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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381(우왕 7)~1398년(태조 7) = 18세.] 조선 태조 때 활동한 왕자.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제 7 왕자. 행직(行職)은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 좌군 절제사(左軍節制使)이다. 봉작(封爵)은 무안대군(撫安大君)인데, 공순군(恭順君)에 추증되었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주거지는 개경, 서울이다. 어머니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는 곡산강씨(谷山康氏) 강윤성(康允成)의 딸이다. 이방번은 신덕왕후 소생의 맏아들이다. 이방석(李芳碩)이 동복 동생이다.
[<제 1차 왕자의 난>의 원인]
1392년(태조 1) 무안군(撫安君)으로 책봉되었고, 의흥부(義興府) 친근위 절제사(親近衛節制使)에 임명되었다. 1393년(태조 2) 나이 13세에 의흥삼군부 좌군 절제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태조와 신덕왕후 강씨의 사랑을 받았는데, 태조는 이방번을 세자(世子)로 책봉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정도전(鄭道傳)·배극렴(裵克廉)·조준(趙浚)이 반대하여, 세자 자리는 동생 이방석(李芳碩)에게 돌아갔다.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韓氏)의 소생들은 이방석의 세자 책봉과 정도전 일파의 병권 장악에 불만을 품었다. 정안대군(靖安大君) 이방원(李芳遠)이 주동이 되어, 1398년(태조7) 태조의 와병 중에 난을 일으켰다.
[세자 책봉의 난항]
태조의 세자 책봉 문제의 실책으로 <제 1차 왕자의 난>이 발생했다. 태조는 병권의 실권자 정도전과 밀착한 강씨의 소생으로 왕자를 책봉하여 우대하고 전실 자손들은 돌보지 않았다. 강씨의 소생은 어렸으나 한씨의 소생은 고려조 때 벼슬도 하고 부왕의 창업을 도왔기에 경력면이나 모든 여건으로 볼 때 한씨 소생을 세자로 책봉하는 것이 순리였다. 더구나 이방원은 부왕의 창업을 도와 공로가 크고 자질이 영매한 인물이었다.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권1에 의하면 태조가 일찍이 배극렴·조준 등을 어전에 불러서 세자를 세울 것을 의논했는데, 배극렴이 말하기를 “시국이 평온할 때는 적장자를 세우고, 세상이 어지러울 때는 공이 있는 자를 세워야합니다.”라고 하자 이 말을 신의왕후 강씨가 몰래 듣고 우니 그 소리가 밖에까지 들렸다고 한다. 태조는 결국 계비 강씨의 자손인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하려 하였고, 이에 1398년(태조 7) 8월 26일 <제 1차 왕자의 난>이 발생한 것이다.
[성품과 일화]
성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태조는 이방번을 세자로 책봉하려고 하자 배극렴·조준·정도전 등의 중신들은 그가 “성격이 광망(狂妄)하고 경동하다.”는 이유로 반대하였다. 그러나 “광망한 성품” 탓에 세자가 못 되었기보다는, 당시 정치 상황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묘소와 후손]
1406년(태종 4) 시호를 공순(恭順)이라고 내렸는데, 공순이 나중에 문종(文宗)의 시호와 비슷하다고 하여 장혜(章惠)로 고쳤다. 묘소는 경기도 광주(廣州) 도진능동(道津陵洞) 학당리산(學堂里山)에 있는데, 지금 서울시 강남구 수서동 광수산(光秀山)이다.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비문이 남아 있다.(『송자대전(宋子大全)』 권163 「무안대군방번신도비(撫安大君芳蕃神道碑)」) 부인 왕씨는 고려 왕실 귀의군(歸義君) 왕우(王瑀)의 딸인데, 후사가 없다. 1437년(세종 19) 세종의 배려로 광평대군(廣平大君)이여(李璵)를 후사(後嗣)로 정하여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