보고하게 하였다. 그때 형조 좌랑 신자건도 뽑혀서 노비(奴婢)를 관리하는 장례원의 소송 문안을 맡아서 처결하고 성종에게 보고하였다. 성종이 소송 문안 중에 하나를 읽어보고 묻기를, “이 소송 사건을 어떻게 처리하였는가?” 하니, 그가 대답하기를, “유사(有司)에서는 마땅히 문권(文券)에 따라서 판결해야 합니다. 그러나 노비 소송 문안의 수미(首尾)를 살펴보건대, 아무개[某]는 비록 문권이 없어서 자신의 옳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지만, 무릇 소송 사건의 처리는 마땅히 사건 정황과 법을 참고해야 합니다. 이 소송 사건은 문권이 없는 자가 옳은 듯합니다.” 하였다. 신자건이 뒤이어 낱낱이 그 곡직을 분별해 내자, 성종이 그 논리에 매우 수긍하여 마침내 그의 주장에 따라 판결하였다.[『사재집』 권3 「강원도 관찰사 신공 묘비명」] 성종은 신자건의 소송 문안을 처결하는 재능을 높이 평가하였다.
1483년(성종 14) 군자감 주부로 승진하였을 때 나라에서 군적을 정리하는 큰일을 시작하였는데, 신자건도 뽑혀서 이 작업에 참여하였다. 당시 군적을 정리하는 작업은 나라의 군사를 징발하는 중요한 업무였는데, 군호(軍戶)를 선정하는 것이 매우 어렵고 복잡한 일이었으므로, 이 일에 참여한 6품 낭관(郎官)들은 모두 당시 일을 잘 한다고 이름난 젊은 관료들이었다.[『사재집』 권3 「강원도 관찰사 신공 묘비명」] 얼마 안 되어 신자건은 형조 좌랑으로 옮겨갔는데, 군적의 작업을 감독하고 지휘하는 병조 판서가 신자건의 일을 처리하는 재능을 아껴서, 신자건을 병조 좌랑에 임명하여 군적을 처리하는 일만을 오로지 맡길 것을 성종에게 청하자, 성종이 형관(刑官)도 중요한 임무라고 하여 허락하지 않고, 병조와 형조 두 관청을 왕래하면서 두 가지 일을 겸하여 처리하도록 하였다.[『사재집』 권3 「강원도 관찰사 신공 묘비명」]
1491년(성종 22) 전라도 도사의 임기가 만료되자, 형조 정랑에 임명되어 상복사를 관장하였다.[『사재집』 권3 「강원도 관찰사 신공 묘비명」] 상복사는 사형에 해당하는 중대한 사건의 죄안을 다시 자세히 심리하여 그 사형 여부를 임금에게 보고하고 생사 여부를 결정하는 기관이었다. 조선 시대에 사형수를 3차례 심의하는 ‘삼복(三覆) 제도’가 있었는데, 이조에서 사형수의 생사 여부를 결정하는 상복사의 책임자를 대개 과거에 급제한 문관으로 임명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이때 과거에 급제하지 않은 신자건이 임명되었던 것은 성종이 소송 문안을 처결하는 데에 신자건의 남다른 탁월한 능력을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림파 대관들이 이에 크게 반발하여, 마침내 신자건이 전라도 도사로 있을 때 고을의 수령들로부터 많은 뇌물을 받았다고 탄핵하여 파직시켰던 것이다.
형조 정랑 신자건이 실무 책임자가 부서별로 돌아가면서 임금에게 업무를 보고하는 윤대(輪對)에서 성종에게 건의하기를, “모든 살인 범죄에서 투살(鬪殺)과 희살(戱殺)을 저지른 주범(主犯)과 종범(從犯)이 유형(流刑)의 형벌을 받으면, 사면령을 내려도 사면을 받지 못하게 되므로 주범과 종범의 경중(輕重)이 없으니, 법을 만든 원래의 취지에 어긋날까 합니다.” 하였다. 성종이 그의 의견을 받아 들여서 조정에서 그 이후로는 모든 투살ㆍ희살의 경우에 유형에 해당하는 종범은 사면령을 내리면 그 죄를 용서하도록 명하였다. 투살은 싸움하다가 사람을 죽이는 것을, 희살은 장난하다가 우발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법령(法令)으로 만들어져서 조선 시대 오랫동안 시행되었이다.
[묘소와 후손]
사재(思齋) 김정국(金正國)이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사재집(思齋集)』 권3 「강원도 관찰사 신공 묘비명(江原道觀察使愼公墓碑銘)」] 참판 김정국의 비명을 보면, “그 덕(德)은 경복(慶福)을 누리는 것이 마땅하니, 벼슬은 2품의 반열(班列)에 올랐고, 수(壽)는 80세를 넘겼는데.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부터 그에게 이르기까지, 잇달아 임금의 위로연(慰勞宴)을 받고 나라에서 베풀어 준 물자가 풍부하였다.” 하였다. 당시 70세를 넘기는 사람이 드물었으나, 아버지 참의 신후갑과 어머니 능성 구씨가 80세까지 장수하고, 신자건이 85세까지 장수하였다. 나라에서 70세 이상의 노인에게 다달이 쌀 · 콩과 반찬 재료를 지급하고 봄 · 가을에 예관(禮官)을 보내어 위로연을 베풀었는데, 거창 신씨 신자건의 집안은 계속하여 위로연과 다달이 풍부한 물자를 받았으므로, 장수 집안으로서 다른 집안의 부러움을 샀던 것이다. 30년 이상 임금이 다달이 보내주는 은사(恩賜)를 계속하여 받은 일은 세상에 드문 일이었기 때문이다.
부인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광흥창(廣興倉) 승(丞) 이석동(李碩童)의 딸이다. 6남 2녀를 낳았으니, 장남 신난동(愼蘭仝)은 무과(武科)에 합격하여 사헌부 감찰을 지냈으나 그보다 먼저 죽었고, 차남 신난근(愼蘭根)도 일찍 죽었다. 3남은 신난종이고, 4남은 신난원(愼蘭元)이고, 5남은 신난수(愼蘭秀)이고, 6남은 신난무(愼蘭茂)이다. 장녀는 김간(金澗)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조세진(趙世珎)에게 시집갔다.[『사재집』 권3 「강원도 관찰사 신공 묘비명」] 신자건의 자손은 <중종반정> 이후에 일부러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