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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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李岏)

서지사항
항목명이완(李岏)
용어구분인명사전
분야왕족
유형인물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총론]
[1529년(중종 24) ∼ 1547(명종 2) = 18세]. 조선 중기 중종의 서출 제 6왕자. 이름은 이완(李岏), 봉작은 봉성군(鳳珹君)이고 시호는 의민(懿愍)이다. 자는 자첨(子瞻), 호는 공우(公友)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중종(中宗)이고, 어머니 희빈 홍씨(熙嬪洪氏)는 남양군(南陽君) 홍경주(洪景舟)의 딸이다. 부인 동래정씨(東萊鄭氏)는 봉상시(奉常寺) 정(正) 정유인(鄭惟仁)의 딸인데, 영의정 정광필(鄭光弼)의 증손녀이고, 좌의정 정유길(鄭惟吉)의 조카이다.

[봉성군 이완의 인품과 그 배경]
봉성군 이완은 중종의 적출 2남과 서출 7남 중에서 서출 제 6자로 태어났는데, 여러 왕자 가운데 가장 똑똑하다는 소문이 났다. 1505년 5월 박원종(朴元宗)·성희안(成希顔) 등이 <중종반정(中宗反正)>을 일으킬 때, 홍경주는 군사 동원의 책임을 맡아서 큰 공을 세우고 정국공신(靖國功臣) 1등에 책훈되었으며 남양군(南陽君)에 봉해졌다. 또 그 딸은 입궁(入宮)하여 중종이 가장 총애하는 후궁이 되어 희빈(熙嬪)에 책봉되었다. 희빈 홍씨는 2남을 낳았는데, 맏아들이 금원군(錦原君) 이령(李岭)이고 둘째아들이 봉성군 이완이다. 1545년(명종 즉위) 9월 경기도관찰사 김명윤(金明胤)이 그를 역모의 일당으로 고발한 봉서(封書)에서, “이완은 여러 왕자(王子)·군(君) 중에서 조금 뛰어나다고 하여, 무지한 무리들 중에서 간혹 칭찬하는 자가 있다.”라고 하였다.(『명종실록(明宗實錄)』 참고) 이것을 보면, 당시 17세의 봉성군 이완은 글을 읽고 학문을 닦아서 품행이 뛰어났기 때문에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던 사실을 알 수 있다.

그가 태어나기 전에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났다. 훈구파(勳舊派) 홍경주·남곤(南袞)·심정(沈貞) 등이 사림파(士林派) 조광조(趙光祖)·김정(金淨)·김식(金湜) 등을 숙청할 때 희빈 홍씨가 아버지 홍경주의 사주를 받고, “주초위왕(走肖爲王)” 곧 조(趙)씨가 왕이 된다라는 의미를 담은 글자가 새겨진 나뭇잎을 중종에게 바치고, 중종으로 하여금 불안감을 가지도록 부추겨서, 중종이 조광조(趙光祖) 등 사림파를 일망타진하게 만들었다. 봉성군 이완은 인품도 훌륭하고 외가집도 훈구파의 일등 공신이기 때문에, 대윤(大尹) 윤임(尹任)과 소윤(少尹)윤원형(尹元衡)의 세력 다툼에서 왕위 계승자로 거론할 만한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인종(仁宗)이 몸이 허약하여 언제 죽을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소윤 윤원형이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아들 명종을 인종의 후계자로 공론화하자, 윤임은 중종의 적출 2왕자 인종과 명종을 제외하고, 서출 7왕자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로서 인정받는 봉성군 이완을 거론할 수밖에 없었다. 또 대윤 윤임은 봉성군 이완을 세자로 책봉하여, 훈구파의 지지를 이끌어내려고 기도하였던 면도 없지 않다.

인종이 왕위에 오른 지 불과 8개월 만에 갑자기 돌아갔으므로, 대윤 윤임 일파는 그 후계자를 공론화할 시간이 없었다. 실제로 윤임은 겉으로 봉성군 이완을 후계자로 거론하면서도 속으로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손자이자 윤임 자신의 조카인 계림군(桂林君) 이류(李瑠)를 세자로 세우려고 하였다. 인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하여 윤원형과 문정대비(文定大妃)가 명종을 후계자로 세우는 데에 성공하였다. 문정대비는 윤원형에게 밀지(密旨)를 내려서 대윤의 윤임·유관(柳灌)·유인숙(柳仁淑) 등을 죽이고, 계림군 이류와 봉성군 이완을 모반 대역(謀叛大逆)으로 몰아 계림군 이류는 죽이고, 봉성군 이완은 귀양 보내게 하였다.

[봉성군 옥사]
1545년 7월 명종이 왕위에 오르자, 소윤의 윤원형과 이기(李芑)·임백령(林百齡)·정순붕(鄭順朋) 등이 정권의 안정을 이룩하기 위해 반대파 대윤의 윤임과 유관·유인숙 등을 일망타진할 계획을 세우고, 윤원형의 첩 난정(蘭貞)을 대궐에 들여보내 문정대비와 명종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여 의혹을 품게 만들었다. 일찍이 이기가 병조 판서가 되려고 하였을 때 유관이 이를 방해하였고, 임백령은 기생첩 옥매향(玉梅香)을 둘러싸고 윤임과 서로 다투다가 사랑을 빼앗겼는데, 이로써 서로 원한을 품었던 것이다. 이때 윤임을 제거하는 동시에 유인숙·유관에까지 그 화를 미치도록 일을 꾸몄다. 그러므로 야사에서는 <을사사화>의 비극이 옥매향에게서 시작되었다고 비아냥거린다.

그때 윤원형 일파는 언문으로 한 통의 편지를 위조하여 예쁜 주머니에 넣고, 이것을 일부터 대궐 안마당에 떨어뜨려 놓았는데, 이것은 좌찬성 윤임이 인종의 왕비 공의전(恭懿殿: 인성왕후)에 급히 보내다가 떨어뜨린 것처럼 꾸민 것이었다. 다음날 한 궁녀가 그 주머니를 주어서 내전을 관할하던 문정대비에게 바쳤다. 이리하여 문정대비가 교서(敎書)를 내리기를, “궁중에서 저들이 언문 편지를 가지고 왕래하다가 발각된 것이 있는데, 그 가운데 말하기를, ‘근래에 나라 일이 점점 수상하게 돌아가서, 언제 죽음을 당할지 몰라서 밤낮으로 고민하고 있습니다. 판서 유인숙도 이러한 사정에 염려하여 왕위를 공우(公友: 봉성군 이완)에게 옮기기 위하여 벌써 정승 유관에게 통기하여 놓았습니다. 어제 왕후께서 하교하신 일은 형편상 시행하기가 곤란하니, 먼저 말씀드린 일을 속히 처결하여 주소서. 이렇게 머뭇거리고 있다가는 마침내 애매하게 죽을 사람이 몇이 될는지 알 수 없습니다. 전번에 윤원로(尹元老)를 귀양 보낼 때 윤원형마저 치죄하여 버렸더라면 인심이 이렇게 양쪽으로 갈라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고 적혀 있었다.” 하였다. 이 언문 편지는 윤원형 일파가 조작한 것인데, 윤임이 계림군 이류에게 왕위를 넘기지 않고 봉성군 이완에게 옮기려 하였다고 쓴 것은 그가 중종의 서출 왕자 가운데 가장 똑똑하다는 평을 받았기 때문이다. 윤원형의 소윤파는 명종의 정권 안정에 위험이 될 수 있는 종실의 인물을 아예 없애버리려는 계획이었다.

1545년(명종 즉위) 9월 경기도관찰사 김명윤이 소윤 일파의 밀령(密令)을 받고 한통의 봉서를 올려서 계림군 이류가 윤임과 작당하여 역모(逆謀)를 꾸몄다고 고발하고, 그 글의 말미에 봉성군 이완도 아울러 처벌하기를 요청하였다. 그 서계(書啓)에서, “봉성군 이완은 신의 죽은 아내의 가까운 친척인데, 나이가 아직 어리므로 필시 무슨 계략을 꾸미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봉성군 이완이 여러 왕자 중에서 뛰어나다고 하여 칭찬하는 자가 많은데, 국가가 위험한 시기를 당하여 공훈을 탐내는 무리들이 그를 꼬드겨서 반역의 계제(階梯)로 삼을 자가 없다고도 보장할 수 없습니다. 아울러 봉성군 이완을 처벌하소서.” 하였다. 관찰사 김명윤은 일찌기 홍경주(洪景舟)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이완은 바로 홍경주의 외손자이므로, 김명윤은 봉성군의 이모부였다. 이때 김명윤은 소윤에 속하였으나, 명종 중기에 가서 명종의 왕비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외삼촌 이량(李樑)이 득세하자, 이량파에 붙어서 재상이 되려고 하다가 실패하였다.

문정대비는 감사 김명윤의 계청(啓請)에 따라서 봉성군 이완도 계림군 이류와 함께 반역을 꾀한 죄목으로 경상도 울진(蔚珍)에 유배시켰다. 그러나 유배 가는 도중에 17세의 어린 나이로 결박당하여 끌려가다가 쓰러져 꼼짝할 수 없게 되자, 가까운 강원도 평창(平昌)으로 유배지가 바뀌고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1547년(명종 2) 9월 홍문관(弘文館) 부제학(副提學)정언각(鄭彦慤)이 양재역(良才驛)에서, “여왕이 집정하고 간신 이기 등이 권세를 자행하여 나라를 망치려고 하는데, 이를 보고만 있을 것인가?”라는 익명의 벽서(壁書)를 발견하고 이기와 정순붕 등에게 알려서, 이른바 <양재역 벽서> 사건이 일어났다. 문정대비는 격분하여 그 배후자를 모두 색출하게 하였는데, 윤원형의 소윤파는 <을사사화> 때 살아남은 잔당(殘黨)을 그 배후로 지목하여 송인수(宋仁壽)·백인걸(白仁傑) 등을 체포하여 심문한 뒤, 송인수·이약빙(李若氷) 등을 처형하고 백인걸(白仁傑)·이언적(李彦迪)·권벌(權橃) 등 20여 명을 먼 변방으로 유배하였다. 이때 봉성군 이완도 그 배후로 지목되어 유배지 평창에서 사사(賜死)되었는데, 그때 나이가 겨우 18세였다.

[묘소와 신원]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사릉(思陵) 뒤쪽에 있는데, 외할아버지 홍경주의 무덤 아래에 있다. 부인과 나란히 묻혔는데, 그 앞에 묘비(墓碑)가 있다. 1570년(선조 3) 영의정 이준경(李浚慶)이 계청하여 을사사화 때 화를 입은 사람들을 신원(伸寃)할 때, 봉성군 이완도 함께 신원되었다.  1732년(영조 8) 나라에서 시호를 의민이라고 내려 주었다.

부인 동래정씨(東萊鄭氏)는 봉상시 정 정유인의 딸인데, 외동딸 하나를 두었다.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명종실록(明宗實錄)』
■ 『고봉집(高奉集)』
■ 『국조보감(國朝寶鑑)』
■ 『기묘록보유(己卯錄補遺)』
■ 『동각잡기(東閣雜記)』
■ 『미수기언(眉叟記言)』
■ 『석담일기(石潭日記)』
■ 『상촌집(象村集)』
■ 『성호사설(星湖僿說)』
■ 『송자대전(宋子大典)』
■ 『순암집(順菴集)』
■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 『을사전문록(乙巳傳聞錄)』
■ 『일사기문(逸史記聞)』
■ 『청음집(淸陰集)』
■ 『퇴계집(退溪集)』
■ 『학봉전집(鶴峰全集)』
■ 『한수재집(寒水齋集)』
■ 『해동야언(海東野言)』
■ 『혼정편록(混定編錄)』

■ [집필자] 윤경수, 이현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