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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382년(우왕 8)~1398년(태조 7) = 17세.] 조선 태조 때 활동한 왕자.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제 8 왕자. 봉작(封爵)은 의안대군(宜安大君)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어머니는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로, 곡산강씨(谷山康氏) 강윤성(康允成)의 딸이다. 이방석(李芳碩)은 신덕왕후 소생의 둘째 아들이다. 이방번(李芳蕃)이 동복 형이다.
[세자 책봉]
1392년(태조1) 조선의 개창으로 의안대군에 책봉되었으며, 그 해 8월 20일에 세자로 책봉되었다. 태조는 원래 신덕왕후 강씨의 맏아들인 이방번을 세자로 책봉하려고 했으나, 중신들이 이방번은 성격이 ‘광망하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하였으므로, 제 8 남인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당시의 중론은 이성계가 군대를 거느리고 요동 정벌에 나섰다가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回軍)하여 조선을 건국하는데 공을 가장 많이 세운 제 5 남 이방원(李芳遠)이 왕세자가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태조의 첫째 부인인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韓氏)는 조선건국 이전에 세상을 떠났다. 계비 신덕왕후를 태조가 총애하여 여론을 의식하지 않고 막내아들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세자의 죽음]
왕세자 책봉문제는 신의왕후 한씨 소생 형제들의 불만을 샀다. 특히 이방원은 조선 건국에 큰 공헌을 하였는데, 아버지인 태조가 신덕왕후 강씨 소생으로 왕세자를 세우자, 결국 동모형제(同母兄弟)들과 함께 1398년(태조 7)에 <제 1 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신덕왕후 강씨의 소생들은 신의왕후 한씨의 소생보다 나이가 어렸다. 그러나 신의왕후 한씨의 소생들은 고려조에 벼슬도 하고 전공(戰功)도 쌓아, 나이 어린 강씨 소생 보다 여러 가지 면에서 훌륭한 전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태조는 젊은 계비 강씨를 총애하였고, 그 강씨의 신임을 받는 정도전 등의 뜻에 따라 국사가 처리되고 결정되는 관계로, 한씨 소생들은 소외되었다. 한씨 소생들은 조정에서 행해지는 일들에 대한 불만으로 소위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궁중은 일대를 피로 물들이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신덕왕후 강씨의 두 아들이 희생되었다. 1396년(태조 5) 그의 나이 15세 때 어머니 강씨가 승하하면서 강씨 세력이 약화된 것도 이들이 죽음에 이르는 원인이 되었으나, 이후 태조가 세자 책봉 문제를 잘못 처리한데 책임이 있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소도(昭悼)이다. 묘소는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엄미리(박수골)에 있으며, 경기도 기념물 제166호로 지정되어 있다. 부인 부유심씨(富有沈氏)는 이조 전서(典書) 심효생(沈孝生)의 딸이다. 후사가 없었으므로, 1437년(세종19) 세종의 여섯째 아들 금성대군(錦城大君)이유(李瑜)를 후사로 삼아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그러나 1457년(세조 3) 금성대군이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가 사사되었기 때문에, 밀성군(密城君) 이침(李琛)의 둘째 아들 춘성정(春城正) 이당(李譡)을 이방석의 후사로 삼고 춘성군(春城君)에 봉하였다.(『성종실록(成宗實錄)』 성종 16년 6월 1일「춘성군 이당의 졸기」 참고.) 그러나 춘성군이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자, 다시 운산군(雲山君) 이성(李誠)의 아들 고성부정(固府副正) 이강(李鋼)이 뒤를 잇고 고성군(固府君)이 되었다.(『선원보』) 1480년(숙종 6) 7월 27일 춘추관 영사 김수항(金壽恒) 등의 상언(上言)에 의하여 의안대군으로 추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