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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25년(세종 7) ∼ 1444년(세종 26) = 20세.] 조선 전기 세종 때 활동한 왕자. 세종의 적출 8남 2녀 중에서 제 5왕자. 봉작(封爵)은 광평대군(廣平大君)이다. 자는 환지(煥之)이고, 호는 명성당(明誠堂)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어머니 소헌 왕후(昭憲王后)는 청송 심씨(靑松沈氏)로서 영의정 심온(沈溫)의 딸이다. 친형이 문종(文宗), 세조(世祖),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 임영대군(臨瀛大君) 이구(李璆)이고, 친동생이 금성대군(錦城大君)이유(李瑜), 평원대군(平原大君) 이림(李琳), 영응대군(永膺大君)이염(李琰)이고, 친누이가 정소공주(貞昭公主)와 정의공주(貞懿公主)다.
[세종 시대 활동]
1432년(세종 14) 1월에 광평대군으로 봉해졌으며 1436년(세종 18) 1월 나이 12세 때 좌의정 신자수(申自守)의 딸과 혼인하였다. 그해 4월 금성대군과 함께 종학(宗學)에 입학하고 공부하였다. 1437년(세종 19) 6월 태조의 제 7왕자 무안대군(撫安大君) 이방번(李芳蕃)의 후사가 되었고, 이해 11월 광평대군 집 안에 무안대군의 사당을 지었다. 1438년(세종 20) 3월 함경도에 6진(鎭)을 개척하자, 도성에 각 진(鎭)의 경재소(京在所)를 설치하여 왕자들에게 국토 개척의 어려움을 체험하도록 하였는데, 진양대군(晉陽大君: 세조) 이유는 경원(慶源)을, 안평 대군 이용은 회령(會寧)을, 임영 대군 이구는 경흥(慶興)을, 광평 대군 이여는 종성(鍾城)을 맡아서 일을 처리하였다. 1443년(세종 25)에 세종이 소헌왕후와 온양에 거둥할 때, 수춘군(壽春君) 이현(李玹)과 함께 수궁(守宮)하였다.
1444년(세종 26) 10월 금성대군과 함께 양화도(楊花渡)에 가서, 선상(船上)에서 화포를 시험하였다. 그때 갑자기 발병한 피부병[瘡疹]으로, 12월 7일 향년 20세로 졸하였다. 광평대군이 부스럼병을 앓자 세종은 몹시 근심하여 잠도 자지 않고, 식사도 하지 않았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치료를 했으나 끝내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졸하자, 세종과 소헌왕후는 매우 슬퍼하여 3일 동안이나 조회를 거두었다. 『세종실록』의 「광평대군 이여 졸기」에서 “광평대군 이여는 나이 어릴 때부터 학문에 힘써서 『효경(孝經)』과 『소학(小學)』과 사서 삼경(四書三經)을 모두다 통달하고, 『문선(文選)』과 이태백(李太白) · 두자미(杜子美) · 구양수(歐陽修) · 소동파(蘇東坡)의 문집 등을 두루 열람하였다. 『국어(國語)』와 『좌전(左傳)』에 대한 공부도 깊었으며, 음률(音律)과 산수(算數)까지 그 오묘(奧妙)한 이치를 모두다 알았다. 글을 잘 짓고 글씨의 필법도 절묘하였으며, 강한 활을 당겨서 멀리 쏘고, 또 격구(擊毬)에도 능하였다. 세종이 간의대(簡儀臺)와 종부시(宗簿寺)의 일을 총관(總管)하도록 명하였는데, 종합하고 정리하는 데에 체제를 세웠다.” 하였다.[『세종실록』 세종 26년 12월 7일 「광평대군 이여 졸기」]
[묘소와 후손]
시호는 장의(章懿)이다. 묘소는 경기도 광주(廣州)의 광수산(光秀山)에 있다고 하였는데, 현재의 서울특별시 강남구 수서동 광수산에 있다. 이곳은 광평대군과 영가부부인(永嘉府夫人) 신씨(申氏)의 묘를 비롯하여 태조의 제 7왕자 무안대군 이방번, 광평대군의 아들인 영순군(永順君) 이부(李溥)의 묘소 등 종친 7백여 기가 함께 있는 곳이다. 1981년 2월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48호로 지정되었다. 「광평대군 신도비」는 1574년(명종 7) 세운 것인데, 비문은 심의겸(沈義謙)이 짓고, 비석 머리 전자(篆字)는 박렴(朴簾)이 썼다. 부인 영가부부인은 평산 신씨(平山申氏)로 중추원(中樞院)첨지사(僉知事) 신자수(申自守)의 딸이고, 신효창(申孝昌)의 손녀이다. 자녀는 1남을 두었는데, 영순군(永順君) 이보(李溥)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