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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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계(尹棨)

서지사항
항목명윤계(尹棨)
용어구분인명사전
분야정치·행정가
유형인물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총론]
[1603년(선조 16)∼1636년(인조 14) = 34세.] 조선 중기 인조 때 활동한 문신. 행직(行職)은 남양부사(南陽府使)이고,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자는 신백(信伯)이고, 호는 신곡(薪谷)이다. 본관은 남원(南原)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증조부는 중추부(中樞府) 지사(知事)를 지내고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된 윤우신(尹又新)이며, 조부는 홍문관(弘文館) 교리(校理)를 지내고 영의정에 추증된 용성 부원군(龍城府院君) 윤섬(尹暹)이다. 아버지는 서흥현감(瑞興縣監) 윤형갑(尹衡甲)이고, 어머니 창원 황씨(昌原黃氏)는 관찰사(觀察使)황치경(黃致敬)의 딸이다. 윤유(尹柔)와 삼학사(三學士) 윤집(尹集)의 형이다.

[인조 시대 활동]
1624년(인조 24) 사마시(司馬試)에 진사(進仕)로 합격하였다. 1627년 후금(後金) 군사가 조선을 침략하여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났다. 1616년 만주에서 건국한 후금은 중국 본토로 진출하여 명(明)나라를 정복하려고 하였다. 당시 조선에서는 향명배금(向明排金) 정책을 표방하였으므로, 후금의 칸[汗] 홍타지는 그 배후를 위협하는 조선을 먼저 정복하여 후환을 없앨 필요가 있었다. 1627년(인조 5) 베이러[貝勒: 왕] 아민(阿敏)에게 3만 명의 기병을 이끌고 조선을 정벌하게 하였다. 아민은 사르호 싸움에서 후금에 항복한 강홍립(姜弘立) 등 조선인을 길잡이로 삼아 압록강을 건너 의주(義州)를 공략하고, 용천(龍川)·선천(宣川)을 거쳐 청천강(淸川江)을 넘어, 평양을 점령하고 황주(黃州)를 공격하였다. 조선에서는 장만(張晩)을 도원수(都元帥)로 삼아 싸웠는데, 평산(平山)에서 개성(開城)까지 후퇴를 거듭하였다. 당시 평안도와 황해도 양서지방(兩西地方)의 관리들은 성을 버리고 도망하였고, 인조는 조신(朝臣)들을 거느리고 강화도(江華島)로 피난하였다. 황주에 이른 후금의 아민은 부장 유해(劉海)를 보내어 조선에 강화(講和)할 것을 요구하였다. 당시 조선은 강화도의 수비조차 어려운 지경이었다. 조정의 분위기는 그저 수치를 참고 그들의 군사행동을 늦추고자 하는데 있었으므로, 강화에 대한 논의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이때 권신(權臣) 최명길(崔鳴吉)이 홀로 강화의 불가피함을 역설함으로써 강화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는데, 이때윤계는상소를 올려 강화에 반대하는 척화(斥和)를 주장하였다.

1627년(인조 5) 정시(庭試) 문과(文科)의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에 보임되었다가, 성균관(成均館) 전적(典籍)을 거쳐, 형조 좌랑(佐郞)이 되었다. 외직으로 강진현감(康津縣監)으로 나갔다가, 내직으로 들어와서 예조 좌랑이 되었다. 1629년(인조 7)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이 되었다가, 이조 좌랑으로 옮겼다. 1630년(인조 8) 사간원 헌납(獻納)이 되었다가 다시 이조 좌랑이 되어 춘추관(春秋館) 기사관(記事官)을 겸임하였고, 홍문관 수찬(修撰)으로 옮겼다. 1631년(인조 9) 홍문관 부교리(副校理)로 승진하였다가, 이조 정랑(正郞)이 되었고, 시재 어사(試才御史)로 전라도에 파견되었다.

1633년(인조 11) 어머니의 상(喪)을 당하여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고 상례를 끝마쳤다. 1635년(인조 13) 홍문관 교리가 되고 이어 응교(應敎)로 승진하였으며, 암행어사(暗行御史)로 경상도 고을을 염문(廉問)하였다. 1636년(인조 14) 아버지를 봉양하기 위하여 외직으로 나가기를 자청하여 남양부사에 임명되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서, 인조가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가서 45일 동안 청(淸)나라 군사와 싸웠다. 그는 임금을 돕기 위하여 남한산성으로 가다가, 청나라 군사에게 사로잡혀 홍타지 앞에 끌려갔다. 무릎을 꿇지 않고 버티다가 1636년 12월 27일 청나라 군사의 칼에 난도질당하여 돌아갔는데, 향년이 겨우 34세였다.

그가 죽고 난 뒤에 후손들이 그와 할아버지 윤섬과 그의 동생 윤집의 유고를 모아서 편집하여 『삼절유고(三節遺稿)』를 간행하였다.

[병자호란과 윤계]
1636년(인조 14) 12월 청나라 태종(太宗) 홍타지가 직접 기병(騎兵) 10만 명을 거느리고 안주(安州)에서 조선의 정병(精兵)을 격파하고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서울에 들이닥쳤다. 인조는 강화도로 피난가려고 하였으나, 길이 청나라 군사에게 막혀 광주(廣州)의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갔다. 그때 사방에서 근왕병(勤王兵)이 일어났으나, 대열이 제대로 정비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서로 연합하여 싸우지 못하여, 청나라 군사의 기습을 받고 지리멸렬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서 서울이 함락될 무렵에 마침 윤계는 충청도 보은(報恩)에서 셋째부인 김씨(金氏)에게 장가를 들고 있었다. 김씨는 현감 김덕민(金德民)의 둘째딸이었다.(『백호전서(白湖全書)』 권19 「김덕민 묘지명」참고.) 장가드는 날 저녁에 청나라 군사가 서울로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이튿날 아침에 날이 밝기도 전에 말을 몰아서 4백여 리를 달려서 남양군(南陽郡)에 다다랐다. 그러나 인조는 벌써 남한산성으로 들어가서 성문을 닫아버렸고, 청나라 군사들은 포위망을 구축하고 서로 맞서 싸우고 있어서 성 안으로 들어 갈 수가 없었다. 그는 여러 사람들 앞에서 크게 통곡하며 충의(忠義)로써 오랑캐와 싸우자고 격려하니, 감동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에 뜻을 같이 하는 사대부(士大夫)들과 함께 흩어진 군사를 소집하여 근왕병을 모집하여 남한산성으로 들어가려고 모의하였는데, 청나라 에게 항복한 박이치(朴以致)라는 자가 이것을 청나라에 밀고하였다. 청나라 군사들이 갑자기 습격하여 우리 군사들이 모두 궤멸(潰滅)되고, 윤계는 결국 사로잡히고 말았다. 청나라 장수가 태종 홍타지에게 끌고 가서 무릎을 꿇으라고 그를 핍박(逼迫)하였으나, 그는 꾸짖기를, “내 머리를 자를 수 있을지언정 내 무릎을 꿇리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였다. 청나라 장수가 그를 대부도(大阜島)로 끌고 가서 그를 구슬렸으나, 그는 다시 장수를 꾸짖기를, “죽어도 너희들에게 복종하지 않는다. 빨리 나를 죽여라.” 하였다. 청나라 장수가 더욱 화가 나서 온몸을 난도질하여 죽이니, 온전하게 남아있는 살점이 하나도 없었지만, 그는 난도질당하여 죽어가면서도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청나라 장수를 계속 꾸짖었다고 한다.(『청음집(清陰集)』 권31 「남양부사 윤공계 묘갈명(南陽府使尹公棨墓碣銘)」 참고, 이하 「묘갈명」이라 약칭.)

1755년(영조 31) 12월 영조가 예조 판서에게 <병자호란>에서 순절한 사람들을 나누어 뽑아서 그 후손을 포상하고 제사를 지내도록 명하였는데, 예조 판서 이정보(李鼎輔)가 아뢰기를, “척화인(斥和人)과 절사인(節死人)을 지난번에 뽑아서 아뢰었는데, 또다시 뽑아 올리라는 명령이 있었습니다. 척화인은 고 상신(相臣) 이경여(李敬輿), 고 참판 윤계 등이고, 순절인은 고 부윤(府尹)황일호(黃一皓), 고 부사 이증(李贈) 등인데, 모두 합하여 26명입니다. 아울러 일체로 치제(致祭)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영조가 허락하였다.(『영조실록(英祖實錄)』 참고.)

[성품과 일화]
윤계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자태(姿態)가 준수(俊秀)하고 장대(壯大)하였으며, 성품이 효도하고 인정이 많았다. 어려서부터 할아버지 윤섬의 절개를 본받아서 기량(器量)이 보통 아이들과 달랐다. 어려서 어버이를 여의고, 동생 윤집·윤유와 함께 외가에서 자랐다. 스스로 애써 배우기에 힘썼는데, 글씨를 잘 쓰고 문장력이 뛰어나서 학업이 이루어졌다. 또한 아우들을 잘 가르쳐 직접 사우(師友)까지 겸했으므로, 사람들은 윤씨 집안에 인물이 났다고 칭찬하였다. 혼란한 광해군 시대 선비의 기풍이 크게 무너졌으므로, 윤계는 이들과 진퇴(進退)를 함께 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고, 한 동안 은거하면서 자신을 지켰다.(「묘갈명」 참고.)

열여섯 살에 부친이 돌아갔을 때 집상(執喪)이 예제(禮制)를 넘어섰고, 어머니가 병이 나자, 칼로써 손가락을 베어 피를 마시게 하였다. 할머니를 봉양할 적에는 순종하고 비위를 맞추려고 힘쓰며 정성을 다하였다. 동생과 누이와 함께 살면서 재산을 다투지 않았다. 남과 사귈 때 비록 작은 것이라도 남의 능한 점을 드러나게 하고 자신을 낮추고 겸양하여 잘난 체하지 않았다. 남과 교유(交遊)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당론(黨論)을 논의하는 것을 즐겨하지 않았다. 자신이 관직의 요로(要路)에 있었으나, 집안에는 재물이 없었다. 사양하거나 받아들일 때에는 법도가 있으면서도 명예를 가까이 하고자 하지 아니하였다. 항상 성만(盛滿)한 것을 두렵게 생각하였고, 형제가 서로 경계하여 사(邪)와 정(正)을 분별하는 것이 엄격하고 늠름하고 당당하였다. 재상 김상용(金尙容)·오윤겸(吳允謙)과 태재(太宰) 정경세(鄭經世)이 평소 인물을 알아보는 안목을 가졌다고 자부(自負)하였는데, 모두 윤계를 후진(後進) 가운데 제일이라고 평가하였다.(「묘갈명」참고.) 그러므로 그가 오래 살았다면, 명재상이 되었을 것이다.

[묘소와 비문]
1706년(숙종 32) 나라에서 충간(忠簡)이라는 시호를 내려주었다. 청나라 군사와 싸우다가 대부도에 끌려가서 죽음을 당하였는데, 처음에 섬의 북면(北面) 현종리(懸鍾里)에 임시로 매장하였다가, 다음해 반장(返葬)하여 김포군(金浦郡) 신동(薪洞)의 선영(先塋)에 장사하였다.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청음집(清陰集)』 권31 「남양부사 윤공계 묘갈명(南陽府使尹公棨墓碣銘)」) 강화도의 충렬사(忠烈祠)와 남양(南陽)의 용백사(龍栢祠)에 제향되었다.

첫째부인 동래 정씨(東萊鄭氏)는 부사 정세미(鄭世美)의 딸인데, 아들 2명을 두었다. 장남은 윤이흠(尹以欽)이고, 차남은 윤이명(尹以明)이다. 둘째부인 밀양박씨(密陽朴氏)는 정랑 박정원(朴鼎元)의 딸이고, 셋째부인 경주 김씨(慶州金氏)는 현감 김덕민의 딸인데, 모두 자식이 없었다.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효종실록(孝宗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영조실록(英祖實錄)』
■ 『정조실록(正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보감(國朝寶鑑)』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송자대전(宋子大全)』
■ 『농암집(農巖集)』
■ 『백호전서(白湖全書)』
■ 『속잡록(續雜錄)』
■ 『신독재전서(愼獨齋全書)』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응천일록(凝川日錄)』
■ 『임하필기(林下筆記)』
■ 『청성잡기(靑城雜記)』
■ 『청음집(淸陰集)』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택당집(澤堂集)』
■ 『포저집(浦渚集)』
■ 『홍재전서(弘齋全書)』
■ 『선원유고(仙源遺稿)』
■ 『월당집(月塘集)』
■ 『기언(記言)』
■ 『남파집(南坡集)』
■ 『동춘당집(同春堂集)』
■ 『시남집(市南集)』
■ 『송곡집(松谷集)』
■ 『노서유고(魯西遺稿)』
■ 『목재집(木齋集)』
■ 『분애유고(汾厓遺稿)』
■ 『남계집(南溪集)』
■ 『서석집(瑞石集)』
■ 『수곡집(睡谷集)』
■ 『도곡집(陶谷集)』
■ 『도암집(陶菴集)』
■ 『성호전집(星湖全集)』
■ 『강한집(江漢集)』
■ 『풍서집(豐墅集)』
■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
■ 『중암집(重菴集)』
■ 『후조당집(後彫堂集)』
■ 『만오집(晩悟集)』
■ 『월봉집(月峯集)』
■ 『무주일고(無住逸稿)』
■ 『묵수당집(嘿守堂集)』
■ 『야곡집(冶谷集)』

■ [집필자] 이현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