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1400년(정종 2) 8월 좌간의(左諫議)가 되었고, 1409년(태종 9) 9월 우사간(右司諫)이 되었으며, 1410년(태종 10) 동부대언(同副代言)이 되었다. 1411년(태종 11) 2월 강원도 관찰사가 되었다. 그 이듬해인 1412년(태종 12) 10월 인녕부윤(仁寧府尹) 재직 당시에 장천군(長川君) 이종무(李從茂)와 함께 정조사(正朝使)로 명(明)나라 경사(京師) 곧 남경(南京)에 갔다가 그 이듬해인 1413년(태종 13)에 돌아왔다. 그 해 10월 강원도 관찰사 재직시의 뇌물 사건에 연루되어 붕당을 만들고 패를 지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장(杖) 70대에 처하여졌다. 1415년(태종 15) 2월 전라도 관찰사가 되었다. 그는 이때 김제의 벽골제(碧骨堤)를 수축하여 송덕비가 세워졌다. 1416년(태종 16) 1월 의금부(義禁府)제조(提調)로 임명되어 <민무질 사건(閔無疾事件)>과 관련된 이지성(李之誠)을 심문하였다. 그리고 연루된 하륜(河崙)을 국문할 것을 청하기도 하였다. 그 해 6월에 호조 참판이 되었다. 1417년(태종 17) 6월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고, 그 해 9월 사헌부(司憲府)대사헌(大司憲)이 되었다. 이때 태조의 제4왕자인 이방간(李芳幹) 등을 치죄(治罪)할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1418년(태종 18) 5월 형조 판서가 되었다.
1418년(세종 즉위) 8월 병조 판서가 되었다. 이때 병사(兵事)를 상왕(上王)인 태종에게 품의하지 않고 처리한 죄로 그 해 9월 사천(泗川)에 유배되고, 이어 같은 해 11월 26일 서교(西郊)에서 참수(斬首)당하였다.
[부인과 자손]
첫째 부인 김씨(金氏)는 김존성(金存誠)의 딸이고, 둘째 부인 전씨(全氏)는 전오륜(全五倫)의 딸이다. 자녀는 1남 1녀를 두었는데, 1남은 박의손(朴義孫)이다. 1녀는 권담(權聃)의 처가 되었다. 1458년(세조 4) 4월 그의 자손의 벼슬길이 허통(許通)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