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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737년(영조 14)~1808년(순조 8) = 72세]. 조선 제21대 왕인 영조(英祖)의 딸. 봉호는 화완옹주(和緩翁主).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주거지는 서울인데, 주로 궁에서 살았다. 한때 강화도 교동부(喬桐府)에서 유배 생활을 하였다. 어머니는 증 찬성 이유번(李楡蕃)의 딸인 선희궁(宣禧宮) 영빈 이씨(映嬪李氏)이다. 친오빠가 사도세자(思悼世子)이고, 조카가 제22대 왕인 정조(正祖)이다. 본관이 연일 정씨(延日鄭氏)로, 이조 판서(判書)정우량(鄭羽良)의 아들인 일성위(日城尉) 정치달(鄭致達)과 혼인하였다. 1757년(영조 33) 딸과 부마(駙馬)를 연달아 잃은 후, 아버지 영조의 배려로 다시 궁에 들어와서 살았다. 부마의 먼 친척인 정후겸(鄭厚謙)을 양자로 삼았는데, 영조가 세손(世孫)인 정조에게 대리청정(代理聽政)을 맡길 때, 화완 옹주는 정후겸 등과 함께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하는 등 정조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방해하였다. 그 결과 정후겸은 사사(賜死)되었고, 화완 옹주는 유배에 처해졌으나, 후에 정조의 비호로 죄가 모두 사면되었다.
[출생 및 혼인]
1737년(영조 14) 1월에 태어난 화완옹주는 영조의 12옹주 가운데 아홉째 옹주였으며, 영조와 영빈 이씨 사이의 1남 6녀 가운데 막내였다. 동복 형제 가운데 3명의 언니가 일찍 죽어 1남 3녀만이 남았는데, 그 1남이 바로 세자(世子)인 사도세자였다. 화완옹주가 태어났을 당시 아버지 영조의 총애는 이들 가운데 큰 언니인 화평옹주(和平翁主)에게 향해 있었다. 화평옹주는 성품이 유순하여서 부모·형제들을 잘 보살폈는데, 22세가 되던 1748년(영조 24) 출합(出閤)하여 살던 사저(私邸)에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이에 영조는 큰 충격을 받았다. 당시 화완옹주의 다른 언니인 화협옹주(和協翁主)도 출합하여 궁을 떠난 상태였던 까닭에 영조는 아직 혼인을 하지 않아 궁에 남아 있던 화완옹주로부터 많은 위안을 받았다. 화평옹주에게 쏠려 있던 총애가 화완옹주에게 쏠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이듬해인 1749년(영조 25) 12세의 화완옹주는 정우량의 아들인 일성위 정치달과 혼인을 하였다. 그러나 아직 나이가 어렸으므로 계속하여 궁에서 살다가, 15세가 되던 1752년(영조 28)에 이르러서야 출합을 하였다. 출합 후 화완옹주는 남편뿐만 아니라 형제들과도 원만하게 지냈는데, 특히 사도세자와의 관계에 많은 신경을 썼다. 『한중록(閑中錄)』에서는 화완옹주가 영조가 사도세자보다 자신을 더 편애한다는 것을 알고 불안하게 여겼다는 정치달의 언급을 서술하고 있다. 이에 정치달 또한 옹주에게 집중된 편애를 사도세자와 나누도록 조언하였다고 한다.
1756년(영조 32) 화완옹주는 드디어 큰 딸을 낳았다. 그러나 화완옹주의 기쁨은 오래 가지 못하였는데, 이듬해 1월 화완옹주의 딸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던 것이다. 이에 영조는 화완옹주가 큰 슬픔에 잘못되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에 옹주를 궁으로 데려와서 보살폈다. 그런데 채 한 달도 되지 않아 2월 중순 화완옹주의 부마인 정치달마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러자 영조는 남편과 딸을 한꺼번에 잃은 화완옹주를 보살피기 위하여, 화완옹주를 궁에서 살게 하였다. 그리고 몇 달 후 영조의 큰 딸로 정빈 이씨(靖嬪李氏)와의 사이에서 낳은 화순옹주(和順翁主)마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화순옹주의 부마인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이 세상을 떠나자, 화순옹주도 월성위를 따라가겠다며 음식을 끊었던 것이다. 영조가 아버지의 명령이라며 화순옹주의 단식을 막았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화순옹주는 단식 14일 만에 사망한 것이다. 이렇게 또 하나의 자식을 잃고 나자 영조는 화완옹주에게 더 큰 애정을 쏟기 시작하였다.
[환궁 후의 생활]
화완옹주가 환궁하여 궁에서 살 당시 영조와 사도세자의 관계는 상당히 좋지 않았다.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매우 엄했는데, 그로 인하여 부자(父子) 사이는 점차 멀어져서 쉽게 회복되지 않을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런 상황에서 영조가 안쓰러운 마음에 화완옹주를 더 편애하자 사도세자는 노골적으로 질투의 감정을 표시하기도 하였는데, 『한중록』에 따르면 사도세자는 화완옹주에 대하여 “저는 자애를 극진히 입고 나는 어이 이러한고”라고 한탄하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그러자 화완옹주는 친오빠인 사도세자를 위하여 영조와 사도세자의 중간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영조와 떨어져 살고 싶어 하는 사도세자를 위하여 영조의 숙소를 창덕궁(昌德宮)에서 경희궁(慶熙宮)으로 옮기게 하였고, 습창이 나서 고생하던 사도세자가 온양온천으로 떠날 수 있도록 주선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762년(영조38) 윤5월 결국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는 <임오화변(壬午禍變)>이 발생하였다. 일부에서는 임오화변에 화완옹주가 깊숙이 관련되어 있다고 보는 시각도 있으나,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과 『한중록』 등 비교적 당대에 쓰인 사료에는 화완옹주가 임오화변에 개입한 흔적이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한중록』에서는 화완옹주가 후에 세손에게는 괴상히 굴었지만, 사도세자의 일에는 스스로 몸을 다하였다고 적고 있다.
한편 <임오화변> 이후 사도세자의 아들인 당시 세손 정조가 영조의 후계자가 되었다. 세손은 아버지가 죽은 후 영조의 큰 아들인 효장세자(孝章世子)의 아들로 입적되었다. 그리고 창덕궁에서 경희궁으로 거처를 옮겨 영빈 이씨와 함께 생활하다가, 1764년(영조 40) 영빈 이씨가 세상을 떠난 후로는 고모인 화완옹주와 함께 생활을 하였다. 여전히 영조의 편애를 받고 있던 화완옹주는 어린 조카인 정조를 잘 보살펴 주었지만, 『한중록』에 따르면 때때로 도가 지나쳐 정조를 자신만이 소유하기를 원하여 정조 주위의 모든 것에 질투를 느꼈다고 한다. 그러나 정조가 나이가 들어 사춘기를 거치면서 점차 그 둘의 사이는 멀어져갔다.
한편 일성위 정치달이 죽은 후, 화완옹주는 정치달의 친척인 정석달(鄭錫達)의 아들 정후겸을 양자로 들였다. 정후겸은 어려서부터 문장에 재능이 있고 배짱도 두둑했는데, 게다가 화완옹주의 아들이라고 하여 영조의 총애까지 받았다. 그리하여 그는 16세가 되던 1764년(영조 40)에 장원서(掌苑署)봉사(奉事)에 임명되었고, 2년 후인 1766년(영조 42)에는 별시(別試)에 합격하여 중앙 정치 무대에 등장할 여건을 마련하였다. 이어 정후겸은 수찬(修撰)을 비롯하여 승지(承旨)를 거쳐 21세에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로 임명되는 초고속 승진을 하였는데, 이 모든 것이 화완옹주와 영조의 후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면서 정후겸은 조정 내에서 또 하나의 세력으로 부상하기 시작하였고, 이 세력은 당파들과 결탁하며 당시 세손이었던 정조의 세력을 위협하는 단계로까지 나아갔다.
[세손의 대리청정]
영조의 편애를 받으며 화완옹주와 그의 아들 정후겸이 궁궐 내의 최고 실력자로 부상한 가운데, 영조의 몸 상태가 급속도로 나빠지기 시작하였다. 1775년(영조 51) 10월 영조는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명령하였고, 이 사실을 화완옹주에게도 알렸다. 그런데 대리청정은 매우 미묘한 문제였다. 대리청정을 섣불리 받아들였다가는 왕위에 관심을 가지는 것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보통 대리청정을 받는 사람은 이를 우선 거절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 후에 왕이 거듭하여 명령을 내리고, 주위에서도 거듭하여 요청을 하면 어쩔 수없이 받아들이는 모양새를 연출한 후 대리청정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이때에 주위에서 거듭 요청을 하는 것도 간단하지 않았다. 왕이 대리청정을 명령하였을 때 바로 수긍하면 현재의 왕이 살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음 왕을 추대하는 것처럼 비춰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왕이 진심으로 대리청정을 원할 경우, 매우 어려운 문제를 해결한 충신이 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이때에는 왕의 진심을 잘 헤아리는 것이 중요하였고, 왕 또한 자신의 진심을 분명하게 표현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이때 영조가 자신의 대리청정을 화완옹주에게도 알렸던 것이다. 당시 궁궐 내에 실력자로 부각하였던 화완옹주가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서 세자가 대리청정을 받아들일 것인가, 아닌가가 결정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처음 영조가 대리청정 의사를 밝혔을 때, 화완옹주는 대리청정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러나 곧 영조의 마음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며 한 발 물러섰다. 모든 편애를 받던 화완옹주가 이렇게 한 발 물러서면서, 그 누구도 대리청정을 건의하는 것이 애매해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대하여 『영조실록(英祖實錄)』에서는 이때 화완옹주의 행동은 정후겸의 입김이 들어갔기 때문이며, 정후겸은 널리 심복들을 배치하여 세손의 일거수일투족을 탐문하였고, 화완옹주 또한 문서의 왕래까지도 찾아내어 정후겸에게 전해주었다며, 이 당시 세손은 매우 위태로운 상황에 놓여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이 계속되자, 결국 영조는 그 해 11월 다시 한 번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시키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자 이번에는 영의정(領議政)한익모(韓翼謨)와 세손의 외할아버지의 동생, 즉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의 작은 아버지인 좌의정 홍인한(洪麟漢) 등이 세손의 대리청정을 반대하였다. 그러다가 12월 3일 부사직(副司直)서명선(徐命善)이 한익모와 홍인한의 처벌을 주장하자 영조가 서명선의 주장에 따르기로 하고, 12월 7일에 드디어 세손의 대리청정을 공식적으로 선포하면서 이 문제는 끝이 났다. 이 과정에서 세손이 대리청정을 거두어 달라고 몇 차례 요청을 하였지만, 이것은 형식적인 것에 불과하였다.
[정조의 즉위]
화완옹주와 정후겸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세손이 대리청정을 하게 된 지 세 달 후인 이듬해 3월, 영조가 세상을 떠나고 정조가 25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정조의 즉위로 화완옹주의 입지는 매우 위험하였다. 영조가 살아있을 때 화완옹주와 정후겸은 영조의 총애를 등에 업고 정조의 반대 세력으로 성장했었던 것이다. 특히 정조가 대리청정을 하며 왕권을 이어 받기 위한 수순을 밟을 때, 화완옹주와 정후겸은 애매모호한 행동을 취하며 다른 이들도 대리청정을 건의할 수 없게끔 행동함으로써 정조의 행보를 방해하였었다. 이렇듯 왕권을 위협하는 세력으로 성장한 이들을 가만히 둘 수는 없었기 때문에, 결국 정조는 이들에 대한 숙청을 감행하였다. 즉위 직후 정조는 영조 대에 당여(黨與)를 맺고, 권세를 농간하였으며, 국법을 멸시하여 온 세상을 교란시키는 짓을 하였고, 임금에게 모함과 훼방하는 말 등을 떠벌려서 저궁(儲宮)을 동요시키려 하였다는 죄를 들어 정후겸을 경원부(慶源府)로 귀양보냈다. 이때 화완옹주도 처벌하여야 한다는 상소들이 올라왔으나, 정조는 화완옹주가 이미 사저(私邸)로 나갔으므로 더 이상 논하지 말라며 옹주는 처벌하지 않았다.
이어 정후겸과 홍인한이 내통하는 사이였다는 상소가 끊임없이 올라오면서 결국 홍인한 또한 여산부(礪山府)로 유배를 갔다. 그리고 정조의 외할아버지이자,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인 홍봉한(洪鳳漢) 또한 정후겸, 홍인한 등과 내통하는 사이였다며 처벌을 촉구하는 상소들도 함께 올라왔으나,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생각한 정조의 비호로 홍봉한은 무사하였다. 그리고 몇 달 후인 그 해 7월 정조는 정후겸과 홍인한을 사사(賜死)하고, 『명의록(明義錄)』을 편찬하여 대리청정을 둘러싼 그 동안의 과정을 서술하도록 하였다.
정후겸이 사사당할 당시 화완옹주는, 영조가 사랑하던 딸이었다는 것을 내세운 정조의 비호로 무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조정 대신들은 끊임없이 화완옹주의 처형을 요구하였는데, 이듬해인 1778년(정조 2) 윤6월 정조는 화완옹주의 직호(職號)를 삭탈하고 강화도 교동부에 옹주를 안치하는 것으로 처형을 대신하였다. 화완옹주는 더 이상 옹주가 아닌 ‘정치달의 처’로 불리게 되었다. 이로부터 4년 후인 1782년(정조 6) 12월 정조는 선조의 딸로서 <김자점(金自點)의 옥(獄)>에 연관되어 유배를 떠난 효명옹주(孝明翁主)의 경우를 들면서 화완옹주의 유배지를 섬에서 육지로 옮겼다. 한편 화완옹주는 이 유배 기간 동안에도 정조의 후의를 받으며 큰 어려움 없이 지냈다.
그리고 1799년(정조 23) 3월 정조는 화완옹주의 죄에 대한 진위(眞僞)가 불분명한데도 아직 죄안(罪案)에 있는 것이 미안하다며 죄명을 없애도록 하였다. 이에 대하여 대신들은 정조가 대리청정을 받을 때 방해하던 역적들의 배후가 화완옹주라며 그 명을 거두어 줄 것을 거듭 요청하였으나, 정조는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화완옹주의 죽음과 묘소]
정조가 세상을 뜬 후 순조(純祖)가 왕위에 오른 이후에도 화완옹주에 대한 정책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그리하여 조정 대신들이 여전히 화완옹주를 탄핵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순조는 이를 따르지 않았다. 이렇듯 정조와 순조의 비호 속에 목숨을 부지하였던 화완옹주는 1808년(순조 8)에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옹주의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사목리 산 116-27에 부마 정치달의 묘소와 나란히 조성되었다. 2001년 파주시 향토유적 제14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