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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02년(연산군 8) ~ 1545년(명종 즉위) = 44세]. 조선 중기 중종~명종 때의 종친. 이름은 이류(李瑠), 봉작은 계림군(桂林君)이다. 자는 언진(彦珍)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성종의 형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외아들 덕풍군(德豊君) 이이(李恞)이고, 어머니 파평윤씨(坡平尹氏)는 파원부원군(坡原府院君) 윤여필(尹汝弼)의 딸이다. 성종의 셋째 아들 계양군(桂陽君)에게 양자로 갔다. 어머니가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와 형제 사이였으므로, 인종(仁宗)의 이종 4촌이고 윤임(尹任)의 조카이다. 또 그 부인 연일정씨(延日鄭氏)는 정유침(鄭惟沈)의 딸이므로 그는 좌의정 정철(鄭澈)의 매부가 된다.
[계림군 이류의 인품과 그 배경]
계림군 이류는 덕풍군 이이의 아들 3형제 중에서 둘째로 태어났다. 덕풍군은 월산대군의 외아들인데, 월산대군은 성종의 형이므로 적장자(嫡長子) 상속에 의한다면, 덕풍군은 세조의 아들 2형제 중에서 맏아들 덕종(德宗)의 장손(長孫)이므로 왕위를 계승할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 계림군은 덕풍군의 아들 3형제 중에서 둘째였으나, 형 파림군(坡林君) 이주(李珘)와 동생 전성부정(全城副正) 이리(李璃)보다 훨씬 똑똑하고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였다. 어릴 때부터 사냥이나 유흥·여색 같은 데에 마음을 쓴 적이 없었고, 책을 읽고 서책을 많이 저장하고 문필에 마음을 두었으므로, 여러 왕족 중에서 계림군의 자질이 가장 훌륭하다고 칭찬이 자자하였다. 중종 말기 인종이 세자로 있을 때 윤원형(尹元衡)의 형 윤원로(尹元老)가 계림군을 보고 인종의 세자로 삼아야 한다고 함부로 말하였다가,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었다. 중종의 아들 9왕자 중에서 장경왕후가 낳은 인종과 문정왕후(文定王后)가 낳은 명종을 제외하면, 왕자들은 모두 궁녀가 낳은 서자(庶子)였다. 그때는 중종이 임금으로 있었고 인종이 세자로서 아직 나이가 젊었으므로 후계자를 논의할 필요가 없었던 때였지만,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는 매우 노하였다.(『기재잡기(寄齋雜記)』 권3 참고.) 계림군의 어머니 파평윤씨(坡平尹氏)는 파원부원군(坡原府院君) 윤여필(尹汝弼)의 딸이고, 윤임의 누이였으며 중종의 제 1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의 언니였다. 장경왕후는 중종에게 시집가서 딸 효혜공주(孝惠公主)를 낳고, 1515년(중종 10) 아들 인종을 낳다가 25세의 나이로 돌아갔기 때문에 계림군의 어머니 윤씨가 죽은 왕후를 대신하여 어린 효혜공주와 인종을 거두어서 길렀다. 그러므로 계림군은 외삼촌 윤임(尹任)과 함께 어린 인종을 돌보았는데, 계림군은 인종보다 나이가 14세나 많았다. 1520년(중종 15) 중종은 나이 6세의 인종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그때 중종은 문정왕후(文定王后)를 제 2계비로 맞아들여 1남 3녀를 낳았다. 1522년(중종 17) 막내아들 명종을 낳자, 문정왕후와 그 동생 윤원형은 나약한 세자 인종을 폐위하고 어린 명종을 세자로 삼으려고 꾀하였으므로, 이들은 세자(후에 인종)을 보호하려는 윤임·계림군 등과 대립하였다.
1527년(중종 22) 2월 세자의 생일날 누군가 쥐를 잡아서 그 사지를 자르고 입·귀·눈 등을 불로 지져서 동궁의 뒷뜰 은행나무에 걸어두어 세자를 저주한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이것을 <작서(灼鼠)의 변>이라고 한다. 이 사건의 범인으로 박승종(朴承宗)의 양딸 경빈박씨(敬嬪朴氏)가 애매하게 지목당하였다. 그리하여, 중종의 제 1서자 복성군(福城君) 이미(李嵋)와 그 어머니 경빈박씨가 함께 궁중에서 쫓겨나서 경상도 상주(尙州)로 유배당하였다가, 모자가 함께 죽음을 당하였다.
중종은 세자를 보호하기 위하여 1531년(중종 26) 세자의 누이 효혜공주의 시아버지 김안로(金安老)를 불러들여 이조 판서·좌의정에 임명하여, 문정왕후의 세력을 견제하도록 하였다. 척신 김안로는 허항(許沆)·채무택(蔡無擇) 등과 작당하여, 정계의 원로 정광필(鄭光弼)·이언적(李彦迪)·최명창(崔命昌) 등을 조정에서 몰아내고 실권을 잡은 다음에, 윤원로·윤원형을 추방하였다. 그러나 1537년(중종 32) 문정왕후마저 폐위시키려고 하다가, 중종의 밀령(密令)을 받은 윤안인(尹安仁) 등에 의하여 김안로 일당이 도리어 죽음을 당하였다. 윤원형은 모사꾼 안세우(安世遇)·이만년(李萬年) 등에게 세자를 죽이고 윤임 일파와 종실 계림군을 일망타진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게 하였다. 이때부터 소윤 일파가 이들의 계략에 의하여 인종과 대윤 일파를 타도하고, 마침내 명종을 왕위에 올렸으므로, 사림파에서는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킨 장본인이 바로 안세우라고 지목하였다.
1544년 11월 인종이 즉위하자, 인종의 외삼촌 윤임과 인종의 이종 4촌 계림군 이류가 사림파의 인사들을 조정에 중용하여 대윤(大尹)을 형성하였고, 명종의 외삼촌 윤원형은 자기와 가까운 이기(李芑)와 정순붕(鄭順朋)·임백령(林百齡)·정언각(鄭彦愨) 등과 소윤(少尹)을 만들어서, 서로 대립하였다. 인종은 성격이 부드럽고 착하여, 문정왕후를 대비(大妃)로 받들고 동생 경원 대군(慶原大君: 후에 명종)을 감싸 안아서 양쪽의 대립을 조정하여 완화시켰다. 인종이 즉위한 지 8개월 만에 갑자기 병이 나서, 1545년 7월 후계자를 정하지도 못하고 나이 31세로 승하하였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윤원형 일파가 선수를 쳐서 12세의 명종을 즉위시키고 문정대비(文定大妃)로 하여금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게 만들었다. 그해 8월 문정왕후가 밀지(密旨)를 내려 대간(臺諫)에서 대윤파 핵심 인물 좌찬성 윤임과 좌의정 유관(柳灌)과 이조 판서 유인숙(柳仁淑) 3명을 탄핵하게 하였다. 그러나 젊은 대관(臺官)들의 반대로 실패하자, 문정왕후는 한밤중에 충순당(忠順堂)에 조정의 백관들을 불렀다. 여기서 중추부 지사 정순붕이 윤임·유관·유인숙을 탄핵하여 세 사람을 잡아 귀양보냈다가 죽이고, 나머지 대윤 일당과 사림파의 인물들을 모조리 체포하여, 심문하여 죽이거나 귀양보냈다. 이것이 바로 <을사사화>다.
[계림군과 문정왕후의 관계]
계림군 이류는 일찍이 성종의 서출 제 1왕자 계성군(桂城君) 이순(李恂)의 양자로 가서 그 작위를 습봉(襲封)하여 종실로서 품계가 높았다. 뿐만 아니라, 당대의 세도가 윤여필의 손자였다. 처음에 문정대비는 윤임·계림군의 세력을 무서워하여 타협하려고 시도하였다. 문정왕후는 자기의 셋째딸 경현 옹주(敬顯翁主)를 윤임의 손자에게 시집보내려고 제의하였으나, 윤임이 응락하지 않아서 하는 수 없이 신수경(申秀涇)의 아들 영천위(寧川尉) 신의(申檥)에게 시집보냈다. 또 문정대비와 계림군은 우연히 효혜공주(孝惠公主)의 유산을 처리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서로 오해를 하게 되었다.
계림군 이류의 어머니 윤씨에게는 아들이 3형제가 있었는데, 이류는 둘째로서 효성이 지극하였으므로 윤씨가 그를 특별히 사랑하였다. 그 때문에 형과 동생에게 미움을 많이 받았다. 일찍이 윤씨가 성종의 후궁 남씨(南氏)와 아주 친하였는데, 윤씨의 동생 장경왕후가 효혜공주(孝惠公主)와 인종을 낳고 돌아가자, 궁중에서 후궁 남씨가 맡아서 기르고 궁 밖에서는 윤씨가 돌봤다. 그 뒤에 효혜공주가 자라서 연성위(延城尉) 김안로(金安老)의 아들 김희(金禧)에게 시집을 갔다. 그러나 효혜공주가 겨우 딸 하나를 낳고 일찍이 죽었으므로, 후궁 남씨가 말하기를, “공주의 가진 물건이 많이 있는데, 외동딸이 아직 어리다. 만일 이 물건을 모두 아직 연소한 연성위 김희에게 넘겨준다면, 연성위의 첩이 제멋대로 쓰서 없애버릴 것이니, 내 집에 갖다 두었다가 딸이 장성할 때까지 기다리겠다. 그리하면 우리들이 부탁받은 양육 의무를 다하게 될 것이다.” 하였다.
후궁 남씨가 죽을 때 그 유산들을 윤씨에게 넘겨서 사가(私家)로 옮기게 하였다. 또 윤씨가 죽을 때 그 세 아들에게 그 유산을 나누어 주었는데, 그 물건을 모두 8개의 궤짝으로 나누어 담아서, 맏아들 파림군 이주와 막내아들 전성부정 이리에게는 각기 2궤짝씩을 주고, 나머지 4궤짝은 계림군 이류(李瑠)에게 주었는데, 이는 어머니가 아들의 효성에 보답한 것이다. 뒤에 파림군 이주와 전성부정 이리가 모두 죽고, 효혜공주의 딸은 자라서 윤원로(尹元老)의 아들 윤백원(尹百源)과 혼인했는데, 그가 곧 문정대비의 조카였다. 파림군 이주의 아내 허씨(許氏)와 전성부정 이리의 아내 신씨(申氏)가 함께 문정대비를 찾아가서 하소연하기를, “효혜공주의 물건을 모두 계림군의 집으로 가져갔습니다.”고 하자, 문정대비가 이 말을 듣고 그 유산을 추심해서 조카 내외에게 주려고, 궁중의 내관(內官)을 보내서 이류에게 물건을 모두 반환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때 계림군 이류는 “처음에 후궁 남씨가 이 물건을 잘못 처리하였고, 그 다음에 우리 어머니가 실수하여 이렇게 된 것이다. 남들은 이런 내막은 모르고, 죽은 어머니가 궁중에서 훔쳐낸 것으로 생각할지도 모르니, 내가 이에 대한 전 책임을 질 수 밖에 없다.” 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이류가 대답하기를, “어머니가 한 일은 사실상 신이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올린 사람들은 반드시 그 물건의 수량을 알 터이니, 그 목록을 적어서 내려주면 물건을 구해서 모두 바치겠습니다.” 하였다. 그러나 문정왕후는 계림군이 어머니의 잘못을 숨기려고 하는 말인 줄을 알지 못하고, 크게 화를 내면서, “제가 감히 이런 발칙한 말로 대답한다는 말이냐? 참으로 지독한 것이로다. 내가 그 보물의 물목을 모를 줄 아느냐?” 하였다. 당시 문정대비는 나이가 45세이고, 계림군은 44세여서 두 사람은 겨우 한 살 차이였다.
<을사사화> 때 소윤 일파가 기회를 틈타서 계림군이 윤임과 역모를 꾸면서 윤임이 계림군을 세자로 삼으려고 하였다고 거짓말을 꾸며서 계림군의 죄를 고발하자, 문정대비는 효혜공주의 유산 때문에 악감정을 품고 있던 터에 고발하는 말을 그대로 곧이듣고, 윤임과 역모를 꾸민 것이라고 믿고, 마침내 계림군에게 큰 화를 당하게 만들었다.(『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10 참고.)
[계림군 옥사]
중종 말기에 인종이 세자일 때 문정왕후의 오빠 윤원로(尹元老)가 말을 만들어서, “윤임이 세자를 보호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이류를 추대하려고 하는 것이다.” 하였는데, 그때 듣는 사람마다 말 같지 않은 소리라고 그냥 웃어 넘겼다. 윤원형은 경망하여 공개적으로 병약한 세자(인종)를 바꾸어야 한다는 둥, 경원대군(명종)이 아주 위태롭다는 둥 온갖 유언비어를 퍼뜨려서 소윤과 대윤의 싸움을 부채질하였다. 1545년 명종이 즉위한 뒤에 문정왕후가 동생 윤원형을 시켜서 오빠 윤원로를 탄핵하여 하여 해남으로 유배시켰다가, 이듬해 사사(賜死)하였다. 그 뒤에 윤원로의 아들 윤백원은 이량(李樑) 일파에 붙어서 삼촌 윤원형과 고모 문정대비를 비방하였다.
1545년 9월 경기도관찰사 김명윤(金明胤)이 문정 대비에게 봉서(封書) 한 통을 올렸다. 그 서계(書啓)에서, “계림군 이류는 윤임의 조카로서, 윤임이 그에게 의지하여 흉측한 모의를 하였으니, 계림군 이류도 반드시 그 실정을 알았을 것입니다. 이미 그 실정을 알고서도 그 즉시 고변하지 않았으니, 용서할 수 없는 죄이므로, 당연히 처치한 바가 있어야 할 터인데도 조정에서는 아직까지 처치함이 없습니다. 이는 필시 범죄의 괴수 윤임이 이미 제거되었으니, 이런 것쯤은 염려할 것이 없다고 여겨 버려두고 거론하지 않는 것입니다.”라고 하며 계림군 이류가 윤임과 역적을 모의하였다고 고발하고, 체포하여 처형하기를 강력히 주장하였다. 이리하여 문정대비가 승정원에 전교하기를, “이류는 소가(小家)가 많아서 소재처가 분명하지 아니하니, 의금부 낭청(郎廳)과 선전관(宣傳官) 등을 나누어 파견하여 다방면으로 수색하여 그를 반드시 체포하고 놓치지 말도록 하라.”하였다.
의금부 낭청과 선전관 등이 계림군 이류의 집에 달려갔었지만 그를 체포하지 못하였다. 누군가가 이류가 고양(高陽)에 가서 있다고 하므로 바로 낭청을 보내었으나, 이류를 체포하지 못하고 우선 그 조카들을 체포하여 왔다. 문정대비가 전교하기를,“이와 같이 간사한 모의를 위에서도 모른 것이 아니었으나, 종실이기 때문에 치죄하지 않았던 것이다. 또 윤임 등을 이미 제거하였으니, 그런 모의는 자연히 없어질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내버려 두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강력히 조치해야 되겠으니 기필코 체포해야 한다.”하고, 선전관 등을 파견하여, 군사 1백 50명을 거느리고 가서 군사마다 횃불 하나씩을 들고 성위를 나누어 지키면서 야경(夜警)을 서도록 하였다. 이때 윤임의 삼촌 도정(都正)윤여해(尹汝諧)와 윤임의 사위 주서(注書) 이덕응(李德應), 이류의 처남이자 정철의 형인 정랑(正郞)정자(鄭滋), 이류의 동서 저작(著作)최홍도(崔弘渡) 등 10여 명이 체포당하여, 경회루(慶會樓)의 남문 밖에서 매질과 단근질을 당하면서 심문을 받았으나, 모두 자백하지 않았다. 오직 윤임의 사위 이덕응만이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윤임이 계림군 이류를 세자로 세우려고 역모를 꾸몄다고 허위 자백하였다.
계림군 이류는 미리 겁을 먹고 밤중에 도성문을 빠져나가서, 양화도(楊花島)에서 배를 타고 도망쳐 함경도 안변(安邊)의 황룡산(黃龍山) 기슭에 있는 이웅(李雄)의 집에 이르러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숨어 있었다. 문정대비가 전교하기를, “듣건대, 이류의 아내가 어제 큰오빠 정자의 집으로 돌아갔다고 하니 급히 수색하라.” 하였다. 그때 황해도 토산현감(兎山縣監) 이감남(李坎男)이 계림군 이류의 종을 붙잡고, 그를 앞세워서 뒤를 쫓아가서 함경도 안변 지방의 황룡산 속에서 토굴을 지어 놓고 사는 이류를 붙잡아서 서울로 압송하였다. 계림군은 도망한 지 불과 며칠 만에 서울로 붙잡혀 왔다. 계림군 이류는 의금부에 하옥되었다가, 경회루의 남문에서 심문을 받았다. 국청(鞫廳)에서 추관(推官)들이 아뢰기를, “이류는 심문에 응하지 아니하니 고문을 실시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문정대비가 대답하기를, “이것은 작은 사건이 아니니, 그는 그렇게 쉽사리 자백하지 아니할 것이다. 이덕응 등의 진술을 가지고 심문하라.” 하였다. 이리하여 이덕응의 진술에 의하여 이류를 심문하니, 이류는, “윤임이 아무리 신을 추대하려고 하였더라도 조정에서 쉽게 받아들이려고 하였겠는가?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 하고 주장하였다. 이어 압슬형(壓膝刑)을 실시하였으나 굴복하지 아니하였다. 이에 단근질을 모질게 하니, 이류는 고통을 견디지 못하여 거짓말로라도 자복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무어라고 말해야 될지를 몰라서 애를 쓰자, 취조관이 할 말을 하나하나 가르쳐 주어서, 그대로 자복했다. 그 공초에서, “윤임이 신에게 말하기를, ‘명종이 안질이 심하니, 어떻게 정사를 처리할 수 있겠느냐? 그러니 봉성군(鳳珹君)이나 그대 둘 중에서 임금이 되어야 할 것이다. 유관·유인숙이 모두 권력을 잡은 재상이므로, 조정에서 그 계획을 의논하더라도 모두 받아들일 것이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이리하여 <계림군 옥사>가 성립되어, 1545년 9월 계림군 이류는 군기시(軍器寺) 앞에서 거열형(車裂刑)에 처해졌다.
[성품과 일화]
계림군 이류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성품이 나약하고 결단성이 없었다. 학문을 좋아하고 문장을 곧잘 지었다. 부유한 환경에서 자라, 어려운 일을 당하여 자기 주견을 가지고 당당하게 행동하지 못하였다.
계림군 이류의 둘째부인은 연일정씨인데, 그 처남이 예조 정랑 정자와 정철이었다. 윤임·유관·유인숙이 체포된 뒤에도 계림군 이류가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고 있었으므로, 정랑 정자가 계림군에게 권유하기를, “권력을 잡은 나쁜 무리들이 윤임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고 하여도 아무런 죄목이 없으므로, 그대를 끌어들여 일을 꾸미려고 하는데, 그대는 왜 급히 서둘러 살 길을 도모하지 않는가? 멀리 떨어진 노복들의 집에 가서 숨어 있다가, 만일 사람들이 눈치채는 기미가 있거든, 또 다른 곳으로 옮겨 가면 될 것이다. 왕가의 노복들이 8도에 널려 있으니, 어디를 가든지 의식 걱정이야 있겠는가?” 하였다. 이때 계림군 이류는 반신반의하면서 처남의 의견을 선뜻 받아들이지 않았다.
계림군 이류는 그의 첩과 상의하였다. 그 첩이 말하기를, “보통 노복들도 벌을 주려 할 때 달아났다가 다시 잡히면, 그 죄가 갑절이나 무거워집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도둑을 맞았을 경우에 의심을 받던 사람이 달아나면, 꼭 그 사람을 진범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당신은 애당초 저지른 일이 없으니, 오히려 가만히 앉아서 죄를 받는다면, 죄도 가벼울 뿐만 아니라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겁니다. 만일 정씨의 말을 들으면, 아마도 달아났다가 잡힌 노복이나, 도둑질 혐의를 받고 도망친 사람과 같은 경우가 될까 염려됩니다.” 하자, 계림군 이류는, “네 말이 일리가 있다. 죄가 가벼우면 관직을 삭탈당할 것이고, 죄가 무겁다고 하더라도 귀양가는 정도일 터이니, 이리저리 숨어 다니면서 위험과 고생을 당하는 것보다 낫지 않겠느냐. 따라서 사태가 진정될 때까지 여기에 그대로 머물러 있겠다.” 하였다.
이튿날 정랑 정자가 그의 누이를 시켜서 급히 하인을 보내어 이류를 불러오게 하고 손뼉으로 등을 치면서 꾸짖기를, “사태가 이렇듯 긴박하게 돌아가는데, 어쩌자고 요망스런 여자의 말만 듣고 아무런 생각도 않고 있는가. 나방이가 촛불에 대드는 꼴인데, 뒷날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하고, 또 정자는 말하기를, “권력 잡은 간당들이 그대를 화(禍)의 근원으로 만들려고 하고 있다. 따라서 화근(禍根)이 없어지면 일을 꾸며낼 건더기가 없어질 것이다. 그대는 어찌하여 한편으로 어린 첩의 말만 듣고 천금같은 몸을 아낄 줄 모르는가?” 하니, 이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한 동안 멍하니 있다가, 하는 수 없이 삿갓을 쓰고 중으로 변장하여 도망하였다. 이때 그를 체포하러 갔던 사람들이 허탕을 치고 돌아오니, 모든 소론파 사람들은 그들의 계획대로 모든 일이 척척 들어맞아, 옥사(獄事)의 구실이 생기게 되었으므로 기뻐서 날뛰었다. 이때 사림파의 여론은 계림군 이류가 억울하다는 것은 모두 잘 알고 있었으나, 그가 굳이 망명하게 된 곡절은 어찌 된 영문인지 알지 못하였다.
[묘소와 신원]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신원동 능골마을에 위치한 월산대군 묘역 안에 있는데, 그 무덤의 좌우에 첫째부인 정창군부인(廷昌郡夫人) 죽산 안씨(竹山安氏)와 둘째부인 조천군부인(鳥川郡夫人) 연일 정씨가 함께 나란히 묻혀 있다. 봉분 앞에 묘표(墓表)가 있다. 그가 거열형에 처해지고 효수(梟首)당하여, 그 시신이 8도에 돌려졌으므로, 신원(伸寃)한 뒤에 두 부인의 무덤 가운데 가장(假葬)하였을 가능성이 많다. 그 후손들도 <계림군 옥사> 때 모두 함께 처형되었다.
원래 계림군 이류는 나이가 인종보다 14살이나 더 많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은 모두, “인종이 어찌 아들로 삼아서 세자로 세울 리가 있었겠는가?” 하고, 윤원형 일파가 이미 계획한 대로 거짓말로 죄를 얽고 허위 자백을 시켜서 처형하였다고 생각하였다. 사림파가 모두 동정하기를, “이런 비통한 일이 있을 수 있는가?” 하였는데, 선조가 즉위하여 사림파가 다시 정권을 잡자, 그 억울함을 거론하였다. 1577년(선조 10) 선조가 계림군 이류를 신원하고 관직을 복구시켰다.(『선조실록(宣祖實錄)』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