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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362년(고려 공민왕 11)~1444년(조선 세종 26) = 83세]. 고려 말 우왕~조선 초기 세종 때까지 활동한 문신. 이조 판서를 지냈다. 자는 경부(敬夫)이고, 호는 설봉(雪峰)이다. 본관은 운봉(雲峰)이고, 거주지는 개성, 서울, 전라도 통진현(通津縣) 동성(童城)이다. 아버지는 박지의(朴之誼)이며, 어머니 주씨(周氏)는 주사옹(周思雍)의 딸이다. 포은(圃隱)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의 문인이다.
[고려 우왕~공양왕 시대 활동]
1385년(우왕 11)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여러 벼슬을 거쳐 사헌부(司憲府) 규정(糾正)이 되었다. 그 때에 이성계(李成桂)가 제군부(諸君府)를 설치하니, 그는 중랑장(中郞將)으로서 군부도사(軍府都事)를 겸대(兼帶)하였고, 뒤에 예조 정랑(正郞), 형조 정랑이 되었다.
[조선 태조~세종 시대 활동]
1392년(태조 1)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채록되었고, 봉상시(奉常寺)소경(少卿)이 되었다. 1393년(태조 2) 2월 사헌부(司憲府) 시사(侍史)가 되었고, 그 해 3월 교주강릉도 안렴사(交州江陵道按廉使)가 되었다가 그 해 9월에 감문위 대장군(監門衛大將軍)과 사헌중승(司憲中丞)을 겸임하였다. 1395년(태조 4) 형조 도관(都官)으로서 노비 문제를 상언(上言)하였는데, 공사노비(公私奴婢)에 대하여 다른 도감을 두고 새로운 노비문서를 만들고 옛 문서는 소각하여 노비 문제에 대한 쟁송을 없애려고 하였다. 1397년(태조 6) 간관(諫官)으로서 변정도감의 속공(屬公)한 노비로 방환(放還)한 노비의 수를 보충하자고 주장하여 관철시켰다. 1398년(태조 7) 쓸데없는 관직을 줄이고 군자전(軍資田)이 적으므로 녹과전(祿科田)으로 정하지 말고 저축에 대비하자고 하였으며, 또 아일(衙日)에는 정전(正殿)에서 조회(朝會)를 받고 정무를 볼 것을 상언하기도 하였다.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 · 성균 대사성(成均大司成)에 전임되었다.
1400년(태종 즉위) 태종이 왕위를 계승하자 승추부(承樞府) 좌부승지(左副承旨)가 되었고, 1401년(태종 1) 참찬관(參贊官)승지(承旨)로서 경연(經筵)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1402년(태종 2) 좌대언(左代言)이 되었다가 그 해 7월 사헌부(司憲府)대사헌(大司憲)이 되었다. 1403년(태종 3) 7월 광주 판목사(廣州判牧事)가 되었다. 1404년(태종 4) 개성유후(開城留後)와 한성부윤(漢城府尹)과 승녕부윤(承寧府尹)이 되었고, 그 해 11월에 의정부(議政府) 참지사(參知事)로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明)나라 서울에 갔다가 1405년(태종 5) 4월에 돌아왔다. 그 해 5월 노비변정도감(奴婢辨定都監)제조(提調)가 되고, 그 해 8월에 다시 사헌부 대사헌이 되었으나, 그 해 11월 대사헌으로서 전후가 맞지 않는 계문(啓聞)을 올렸다는 이유로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순금사(巡禁司)에 하옥되었다가 아주(牙州)로 귀양갔다. 1406년(태종 6) 2월 귀양에서 풀려나 경외종편(京外從便) 되었으며, 그 해 3월에 동북면 도순문 찰리사(東北面都巡問察里使)에 임명되었다. 그 때 경성 · 경원에 무역소를 설치하자고 상소하였다. 1407년(태종 7) 7월 다시 의정부 참지사가 되었는데, 그때 세자(世子)가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 서울에 갈 때 요동까지 호종하고 돌아왔다. 그 해 12월에 공조 판서가 되었다. 1408년(태종 8) 7월에는 어머니의 상(喪)을 당하였으나 기복(起復)되어 서북면 도순문 찰리사(西北面都巡問察里使) 겸 평양부윤(兼平壤府尹)이 되었다. 1409년(태종 9)에는 또 아버지 상을 당하였으나 1410년(태종 10) 11월에 기복되어 의정부 지사(知事)가 되었다. 1412년(태종 12) 12월 호조 판서가 되었다. 그가 호조 판서 때인 1414년(태종 14) 9월에 과염법(課鹽法)을 세웠다. 1415년(태종 15) 5월 병조 판서가 되었다. 1416년(태종 16) 5월 의정부 찬성사(贊成事)가 되었다가 그 해 11월에 이조 판서가 되었다. 1417년(태종 17) 의금부(義禁府)제조(提調)가 되었다. 1418년(태종 18) 1월 우군 도총제부 판사(右軍都摠制府判事)가 되었고, 그 해 5월에 다시 병조 판서가 되었으며, 그 해 8월에 다시 의정부 찬성사가 되었다.
1418년(세종 즉위) 8월 12일 의정부 찬성사로서 봉숭도감(封崇都監)의 제조(提調)가 되었고, 그 해 9월 사은사(謝恩使) 심온(沈溫)과 함께 주문사(奏聞使)로 명나라 서울인 북경(北京)에 갔다가 그 해 12월에 돌아왔다. 1419년(세종 1) 3월에 다시 이조 판서에 임명되어 선공감(繕工監)제조(提調)가 되었더니, 선공감 관리의 불법(不法) 행위의 공사(供辭)에 관련되어 그 해 5월 부모가 살던 전라도 통진현(通津縣) 동성(童城)에 유배되었다. 13년만인 1432년(세종 14) 2월에 소환 되었다가 1444년(세종 26) 윤7월 12일 나이 83세로 세상을 떠났다.
[성품과 일화]
박신은 타고난 성품이 관후(寬厚)하고 풍채와 위의(威儀)가 대단히 뛰어났고 부국(富國)을 경영(經營)하는 방술(方術)이 뛰어났다고 한다. 그가 통진현(通津縣)에 있을 때 통진현의 서쪽에 갑곶(甲串)이라는 나루가 있었는데, 오고가는 사람들은 반드시 물속을 수십보(數十步) 걸어가야 비로소 배에 오를 수 있고, 또 배에서 내려서도 물속을 수십보 걸어가야 언덕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므로 얼음이 얼고 눈이 내릴 때면 길 다니는 나그네들이 더욱 고통을 당하였는데, 그가 재산을 의연(義捐)하고 고을 사람들을 이끌어 양쪽 언덕에 돌을 모아 길을 만들었더니, 길 다니는 사람들이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 공로를 힘입고 있다고 하였다.
[시호와 후손]
시호는 혜숙(惠肅)이다. 부인 조씨(趙氏)는 2남을 낳았는데, 장남은 박종지(朴從旨)이다. 차남 운성군(雲城君) 박종우(朴從愚)는 정혜옹주(貞惠翁主)와 결혼하면서 태종(太宗)의 부마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