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총론]
[?∼1449년(세종 31) = ?]. 조선 전기 세종 때 활동한 왕자. 정종(定宗) 이방과(李芳果)의 서출 15남 8녀 중에서 제 7왕자. 봉작(封爵)은 수도정(守道正)이고 수도군(守道君)에 추증되었다. 자는 회부(晦夫)이고, 호는 묵은(黙隱)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어머니는 윤숙의(尹淑儀)이다. 윤숙의가 낳은 4남 1녀 중에서 맏아들인데, 동복아우는 임언군(林堰君) 이녹생(李祿生), 석보군(石保君) 이복생(李福生), 장천군(長川君) 이보생(李普生)이고, 동복누이는 인천옹주(仁川翁主)다.
[세종 시대 생활]
1430(세종 12) 4월 원윤(元尹)이 되었다. 1431년(세종 13) 4월 종부시(宗簿寺)에서 아뢰기를 “원윤 이덕생과 이녹생(李祿生)이 종학(宗學)에 나오지 않는 일이 많습니다.”고 하니, 세종이 수도군 이덕생과 임언군(林堰君) 이녹생(李祿生)의 구사(丘史)를 거두라고 명하였다. 1433년(세조 15) 이덕생이 병을 핑계하고 종학에 나가지 않았다고 종부시에서 아뢰었으므로, 세종이 그 구사를 회수하였다. 1444년(세종 26) 7월 정3품상 명선대부(明善大夫) 수도정이 되었다.
1449년(세종 31) 2월 수도정 이덕생의 집의 뜰에서 소뼈와 말뼈가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이덕생이 박만(朴萬) · 이원생(李元生) 등과 함께 민가의 소와 말을 훔쳐서 밀도살한 흔적이었다. 소와 말을 잃어버린 임자가 뒤를 밟아서 쫓아오자, 이덕생이 대문에서 사람들을 가로막아서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종부시에서 이를 고발하자, 세종이 내관(內官)을 보내어 이덕생의 집을 수색하게 하니, 소와 말을 잡아먹은 뼈다귀가 발견되었던 것이다. 이에 그해 7월 이덕생은 직첩을 회수하고 전라도 담양에 안치하였는데, 사간원에서 양계(兩界)의 극변(極邊)에 안치할 것을 주장하여 강진(康津)으로 옮기게 되었다. 1449년(세종 31) 7월 유배소로 가다가 노상에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세종은 거두었던 그의 직첩과 과전(科田)을 돌려주게 하고, 종친의 예에 따라 치부(致賻)하고, 정조(停朝)하였다.
[수도군의 수도승 일화]
『세종실록(世宗實錄)』을 보면, 이덕생이 한때 중이 되었던 적도 있었는데, 세종이 그를 환속하게 하였다.[『세종실록』 세종 31년 2월 27일] 그 뒤에 4백여 년이 지나서, 1872년(고종 9) 3월 이덕생을 수도군(守道君)에 봉하였는데, 이덕생(李德生)이 일찍이 중이 되어 도(道)를 지키는 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수도군(守道君)이라는 봉작을 내린 것이다.[『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고종편]
중봉(重峰) 조헌(趙憲)의『동현문집(東賢文集)』에 보면, “조선 건국 초기에 수많은 명현과 절사(節士)가 있었으나, 특히 종실의 여러 왕자 중 수도정 이덕생만이 부귀영화를 거절하고 충효를 겸전함으로써 세상 사람들로부터 추앙을 받았으며, 백이(伯夷)의 절개가 있음으로써 칭송을 받았다. 항상 호학(好學) 수도에만 열중하였으므로, 당세의 동방의 안자(顔子)였다.”고 하였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희정(僖靖)이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 미아리(彌阿里)[『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紀略)』]에 있는데, 현재는 경기도 포천군 소흘면(蘇屹面) 무림리(茂林里)이다. 1872년(고종 9) 수도군과 영종정경(領宗正卿)에 추증되었다. 부인 여산 송씨(礪山宋氏)는 부사(府使) 송계성(宋繼性)의 딸인데, 3남 1녀의 자녀를 두었다, 장남은 어산부정(語山副正) 이검(李儉)이고, 차남은 동림부정(東林副正) 이암(李巖)인데, 이암(李儼)이라고도 하며, 3남은 풍산 부정(豊山副正) 이외(李偎)인데, 이외(李畏)라도고 한다. 1녀는 김선손(金善孫)의 처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