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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56년(세조 2) = 미상]. 조선 전기 태종~세조 때 활동한 왕자. 정종(定宗) 이방과(李芳果)의 서출 15남 8녀 중에서 제 2왕자. 봉작(封爵)은 순평군(順平君)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어머니 기숙의(奇淑儀)는 행주 기씨(幸州奇氏)로서 기면(奇勉)의 딸인데, 공안부(恭安府) 궁인(宮人) 출신으로서 이름이 기자재(奇自在)라고 하였다. 순평군은 기숙의가 낳은 4남 1녀 중에서 맏아들인데, 동복아우는 금평군(錦平君) 이의생(李義生), 정석군(貞石君) 이융생(李隆生), 무림군(茂林君) 이선생(李善生)이고, 동복누이가 숙신옹주(淑愼翁主)이다.
[태종~단종시대 활동]
이군생은 1412년(태종 12) 5월 부정윤(副正尹)이 되었다. 1417년(태종 17) 9월 종2품상 가정대부(嘉靖大夫) 순평군이 되었고, 1425년(세종 7) 10월 다시 종2품상 가정대부 순평군이 되었다. 1425년(세종 7) 4월 큰형인 의평군(義平君) 이원생(李元生), 동생인 원윤(元尹) 이의생, 숙신옹주 부마 돈녕부 동첨지사(同僉知事) 김세민(金世敏), 함양옹주(咸陽翁主) 부마 돈녕부 동부지사(同副知事) 박갱(朴賡) 등과 함께 사패(賜牌)를 위조한 혐의로 탄핵을 받고, 전라도 금구(金溝)로 자원안치(自願安置)되었다가 6월에 석방되었다. 사패(賜牌)란 왕자와 공주에게 특별히 토지와 노비를 하사할 때 어보(御寶)를 찍거나 어압(御押)을 눌러서 소유권과 상속권을 허락하는 문권(文券)이다. 왕자와 부마들이 종종 어보와 어압을 위조하여 남의 전지와 노비를 점탈(占奪)하였으므로, 항상 말썽이 일어났다.
1442년(세종 24) 음란한 짓을 하다가 파직되었으나, 1444년(세종 26) 다시 종2품상 중의대부(中義大夫) 순평군이 되었다. 순평군의 음란한 행동은 여러 차례 구설수에 올랐다. 처형인 이효경(李孝敬)의 처 설씨(薛氏)와 사통한 문제는 세종 시대부터 단종 시대까지 오래도록 여러 차례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1456년(세조 2) 8월 21일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조정에서 부의를 보내고 시호를 내려 주었다.
[성품과 일화]
성현(成俔)의 『용재총화(慵齋叢話)』를 보면, 순평군 이군생은 나이가 40세가 넘도록 글자 한자도 알지 못했다. 종학(宗學)의 학관(學官)이 『효경(孝經)』을 펴고, 제 1장 ‘개종 명의(開宗明義)’를 가르쳤으나, 그는 읽지를 못하고 학관에게 “내가 지금 늙고 둔하므로, 다만 ‘개종(開宗)’ 두 글자만 알더라도 족하다.”고 하고, 또 종들에게 “너희들도 ‘개종(開宗)’ 두 글자를 잊지 말고 있다가 내가 막힐 때 가르쳐 다오.” 고 하였다고 전한다.[『용재총화(慵齋叢話)』]
[묘소와 후손]
시호는 안간(安簡), 또는 충간(忠簡)이다.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 3동에 있다. 묘비는 오랜 세월이 흘러 훼손되어 내용을 알 수 없다. 1872년(고종 9)에 영종정경(領宗正卿)의 추증되었다. 부인은 순창 설씨(淳昌薛氏) 설존(薛存)의 딸인데, 2남 2녀의 자녀를 두었다. 장남은 정윤(正尹) 이백평(李伯平)인데, 의성군(義城君)이 되었다. 차남은 의신부정(義新副正) 이숙평(李叔平)이다. 1녀는 김순(金珣)의 처가 되었고, 2녀는 허준(許峻)의 처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