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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398년(태조 7) = ?]. 고려 말 우왕~조선 초 태조 때 활동한 무신, 명장이다. 문하부(門下府) 참찬사(參贊事)를 지냈다.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아들은 박기(朴耆)이다.
[고려 우왕~공양왕 시대 활동]
고려 우왕(禑王) 때에 김해부사(金海府使)가 되었다. 이때 왜구(倭寇)를 공격 격퇴시켰다. 뒤에 경상도순문사(慶尙道巡問使)가 되어 왜적을 목 베었다. 1388년(우왕 14) 요동정벌(遼東征伐) 때 원수(元帥)로서 행군하였다가 이성계(李成桂)를 따라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回軍), 최영(崔瑩)을 축출한 뒤에는 다시 경상도 도순문사(慶尙道都巡問使)가 되었다. 이때인 1389년(창왕 1) 2월 전함 1백여 척을 이끌고 대마도(對馬島)를 쳐서 왜선 3백여 척을 불태우고 피로(被虜)된 남녀 1백여 인을 찾아 돌아왔다. 뒤에 자혜부(慈惠府) 판사(判事)가 되어 1388년(창왕 1) 11월 이성계, 삼사판사(三司判事) 심덕부(沈德符), 밀직부사(密直副使) 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창왕(昌王)을 폐하고 공양왕을 추대한 공으로 문하부 지사(知事)가 되었고, 충의군(忠義君)에 봉해졌으며, 공신(功臣)이 되었다. 1390년(공양왕 2) <김종연(金宗衍)의 옥사(獄事)>에 연루되어 풍주(豐州)에 유배되었으나 곧 사면되어 회군공신(回軍功臣)이 되었다.
[조선 태조 시대 활동]
조선 초기인 1393년(태조 2) 양광도 절제사(楊廣道節制使)가 되어 왜구를 물리쳤다. 그 해 문하부 참찬사가 되었는데 1394년(태조 3) 1월에 밀성(密城) 사람인 이흥무(李興茂)의 옥사(獄辭)에 연루되어 순군옥(巡軍獄)에 구금되었다. 대간(臺諫)과 형조에서 대역죄로 논의되었으나 태조의 호의로 구금된 지 2일 만에 석방되었고, 그 해 3월에 파면되었다.[『태조실록(太祖實錄)』 태조 3년 1월 16일 · 1월 21일 · 2월 25일 · 2월 29일 · 3월 1일 · 3월 13일] 그 해 9월에 서북면 도순문사(西北面都巡問使)가 되었는데, 헌사(憲司)에서 그가 일찍이 김가행(金可行)과 박중질(朴仲質)의 옥사에 관련되었다고 파직을 청하였기 때문에 파직되었다.[『태조실록』 태조 3년 9월 19일] 1398년(태조 7) 1월에 다시 문하부 참찬사가 되어 금군(禁軍)을 관장하였다. 그 해 <제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서 8월 26일 봉화백(奉化伯) 정도전, 의성군(宜城君) 남은(南誾), 부성군(富城君) 심효생(沈孝生) 등이 실각하여 참형(斬刑)을 당하였다. 그도 문하부 참찬사로서 금군을 관장하고 있었는데, 갑사(甲士)를 거느리고 대궐 문에 나가서 있다가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태조실록』 태조 7년 8월 26일]
[성품]
그는 넓은 도량과 활달(豁達)한 자질로써 재능이 있어 중앙과 지방 관직을 두루 벼슬하며 칭찬을 받았으며, 특히 장수의 지략(知略)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