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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19년(세종 1)~1475년(성종 6) = 57세]. 조선 전기 세종~성종 때 활동한 왕자. 정종(定宗) 이방과(李芳果)의 서출 15남 8녀 중에서 제 15왕자. 봉작(封爵)은 무림군(茂林君)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어머니 기숙의(奇淑儀)는 행주 기씨(幸州奇氏) 기면(奇勉)의 딸인데, 공안부(恭安府) 궁인(宮人) 출신으로서 이름이 기자재(奇自在)라고 한다. 기숙의가 낳은 4남 1녀 중에서 막내아들인데, 동복형이 순평군(順平君) 이군생(李群生), 금평군(錦平君) 이의생(李義生), 정석군(貞石君) 이융생(李隆生)이고, 동복누이가 숙신옹주(淑愼翁主)이다.
[세종~성종 시대 활동]
1430년(세종 12) 종3품상 중직대부(中直大夫) 정윤(正尹)이 되었고, 1441년(세종 23)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 원윤(元尹)이 되었고, 1444년(세종 26) 7월 정3춤상 명선대부(明善大夫) 무림정(茂林正)이 되었다. 1457년(세조 3) 6월 어머니 기씨의 상을 당하였다. 이후 무림도정(茂林都正)을 거쳐 1460년(세조 6) 10월 세조가 황해도와 평안도를 순행할 때 호종(扈從)하였다. 1466년(세조 12) 지방에 여러 가지 폐단을 조사하는 문폐사(問弊使)에 임명되어, 지방의 여러 고을을 염찰(廉察)하면서 지방 수령관의 실정과 백성들의 폐단 등을 세조에게 보고하였다. 이때 세조는 종친을 보내어 지방의 수령관을 몰래 염찰하였는데, 이는 조선 후기에 암행어사(暗行御史)로 발전하였다. 1468년(예종 즉위) 11월 무림군으로 봉해졌고, 1470년(성종 1) 종2품하 중의대부(中義大夫)에 오르고, 1473년(성종 4) 정2품하 승헌대부(承憲大夫)에 올랐다. 1475년(성종 6) 2월 19일 병으로 돌아가니, 향년이 57세였다.[『성종실록(成宗實錄)』 성종 6년 2월 19일 「무림군 이선생 졸기」]
[시호로 본 인품]
성품은 공손하고 과묵(寡黙)하였다. 그의 시호가 보면, 소이(昭夷)라고 하였는데, 『성종실록』의 「무림군 이선생 졸기」에서 그의 시호 소이(昭夷)에 대하여 “얼굴과 거동이 공손하고 아름다움을 소(昭)라 하고, 마음을 편히 하고 고요함을 좋아함을 이(夷)라 한다.”고 하였다. 시호는 가족들이 시장(諡狀)을 만들어 시호를 내려달라고 요청하면, 봉상시(봉상사)에서 고인의 업적과 성품을 따져서, 시호고(詩號考)에 규정된 2백여 자 가운데 글자를 골라서 시호를 정하는데, 앞의 글자는 업적을, 뒤의 글자는 성격을 나타낸다. 무림군 이선생의 인품을 시호에서 보면, 왕자이면서도 대인관계에서 남에게 아주 공손하고 자기가 왕자라는 것을과시하지 않고 언제나 입을 다물고 조용하게 지냈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소이(昭夷)다. 묘소는 경기도 광주 안정촌에 있었는데, 1476년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으로 이장하였다. 묘소의 소재지는 경기도 양주군 차유령[『선원록』], 경기도 양주군 우고리[『선원강요』],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 자가리[『선원계보』]라고 다소 다르게 기록되어 있으나 같은 고장의 지명이다. 1872년(고종 9) 영종정경(領宗正卿)의 관직이 추증되었다.
부인은 남양 홍씨(南陽洪氏) 홍승선(洪興善)의 딸인데, 2남 4녀의 자녀를 두었다. 1자는 명천도정(明川都正) 이장손(李長孫)이고, 2자는 신평정(新平正) 이종손(李終孫)이다. 1녀는 나승손(羅承孫)의 처가 되었고, 2녀는 김맹광(金孟光)의 처가 되었으며, 3녀는 유대승(柳大升)의 처가 되었고, 4녀는 윤지영(尹之嶸)의 처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