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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15년(태종 15)~1477년(성종 8) = 63세]. 조선 제4대 왕인 세종(世宗)의 딸. 봉호는 정의공주(貞懿公主)이다. 어머니는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 안효공(安孝公) 심온(沈溫)의 딸이자, 위화도(威化島) 회군공신(回軍功臣) 1등에 추록된 정안공(定安公) 심덕부(沈德符)의 손녀인 소헌왕후(昭憲王后)이다. 친오빠가 제5대 왕인 문종(文宗)이고, 바로 아래 동생이 제7대 왕인 세조(世祖)이다. 본관은 죽산 안씨(竹山安氏)로, 관찰사(觀察使) 안망지(安望之)의 아들인 연창위(延昌尉) 안맹담(安孟聃)과 혼인하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훈민정음 창제에 간여하였다고 전해진다.
[안맹담과의 혼인]
세종과 소헌왕후는 8남 2녀의 자식을 두었는데, 정의공주는 그 가운데 셋째이자, 첫째인 정소공주(貞昭公主)에 이어 둘째 딸로 1415년(태종 15)에 태어났다. 1424년(세종 6)에 정소공주가 세상을 떠나면서 자연스레 큰 딸의 역할을 물려받게 되었다. 14세가 되던 1428년(세종 10) 2월 12일에 정의공주로 책봉되었고, 같은 날 죽성군(竹城君)으로 책봉된 안맹담과 그 다음날인 2월 13일에 혼인을 하였다. 이후 안맹담은 1432년(세종14)에 연창군(延昌君)에 봉해졌다가, 1450년(문종 즉위)에 종실(宗室)을 구별하기 위하여 부마를 군(君)이 아닌 위(尉)로 칭하라는 조정의 명에 따라 연창위로 개봉(改封)되었다.
『세조실록(世祖實錄)』에서는 정의공주의 부마였던 안맹담에 대하여 온량(溫良)하고 즐기기를 좋아하였으며, 자혜롭고 어버이를 사랑으로 섬겼다고 평하였다. 그러나 술을 좋아하여 세종이 조알(朝謁)을 끊을 지경이었다고 한다. 결국 세종이 연창위의 술친구들을 불러서, 연창위가 누구와 술 마시기를 좋아하는지 물었고, 이후 술친구들이 다시는 연창위와 술을 마시지 않았다는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심성은 고운 편이었던 듯한데, 『문종실록(文宗實錄)』에서는 연창위가 부귀롭게 생장하여 학술은 없으나, 불법(佛法)을 좋아하여 밥 먹이는 중이 항상 10여 명이나 되었으며, 중의 옷을 입고 중의 아랫자리에 앉아서 불경을 읽고는 밥을 먹으며, 살생(殺生)을 싫어하고 양잠(養蠶)도 하지 않았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 외에도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에서는 안맹담이 초서(草書) 및 활쏘기와 말타기를 잘 하였고, 음률(音律)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약물(藥物)을 갖추어 놓고 다른 이에게 봉사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부마 안맹담이 학술이 없었다고 평해지는 것과 달리 정의공주는 어렸을 때부터 총명했다고 전해진다. 『성종실록(成宗實錄)』의 「정의공주 졸기」에 따르면, 공주는 성품이 총명하고 지혜로웠으며, 역산(曆算)을 해득하여서, 세종이 사랑하였다고 한다. 세종은 이러한 사랑을 실제로도 끊임없이 표현하였는데, 살아있을 때에 정의공주의 집에 방문하였다가, 공주의 아들들 이름을 지어주기도 하였다. 큰 아들은 물에서 노는 수달과 같이 활발하다 하여 여달(如獺)이라 하였고, 셋째 아들은 뽕나무 밭의 닭처럼 쉴새없이 돌아다닌다고 하여 상계(桑鷄)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이들은 이에 감격하여 이 아명(兒名)을 성인이 된 후에도 계속 사용하였다.
[세조 즉위 및 노후 생활]
아버지 세종이 세상을 떠난 후, 큰 오빠인 문종(文宗)과 조카인 단종(端宗)이 연이어 왕위에 오른 후에도 정의공주는 종실로서의 삶을 영위하였다. 그런 가운데 동생인 수양대군(首陽大君)이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서 실권을 장악하고, 이어 조카인 단종으로부터 양위(讓位)를 받아 왕위에 오르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때 정의공주 및 부마와 아들들은 특별히 개입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안맹담은 세조 즉위 후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1등으로 이름을 올렸는데, 원종공신은 국가나 왕실의 안정에 공훈이 있는 정공신(正功臣) 외에 공이 있는 사람들에게 주는 칭호로서, 아들 혹은 사위 등이 주로 이 칭호를 받았다.
안맹담이 원종공신의 공훈을 받고 세조 즉위 후에도 관직에 있었던 것과는 달리 정의공주의 셋째 아들인 안상계는 세조의 행보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리하여 계유정난이 일어난 후에는 저자도(楮子島)에서 은거하였고, 이후에는 김종직(金宗直), 남효온(南孝溫) 등과 어울리며 세월을 보내다가 예종(睿宗)이 왕위에 오르고 나서야 관직에 나섰다.
비록 아들이 세조를 반대하는 입장이기는 하였으나, 정의공주와 세조의 사이는 나쁘지 않았다. 세조는 왕위에 있는 동안 틈틈이 정의공주의 집을 방문하였을 뿐만 아니라, 의약품 및 곡식을 자주 하사하였고, 공주가 온천으로 여행을 떠났을 때는 위로 잔치를 열어주기도 하였다. 또한 부마인 안맹담이 죽었을 때는 이틀간 철조(輟朝)하고 양효(良孝)라는 시호를 내려 주기도 하였다.(『세조실록』 세조 8년 12월 25일 기사 참고.) 정의공주의 병이 심각하였을 때는 막내아들 안빈세(安貧世)를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임명하였는데, 이는 7계급을 뛰어넘는 파격 승진이었다.(『세조실록』 세조 12년 10월 24일 기사 참고.)
세조가 죽은 후에도 정의공주에 대한 조정의 대우는 여전하여서, 공주는 예종과 성종(成宗) 때에도 종실의 혜택을 받으며 살았다. 그러다가 1477년(성종 8) 6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안맹담과의 사이에서 4남 2녀를 두었다. 큰아들은 안여달이고, 둘째아들은 안온천(安溫泉)이며 셋째아들은 안상계(安桑鷄)이고 넷째아들은 안빈세이다. 첫째 딸은 한치례(韓致禮)의 처이고 둘째딸은 정광조(鄭光祖)의 처이다.
공주의 묘소는 부마 안맹담의 묘소 옆에 나란히 있는데, 현재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63-1에 위치한다. 묘소 앞에 있는 신도비의 비문은 정인지(鄭麟趾)가 지었으며, 글씨는 아들 안빈세가 썼다. 1982년 11월 13일에 부마 안맹담의 묘소와 함께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50호로 지정되었다.
[정명공주의 총명함 및 지장보살본원경의 간행]
어려서부터 총명하였던 정의공주는 훈민정음 창제에도 관여를 하였다고 전해진다. 『죽산안씨대동보(竹山安氏大同譜)』에 따르면 세종이 훈민정음을 만들 때, 변음과 토착을 다 끝내지 못하여서 여러 대군에게 풀게 하였으나 모두 풀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공주에게 내려 보내자 공주가 곧 풀어 바쳤다고 전하고 있다. 아울러 정의공주가 부왕(父王)이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 동궁과 진양대군(晋陽大君: 훗날 세조) 및 안평대군(安平大君)과 함께 참여하였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이러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은 『조선왕조실록』이 부녀자의 사회 활동을 인정하지 않는 유교적 가치에 따라서 편찬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런데도 「정의공주의 졸기」에서는 공주가 역산을 해득하여서 세종이 사랑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러한 기록들을 볼 때 정의공주는 언어학과 천문학 등에 매우 뛰어났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정의공주는 간행 사업에도 관여하였는데, 부마 안맹담이 죽은 후 그의 명복을 빌고자 『수륙의문(水陸儀文)』, 『결수문(結手文)』, 『소미타참(小彌陀懺)』,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등과 함께 『지장보살본원경(地裝菩薩本願經)』을 간행하였다. 그 가운데 1469년(예종 1)에 간행한 『지장보살본원경』은 당(唐)나라의 법등(法燈)이 번역한 『지장보살본원경』권 상·중·하를 나무에 새겨서 닥종이에 찍은 것으로 3권이 하나의 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세로 31.8㎝, 가로 20.5㎝인 이 책의 책 머리에는 불경의 내용을 요약하여 그린 변상도(變相圖)와 기원하는 글을 적은 패(牌), 그리고 신중상(神衆像) 등이 묘사되어 있다. 책 끝의 발문(跋文)은 김수온(金守溫)이 썼으며, 목판에 새기는 일에는 권돈일(權頓一)·사부귀(史富貴)·고말종(高末終)·박군실(朴群實)·이장손(李長孫) 등이 참여하였다. 조선 왕실의 불교 신앙에 대한 한 유형을 살필 수 있는 자료로 평가 받는 이 『지장보살본원경』은 1988년 12월 28일에 보물 제966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