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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364년(공민왕 13)~1421년(세종 3) = 58세]. 여말선초 고려 공민왕~조선 태종 때 활동한 왕자.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제 4왕자. 봉작(封爵)은 회안대군(懷安大君), 마한공(馬韓公)이다. 호는 망우당(忘牛堂)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주거지는 서울이다. 어머니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韓氏)는 안변 한씨(安邊韓氏) 한경(韓卿)의 딸이다. 이방우(李芳雨), 이방과(李芳果), 이방의(李芳毅)의 동복 동생이고, 이방원(李芳遠), 이방연(李芳衍)의 형이다. <제 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가, 다섯째 동생 정안대군(靖安大君) 이방원에게 패배하여 토산(兎山)으로 유배되었다.
[<제 1차 왕자의 난> 때 전공]
그는 고려왕조에서 군기시(軍器寺) 소윤(少尹)을 역임하고, 조선 왕조가 개창되자 1392년(태조 1) 회안군에 봉군되었다. 1398년(태조 7) 친왕자에게 공(公)이라 봉작하였는데, 이때 회안공(懷安公)이 되었다. 1401년(태종 1) 작호를 개정할 때, 비록 유배지에 있었지만 회안대군이 되었다.
1398년(태조 7)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신의왕후 한씨 소생의 왕자들이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 소생의 이방석(李芳碩)과 그를 지지하는 정도전(鄭道傳) 일파를 제거하고 권력을 잡은 사건을 <제 1차 왕자의 난>이라 한다. 이 공으로 이방간(李芳幹)은 정사공신(定社功臣) 1등이 되었고, 이어 이방원, 이방의과 함께 개국공신(開國功臣) 1등이 되었다. 1399년(정종1) 대간(臺諫)의 건의에 따라 종친과 훈신에게 여러 도의 군사를 나누어 맡길 때, 이방간은 풍해도(豊海道) 서북면(西北面)을 받았다.
[<제 2차 왕자의 난> 때 유배]
1398년(태조 7)에 일어난 <제 1차 왕자의 난>이 이복형제간의 왕위쟁탈전이었다면 1400년(정종2)에 발생한 <제 2차 왕자의 난>은 신의왕후 한씨 소생의 동모형제 곧 제 4남 이방간과 제 5남 이방원 사이에 왕위를 둘러싸고 일어난 싸움이다. 이 형제간의 왕위 쟁탈전은 개경(開京)에서 일어났다. 전세는 이방원에게 유리해, 이방간은 체포되어 토산(兎山)에 유배되었다가 그 후 익주(益州)에 안치되었다. 이 난으로 인하여 이방원은 왕세자가 되었는데, 이어 정종의 양위로 즉위하게 되니, 그가 곧 제3대 태종(太宗)이다. 1410년(태종 10) 8월 이방간은 다시 완산(完山)으로 옮겨졌다. 태종은 형에 대한 혈육의 정을 보이기도 했으나, 신하들의 반발로 1416년(태종 16) 그의 공신록(功臣錄)과 직첩(職帖)을 회수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해에는 홍주읍(洪州邑) 성내(城內)의 옛 관관(官館)으로 옮겼다. 1418년(세종 즉위)에도 의정부·사헌부(司憲府)·육조(六曹) 등에서 이방간에 대하여 처벌을 요구하는 상소가 잇따랐으나, 세종은 일체 윤허하지 않았다.
[이방간의 죽음]
이방간은 태조의 제 4남으로 순차적으로 따진다면 제 5남인 이방원을 제치고 제3대 왕에 등극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방원에 비해 지략과 용맹이 떨어져 왕권 다툼에서 이기지 못했다. <제2차 왕자의 난>에 관하여 실록에서는 이방간이 1400년(정종 2) 중추부(中樞府)지사(知事)박포(朴苞)의 이간에 충동되어 일으켰다고 한다. 이때, 왕이 도승지(都承旨)를 보내어 사사로이 군대를 일으켜 골육을 해치는 용병행위를 중지하라고 명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대세가 기울어진 상태에서 부하의 말을 듣고 이방원군과 싸우니 질 수밖에 없었다. 정종과 세자 이방원의 관용으로 가죄(加罪)되지는 않았다. 태종은 즉위 후에 유배 가 있는 회안대군에게 의자(醫者)를 보내 돌보거나 문안을 하였다. 그 후에 뉘우침이 없다고 제주도로 이배(移配)하라는 요청이 있었지만, 순천성(順天城)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1421년(세종 3) 홍주(洪州)에서 병으로 죽었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양희(良僖)이다. 묘소는 전라북도 완주군 용진면 금상리에 있다. 1400년(정종 2) <제 2차 왕자의 난> 직후 동모형제간 골육상쟁의 왕위쟁탈전을 일으킨 죄로 『선원록(璿源錄)』에서 제외되었다가, 1605년(선조38) 신원(伸寃)되었고, 1680년(숙종 6) 그 자손과 함께 『선원록』에 재록(載錄)되었다. 조선 건국 후 개국공신 1등과 정사공신 마한공에 봉해졌고, 1872년(고종9) 영종정경(領宗正卿)에 추증되었다.
부인 여흥민씨(驪興閔氏)는 민선(閔璿)의 딸인데, 자녀는 1남 2녀를 두었다. 아들은 의녕군(義寧君) 이맹종(李孟宗)이며, 맏딸은 조신언(趙愼言)의 처가 되었고, 둘째딸은 이대성(李大成)의 처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