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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56년(세조 2) = ?]. 조선 전기 세종~세조 때 활동한 문신. 호는 한석당(閑碩堂)이고, 본관은 순천(順天)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박안생(朴安生)이며, 어머니 안동 김씨(安東金氏)는 김휴(金休)의 딸이다. 부인 안동 김씨(安東金氏)는 김익생(金益生)의 딸이다.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인 박팽년(朴彭年)의 아버지로 그의 아들과 함께 순절하였다. 성삼문(成三問) · 하위지(河緯地) 등이 모두 스승으로 섬겼다.
1423년(세종 5) 식년(式年) 문과(文科)에 장원하였다. 그 해 3월 인수부(仁壽府) 승(丞)이 되었다. 1427년(세종 9) 문과(文科)중시(重試)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그 해 집현전(集賢殿)수찬(修撰)이 되고, 1428년(세종 10) 겸관(兼官)으로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보덕(輔德)이 되었다. 1438년(세종 20) 9월 좌사간 대부(左司諫大夫)가 되었고, 1441년(세종 23) 11월 다시 좌사간 대부가 되었으며, 1442년(세종 24) 12월 12월 중추원(中樞院)첨지사(僉知事)가 되었다. 1445년(세종 27) 3월 다시 중추원 첨지사가 되었고, 4월 병조 참의(參議)가 되었으며, 6월에 우승지(右承旨)가 되었다. 1446년(세종 28) 11월 좌승지(左承旨)가 되었다. 1447년(세종 29) 4월 여산군(礪山郡)으로 귀양 갔다가 1448년(세종 30) 4월 풀려 돌아와 7월 공조 참의(參議)가 되었다. 1449년(세종 31) 1월 병조 참판(參判)이 되었고, 9월 선위사(宣慰使)로 평양(平壤)에 갔으며, 12월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다.
1452년(문종 2) 2월 공조 참판이 되었다. 이때 『세종실록(世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여 연대(年代)를 찬수(撰修)하였다.
1452년(단종 즉위) 5월 사은사(謝恩使)로 명(明)나라에 갔다가 그 해 9월에 돌아왔다. 그 해 12월 호조 참판이 되었다. 1453년(단종 1) 7월 초에 다시 호조 참판이 되었다가 같은 달 하순에 사헌부(司憲府)대사헌(大司憲)이 되었다. 그 해 10월 11일 또 다시 호조 참판이 되었고, 같은 달 15일 형조 판서가 되었으며, 11월 공조 판서가 되었다. 1455년(단종 3) 2월 중추원 사(使)가 되었다.
1455년(세조 1) 7월 경연(經筵)지사(知事)가 되었고, 8월 중추원 동지사(同知事)가 되었다. 1456년(세조 2) 3월 다시 중추원 동지사가 되었다가 5월 예문관(藝文館)대제학(大提學)이 되었다. 일찍이 세종의 신임을 받은 그는 세조가 어린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빼앗아 차지하자 크게 통분하여 통한을 품어오던 차에 아들 박팽년과 이개(李塏) · 성삼문 · 하위지 · 유성원(柳誠源) 등 집현전 학사들이 중심이 되어 은밀히 추진되던 단종 복위 운동에 가담하였다. 그 해 6월 2일 성균 사예(成均司藝) 김질(金礩)이 그 장인인 의정부 우찬성(右贊成)정창손(鄭昌孫)과 더불어 밀고하여 이 단종 복위 운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는 그 아들 박팽년과 함께 잡혀 그 달 8일에 군기감(軍器監) 앞 길에서 모두 능지처사(陵遲處死) 당하였다. 그의 나머지 아들 박인년(朴引年) · 박대년(朴大年) · 박기년(朴耆年) · 박영년(朴永年)들도 모두 상왕(上王) 단종 복위 운동을 도모하다가, 같은 해 6월 대역죄로 처형되었다.
[시호와 후손]
시호는 문민(文愍)이다. 1739년(영조 15)에 신원(伸寃)되어 복관(復官)되고, 1791년(정조 15) 장릉(莊陵) 배식단(配食壇) 정단(正壇)에 배향되었으며, 공주 동학사 숙모전(肅慕殿)에 제향되었다. 부인 안동 김씨(安東金氏)는 김익생(金益生)의 딸인데. 자녀는 4남을 낳았다. 1남은 박팽년(朴彭年)이고 2남은 박인년(朴引年)이며, 3남은 박기년(朴耆年)이고, 4남은 박대년(朴大年)이다. 박영년(朴永年)은 박중림의 서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