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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69년(선조 2)∼1629년(인조 8) = 61세.] 조선 중기 선조~인조 때 활동한 문신. 행직(行職)은 병조 참지(參知)이다. 자는 정석(廷碩)이고, 호는 설초(雪樵)이다. 본관은 양주(楊州)이고, 충청도 서원(西原: 청주) 출신으로 주거지는 서울이다. 증조부는 좌통례(左通禮) 윤계훈(尹繼勳)이고, 조부는 윤시우(尹時雨)이다. 아버지는 수운 우판관(水運右判官) 윤응상(尹應商)이고, 어머니 전주이씨(全州李氏)는 교하 현감(交河縣監) 이원우(李元友)의 딸로 양녕 대군(讓寧大君)의 후손이다. 병조 정랑(正郞)윤홍국(尹弘國)과 윤광국(尹匡國)의 형이고,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의 외조부다.
[선조 시대 활동]
1589년(선조 22) 사마시(司馬試)에 생원(生員)으로 합격하였고, 2년 뒤에 1591년(선조 24) 식년시(式年試) 문과(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23세였다. 처음에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에 보임되었으나, 동인(東人)들이 그를 성혼(成渾)·이이(李珥)의 당(黨)이라고 지목하여 반대하였으므로, 임용되지 못하였다. 1592년(선조 25) 어머니 상(喪)을 당하고, 연이어 다음해에 아버지 상(喪)을 당하였다. 고향에서 <임진왜란(壬辰倭亂)>의 전쟁 중에 상례를 끝마쳤으나, 그대로 고향인 충청도 서원(西原: 청주)에서 살면서, 서울에 올라오지 않았다.
1598년(선조 31) 동인들이 실각하자, 성균관(成均館)박사(博士)에 임명되었고, 명(明)나라 참장(參將) 왕국동(王國棟)의 접반관(接伴官)이 되었다. 이듬해에 공조 좌랑(佐郞)으로 전임되었는데, 7년 전란이 끝나자, 왕 참장(王參將)을 의주(義州)까지 전송하였다. 그때마침 명나라 급사중(給事中) 서관란(徐觀瀾)이 도산(島山) 전투의 공과(功過)를 조사하러 나오자, 접반사(接伴使) 공조 판서(判書)신점(申點)의 추천으로 종사관(從事官)이 되었다가, 일이 끝난 후에 고향 서원으로 돌아갔다. 1600년(선조 33) 상국(相國) 한응인(韓應寅)의 추천으로 다시 공조 좌랑에 임명되었다가, 예조 좌랑을 거쳐, 병조 좌랑으로 옮겼다.(『서계집(西溪集)』 권9 「강원도관찰사윤공안국묘지명(江原道觀察使尹公安國墓誌銘)」 참고, 이하 「묘지명」이라 약칭.)
1601년(선조 34) 병조 정랑으로 승진하였고,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에 임명되었다가, 다시 병조 정랑이 되었다. 1602년(선조 35) 성균관 전적(典籍)이 되었는데, 그해 사은사(謝恩使) 정사호(鄭賜湖)의 서장관(書狀官)에 임명되어 육로(陸路)를 통하여 중국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왔다. 그때 사은사 정사호, 부사(副使)조정지(趙庭芝), 서장관 윤안국(尹安國) 세 사람이, 일행의 나머지 사신 원역(員役)과 짐을 실은 차량(車輛)을 압록강 건너 중국땅에 두고, 먼저 강을 건너서 의주로 들어왔는데, 강을 건넌 다음에 수검 어사(搜檢御史)가 사신 일행의 짐 보따리를 검사할 적에 서장관이 협력하지 않았다고 하여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다. 윤안국은 자신과 사이가 나쁜 기자헌(奇自獻)이 일부러 그를 모함하려고 한 일이라고 믿었다. 그 일로 인하여 이듬해 1603년(선조 36) 울산 판관(蔚山判官)으로 좌천되었으며, 1606년(선조 39) 다시 금성 현령(金城縣令)으로 옮겼다.
[광해군 시대 활동]
1608년(광해군 즉위) 병조 정랑에 임명되었다가, 장악원(掌樂院)첨정(僉正)으로 전직되었다. 그가 사헌부 정언으로 있을 적에, 이산해(李山海)의 죄를 탄핵한 일이 있었는데, 이때에 그의 아들 이경전(李慶全)이 이조 판서가 되어서, 그를 함경도 도사(咸鏡道都事)로 좌천시켰으므로, 이듬해 병이라고 핑계되고 사직하였다.
1610년(광해군 2) 호조 정랑이 되었고, 암행어사(暗行御史)에 임명되어 호남 지방의 재해 실상을 염찰하고 돌아와서 임금에게 보고하였다. 이어 성균관 직강(直講)이 되었고, 1611년(광해군 3) 성균관 사예(司藝)가 되었다가, 종부시(宗簿寺)정(正)에 임명되었다.(「묘지명」 참고.) 그해 가을에 북쪽 지방에 기근(饑饉)이 들자, 암행어사에 임명되어 진휼(賑恤) 실상을 염찰하고 돌아와서 임금에게 보고하였는데, 그 공로로 1612년(광해군 4) 봄에 당상관(堂上官)에 올랐으며, 가을에는 영남 지방의 곡식을 운반하는 독운사(督運使)로 활약하였고, 겨울에는 덕원 부사(德源府使)에 임명되어 선정을 베풀었다.(「묘지명」 참고.)
1616년(광해군 8) 분조(分朝)의 승지(承旨)로 발탁되었고, 동지사(冬至使)에 임명되어 중국 명나라에 파견되었다. 1617년(광해군 9) 분조 승지에서 체직되었으며, 그해 여름에 천추사(千秋使)에 임명되어 명나라 북경(北京)에 파견되었다. 1618년(광해군 10) 이이첨(李爾瞻) 등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고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위하여 서궁(西宮)에 유폐시키자는 <정청(庭請)>을 전개하자, 그는 서인으로서 마지못하여 이에 참여하였으나, 광해군의 정치가 더욱 어지러워지자, 그해 가을에 벼슬을 그만두고 송추(松楸)로 물러나서 살았다. 그때 그는 시와 술을 즐기며, 소를 타고 산수(山水)를 유람하였다.(「묘지명」 참고.)
1620년(광해군 12)부터 여러 차례 분조(分朝) 승지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622년(광해군 14) 명나라 요동 지방이 후금(後金)의 누르하치에게 함락당하자, 요동 지방에 살던 중국인들이 떼를 지어 평안도의 가도(椵島)로 건너왔는데, 그 중에서 모문룡(毛都督)이 스스로 도독(都督)이라고 일컫고 피난민을 통솔하는 한편 조선에 막대한 군량미(軍糧米)를 요구하였다. 조정에서 윤안국을 그 접반사로 파견하여 모문룡과 교섭하게 하였으나, 그는 병이라고 핑계하고 사피하니, 광해군이 노하여 그에게 백의종군(白衣從軍)하도록 명하였다.(「묘지명」 참고.)
[인조 시대 활동]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서 서인들이 정권을 잡자, 그는 장례원(掌隷院) 판결사(判決事)에 임명되었다. 그때 그는 광해군 때 내수사(內需司)와 권신(權臣)에게 빼앗겼던 노비(奴婢)들을 모두 본 주인에게 되돌려주었다. 이어 예조 참의(參議)로 옮겼고, 동부승지(同副承旨)에 발탁되었다가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옮겼으며 강원도 관찰사로 나갔다.(「묘지명」 참고.)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반란>이 일어나자, 강원도 관찰사 윤안국은 다른 도(道)의 관찰사보다 먼저 군사를 거느리고 서울로 올라와서 왕을 숙위(宿衛)하였는데, 그해 겨울에 병조 참지에 임명되었다. 1625년(인조 3) 모문룡이 후금 누르하치를 배후에서 견제하도록 요청하자, 조정에서 윤안국을 종성 부사(鍾城府使)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그의 나이가 이미 예순이 되어 몸이 쇠약하므로, 변방의 성곽을 지키는 자리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하여 곧 교체되었다.
1626년(인조 4) 상주 목사(尙州牧使)에 임명되었으나, 얼마 뒤에 파직되었다. 1629년(인조 7) 형조 참의가 되었는데, 동지사(冬至使)에 임명되었다.(『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인조편 참고.) 요동 지방에 후금 누르하치에게 함락당하자, 중국 명나라 북경으로 가는 육로가 막혔으므로, 조선의 사신 일행은 배를 타고 해로(海路)를 통하여 중국 명나라 북경으로 갔다. 1626년 9월 17일 동지사 윤안국 일행은 중국 북경으로 가기 위하여 북신구(北汛口)에서 돛을 달고 각화도(覺華島)로 향하던 중에 동남풍이 크게 일어 배가 침몰하면서 익사하였다.(『승정원일기』 인조편 참고.) 이때 진하사(進賀使) 이흘(李忔)도 같이 동행하였는데, 사신 일행이 5~6척의 배에 나누어 탔기 때문에 이흘은 무사히 북경에 가서 황제에게 하례(賀禮)를 드렸다. 그러나 이흘도 북경 회동관(會同館)의 옥하관(玉河館)에서 병사(病死)하였다.
[명나라 사절(使節)과 사행로(使行路)]
조선시대 사신(使臣)의 구성은 대개 정사(正使)·부사(副使)·서장관(書狀官)·통사(通事)·군관(軍官)·의원(醫員)·사자관(寫字官)·화원(畵員) 등의 정관(正官)과 마부(馬夫)·노비 등의 종자(從者)로 구성되었는데, 정관은 30~40명 정도이고, 종자도 30~40명 내외였으므로, 사절의 규모는 대개 70~80명 정도였다. 정사와 부사는 2품 이상의 대신(大臣) 중에서 임명하고, 서장관은 6품의 문관(文官)으로 임명하는데, 보통 사헌부의 감찰(監察)이 많이 임명되었다. 서장관은 사헌부 서리(書吏) 1명을 데리고, 사신 일행이 왕래할 때 이를 감독하고 그 물화를 점검하고 사무역(私貿易) 행위를 규제하였다. 실제로 사신 일행을 감독하고 통솔하던 책임을 맡은 사람은 서장관이었다. 그리하여 정사는 자기 심복을 추천하여, 임명되도록 하는 경우도 많았다.
중국어 통역을 맡은 통사는 2~3명인데, 그들은 통역을 맡은 이외에 무역을 맡아서 중국 상인들과 교역하였다. 통사는 일반물화를 무역을 맡아보는 상통사(上通事)와 약재(藥材) 무역을 전담하는 차상 통사(次上通事)로 나누어지는데, 이들 통사가 중국 상인들과 사무역과 밀무역을 하여 막대한 이익을 취하였으므로, 조선 시대 거부(巨富)는 통사가 대다수였다. 또 사신 일행을 호위하는 군관(軍官)과 질병을 치료하는 의원은 물론, 글자를 베껴쓰는 사자관과 그림을 그리는 화원도 모두 사무역과 밀무역을 행하였다. 서장관이 이를 철제하고 통제하지 않으면, 회동관에서 행해지는 관무역(官貿易) 이외에 사신 일행이 묶는 곳마다 사무역과 밀무역이 끈임 없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신 일행이 중국에서 돌아올 때 압록강을 건너오면, 조정에서 파견한 수검 어사가 의주에서 나루로 나가서 사절(使節)의 짐 보따리를 일일이 검사하도록 법제화되어 있었다.
1602년(선조 35) 윤안국이 사은사 정사호의 서장관에 임명되어 육로를 통하여 중국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올 때 사은사 정사호, 부사 조정지, 서장관 윤안국 세 사람이 일행의 나머지 원역과 짐을 실은 차량을 압록강 건너 중국땅에 두고 먼저 강을 건너서 의주로 들어왔다. 그런데 수검 어사가 나머지 원역의 짐 검사를 할 때 서장관이 현장에 입회하여 나머지 일행을 독려하지 않았다고 하여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던 것이다. 윤안국은 자신과 사이가 나쁜 기자헌이 일부러 그를 모함한 일이라고 믿었으나, 사실은 그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잘못이 있었다. 그 일로 인하여 윤안국은 울산 판관으로 좌천되었던 것이다.
조선에서 중국 명나라 북경에 가는 사행로(使行路)는 육로(陸路)와 해로(海路)가 있었는데, 육로는 서울~의주~요양(遼陽)~산해관(山海關)~북경의 4곳을 거쳐 1천 9백 리(里)였고, 해로는 선사포(宣沙浦)에서 출발하여 일단 가도(椵島)에 들렸다가, 차우도(車牛島)~장자도(獐子島)~신도(薪島)를 거쳐 평안도 해변을 따라서 압록강 어귀에 도착한 다음에, 요동 반도의 해안을 따라서 녹도(鹿島)~석성도(石珹島)~장산도(長山島)~광록도(廣鹿島)~평도(平島)~여순(旅順) 포구에 이르러, 요동 반도에서 산동 반도에 이르는 대해(大海)를 건너서, 산동 반도의 묘도(廟島)~등주(登州) 곧 봉래(蓬萊)에 이르고, 등주에서 북경(北京)까지 육로로 갔는데, 총거리가 3천 7백 60리였다.(『사서집(沙西集)』 권5 참고.) 중국에 왕복한 일정은 육로가 4~5개월, 해로(海路)가 7~8개월 걸렸는데, 이는 조선 사신관인 북경 회동관의 옥하관에 사신 일행이 머물던 40여 일을 포함한 것이다.
1629년(인조 7) 형조 참의 윤안국이 동지사에 임명되어 중국 명나라에 갈 때 후금 누르하치가 요동 반도를 점령하여 육로의 사행로(使行路)가 막혔으므로, 육로보다 험악한 해로를 이용하게 되었다. 그때 명나라의 영원위 독사(寧遠衛督師) 원숭환(袁崇煥)이 가도의 제독(提督) 모문룡을 견제하기 위하여, 조선의 사절이 해로의 사행로를 변경하여 각화도를 거쳐 영원위에 도착한 다음에 육로로 산해관으로 가도록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 길은 철산(鐵山)을 경유하여 바닷길로 몇 고비의 험로(險路)를 거쳐야 할 뿐만 아니라, 이전 보다 몇 배나 거리가 멀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사신으로 가기를 꺼려하였다. 그러나 윤안국은 친한 친구들에게 말하기를, “만일 죽을 때가 된다면 집에 있다고 하더라도 죽음을 면할 수 있겠는가?” 하고, 나라를 위하여 사양하지 않고 사행(使行)에 나섰다. 8월 초하룻날 평양(平壤)에서 출발하여, 9월 17일 북신구에서 돛을 달고 각화도로 향하였는데, 동남풍이 크게 불어서 돛이 끊어지고 배가 뒤집혀 침몰하여 익사하고 말았다.(『승정원일기』 인조편 참고.)
17세기 초에 후금의 누르하치가 요동 지방을 점령하여, 조선에서 중국 명나라 북경으로 가는 육로의 사행로가 막혔으므로, 바다로 가는 해로를 따라서 중국으로 가다가 폭풍을 만나서 전후에 익사한 사신들이 속출하였는데, 유간(柳澗)·박이서(朴彝叙)·정응두(鄭應斗)·윤창립(尹昌立)·윤안국(尹安國) 등이 바로 그들이다.(『성호사설(星湖僿說)』 권16 참고.)
[성품과 일화]
윤안국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그의 「묘지명」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의표(儀表)가 헌걸차고 수염이 아름다워, 그가 조정에 서면 용모가 반열(班列)에서 특출하였다. 선조가 그를 보고 특이하게 여겨서 좌우 측근에게 누구냐고 물어보기까지 하였다. 선조는 윤안국의 생김새가 병조의 자리에 적합하다고 생각하여, 그 직책에 오래 머물러 두려고 하였다. 이조에서 그를 대각(臺閣)이나 승지의 자리에 의망(擬望)한 적이 수십 차례였으나, 선조는 오히려 다른 자리에 의망하는 이조의 낭청(郎廳)을 불러서 꾸짖기까지 하였으므로, 끝내 그는 화직(華職)으로 영전하지 못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숙성하여 글을 배울 때 한번 들으면 바로 이해하고 한번 보면 잊지 않았다. 그는 책읽기를 좋아하여 제자백가(諸子百家)를 두루 섭렵(涉獵)하였으므로, 지식이 지극히 해박하였으나 스스로 남에게 아는 체 하지 않았다. 시문(詩文)은 격조가 매우 높았고, 술을 마시면 시를 곧잘 읊었다. 그는 평소 술을 좋아하고 주량도 컸으나, 취하도록 술을 마시지 않았다. 그는 막내아우 병조 정랑 윤홍국과 우애가 아주 두터웠는데, 특히 그의 청고정민(淸苦精敏)함을 사랑하여 남들에게 자랑하기를, “나의 아우의 청렴과 정성은 다른 사람들이 도저히 따라가지 못한다.” 하였다. 관직에 있을 때에는 간결하게 일을 처리하였고, 또 사람들에게 가벼이 선심(善心)을 베풀지 않으면서, “공물(公物)을 사사로이 남에게 베풀어서는 안 된다.” 하였다.
1600년(선조 33) 대북(大北)의 홍여순(洪汝諄)과 이이첨이 서로 알력이 생겨서 물의를 일으키자, 선조가 두 사람의 행위에 격노하여 두 사람을 모두 내치려고 하였다. 이이첨이 그의 일당 조정(趙挺)과 모의하여 윤안국을 천거하여 이조 좌랑의 자리에 앉힘으로써 후일을 도모하려고 계획하여, 넌지시 그의 의사를 떠보았으나, 윤안국이 이에 응하지 않았으므로 그만두었다. 상국 김명원(金命元)이 이조를 맡고 있을 때에 상국 한응인에게 인재를 추천하라고 부탁하였다. 한응인이 즉시 윤안국을 천거하여, 윤안국은 공조 좌랑에 임명되었고, 예조 좌랑으로 옮겼다가, 다시 병조 좌랑이 되었다.(「묘지명」 참고.) 광해군 때 그의 외종형이 권신 이이첨과 혼인을 맺으려고 이이첨을 위하여 성의를 다하면서, 그에게 이이첨과 친하게 지내도록 권유하자, 그는 사양하기를, “선비가 자신을 지키는 것은 처녀가 자신을 지키는 것과 같은데, 어떻게 자진하여 중매를 설 수 있겠는가?” 하였다. 혹자가 그 말을 이이첨에게 전하자, 이이첨이 크게 노하여 하마터면 그가 불측한 지경에 빠질 뻔하였다.
그는 성품이 중후하고 기량이 관대하였다. 그는 집에 있을 때에는 검소하여 평생 성색(聲色)이나 분화(紛華)를 즐기는 일이 없었다. 혹자가 그 옷이 낡았다고 말하면 그가 말하기를, “몸이 깨끗지 못한 것은 참으로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나, 옷이 나쁜 것은 내가 부끄러워해야 할 바가 아니다.” 하였다. 입으로 한 번도 남의 잘못을 말한 일이 없었지만, 부정을 미워하여 항상 부정한 사람을 가까이 하면 자기까지 더렵혀지는 것처럼 여겼다. 권세 있는 사람의 문전에 발걸음하지 않았고, 놀면서 남의 말만 하는 사람과는 사귀지 않았다. 조정에 벼슬한 지 40년이 되었으나, 항상 진흙창에 철벅거리고 얼음판에 미끄러지는 일이 많았지만, 그는 조금도 마음에 두지 않고, “나는 이만하면 족하다. 분수 밖의 일을 어찌 바라겠는가?” 하였다.
[묘소와 후손]
그는 동지사(冬至使)가 되어 중국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다가, 바다에서 익사하여 시신을 찾을 수 없었으므로, 관례에 따라 의관(衣冠)을 가지고 허장(虛葬)을 지냈는데,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 석적리(石積里) 발우산(鉢盂山)의 언덕에 있다. 외손자 박세당이 지은 묘지명(墓誌銘)이 남아 있다.(『서계집(西溪集)』 권9 「강원도관찰사윤공안국묘지명(江原道觀察使尹公安國墓誌銘)」)
부인 우봉이씨(牛峯李氏)는 참봉(參奉) 이첩(李*)의 딸인데, 3남 1녀의 자녀를 두었다. 장남은 사헌부 지평(持平) 윤수(尹數)이고, 차남은 윤유(尹攸)이며, 3남은 윤징(尹徵)이다. 1녀는 이조 참판 박정(朴炡)의 처가 되었는데, 그 외손자가 서계 박세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