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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30년(세종 12)~1479년(성종 10) = 50세.] 조선 전기 세종~성종 때 활동한 왕자. 세종(世宗)의 서출 제 5자. 봉작(封爵)은 밀성군(密城君)이고, 자는 문지(文之)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어머니 김신빈(金愼嬪)은 청풍 김씨(淸風金氏) 중추원(中樞院)첨지사(僉知事)김원(金元)의 딸이다. 김신빈이 낳은 아들 6명 중에서 셋째인데, 동복형이 계양군(桂陽君) 이증(李璔), 의창군(義昌君) 이강(李玒)이고, 동복아우가 익현군(翼峴君) 이관(李璭), 영해군(寧海君) 이당(李瑭), 담양군(潭陽君) 이거(李璖)이다.
[세종~세조 시대 활동]
1430년(세종 12) 세종과 김신빈 사이에 셋째 아들로서 태어났다. 1442년(세종 24) 7월 13세 때에 밀성군으로 봉해졌다. 1444년(세종 26) 15세 때에 풍저창(豊儲倉) 사(使) 민승서(閔承序)의 딸과 혼인하였다. 1450년 2월 18일 아버지 세종이 승하한 직후 어머니 김신빈은 출가(出家)하여 여승이 되었다. 1451년(문종 1) 3월 밀성군 이침이 병에 걸려서 위독하게 되자, 문종이 승려들을 모아서 흥천사(興天寺)에서 그의 병이 낫기를 기도하였다. 밀성군의 병이 나으니 문종이 기뻐하며 밀성군의 치료를 담당했던 내의(內醫) 전순의(全循義)에게 말을 하사하였다.
1453년(단종 1) 10월 수양대군(首陽大君)이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키자, 왕자들과 종친(宗親)들은 세조에 대한 지지와 반대로 갈리었다. 밀성군 이침은 동복형 계양군 이증, 의창군 이강을 따라서 수양대군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 1455년 윤6월 세조가 즉위하자, 각종 연회에서 시연(侍宴)하였고, 관사(觀射)에 입시(入侍)하였다. 세조는 단종을 보호하거나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처벌받은 ‘역적’들의 가산(家産)을 적몰하고 이를 종친과 공신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밀성군은 여러 차례 토지와 노비를 하사 받았다. 1456년(세조 2) 3월 유한(柳漢)의 해주(海州) 토지를 하사받았고, 1457년(세조 3) 3월 이호(李昊)의 연산(連山) 토지를 하사 받았다. 또 1457년 2월에도 ‘역적’의 노비를 하사받았다. 1458년(세조 4) 집에 도적이 침입하려고 한 적이 있었는데, 의금부 · 형조의 낭관과 한성부의 군사를 보내서 혐의자들을 모조리 수색 체포하게 하여, 이때 잡힌 자가 2백여 명이나 되었다. 이들을 의금부(義禁府)와 전옥(典獄)에 나누어 가두고 삼사(三司)에서 일일이 국문하게 하니[『세조실록』 세조 4년 4월 28일] 진짜 도적 태산(泰山)을 잡아낼 수 있었다.
1465년(세조 11) 1월 16일 어머니 김신빈이 졸하였다. 1467년(세조 13) 1월 오위도총부(兼五衛都摠府) 도총관(都摠管)이 되었다. 그해 5월 함길도(咸吉道)에서 <이시애(李施愛)의 반란>이 일어나자, 세조가 밀성군 이침에게 이를 토벌하도록 명하였다. 밀성군 이침은 병이라고 핑계하고 사양하였으므로, 세조는 임영대군(臨瀛大君)의 둘째 아들 구성군(歸城君) 이준(李浚)을 함길도 · 강원도 · 평안도 · 황해도 4도(道)의 병마 도총사(兵馬都摠使)로 삼았다. 1467년(세조 3) 12월 세조가 전곡(錢穀)을 맡아보는 관청의 문서(文書)를 모두 거두어 들여서, 밀성군 이침으로 하여금 문서를 자세히 검토하여 법을 어기고 전곡을 착복한 관리들을 찾아내게 하였다. 이를 보면, 세조가 밀성군 이침에게 군사의 현장 지휘와 경제의 현황 파악에 남다른 재능이 있다고 보았으나, 본인의 사양으로 그만두었다.
[예종~성종 시대 활동]
1468년 9월 세조가 52세의 나이로 승하하고, 19세의 예종이 즉위하자, 세조의 정희왕후(貞熹王后)가 세조의 장례지를 종친 · 재추(宰樞)들과 의논하고 원릉(園陵)으로 쓸 만한 땅을 찾아보게 하였다. 정희왕후가 밀성군 이침의 주장에 따라서 광릉(光陵)으로 정하고, 산릉도감(山陵都監)의 제조(提調)에 임명하였다. 그해 12월에 세종의 왕릉인 영릉(英陵)을 천장(遷葬)할 때, 천릉도감(遷陵都監) 도제조(都提調)에 임명되어, 영릉을 경기도 여주로 옮겼다. 1469년 11월 예종이 20세로 승하하고, 13세의 성종이 즉위하자, 정희대비의 명을 받고 예종(睿宗)의 왕릉을 조성할 땅을 상지(相地)하였다.
1467년(예종 즉위) 10월 병조 참지(參知) 유자광(柳子光)이 병조 판서 남이(南怡)가 반란을 모의하였다고 고변하였다. 밀성군 이침은 영순군(永順君) 이부(李溥) · 신숙주(申叔舟) · 한명회(韓明澮) 등과 함께 <남이의 옥사>을 다스렸다. 그 공으로 덕원군(德源君) 이서(李署) 등과 함께 익대공신(難翊戴功臣) 2등에 책록되어, 수충 보사 정난 익대공신(輸忠保社定難翊戴功臣)의 칭호를 받았다. 1471년(성종 2) 어린 성종이 즉위하는 데에 공훈이 크다고 하여 좌리공신(佐理功臣) 2등에 책록되어, 순성 명량 경제 좌리공신(純誠明亮經濟佐理功臣)의 칭호를 받았다.
1469년(예종 1) 종부시(宗簿寺)제조(提調)로 예종의 명을 받고 선원전(璿源殿)에 나가 영순군 이부와 함께 환조(桓祖)이자춘(李子春) 이하의 영정(影幀)을 받들어 대궐 안으로 들어 왔다. 1474년(성종 5) 12월 24일 종친의 범법(犯法)을 사간원에서 탄핵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반대하였다. 1476년(성종 7) 대비의 명을 받고 좌찬성(左贊成)노사신(盧思愼)과 함께 교명(敎命)과 책보(冊寶)를 가지고 가서 윤기견(尹起畎)의 딸 윤숙의(尹淑儀: 제헌왕후)를 중궁으로 책봉하였는데, 윤숙의가 바로 연산군 생모인 폐비(廢妃) 윤씨(尹氏)이다. 1478년(성종 9) 1월 종부시 제조로서 창원군(昌原君)이성(李晟)이 종들을 시켜 고읍지(古邑之)를 살해한 사건을 조사하고 죄인들을 심문하였다. 창원군은 세조의 서출 제 2왕자로서 박근빈(朴謹嬪)이 낳은 아들이다. 창원군은 이 사건으로 직첩이 회수되었다.
1479년(성종 10) 1월 1일 병으로 졸하였는데, 향년이 50세였다.
[성품과 일화]
『성종실록』의 「밀성군 이침 졸기」를 보면, “언행을 삼가고 조심하며, 우애(友愛)가 아주 돈독하였으므로, 세조가 이를 가상히 여겨서 궁궐의 금병(禁兵)을 맡아서 보게 하였다. 그의 타고난 성품이 현명하고 민첩하며, 몸가짐이 단중(端重)하여 집에는 희첩(姬妾)을 두지 않았고, 삼가 법도(法度)를 지켰으므로, 역대 임금들이 특별히 그를 사랑하여, 항상 사옹원(司饔院) 제조 · 문소전(文昭殿) 제조 · 종부시 제조가 되었다.”고 하였다[『성종실록』 성종 10년 1월 1일 「밀성군 이침의 졸기」] 이때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그는 현명하고 분명하여 일을 처리하는 재간이 있었으므로, 세조도 그에게 재능과 덕량이 있다고 여겼다. 나라의 모든 큰 일이 있으면 반드시 그에게 명하여 종실(宗室)로서 일을 맡아보게 하여, 세조의 신임을 가장 많이 받았다. 그는 치산(治産)하는 데에도 부지런하여, 재산이 아주 부유하였다.”고 하였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장효(章孝)이다. 묘소는 현재 경기도 하남시 초이동 319-4에 있다.(향토유적 제 2호.) 사가정(四佳亭) 서거정(徐居正)이 지은 신도비가 남아 있다.
부인 여흥 민씨(驪興閔氏)는 판윤(判尹) 민승서(閔承序)의 딸인데, 4남 2녀를 두었다. 장남은 운산군(雲山君) 이계(李誡)이고, 차남은 춘성군(春城君) 이당(李譡)인데, 의안대군(宜安大君) 이방석(李芳碩)에게 출계하여 후사가 되었다. 3남은 수안군(遂安君) 이상(李*)으로 수춘군(壽春君) 이현(李玹)에게 출계하여 후사가 되었다. 4남은 석양군(石陽君) 이학(李謞)이다. 장녀는 하한문(河漢文)의 처이고, 차녀는 안우하(安友夏)의 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