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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04년(태종 4) = 45세 전후 추정 ]. 여말선초 고려 공민왕〜조선 태종 때 활동한 왕자.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제 3 왕자. 행직(行職)은 중군 절제사(中軍節制使), 봉작(封爵)은 익안대군(益安大君)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어머니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韓氏)는 안변한씨(安邊韓氏) 한경(韓卿)의 딸이다. 이방우(李芳雨), 이방과(李芳果)의 동복 동생이고, 이방간(李芳幹), 이방원(李芳遠), 이방연(李芳衍)의 동복형이다. 두 차례의 <왕자의 난> 때 다섯째 동생 이방원을 도와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제 1차 왕자의 난> 때의 역할]
태조는 신의왕후와의 사이에서 6남을 두었다. <제 1차 왕자의 난>은 태조가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 소생의 아들 이방석(李芳碩)을 왕세자로 봉하려 하자, 신의왕후 한씨의 소생의 아들들이 반기를 들게 되었는데, 그 중 이방원이 주동이 되었고, 이방의가 그를 도왔다. 이 난을 <제 1차 왕자의 난>이라고 하는데, 이방원은 강씨(康氏) 소생의 두 왕자를 살해했다. 이런 왕가의 골육상쟁은 태조가 계비 강씨를 총애하여 왕가의 체통을 지키지 않은데 있다.
1400년(정종 2) 동모형제인 이방간(李芳幹)이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을 때 그는 모반을 개탄하면서 절제사(節制使)직을 사임하고 이방원을 간접적으로 지원하였다. 그가 1차 2차에 걸쳐 왕자들 간에 골육상쟁을 벌일 때 이방원을 도운 것은 왕통을 바로잡기 위함이었다.
[왕위계승 문제]
신의왕후 한씨의 소생 6남 중 왕위에 대한 욕심이 강했던 왕자는 넷째 이방간과 다섯째 이방원이라고 할 수 있다. 넷째 이방간은 <2차 왕자의 난>때 정종(定宗)의 뒤를 이어 왕위를 차지하려고 동모형제간 골육상쟁의 비극을 유발한 왕자로 지목된다. 왕권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왕자는 태조의 맏아들 이방우와 셋째 이방의를 들 수 있다. 이방우는 태조의 <위화도회군>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강호에 묻혀서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2남 정종은 <1차 왕자의 난>으로 태조에게 왕위를 물려받아 1399년~1400년까지 2년간 재위하다가 이방원에게 양위하고 상왕(上王)이 되었다. 순차적으로 본다면 3남 이방의가 조선의 3대에 왕으로 즉위해야 하지만 왕위에 대한 욕심이 전혀 없었기에 이방원이 제3대 태종으로 왕위를 계승했다.
[태조~태종시대 활동]
1392년(태조 1) 태조가 즉위하여 여러 왕자를 군으로 봉할 때 이방의는 익안군(益安君)으로 책봉되었고, 1398년(태조 7) 12월 개국공신 1등에 추록되었다. 이보다 앞서 9월에 정사공신(定社功臣)과 중군 절제사(中軍節制使)로 봉해졌다. 동생 이방간과 이방원이 왕위 계승 문제로 싸울 때 중립을 지키면서도 간접적으로 이방원을 도왔다. 그는 1400년(정종 2)에 이방간의 모반 사건을 개탄하면서 절제사를 사임하였다.
한편, 1398년(태조 7) 친왕자에게 공(公)이라 봉작하였는데, 이때 익안공(益安公)이 되었다가 1401년(태종 1) 작호를 개정할 때 익안대군이 되었다. 지병을 앓다가 1404년(태종 4) 9월 26일에 세상을 떠났다.(『태종실록』 태종 4년 9월 26일 「익안 대군 이방의의 졸기」 참고.)
[성품과 일화]
1392년(태조 1) 태조가 송경(松京)의 수창궁에서 즉위할 때, 조선 개국에 공이 많은 사람들에게 공신 책록을 하였는데, 그가 왕자 중 1등 공신이 되었다. 왕가에서는 충효전가(忠孝傳家)를 배우게 되므로 왕자들의 충효관은 투철하다. 익안대군 이방의는 유년시절부터 배워 왕자답게 행하며 살았다.『태종실록(太宗實錄)』을 보면,“개국종사(開國宗社)에 참여하여 대군으로 진봉되었고, 성질이 온후하고 화미(華美)한 것을 일삼지 아니하고 손님이오면 술자리를 베풀어 문득 취하여도 시사(時事)를 말하지 아니하였다.”하였는데,(『태종실록』태종 4년 9월 26일조 기사 참고.) 이를 보더라도 그가 왕자로서 충효로써 처신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안양(安襄)이다. 묘소는 경기도 개풍군 봉덕면 백전리에 있다. 그의 영정(影幀)이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화악리에 있는데, 문화제 제329호로 지정되어 있다. 1418년(태종 18) 마한(馬韓) 안양공(安襄公)에 추증되었고, 1870년(고종 9) 영종정경(領宗正卿)에 추봉되었다. 부인 철원최씨(鐵原崔氏)는 최인두(崔仁㺶)의 딸인데, 자녀는 1남 2녀를 두었다. 1자는 익평군(益平君) 이석근(李石根)이고, 1녀 회인현주(懷仁縣主)는 첨총제(僉摠制) 광주 김씨(光州金氏) 김한(金閑)의 처가 되었고, 2녀는 한가경(韓可敬)의 처가 되었다.(『태종실록』 태종 4년 2월 18일 「제릉 비문」 참고.) 서자는 영가부정(永可副正) 이승(李昇)이다.(『태종실록』 태종 14 1월 28일 기사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