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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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섬(尹暹)

서지사항
항목명윤섬(尹暹)
용어구분인명사전
분야정치·행정가
유형인물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총론]
[1561년(명종 16)∼1592년(선조 25) = 32세]. 조선 중기 선조 때 활동한 문신. 행직(行職)은 홍문관(弘文館) 교리(敎理)이고, 봉작(封爵)광국공신(光國功臣) 2등, 용성부원군(龍城府院君)이며, 증직(贈職)은 영의정이다.자는 여진(汝進)이고, 호는 과재(果齋)이다. 본관은 남원(南原)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증조부는 목사(牧使)윤시영(尹時英)이고, 조부는 증 영의정 윤징(尹澄)이다. 아버지는 중추부(中樞府) 지사(知事)를 지내고 찬성(贊成)에 추증된 용릉군(龍陵君) 윤우신(尹又新)이며, 어머니 문화 유씨(文化柳氏)는 유문윤(柳文潤)의 딸이다.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문인이다. 남양 부사 윤계(尹棨), 삼학사(三學士) 윤집(尹集), 윤유(尹柔)의 조부이다.

[선조 시대 활동]
1583년(선조 16) 별시(別試) 문과(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23세였다.(『방목』) 처음에 승문원(承文院) 부정자(副正字)에 보임되었다가, 홍문관 정자(正字)로 옮겼다. 참하관(參下官)의 여러 관직을 거쳐, 형조 좌랑(佐郞)에 임명되었는데, 소송 사건을 공평하고 신속하게 처리하여, 형옥(刑獄)이 적체되지 않았다.(『송자대전(宋子大全)』 권159「과재 윤공섬 신도비명(果齋尹公暹神道碑銘)」 참고, 이하 「신도비명」이라 약칭함.)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을 거쳐 헌납(獻納)으로 승진되었고, 또 사헌부 지평(持平)이 되었는데, 그는 대간(臺諫)이 되어 어떤 일이든지 잘못된 일에 대해서는 탄핵하는 것을 기피하지 않았다. 이때 율곡 이이와 우계(牛溪) 성혼(成渾)이 동인들의 공격을 받아서 어려움을 당하였다. 윤섬은 대간 중에 서인 동료들과 함께 힘을 합하여 두 사람을 변명하다가, 동인으로부터 탄핵을 받아서 벼슬에서 쫓겨나서 오랫동안 집에서 은거하였다. 중봉(重峰) 조헌(趙憲)이 상소하기를, “이항복(李恒福)과 윤섬 등이 이이와 성혼이 어질고 옳다는 의논을 제기하였다가, 여러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당하였습니다.” 하고, 용서해 주기를 간청하였다.(「신도비명」 참고.)

1587년(선조 20) 사은사(謝恩使) 유홍(兪泓)의 서장관(書狀官)에 임명되어 중국 명(明)나라 북경(北京)에 갔다. 다음해 돌아올 때 정사 유홍과 서장관 윤섬이 피눈물을 흘리면서 하소연하여, 명나라 예부(禮部)에서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가계를 수정한 『대명회전(大明會典)』을 비밀리에 얻어 가지고 왔다. 이 소식을 들은 선조는 대단히 기뻐하여 몸소 태평관(太平館)으로 나가서, 사신 일행을 맞이하여 잔치를 베풀어 그 노고를 위로하였다. 또 종묘에 고유제(告由祭)를 지내고, 사은사 일행에게 모두 벼슬을 올려주고, 노비와 전토(田土)를 각각 내려 주었다. 이때 윤섬은 사헌부 지평에서 장령(掌令)으로 승진하였다.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의 옥사>가 일어나자 좌의정 정철(鄭澈)이 위관(委官)이 되어 옥사를 다스렸는데, 동인(東人)들을 이 사건의 배후 세력으로 지목하여 이발(李潑)·최영경(崔永慶) 등을 죽이고 동인 1천여 명을 숙청하였다. 이때 호남 출신 성균관(成均館) 유생(儒生) 정암수(丁巖壽)가 상소하여 <정여립 옥사>의 배후 인물로서 동인의 유력 인사를 거론하다가, 선조의 뜻을 거슬러 하옥되었다. 당시 대간이었던 장령 윤섬을 비롯하여 대사헌(大司憲)최황(崔滉), 집의 성영(成泳) 등과 대사간(大司諫) 이증(李增), 사간 오억령(吳億齡), 헌납 백유함(白惟咸) 등이 우의정 정철의 사주를 받고 정암수를 구원하였다. 1590년(선조 23) <종계변무(宗系辨誣)>에 공로가 있는 사람 19명을 광국공신(光國功臣)으로 책훈하였는데, 윤섬은 광국공신 2등에 녹훈되고 용성 부원군(龍城府院君)에 봉해졌다. 1591년(선조 24) 홍문관 교리에 임명되었는데, 동인이 집권하자 일찍이 성균관 유생 정암수를 구원해준 윤섬을 비롯하여 최황·성영 등과 이증·오억령·백유함 등을 탄핵하여 모두 파면시켰다.(『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참고.)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서, 왜적이 파죽지세로 북상하자, 당황한 조정에서는 명장 이일(李鎰)을 순변사(巡邊使)로 임명하고 사복시(司僕寺) 정(正) 윤섬과 홍문관 교리 박지(朴箎)를 그 종사관(從事官)으로 삼아, 경상도 상주(尙州)에서 왜적을 방어하게 하였다. 당시 이일은 신립(申砬)과 함께 함경도에서 북병사(北兵使)로서 오랑캐의 침입을 막아서 명장으로 칭송되었으므로, 선조는 이 싸움에서 이일이 반드시 승리하리라고 굳게 믿었다. 순변사 이일은 ‘제승방략(制勝方略)’의 오랑캐를 막는 방어 체제를 이용하여 남방의 왜구를 막는 데에 적용하려고 시도하였다. 제승방략 방어 체제는 중앙에서 파견되는 대장이, 현지의 군민(軍民)을 동원하여 3군 체제를 갖추어 그 지리 지형을 이용하여 적과 싸우는 방법이었다. 순변사 이일과 종사관 윤섬 등이 급히 상주로 달려갔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 왜적은 이미 상주를 공략하였는데, 경상도 여러 고을에서 차출된 군사들은 대장이 없어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이일의 일행이 상주에 도착하여,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여 상주 북쪽 시루못 위에 진을 쳤다가, 도리어 왜구의 공격을 받았다. 1592년(선조 25) 4월 25일 종사관 윤섬·박지 등은 전사하고, 대장 이일은 단기로 도망하여 3도 순변사 신립이 있는 충주(忠州)로 갔다. 이 때 윤섬의 나이는 겨우 32세였다.

윤섬과 그의 손자 윤계·윤집의 유고를 모은 문집 『삼절유고(三節遺稿)』에 그가 지은 시 22수와 대책(對策) 1편이 실려 있다.

[<종계변무>와 윤섬]
1394년(태조 3년) 명나라 흠차내사(欽差內使) 황영기(黃永奇) 등이 조선에 와서 해악(海岳)과 산천(山川) 등의 신에게 고유제(告由祭)를 지냈는데, 그 축문(祝文)을 가운데, “고려 배신(陪臣) 이인임(李仁任)의 후사(後嗣) 이성계”라는 구절이 있었다. 명나라 태조 때 편찬된 『대명회전』에 이성계가 고려 말의 권신(權臣) 이인임의 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인임은 고려의 권신으로서 전횡하다가, 이성계에게 죽음을 당한 사람이다. 고려 말에 <위화도(威化島) 회군> 이후에 이성계 일파가 정권을 잡자, 고려의 이초(李初)와 윤이(尹彛)가 명나라에 몰래 들어가서, 태조 주원장(朱元璋)에게 간청하기를, “고려의 간신 이인임의 아들 이성계가 고려왕을 죽이고 국권을 찬탈하였으므로, 고려 왕조를 구원해 달라.”고 하였다. 그 뒤에, 조선의 이성계의 가계[宗系]가 명나라 『태조실록(太祖實錄)』과 『대명회전』에 그대로 기록되었다. 조선은 태종 때부터 선조 때까지 모두 20~30 차례에 걸쳐 주청사(奏請使)와 사은사를 보내어 그 잘못된 무고(誣告)를 변명하고[辨誣] 그 기록을 고쳐달라고 주청하였는데, 이것을 <종계변무사(宗系辨誣使)>라고 한다.

조선에서 종계변무사(宗系辨誣使)를 보내어 시정해 달라고 주청하였으나, 그때마다 명나라의 예부에서는 명나라 태조 주원장의 성훈(聖訓)이라고 하여 고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선조가 즉위하여 더욱 적극적으로 종계변무사를 여러 차례 파견하여 이를 시정하도록 명나라에 요구하였다. 이것은 명종·선조 때 사림파(士林派)가 집권하면서 대의(大義) 명분(名分)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고, 마침 명나라에서 『대명회전』을 증보 편찬하여 속간(續刊)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573년(선조 6) 이후백(李後白)·윤근수(尹根壽) 등을 보내어 종계변무에 관한 수정을 속간하는 『대명회전』에 넣어 달라고 주청하였다. 1575년(선조 8) 사은사 홍성민(洪聖民)이 북경에 가서 사은하고 종계변무를 새로 만드는 『대명회전』에 넣어 달라고 주청하였다. 1577년(선조 10) 주청사 황림(黃琳)이 북경에 가서새로 만드는 『대명회전』에 전후 종계변무의 교섭 과정을 상세히 기록해 달라고 주문(奏聞)하였다.

1580년(선조 13) 성절사(聖節使) 이증이 북경에서 돌아왔는데, 명나라 예부에서 자문(咨文)을 보내기를, “본국의 종계변무에 관한 일을 이미 새로 편찬하는 『대명회전』에 넣어 특별히 오명(汚名)을 씻도록 하였으니, 지나치게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고 하였다. 조선이 여러 차례 주청사를 보내어 끈질기게 교섭한 결과, 명나라 예부에서 새로 편찬하는 『대명회전』에서 이미 종계변무를 수정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선조는 이를 믿지 못하여 새로 편찬된 『대명회전』을 직접 보고 확인하기 전까지 계속 주청사를 파견하여 새로 간행된 『대명회전』 한 질을 보내주도록 거듭 촉구하였다. 이때 명나라 예부에서 답변하기를 “조속히 반포하여 귀국에 보내달라는 한 가지 일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새로 『대명회전』의 큰 책을 만드는 일은 강목(綱目)이 대단히 복잡해서 편찬하고 수정하는 데에만 몇 년이 걸리므로, 조석 간에 실마리를 풀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또 『대명회전』이 완간되더라도, 그 책의 완질(完帙)을 황제에게 바쳐서 어람(御覽)이 끝난 뒤에야 비로소 중외에 반포되는 것입니다.” 하였다. 1581년(선조 14년)에 주청사 김계휘(金繼輝)를 보내어 완성된 『대명회전』을 요청하니, 명나라 예부 상서(尙書) 서학모(徐學謨)가 말하기를, “조선국(朝鮮國)이란 항목 아래에 이미 본국 종계가 무고를 당하게 된 경위를 상세히 기록하였습니다. 만약 『대명회전』이 완성되면 곧 원하는 대로 귀국에 보내드릴 것입니다.” 하고, 김계휘 인편에 한림원(翰林院)에서 찬사(撰寫)한 가본(假本)을 조선으로 부쳐서 보내왔다. 1584년(선조 17) 주청사 황정욱(黃廷彧)이 역관홍순언(洪純彦) 등과 함께 명나라에 가서, 이미 완간된 『대명회전』을 반포해서 조선에도 한 질을 보내달라고 요청하니, 명나라 신종(神宗) 만력제(萬曆帝)가 약속하기를, “새로운 『대명회전』이 반포되는 날 그대 나라로 보낼 것이다.” 하였다. 1588년(선조 21) 주청사 유홍이 서장관 윤섬과 함께 명나라에 가서 『대명회전』을 반포하여 보내주기를 간청하니, 예부에서 완간된 『대명회전』을 아직 황제가 열람하지 않았다고 하여 이를 어렵게 여겼다. 이에 정사 유홍과 서장관 윤섬 등이 머리를 조아리고 피눈물을 흘리니, 만력제가 감격하여 칙서(勅書)를 내리고 경서(經書)를 하사하였는데, 이때 예부에서 반포되기 전에 비공식적으로 『대명회전』 한 질을 조선 사신에게 주었다. 이에 선조가 너무나 기뻐하면서, “내가 이제 조상들을 뵐 면목이 생기게 되었다.” 하고, 선조가 몸소 사신 일행을 맞이하여 태평관에서 잔치를 베풀었으며, 또 황제가 하사한 망의(蟒衣)를 입고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1590년(선조 23) 사은사 윤근수가 북경에 다녀왔다. 이 때 명나라 신종 만력제가 반포된 『대명회전』 전부(全部)를 공식적으로 조선에 보내왔다. 이리하여 2백년 동안 끌어오던 <종계변무>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었다. 1644년(인조 22)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淸)나라가 북경에 천도하자, 세폐(歲幣) 등 새로운 문제가 외교 현안으로 등장하였다. 1590년(선조 23) <종계변무>에 공훈이 많은 주청사 정사·부사·서장관과 역관 등 19명을 광국 공신으로 책훈하였데, 윤섬은 광국공신 2등에 책훈되고 용성군에 봉해졌다. 그때 윤섬의 나이가 겨우 30세였다.

[성품과 일화]
윤섬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신도비명」참고.) 그는 용모가 뛰어나고 특이하며, 성품이 어질고 후덕하며, 마음가짐이 온화하고 평안하였다. 사람들과 더불어 아무런 흉허물 없이 지내서 자기 속에 쌓인 감정을 남에게 환히 보이었다. 피부가 옥과 같이 맑고 눈빛같이 희고, 정신이 물속의 달[水月]과 같이 빛나서, 그가 조정을 출입하면, 사람들이 모두 눈여겨보았다. 또 총명함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서, 눈에 한번 본 것은 어김없이 기억하고, 많은 글을 널리 읽고 언제나 옛 충신들을 사모하였다. 그러므로 실천함이 독실하고, 지조가 견고하여 외물에 그 마음이 끌리는 바가 없었다.

1588년( 선조 21) 주청사 유홍과 서장관 윤섬 등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명나라 예부에 정문(呈文)을 바치고, 새로 편찬한 『대명회전』을 내려주도록 청하기를, “이것을 가지고 돌아가서 과군(寡君)에게 보고하지 못한다면 차라리 이곳에서 뼈를 묻겠습니다.” 하고, 유홍과 윤섬 등이 머리로 땅을 짓찧어서 피가 흐르니 예부에서 즉시 황제에게 보고하였다. 중국 신종 만력제가 이를 가상하게 여겨서 특별히 다른 나라보다 먼저 『대명회전』을 반강(頒降)하라고 명하고, 칙명(勅命)을 내리기를, “배신(陪臣)들이 지성으로 간청하므로 지금 빨리 『대명회전』을 보내주는 것이다.” 하였다. 이것은 반포하기 전에 비공식적으로 반사(頒賜)하는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선조는 크게 기뻐하여 교외로 나가서 칙서를 맞이하고, 그 공로에 대한 상사(賞賜)를 매우 후하게 내렸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왜적이 파죽지세로 북상하니, 처음에 이일이 순변사에 임명되어 윤섬의 친구를 그 종사관으로 삼았으므로, 그 친구가 이일을 따라 가게 되었다. 그때 윤섬이 이일에게 부탁하기를, “이 친구는 늙은 어머니가 계시고 형제가 없으니, 마땅히 그 직책을 면해주어야 옳을 것입니다.” 하니, 이일이 그 친구를 면해 주고, 마침내 윤섬을 그 자리에 대신 임명하였다. 이때 윤섬은 사복시 정으로 있으면서 지제교(知制敎)를 겸임하였다. 윤섬의 동생 윤탕(尹逿)이 울면서 만류하기를, “형님은 어찌해서 다른 사람의 어머니는 불쌍하게 여기면서 우리 부모는 생각하지 않습니까?” 하니, 윤섬이 말하기를, “구차하게 면하는 것은 의리가 아니다. 또 부모를 봉양하는 데에는 네가 있지 않으냐?” 하였다. 이때 아버지 윤우신이 중국에 사신으로 가서 돌아오지 아니하였는데, 윤섬이 어머니 방으로 들어가서 이별을 고하니, 어머니가 울면서, “네가 나를 버리고 죽을 땅으로 가느냐?” 하므로, 윤섬이 위로하여 근심을 풀어 드리고, 말하기를, “국가에 급한 난리가 났으므로, 부모의 은정과 국가의 의리를 다함께 온전하게 지킬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였다.

순변사 이일이 흩어진 군사들을 수습하여 상주 고을 북쪽 시루못 위에 진을 쳤다. 종사관 윤섬과 박지도 그 막하(幕下)에서 군사를 지휘하였는데, 왜적의 무리가 갑자기 공격해 오니, 대장 이일이 뛰어가면서 윤섬에게 이르기를, “개처럼 죽는다는 것은 무익한 것이다. 그대도 나를 따라오기를 바란다.” 하고 도망치니, 우리 군사들은 드디어 무너져 흩어졌다. 그때 윤섬이 말하기를, “장차 임금을 뵈올 면목이 없다. 남아(男兒)가 나라를 위하여 직분을 다하여 죽을 뿐이다.” 하고, 드디어 박지와 함께 왜적과 싸우다가 함께 전사하였다. 그 뒤에 동생 윤탕이 시루못에 가서 형의 시체를 찾았으나, 결국 찾지 못하였다.


『선조수정실록』을 보면, “1592년(선조 25) 4월 왜적이 상주에 침입했는데, 이일의 군사가 패주하였다. 왜적이 마침내 크게 집결하여 포환(砲丸)을 일제히 쏘아대며 좌우에서 포위하니, 군인들이 겁에 질려 활을 쏘면서도 시위를 한껏 당기지도 못했다. 군대가 크게 소란스러워지자, 이일은 곧바로 말을 달려서 도망하였으며, 군사들은 모두 섬멸되었다. 종사관 윤섬과 홍문관 교리 박지, 방어사의 종사관 병조 좌랑 이경류(李慶流), 판관 권길(權吉) 등이 모두 죽었다. 이일은 군관 한 명, 노자(奴子) 한 명을 데리고 맨몸으로 도망해서 문경(聞慶)에 이르러 장계를 올려서 대죄(待罪)하다가, 다시 조령(鳥嶺)을 넘어서 신립의 군진으로 갔다.” 하였다.

[묘소와 비문]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묘소는 경기도 광주(廣州) 거북내 냉정리에 있는데, 윤섬의 유해(遺骸)를 찾을 수 없었으므로, 아버지 윤우신이 속례(俗例)에 따라 그의 의관(衣冠)을 가지고 장례를 지냈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신도비명(神道碑銘)과 시장(諡狀)이 남아 있다.(『송자대전(宋子大全)』 권159「과재 윤공섬 신도비명(果齋尹公暹神道碑銘)」· 권202 「과재 윤공섬 시장(果齋尹公暹諡狀)」) 나라에서 영의정에 증직하고, 그 집에 정려(旌閭)하였다. 1792년(정조 16) 상주에서 충신 윤섬·이경류·박지 등이 싸우다가 죽은 곳에 제단을 세워 충신의사단(忠臣義士壇)이라 이름하고, 비를 세워 그 충절을 기리었다.(『정조실록(正祖實錄)』 참고.)

부인 원주원씨(原州元氏)는 군수 원경심(元景諶)의 딸인데, 자녀는 1남을 두었다. 외아들 윤형갑(尹衡甲)은 현감(縣監)을 지냈다. 맏손자가 남양부사 윤계이고, 둘째손자가 삼학사 윤집이다.

남양부사 윤계는 <병자호란(丙子胡亂)>가 일어나자, 군사를 모집하여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가 근왕(勤王)을 하려다가 청(淸)나라 군사에게 붙잡혔으나, 굴복하지 않고 처절하게 대항하다가 순절하였다. 삼학사 윤집은 척화(斥和)를 주장하다가 청나라에 끌려가서 죽음을 당한 삼학사의 한 사람이다. 손자 윤계·윤집 형제는 어릴 때부터 정문(旌門)한 집에서 자라면서, 임진왜란 때 순절한 할아버지 윤섬의 충절을 이어받으려고 결심하였다. 과연 충신의 집안에서 충신이 나고, 효자의 집안에서 효자가 난다는 말이 윤섬과 그 손자 윤계·윤집이 증명하였다. 그 후손들이 세 사람의 유고를 편집하여 『삼절유고』를 간행하였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숙종실록(肅宗實錄)』
■ 『정조실록(正祖實錄)』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보감(國朝寶鑑)』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삼절유고(三節遺稿)』
■ 『송자대전(宋子大全)』
■ 『계갑일록(癸甲日錄)』
■ 『기재사초(寄齋史草)』
■ 『기축록(己丑錄)』
■ 『난중잡록(亂中雜錄)』
■ 『농암집(農巖集)』
■ 『상촌집(象村集)』
■ 『서애집(西厓集)』
■ 『시정비(時政非)』
■ 『아계유고(鵝溪遺稿)』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유천차기(柳川箚記)』
■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
■ 『혼정편록(混定編錄)』
■ 『홍재전서(弘齋全書)』
■ 『검간집(黔澗集)』
■ 『경산집(經山集)』
■ 『계은유고(溪隱遺稿)』
■ 『고담일고(孤潭逸稿)』
■ 『낙애유고(洛涯遺稿)』
■ 『남계집(南溪集)』
■ 『담인집(澹人集)』
■ 『문월당집(問月堂集)』
■ 『미암집(眉巖集)』
■ 『백졸재유고(百拙齋遺稿)』
■ 『사류재집(四留齋集)』
■ 『선원유고(仙源遺稿)』
■ 『소재집(穌齋集)』
■ 『송강집(松江集)』
■ 『송당집(松塘集)』
■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
■ 『은봉전서(隱峯全書)』
■ 『중봉집(重峰集)』
■ 『직암집(直菴集)』
■ 『하당집(荷塘集)』

■ [집필자] 윤경수, 이현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