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박소립(朴素立)

서지사항
항목명박소립(朴素立)
용어구분인명사전
분야정치·행정가
유형인물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총론]
[1514년(중종 9)~1582년(선조 15) = 69세]. 조선 중기 중종~선조 때 활동한 문신. 사헌부(司憲府) 대사헌(大司憲)을 지냈다. 자는 예숙(豫叔)이다. 본관은 함양(咸陽)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증 예조 판서 박세무(朴世茂)이며, 어머니 안동 권씨(安東權氏)는 부사과(副司果) 권잉(權仍)의 딸이다.

[명종~선조 시대 활동]
1555년(명종 10) 식년시(式年試) 문과(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1556년(명종 11) 12월 승정원(承政院) 주서(注書)가 되었고, 1557년(명종 12) 7월 초에 홍문관(弘文館) 정자(正字)가 되었으며, 같은 달 중순 말에 예문관(藝文館) 대교(待敎)가 되었다. 1559년(명종 14) 10월 부수찬(副修撰)이 되었고, 그 해 12월 병조 좌랑(佐郞)이 되었다. 1560년(명종 15) 1월 홍문관 수찬(修撰)이 되었고, 그 해 8월 홍문관 부수찬이 되었다. 1561년(명종 16) 5월 이조 좌랑이 되었다. 1562년(명종 17) 8월 사헌부 지평(持平)이 되었고, 그 해 12월 홍문관 부교리(副校理)가 되었다. 1563년(명종 18) 1월 병조 정랑(正郞)이 되었다가 같은 해 2월 이조 정랑이 되었는데, 당시 명종의 총애를 받던 척신 이량(李樑)과 사이가 나빠 대사헌 이감(李戡)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이량이 술책을 써서 자기 아들을 알성시(謁聖試) 문과에 갑과(甲科)로 뽑히게 한 뒤 전랑(銓郞)으로 추천하였으나 상피제(相避制)에 의해 아들이 취임하지 못하자 아들의 친구인 유영길(柳永吉)을 후임으로 추천하니, 박소립이 이를 못마땅하게 여겨 좌랑 윤두수(尹斗壽) 등과 함께 이를 반대하였다. 이문형(李文馨), 허엽(許曄), 사정(司正)기대승(奇大升) 등도 이에 동조하였으나, 국정을 전단하는 이량과 이감에 의해 “부박(浮薄)하며 선동한다.”는 죄명으로 관직에서 추방되었다. 그러나 심의겸(沈義謙)의 도움으로 그 해 9월 홍문관 부교리로 복직되고, 10월에 이조 정랑이 되었으며, 12월에 의정부(議政府) 사인(舍人)이 되었다. 1564년(명종 19) 윤2월에 응교(應敎)가 되고, 그 해 3월에 다시 의정부 사인이 되었고, 6월 중순에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었다가 6월 하순에 홍문관 부응교(副應敎)가 되었으며, 11월에 사헌부 집의(執義)가 되고, 12월에 사복시(司僕寺) 정(正)이 되었다. 1567년(명종 22) 3월 초에 홍문관 응교(應敎)가 되었다가 같은 3월 하순 홍문관 직제학(直提學)이 되었으며, 그 해 6월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었다. 이때 명종이 후사(後嗣) 없이 돌아가자 원상(院相)이준경(李浚慶), 도승지(都承旨)이양원(李陽元) 등과 같이 덕흥군(德興君)의 셋째아들 선조(宣祖)를 임금으로 즉위시키는데 공을 세워 같은 해(선조 즉위) 10월에 대사성(大司成)이 되었다. 1569년(선조 2) 윤6월 승지(承旨)가 되었다. 1571년(선조 4) 1월 성절사(聖節使)로 명(明)나라에 다녀왔으며, 1572년(선조 5) 우승지(右承旨)가 되었다가 같은 해 11월에 도승지가 되었다. 1573년(선조 6) 7월 초에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가 그 해 8월 말에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이 되었다. 1574년(선조 7) 9월 사헌부 대사헌이 되었으며, 1579년(선조 12) 참판으로 있다가 그 뒤 중추부(中樞府) 지사(知事)가 되었다. 1582년(선조 15) 세상을 떠나니 나이는 69세이다.

[성품과 일화]
박소립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성품이 평온하고 고요하며 훌륭한 행실로 당시에 뛰어났을 뿐 아니라 명망이 있었다. 그가 의정부 사인으로 임명받았을 때 실록에서는 그에 대하여 말하기를, “마음을 곧게 갖고 몸가짐은 청렴 근신하게 하였는데 지난 날에 이량 등의 미움을 받아 무거운 화를 입었다.” 라고 하였다.[『명종실록(明宗實錄)』 명종 18년 12월 28일] 또 그가 홍문관 직제학으로 임명받을 때는 실록에서는 “온유(溫柔)한 가운데 주관이 뚜렷하였고 친구사이에 신의가 있었다.” 라고 하였다.[『명종실록』명종 22년 3월 20일]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 신혈리(神穴里) 선영(先塋)에 있다. 부인 평해 손씨(平海孫氏)는 손숙겸(孫叔謙)의 딸인데, 자녀는 1남 1녀를 낳았다. 아들은 박지언(朴知言)이고, 딸은 심종수(沈宗壽)의 처가 되었다.

[참고문헌]
■ 『명종실록(明宗實錄)』
■ 『선조실록(宣祖實錄)』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국조방목(國朝榜目)』
■ 『한국인(韓國人)의 족보(族譜)』

■ [집필자] 박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