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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생몰년 미상]. 고려 말 우왕~조선 태조 때 활동한 문신. 태조의 원종공신(原從功臣). 강화절제사(江華節制使)를 지냈다. 본관은 반남(潘南)이고, 거주지는 개성, 서울이다. 아버지는 박문보(朴文珤)이고, 아들은 박고(朴翶)이다.
[고려 공민왕~조선 태조 시대 활동]
1380년(우왕 6) 우상시(右常侍)에서 공주도병마사(公州道兵馬使)가 되었다. 1388년(우왕 14) 요동 정벌 때는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 이성계(李成桂) 휘하의 조전원수(助戰元帥)가 되었다. 1390년(공양왕 2) 밀직사(密直司) 동지사(同知事)로 있을 때 <위화도 회군(威化島回軍)>의 공으로 회군공신(回軍功臣)에 책록되었다. 1391년(공양왕 3) 한양부윤(漢陽府尹)이 되었다.
조선이 건국되는 해인 1792년(태조 1) 10월에 그는 한양윤(漢陽尹)으로 나가 있었는데, 동중추원(中樞院)동지사(同知事)가 되었고, 원종공신(原從功臣)이란 칭호를 받았다. 1393년(태조 2) 2월에 태조가 새 도읍 건설 관계로 계룡산(鷄龍山)에 갈 때 그는 임금과 함께 갔었는데, 임금이 계룡산에서 길을 떠나면서 박영충 등을 그 곳에 남겨 두고 새 도읍의 건설을 감독하게 하여 감독하였다. 그 해 5월에 강화절제사가 되었고, 그 해 7월에 개국공신(開國功臣) 2등에 추록되었다. 그 해 9월에 천추절 진하사(千秋節進賀使)로 명(明)나라에 파견되었으나, 첨수참(甜水站)에 이르렀다가 명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