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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16년(광해군 8)~1662년(현종 3) = 47]. 조선 후기 인조~현종 때 활동한 문신. 사간원(司諫院)사간(司諫)을 지냈다. 자는 회중(晦仲)이고, 호는 낙정(洛汀)이다. 본관은 밀양(密陽)이고 거주지는 경상도 선산(善山)이다. 아버지는 박진환(朴震煥)이며, 어머니 김씨(金氏)는 김훤(金翧)의 딸이다. 조부는 형조 참의(參議)박수홍(朴守弘)이다.
[인조~현종 시대 활동]
1648년(인조 26) 식년(式年) 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1654년(효종 5) 10월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이 되었고, 1655년(효종 6) 2월 초순에 전라우도 추쇄어사(全羅右道推刷御使)이 되었으며, 2월 말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사서(司書)가 되었다. 그 해 6월 다시 사헌부 지평이 되었다가, 12월에 다시 세자시강원 사서가 되었다. 1658년(효종 9) 9월 또 다시 세자시강원 사서가 되었다.
1659년(현종 즉위) 9월 사간원 정언(正言)이 되었고, 1660년(현종 1) 12월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었다. 1661년(현종 2) 1월 성균관(成均館)사예(司藝)가 되었는데, 같은 달에 문례관(問禮官)이 되었다. 그 해 3월 사간원 헌납(獻納)이 되고, 4월 사헌부 장령이 되었고, 8월에 또 사헌부 장령이 되었으며, 11월에 또 다시 사헌부 장령이 되었다. 1662년(현종 3) 2월 사간원 사간이 되었는데, 6월 그가 일찍이 장성부사(長城府使)로 있었을 때에 입암산성(笠巖山城)의 군량미를 조적(糶糴)하면서 아직 받지도 않은 것을 받았다고 허위로 기록하였기 때문에 기역(畿驛)에 장배(杖配) 되었었다. 1664년(현종 5) 4월 사헌부 장령이 되었다. 1666년(현종 7) 2월에는 경차관(敬差官)으로 명을 받고 지방의 전곡(典穀)의 손실과 민정을 살폈다. 그 해 12월 사헌부 장령이 되었고, 1667년(현종 8) 12월 또 사헌부 장령이 되었다. 1668년(헌종 9) 8월 사헌부 집의(執義)가 되었고, 10월 사간원 사간이 되었다.
1669년(현종 10) 2월 다시 집의가 되었는데, 5월까지 계속 5회에 걸쳐 사헌부 집의가 되었다. 그 해 6월에 사간원 사간이 되고, 9월 사헌부 집의가 되었고, 10월 사간원 사간이 되었으며, 11월 또 사간원 사간이 되었다. 1672년(현종 13) 6월 세자시강원 보덕(報德)이 되었고, 7월 세자시강원 필선(弼善)이 되었으며, 9월 사간원 사간이 되었다. 그 해 10월 그는 사간으로서 고향에 있으며 상소하여 사직을 하면서 영남의 네 가지 폐단을 아뢰었으니, 즉 흉년으로 굶주리고 있는 백성들에게 마땅히 관곡을 풀어 대여해 주는 것이 정부의 방침이었는데도 이에 대한 실행이 전혀 없음을 지적하였고, 전세(田稅)와 곡물의 과중함이 너무 지나치므로 이에 대한 시정책이 강구되어야 할 것임을 주장한 것 등이다. 그리고 그는 같은 해 12월 세자시강원 필선이 되었다.
[후손]
부인 안동 김씨(安東金氏)는 김수창(金壽昌)의 딸인데, 자녀는 2남을 낳았다. 1남은 박성익(朴成翼)이고 2남은 박성하(朴成厦)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