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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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형성(尹衡聖)

서지사항
항목명윤형성(尹衡聖)
용어구분인명사전
분야정치·행정가
유형인물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총론]
[1608년(선조 41)∼1676년(숙종 2) = 69세]. 조선 후기 현종~숙종 때 활동한 문신. 행직(行職)은 진주목사(晉州牧使)이다. 자는 경임(景任)이고, 호는 기기재(棄棄齋)이다. 본관은 남원(南原)이고, 주거지는 충청도 임천(林川)이다. 증조부는 내자시(內資寺) 판관(判官)윤청(尹淸)이며, 조부는 사옹원(司饔院) 참봉參奉)을 지내고 이조 참판(參判)에 추증된 윤민신(尹民新)이다. 아버지는 승지(承旨)윤길(尹*)이고, 어머니 전주이씨(全州李氏)는 이세량(李世良)의 딸이다. 윤형지(尹衡志)의 동생이다. 시남(市南) 유계(兪棨)와 가장 친한 사이였다.

[현종 시대 활동]
1662년(현종 3) 증광시(增廣試) 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55세였다.(『방목』) 늦은 나이에 급제하였으나, 성균관(成均館) 전적(典籍)을 거쳐 공조 좌랑(佐郞)이 되었고, 이듬해 병조 정랑(正郞)으로 승진되었다. 외직으로 나가서 함평 현감(咸平縣監)과 옥천군수(沃川郡守)를 지냈다. 1664년(현종 5)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이 되었다가, 사헌부(司憲府)로 옮겨서 지평(持平)·장령(掌令)으로 차례로 승진하였다. 그때 함경도관찰사 서필원(徐必遠)이 상소하여, 송시열(宋時烈)의 융통성 없는 고집을 비판하였는데, 대간(臺諫)의 관원 중에서 이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탄핵하지 않고 있다가, 성균관(成均館) 유생(儒生) 조해(趙楷)로부터 공격과 비난을 받아서 대간이 모두 인혐(引嫌)하여 사퇴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당시 서인은 송시열을 적극 지지하는 준론(峻論)과 서필원을 동정하는 완론(緩論)으로 나누어졌는데, 장령 윤형성은 이경휘(李慶徽)·유상운(柳尙運)과 함께 ‘완론의 3간(奸)’이라고 불리울 만큼 서필원을 지지하다가, 서인에 의하여 파면되었다.

1667년(현종 8) 사간원 헌납(獻納)에 임명되었고, 1668년(현종 9) 다시 사헌부 장령이 되어,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필선(弼善)을 겸임하였다. 외직으로 나가서 삼척부사(三陟府使)를 지냈다. 1672년(현종 13) 세자시강원 문학(文學)이 되었다가, 1673년(현종 14) 다시 사간원 헌납·사헌부 장령·사간원 사간(司諫)을 역임하였다.(『현종실록(顯宗實錄)』 참고.) 현종 시대 윤형성은 주로 양사(兩司)에서 봉직하면서, 송시열의 주장에 대한 서인 안의 준론과 완론의 갈등에서 송시열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를 가졌다.

[숙종 시대 활동]
1674년 8월 숙종이 즉위하자, 사헌부 집의(執義)가 되었다가, 좌천되어 진주목사로 나갔다. 그때 효종의 왕비 인선왕후(仁宣王后)가 돌아가자, 당시 살아있던 인조의 계비(繼妃) 자의대비(慈懿大妃) 조씨(趙氏)의 상복을 입는 문제를 놓고 <제 2차 예송(禮訟) 논쟁>이 벌어졌다. 집의 윤형성은 서인으로서 <제 2차 예송 논쟁>에서 송시열의 9개월 대공설(大功說)을 적극 지지하였다. 1년의 기년설(朞年說)을 주장하던 남인들이 승리하여 집권하자, 윤형성은 진주목사에 부임한 지 6개월 만에 파직되었다. 숙종이 즉위할 때 벌어진 <제 2차 예송 논쟁>에서 서인과 남인이 정권의 운명을 걸고 싸울 때 그는 서인의 앞장을 서서 송시열의 대공설을 적극 주장하고 나섰다.

그는 벼슬에서 쫓겨나 고향 임천으로 돌아가서, 시남 유계와 어울려 임천의 칠산(七山)을 유람하고, 시를 음영(吟詠)하면서 자연을 즐겼다. 유계는 임천 출신으로 이조 참판을 지냈고, 그의 맏아들이 윤형성의 둘째딸과 혼인하였다. 윤형성은 그의 집 주위에 대나무를 심고, 서재의 이름을 ‘백무(百無)’라고 하고, 그 편액(扁額)을 ‘기기재(棄棄齋)’라고 하였다. 낙향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병에 걸려서, 1676년(숙종 2) 7월 22일 임천의 집에서 돌아가니, 향년이 69세였다.

[현종 시대 서인의 준론과 완론]
인조 때 두 차례의 호란을 겪으면서 조야(朝野)에서 후금(後金)의 오랑캐에 대한 적개심이 고조되었는데, 후금(後金)이 1636년 청(淸)나라로 국호를 바꾸고, 1644년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북경(北京)으로 천도하자, 조선은 청나라의 칸[汗: 임금]을 천자(天子)로 받들고 <사대(事大)의 예>를 행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인조는 맏아들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죽자, 둘째아들 봉림대군(鳳林大君)을 세자로 삼았는데, 그가 효종(孝宗)이다. 효종은 사도세자 내외와 함께 심양(瀋陽)의 질관(質館)에서 오랫동안 볼모 생활을 하였으므로, 후금 오랑캐의 사정에 정통하였다. 효종은 송시열과 송준길(宋浚吉)을 등용하여 북벌(北伐) 계획을 세우고, 청나라를 공략할 준비를 하였다. 그러다가 효종이 승하하고, 현종이 즉위하자, 송시열이 정권을 잡고 남인 허적(許積)·허목(許穆) 등을 탄압하였다. 송시열의 독재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가 서인 안에서도 높았다.

1664년(현종 5) 2월 대사간에서 함경도 감사로 좌천된 서필원(徐必遠)이 상소하기를, “송시열은 유림(儒林)의 영수로서 의리에 투철한데, 복제(服制)에 대해서는 1년과 3년의 차이를 두고 천리(天理)나 인정(人情)이 같지 않다고 하면서, 원수를 갚는 데에는 전혀 차별을 두지 않고, 어떻게 원수마다 모두 다 보복하려고 계청(啓請)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과연 오랑캐와 금수(禽獸)의 세계로 빠지는 지름길이 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송시열이 대신 홍명하(洪命夏), 중신 허적(許積)··이일상(李一相) 등을 무차별 탄압하고 숙청한 것을 비난하였다. 그때 삼사(三司)에서 곧바로 서필원을 탄핵하지 않았는데, 삼사의 관원 중에서 서필원의 주장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서필원이 상소한 지 한 달이 지난 뒤에 그해 3월 성균관 유생(儒生) 조해(趙楷) 등이 상소하기를, “근래 서필원이 편벽된 견해를 가지고 유현(儒賢: 송시열)을 공격하였으니, 어찌 오랑캐와 금수의 세계로 빠지는 지름길이 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고, 서필원을 공격하고, 또 삼사(三司)에서 서필원을 논핵하지 않은 것을 비난하였다. 이에 대사간 김수흥(金壽興) 이하 양사의 관원들이 모두 인피(引避)하여 출사(出仕)하지 않았다. 그 뒤에 지평 이규령(李奎齡) 등이 먼저 논의를 제기하려고 하다가, 동료 박증휘(朴增輝)에게 저지당하였고, 정언 조성보(趙聖輔)가 뒤이어 의논을 제기하려고 하다가, 박세당(朴世堂)에게 저지를 당하였다. 또 성균관 유생 윤헌(尹攇) 등이 소장을 올리자, 현종이 특별히 그 소두(疏頭)를 부황(付黃: 결재판에 누른 딱지를 붙이는 것)하라고 명하였다. 이리하여 성균관 유생들이 권당(捲堂: 동맹 휴학)하는 사태까지 벌어져서, 여러 날 성균관을 비웠다. 뒤이어 이규령·조성보 등을 북방의 고을로 좌천시켰다. 이때 조정에서 윤형성과 조원기(趙遠期)를 특별히 대간(臺諫)의 관직에 임명하여 진정하는 분위기를 만들려고 하였으나, 대간에서 서필원을 지지하는 분위기를 바꿀 수는 없었다. 현종 시대 서인이 이미 강경파와 온건파로 갈라져 준론(峻論)완론(緩論)으로 나누어졌는데, 당시 <준론>은 모두 송시열(宋時烈)을 유종(儒宗)으로 받들고 청론(淸論)이라고 자부하는 경경파 인사들이었고, <완론>은 서필원의 상소에 일리가 없지 않다고 하면서, 양자 간을 조정하려고 하는 온건파 인사들이었다. 이때부터 서인의 강온 양파는 날로 서로 틈이 벌어졌다. 1683년(숙종 9) 송시열과 그 제자 윤증(尹拯)이 서로 충돌하자, 마침내 송시열을 지지하는 노론(老論)과 윤증을 지지하는 소론(少論)으로 나누어졌다. 윤형성이 죽은 뒤 7년만에 노론·소론으로 분당되었는데, 그의 절친한 친구 유계는 노론이 선봉장이 되어, 소론 인사들을 공격하였다.

[성품과 일화]
윤형성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가. 그는 머리가 총명하고 기발하였으며, 기상이 빼어났다. 담론을 길게 잘하였고, 한가함을 좋아하지 않았다. 소년 시절에 공부를 즐겨 하지 아니하였는데, 형 윤형지가 동생을 자극시켜서 학문에 분발하도록 타이르기를, “누구의 아들 아무개는 너와 같은 나이인데, 지금 바야흐로 무슨 책을 읽는다.” 하였다. 그는 바로 그날부터 공부하기를 청하였다. 이때부터 문리가 빠르게 트여서 많은 서적을 섭렵하고, 문사(文思)가 민첩하여 모든 시키는 일을 제때에 재빠르게 행하였다.

효도와 우애가 두터워서, 어버이를 미처 제대로 섬기지 못한 것을 평생토록 애통하게 여겼으며, 말이 거기에 미치면 반드시 눈물을 흘렸다. 집을 떠나 멀리 있을 때 부모의 기일(忌日)을 만나면, 반드시 제사 자리를 마련하고 망곡(望哭)하였다. 형 윤형지를 아버지처럼 섬기고 고을을 다스릴 적에 맛좋은 음식이 있으면 한결같이 형에게 보냈으며, 비록 집에 있을 때라도 계절마다 의복을 만들어 반드시 형에게 바쳤다. 공관(公館)에다 고아와 과부를 데려다가 돌봐주면서 은혜와 예절을 다하였고, 빈궁한 사람을 두루 구휼하면서 자기에게 돈이 있는지 없는지 따지지 않았다. 간혹 임금에게 그 사실을 상소하라고 권하는 자의 말을 듣게 되면, 그는 웃으면서, “내가 성질이 졸렬하고 아무 계책도 없어서, 한때 바람같이 떠돌아다니는 것이 마치 물에 뜬 마름 같은데, 어느 틈에 자손을 위한 계책을 마련하겠는가?” 하였다. 그가 호남 지방에 오랫동안 거처하면서 고기잡이와 염전(鹽田)을 하면서 살았는데, 일찍이 자기가 다른 사람과 다르다고 생각하지 아니하였다.

시남 유계와는 같은 임천에 살면서 어릴 때부터 가장 친한 지기지우(知己之友)였다. 두 사람은 아들과 딸을 낳으면 혼인시키기로 약속하여, 마침내 그의 둘째딸을 유계의 맏아들 유명윤(兪命胤)에게 시집보냈다. 두 사람이 벼슬하지 않고 강호(江湖)에 묻혀서 살 때 임천의 칠산을 찾아다니면서 시(詩)를 음영(吟詠)하였다. 대문 앞에 국화를 옮겨 심고, 대나무를 심어서 세상 밖에서 살아가는 운치가 있었다. 나중에 유계가 먼저 벼슬길에 나아가서 조정으로 들어가서, 그에게 음직(蔭職)을 제수하려고 하니, 그는 서찰로써 책망하여 이를 중지시켰다. 늙은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라서 사헌부의 관직을 두루 거쳤는데, 그 착하고 착하지 못한 것을 하나같이 자기 뜻으로 결단하면서, “흰머리가 나서 임금님 가까운 반열에 있으니, 분수가 이미 넘었다. 다만 앞으로 나갈 따름인데, 어찌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볼 수 있겠는가.”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서인의 영수 송시열을 비판하는데 앞장섰던 것이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금천(衿川) 신림동(新林洞)의 선영(先塋)에 있는데,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송자대전(宋子大全)』 권179 「기기재 윤공형성 묘갈명(棄棄齋尹公衡聖墓碣銘)」)

부인은 전주이씨(全州李氏)는 이사민(李師閔)의 딸인데, 4남 4녀의 자녀를 두었다. 장남은 윤뢰(尹耒)이고, 차남은 윤래(尹來)이며, 3남은 윤간(尹柬)이고, 4남은 윤동(尹東)이다. 장녀는 박세휘(朴世彙)의 처가 되었고, 차녀는 홍문관 수찬(修撰) 유명윤의 처가 되었고, 3녀는 진사 김성우(金盛遇)의 처가 되었고, 4녀는 의정부 사인(舍人) 박태우(朴泰宇)의 처가 되었다. 측실에서 난 아들이 윤속(尹束)이다.

[참고문헌]
■ 『현종실록(顯宗實錄)』
■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문곡집(文谷集, 金壽恒)』
■ 『농암집(農巖集)』
■ 『송자대전(宋子大全)』
■ 『약천집(藥泉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열하일기(熱河日記)』
■ 『시남집(市南集)』
■ 『송곡집(松谷集)』
■ 『노서유고(魯西遺稿)』
■ 『규창유고(葵窓遺稿)』
■ 『문곡집(文谷集)』
■ 『문정공유고(文貞公遺稿)』
■ 『직재집(直齋集)』
■ 『도곡집(陶谷集)』
■ 『연암집(燕巖集)』
■ 『귀암집(歸巖集)』
■ 『손암집(損庵集)』
■ 『양와집(養窩集)』
■ 『모주집(茅洲集)』

■ [집필자] 윤경수, 이현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