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총론]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 중종 때 활동한 문신. 병조 참지(參知)를 지냈다. 자는 원장(元章)이다. 본관은 죽산(竹山)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조부는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 영의정(領議政)박원형(朴元亨)이고, 아버지는 정안공(靖安公) 의정부(議政府) 좌찬성(左贊成)박안성(朴安性)이다. 어머니는 한양 조씨(漢陽趙氏) 조계발(趙季發)의 딸이다. 부인 남원 윤씨(南原尹氏)는 윤사함(尹思涵)의 딸이다.
[중종 시대 활동]
1507년(중종 2) 식년시(式年試) 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문정공(文正公)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를 중심으로 하는 신진사류에 속한다. 1508년(중종 3) 8월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이 되었다. 1511년(중종 6) 6월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이 되었다가 그 뒤 헌납(獻納)을 거쳐 이듬해인 1512년(중종 7) 윤5월 다시 지평이 되었다. 1516년(중종 11) 홍문관(弘文館)전한(典翰), 1517년(중종 12) 10월 사헌부 집의(執義)가 되어서는 각종 음사(淫祀)와 소격서(昭格署)의 폐지를 주장하였다. 또 중종반정에 공을 세운 사람에게 내린 정국공신(靖國功臣)에 위훈(僞勳)된 사람이 많다고 삭제할 것을 주장하였다.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 조광조를 비롯한 ‘기묘명현(己卯名賢)’들이 제거되자 함께 죄받기를 청하였다. 1520년(중종 15) 2월 홍문관 전한이 되었다. 이때 시강관(侍講官)을 겸임하였다. 1521년(중종 16) 2월 병조 참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