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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생몰 연대 미상.] 조선 전기 태종~세종 때 활동한 왕자. 정종(定宗)의 서출 15남 8녀 중에서 제 11왕자. 봉작(封爵)은 임성정(任城正)이고, 증직(贈職)은 은성군(任城君)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어머니는 지성빈(池誠嬪)인데, 숙의(淑儀)였다가 성빈(誠嬪)이 된 것 같다. 지성빈은 충주 지씨(忠州池氏)로서 고려 문하성(門下省) 찬성사(贊成事)지윤(池奫)의 딸이다. 지성빈은 5남 1녀를 낳았는데 임성군 이호생은 그 중 넷째 아들이다. 동복형은 의평군(義平君) 이원생(李元生), 선성군(宣城君) 이무생(李茂生), 덕천군(德泉君) 이후생(李厚生)이고 동복 아우는 도평군(桃平君) 이말생(李末生)이며 동복 누이는 함양옹주(咸陽翁主)다. 정종은 적실 왕자가 없었기 때문에 장례와 제사 때에 의평군 이원생이 맏아들 역할을 하였다. 지윤의 맏딸은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맏아들 진안대군(鎭安大君) 이방우(李芳雨)의 정실부인이 되었으나, 지성빈은 이성계의 둘째아들 이방과의 후실(後室)이 되었다. 고려 우왕 때 지윤이 최영 · 이성계에게 패망한 뒤에 지씨 집안이 몰락하여 후실이 된 것 같다. 지성빈은 이방과가 정종이 되자, 후궁으로 봉해졌다.
[세종 시대 활동]
정종과 지숙의 소생들의 행동은 사람들로부터 귀감이 될 정도로 모범적이었는데 오직 한 가지 흠이 있다면 남녀상열(男女相悅) 문제로 지탄을 받은 것이다. 이호생(李好生) 본인을 비롯하여 동모형제인 이무생과 이복 형제인 이말생(李末生), 이융생(李隆生), 이의생(李義生), 이복생(李福生)도 음란한 짓을 하다가 물의를 일으키자, 민간에서 사람들이 “인덕전(仁德殿: 정종)의 아들들이 모두 황음(荒淫)한데, 그 낳은 어미가 올바르지 못하기 때문이다.”라는 말이 있었을 정도였다. 이에 세종은 이 문제에 대하여 경녕군(敬寧君) 이비(李裶)를 불러서 물었는데, 경녕군은 “신 등이 아뢰고자 한 적이 오래였으나, 다만 기회가 없기 때문에 말없이 있었습니다. 이호생 · 이말생 · 이융생은 인덕전의 여러 아들 중에서 더욱 음란한 자들입니다.” 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1439년(세종 21) 6월 세종은 그 비위의 정도에 따라서 그들을 처벌하였다. 1444년(세종 26) 7월 정3품상 명선대부(明善大夫) 임성정(任城正)이 되었다.
[성품]
임성군 이호생은 효성과 우애가 뛰어나고, 성품이 공손하고 온순하였을 뿐만 아니라 겸손하여, 모든 사람들이 흠모하고 공경하였다고 전한다. 왕자들은 왕통을 이어나가야 하므로, 교육을 철저하게 배워서 권세가 있으면서도 겸양의 미덕을 지니며 살았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정혜(靖惠)이다. 1871년(고종 8) 3월에 추증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용암리 산68의 1에 있다.[『선원강요(璿源綱要)』]
부인은 평창 이씨(平昌李氏) 군수(郡守) 이계동(李繼童)의 딸이다. 서출 딸이 하나 있는데, 고계건(高繼乾)의 처가 되었다. 그는 후사가 없었으므로, 정종 후궁 윤숙의 소생 서출 9남 석보군(石保君) 이복생의 3남인 곡성 부정(鵠城副正) 이금손(李金孫)을 후사로 삼았다. 이금손은 예종 때 곡성군(鵠城君)으로 봉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