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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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주(朴宗冑)

서지사항
항목명박종주(朴宗冑)
용어구분인명사전
분야정치·행정가
유형인물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총론]
[1591년(선조 24)~1623년(인조 1) = 33세]. 조선 중기 광해군~인조 때 활동한 문신. 이조 정량(正郞)을 지냈다. 자는 언중(彦仲)이고, 호는 이우헌(二憂軒)이다. 본관은 고령(高靈)인데, 거주지도 경상도 고령이다. 아버지는 장령(掌令)박광선(朴光先)이다. 조부는 박정완(朴廷琬)이고, 조모 조씨(曹氏)는 조몽길(曹夢吉)의 딸이다. 처는 벽진 이씨(碧珍李氏)는 이언영(李彦英)의 딸이다.

[광해군∼인조 시대 활동]
1615년(광해군 7) 식년시(式年試) 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1616년(광해군 8) 3월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설서(說書)가 되었다가 홍문관(弘文館) 저작(著作)이 되었다. 1617년(광해군 9) 2월 저작으로서 설서(說書)를 겸하였고 3월 홍문관 수찬(修撰)이 되었으며, 이어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이 되었는데, 12월 세자시강원 사서(司書)를 겸하였다. 1618년(광해군 10) 초에 사간원(司諫院) 헌납(獻納)이 되고, 5월 홍문관 부교리(副敎理)가 되었고, 7월 이조 좌랑(佐郞)이 되었다. 그 해 11월 이조 정랑과 사서를 겸하였고, 12월에는 세자시강원 문학(文學)을 겸하였다. 1619년(광해군 11) 12월 그는 어전 예차(御前預差)인데 고향에 내려가 병을 핑계로 올라오지 않았으므로 여러 차례 전교하여 올라오게 하였다. 한편 그의 아버지와 아우 박종윤(朴宗胤) 등과 함께 정인홍(鄭仁弘)의 심복으로 광창부원군(廣昌府院君) 이이첨(李爾瞻)과 결탁하였다. 1622년(광해군 14) 7월 분승지(分承旨)가 되었는데, 『광해군일기』에는 그가 관반(館伴)으로 남도(南道)에서 음학(淫虐)을 일삼았다고 하였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인조가 즉위하자 4월 양사 합계(兩司合啓)로 그를 처형하라는 주장이 계속되었다. 이에 5월 의금부 도사를 경상도에 보내어 대구 남문 밖에서 박종주를 참수하였으니 당시 박종주의 나이는 33세였다.


『인조실록(仁祖實錄)』에서 당시 그가 처형당하게 된 정황을 볼 수 있다. 당시 양사에서 합계(合啓)하기를, “박종주는 그 몸에 온갖 악이 다 갖추어져 있습니다. 폐모를 주장했던 흉악하고 참혹한 논의는 박정길(朴鼎吉) · 한찬남(韓纘男) 등과 다를 것이 없고, 뻗치는 위세를 믿고 인명을 해치고 죽인 것은 박엽(朴燁)과 다를 것이 없으므로 영남 사람들이 그 고기를 씹어 먹고 싶어 합니다. 김순(金純)의 예에 의거하여 경계 위에서 주살함으로써 인심을 통쾌하게 하소서…”라고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박종주의 일은, 인명이 지극히 중한 것이니, 경솔하게 주살할 수는 없다. 위리 안치하도록 하라. 나머지는 아뢴대로 하라.” 하였다. 다음 날 양사가 박종주에 대한 일을 탑전(榻前)에서 또 아뢰니, 임금이 따랐다.[『인조실록』 인조 1년 4월 29일]

[성품과 일화]
박종주의 성품에 대하여서는 광해군 시대에 사간원에서 박종주의 출사를 청하며 올린 계(啓)에서 알 수 있다. 사간원에서 아뢰기를 “박종주는 쇠처럼 굳세고 옥처럼 깨끗한 사람으로서 다른 뜻이 전혀 없습니다. 어려서부터 현상(賢相)의 문하에서 수업하여 언행이 아름다웠으므로 평소 마을에서 칭찬이 자자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벼슬길에 올라서는 청직(淸職)의 반열을 많이 거치면서는 안빈(安貧)과 근신(謹身)으로 자임하였으므로, 관직에 몸을 담고 일을 처리하는 데에 조금도 잘못됨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요망한 유자(儒者)들의 무리가 감히 형편없는 말과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를 가지고 못할 짓 없이 추악하게 비난하고 모욕을 가하면서 기필코 불측한 지경에 빠뜨리고야 말려고 하였습니다.…헌납(獻納) 박종주의 출사(出仕)를 명하소서.”라고 하였다.[『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광해군 10년 4월 23일] 그러나 이 기록에 대하여 사관은 “요망한 유자들이 박종주는 공격한 것이 정권을 다투던 허균(許筠)의 꾀에서 나온 것이긴 하다. 그러나 박종주가 탐욕을 부려 제멋대로 행동하면서 한 도(道)를 무단(武斷)하다가 등제(登第)하고 난 뒤에 갑자기 갑부가 된 것이야말로 숨길 수 없는 죄악이라 할 것인데, 지금 얼음처럼 깨끗하고 옥처럼 고결하다고 비유하다니 놀라겠다.” 라고 논평하였다.

[참고문헌]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국조방목(國朝榜目)』
■ 『기년편고(紀年便攷)』
■ 『학봉집(鶴峰集)』
■ 『한국인(韓國人)의 족보(族譜)』

■ [집필자] 박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