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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791년(정조 15)~1854년(철종 5) = 64세]. 조선 후기 순조~철종 때 활동한 문신. 행직은 우의정(右議政)이다. 자는 성기(聖氣)이고, 호는 오서(梧墅)이며, 본관은 고령(高靈)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조부는 박경규(朴敬圭)이고, 조모 이씨(李氏)는 이석심(李錫心)의 딸이다. 아버지는 예조 참의(參議)박종순(朴鍾淳)이며, 어머니 양주 조씨(楊洲趙氏)는 조영소(趙榮素)의 딸이다.
[순조 시대 활동]
1813년(순조 13)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1816년(순조 16)에 식년시(式年試) 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가주서(假注書)로서 경연관(經筵官)이 되었다. 1817년(순조 17)에 승문원(承文院)에 보임되어 1822년(순조 22)에 수찬(修撰)이 되었고, 1823년(순조 23)에 규장각(奎章閣)직각(直閣)이 되었다. 그 해 어사(御使)에 뽑히었다. 1825년(순조 25)에 통정대부(通政大夫)가 되었고, 1829년(순조 29)에 명천부사(明川府使)가 되었다가 같은 해 11월에 전라도 관찰사가 되었다. 1832년(순조 32) 3월에 성균관(成均館)대사성(大司成)이 되었고, 그 해 7월에 이조 참의가 되었으며, 1833년(순조 33)에 우승지(右承旨)가 되었다.
[헌종 시대 활동]
1835년(헌종 1) 5월에 규장각 직제학(直提學)이 되었다. 1836년(헌종 2) 1월에 승지(承旨)가 되었다가 그 해 5월에 사간원(司諫院)대사간(大司諫)이 되었으며, 그 해 9월에 이조 참판(參判)이 되었다. 1837년(헌종 3) 김흥근(金興根)과 함께 실록교수당상(實錄校讎堂上)의 직을 맡아 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838년(헌종 4) 강화유수(江華留守)가 되었다가, 1839년(헌종 5) 6월에 공조 판서가 되었다. 1840년(헌종 6) 11월에 사헌부(司憲府)대사헌(大司憲)이 되었으며, 1841년(헌종 7) 5월에 형조 판서가 되었다. 1842년(헌종 8) 1월에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이 되었고, 그 해 5월에 다시 형조 판서가 되었으며, 그 해 8월에 예조 판서가 되었다. 1843년(헌종 9) 7월에 호조 판서가 되었고, 1844년(헌종 10) 1월에 규장각 제학(提學)이 되었다. 1845년(헌종 11) 1월에 이조 판서가 되었고, 그 해 8월에 예조 판서가 되었다. 1846년(헌종 12) 3월에 진하 겸 사은정사(進賀兼謝恩正使)로 부사(副使) 조형복(趙亨復), 서장관(書狀官) 심희순(沈熙淳)과 함께 청(淸)나라에 갔다가 그 뒤 돌아왔는데, 그 해 7월에 다시 예조 판서가 되었다가, 같은 해 10월에 사헌부 대사헌이 되었다. 1847년(헌종 13) 1월에 예조 판서가 되었고, 그 해 9월에 공조 판서가 되었다. 그 해 11월에는 김흥근과 함께 국조보감 찬집청(國朝寶鑑纂輯廳) 교정 당상校正堂上)이 되어 국조보감 찬집에 참여하였다. 1848년(헌종 14) 5월에 예조 판서가 되었고, 그 해 7월에 함경도관찰사가 되었다.
[철종 시대 활동]
1849년(철종 즉위) 11월에 문형회권(文衡會圈)을 행하여 박영원·조두순(趙斗淳)·서기순·윤정현 중에서 조두순을 대제학(大提學)으로 삼았다. 1850년(철종 1) 3월에 겸지실록사(兼知實錄事)가 되고, 그 해 6월에 의금부(義禁府)판사(判事)가 되었고, 그 해 10월에 실록찬수당상(實錄纂修堂上)이 되었으며, 그 해 11월에는 예조 판서가 되었다. 1851년(철종 2) 1월에 병조 판서가 되었고, 그 해 2월에 우의정(右議政)이 되었다. 이때 절검(節儉)에 힘쓸 것을 진달(陳達)하였는데, 비답(批答)하기를, “만일 백성을 사랑하려고 한다면 절검부터 시작해야 한다. 경이 ‘애민(愛民)’이란 두 글자로 간절히 진계하고 면려하니, 결단코 마땅히 체념(體念)하겠다.” 하였다. 그는 그 뒤 좌의정(左議政)이 되었는데, 1852년(철종 3) 4월에 진소(陳疏)하여 사직(辭職)하니, 비답을 내려 면부(勉副)하였다. 그 뒤 중추부(中樞府)판사(判事)로 있다가 1854년(철종 5) 12월 25일 세상을 떠나니, 나이 64세이다. 임금은 그를 믿고 의지하는 바였으며, 조야(朝野)가 우러러 사모하였는데, 불행히도 의외로 빌미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는 부음을 받고 지극히 애통해 하며, 그의 초상에 동원부기(東園副器) 1부(部)를 보내주고, 성복(成服)하는 날에는 승지(承旨)를 보내어 치제(致祭)하며 녹봉(祿俸)은 3년을 한하여 보내어주라 하였다.
[성품과 일화]
박영원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하다. 그는 타고난 성품이 독실(篤實)하고 몸가짐이 간중(簡重)하였다. 그는 특히 단아(端雅)한 자질과 고상(高尙)한 식견이 비단 나라를 빛내는 문채(文采)일 뿐만 아니라, 문학(文學)이 심오(深奧)하고 근거가 있었으며, 규모(規模)가 세심하고 치밀하였다. 네 임금을 역사(歷事)하여 조정에 선지 40년에 4도(四道)의 관찰사와 6조(六曹)의 판서(判書)를 역임하고 정승에 이르렀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이 없어 조심하고 겸손하였다. 집안에 쌓인 재물이 없었고, 문 안에는 잡된 손이 없었으니, 옛날에 이른바 영명(令名)을 잃지 않은 이라고 한 것에 거의 가까웠다.[『철종실록』 철종 5년 12월 25일 「박영원 졸기」]
[시호와 가족]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부인 창녕 성씨(昌寧成氏)는 성재숭(成載崇)의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