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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17년(중종 12)∼1580년(선조 13) = 64세]. 조선 중기 명종~선조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성균관(成均館)대사성(大司成)이다. 자(字)는 태휘(太輝)이고, 호는 초당(草堂)이다. 본관은 양천(陽川), 주거지는 서울이다. 증조부는 성균관(成均館)전적(典籍)을 지내고 승정원(承政院) 도승지(都承旨)에 추증된 허창(許菖)이며 조부는 금화사(禁火司) 별제(別提)를 지내고 이조 참판(參判)에 추증된 허담(許聃)이다. 아버지는 군자감(軍資監)부봉사(副奉事)를 지내고 이조 참판에 추증된 허한(許澣)이며 어머니 창녕성씨(昌寧成氏)는 돈녕부(敦寧府) 판관(判官) 성희(成憙)의 딸이다. 허성(許筬)·허봉(許篈)·허균(許筠)과 난설헌(蘭雪軒) 허초희(許楚姬)의 아버지이다.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이고,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과 절친한 사이였다.
[명종 시대 활동]
1540년(중종 35) 사마시(司馬試)에 진사(進士)로 급제하였고, 1546년(명종 1) 식년시(式年試) 문과(文科)에 갑과(甲科) 3위 탐화랑(探花郞)으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30세였다.『방목』
1548년(명종 3)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이 되었고, 예조 좌랑·공조 좌랑·병조 좌랑을 두루 거쳤다. 1549년(명종 4) 이조 좌랑에 임명되었는데(『명종실록(明宗實錄)』 참고.) 이감(李戡)이 이조 좌랑 허엽이 자기를 천거해 주지 않은 것에 대해서 원망을 품었다. 나중에 이감은 허엽을 무함하기를, “허엽이 자기 집을 지으면서 나라의 목재와 인부를 부당하게 사용하였다.” 하였다. 그 뒤에 독서당(讀書堂)에 들어가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1551년(명종 6) 홍문관(弘文館)에 부수찬(副修撰)·수찬(修撰)·부교리(副校理)로 차례로 승진하였고, 이조 정랑이 되었다. 1552년(명종 7) 의정부 검상(檢詳)이 되었다가, 사인(舍人)으로 승진되었다. 1553년(명종 8) 사헌부(司憲府)장령(掌令)이 되었다가, 성균관 사예(司藝)를 거쳐, 홍문관 교리(校理)가 되었다.(『명종실록』 참고.) 허엽이 사헌부 장령이 되었을 때 대사헌(大司憲)윤춘년(尹春年)이 이감의 무함하는 말을 듣고 양사(兩司)를 동원하여 허엽을 탄핵하였다.
1557년(명종 12) 어머니의 상(喪)을 당하여, 3년 동안 상례를 끝마치고, 1559년(명종 14) 허엽은 외직을 자원하여 황해도 배천군수(白川郡守)로 나갔다. 그때 황해도 지방에 임꺽정[林巨正]의 무리가 출몰하여 도둑질을 일삼았으나 이를 체포하지 못하자, 조정의 공론이 황해도 수령을 모두 무신으로 교체하여 도둑떼를 빨리 잡아야 한다고 하였으므로, 허엽도 교체되어 사헌부 집의(執義)에 임명되었다. 그때 대사헌과 의견이 맞지 않아서 서로 대립하다가, 대사헌은 체직(遞職)되고 집의 허엽은 파면당하였다. 얼마 안 되어 이조 판서 윤춘년이 그를 기용하여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필선(弼善)으로 삼았는데, 그때 명종이 파직당한 허엽을 겨우 열흘만에 학관(學官)에 의망(擬望)한 까닭을 따져 물었으므로, 이조 판서 윤춘년이 대죄하였으나, 명종이 용서하였다.(『명종실록』 참고.) 1560년(명종 15) 특명으로 공조 참의(參議)가 되었다가,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다.(『명종실록』 참고.)
1562년(명종 17) 예조 참의가 되어서,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 어느 날 야대(夜對)에서 허엽이 명종에게 직언(直言)하기를, “조광조(趙光祖) 등이 불행하게도 나쁜 사람들의 시기를 당하여 억울하게 참혹한 화를 당하였으니, 서둘러 신원(伸寃)하여 주면 인심이 진정되고 국가가 편안해질 것입니다.” 하니, 명종이 당황하여, “선조(先朝)에 있었던 일을 어찌 감히 함부로 논의할 수 있겠는가?” 하였으므로, 대간(臺諫)에서 허엽을 탄핵하여 파면당하였다.(『소재집(蘇齋集)』 권20 「유명조선국가선대부 경상도관찰사 허공엽신도비명(有明朝鮮國嘉善大夫慶尙道觀察使許公曄神道碑銘)」참고. 이하 「비명」으로 약칭) 1563년(명종 18) 삼척부사(三陟府使)에 임명되었으나, 명종의 처삼촌 이량(李樑)이 이감을 시켜 사림(士林) 일파를 일망타진(一網打盡)하였으므로, 그는 부임한 지 13일 만에 파면되었다. 그 뒤에 이량 일파가 명종의 외삼촌 윤원형(尹元衡)의 소윤(少尹)에게 패배하여 몰락하자, 다시 등용되었으나, 윤원형이 그가 야대에서 직언한 사실을 문제삼아 청요직(淸要職)에서 배제하였으므로, 1564년(명종 19) 경주부윤(慶州府尹)에 임명되었다.
[선조 시대 활동]
1568년(선조 1) 진하사(進賀使)에 임명되어 중국 명(明)나라 북경에 가서 태자(太子) 책봉을 축하하고 돌아왔는데, 그가 중국에서 『독서록(讀書錄)』를 구해 와서 선조에게 바치니, 선조가 인쇄하여 반포하라고 명하였다.(「비명」 참고.) 1569년(선조 2) 동부승지(同副承旨)에 발탁되었고 이어 우부승지(右副承旨)·좌부승지(左副承旨)를 거쳐, 우승지(右承旨)가 되었다, 1571년(선조 4) 이조 참의가 되었으며, 1573년(선조 6)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이 되었다가(『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참고) 다시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다. 1575년(선조 8) 사간원 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되었다가, 얼마 있지 않아서 파면되었다. 그때 자기 상전을 죽인 노비가 있어서 하옥(下獄)시켜 죄를 다스렸는데, 옥사를 처리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대사간 허엽과 사간원 정언 조원(趙瑗)이 서로 대립하였다. 이리하여 양사의 대간들의 의견이 서로 엇갈려서 시비를 거듭 하였으므로, 선조가 대사간과 대사헌을 함께 파직하였다.(「비명」 참고.)
1579년(선조 12)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에 임명되었는데, 약을 잘못 복용하여 병을 얻었다. 1580년(선조 13) 봄에 병이 심해져서, 사직하는 상소를 올리고 서울 집으로 돌아오다가, 경상도 선산(善山)에 이르러 병이 발작하여, 마침내 1580년 2월 4일 상주(尙州)의 객관(客館)에서 돌아가니, 향년이 64세였다.
저서로는 『초당집(草堂集)』, 『전언왕행록(前言往行錄)』 등이 남아 있다
[화담 학파의 분열]
조선 중기에 화담 서경덕이 성리학(性理學)의 이기론(理氣論)에서 ‘기일원론(氣一元論)’을 주장하고 정자(程子)·주자(朱子)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비판하였다. 그는 주돈이(周敦頤)·장재(張載)의 ‘태허설(太虛說)’을 받아들여 기(氣)의 본질은 태허(太虛)라고 주장하여, 태허의 기는 우주의 만물을 생성하는데, 만물이 소멸되더라도 기의 본체(本體)는 여전히 존재한다고 보았다. 이에 반하여 퇴계(退溪) 이황(李滉)은 주자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받아들여 이를 크게 발전시켰다. 율곡(栗谷) 이이(李珥)는 서경덕의 ‘기일원론’을 수용하여 이를 더욱 발전시켰다. 처음에 서경덕이 개성에서 제자들을 가르칠 때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문하로 몰려들어 제자들이 매우 많았으나, 1546년(명종 1) 서경덕이 돌아가자, 그 제자들이 뿔뿔이 흩어졌는데, 오직 허엽과 박순(朴淳)만이 서경덕의 학통을 이어서 변치 않고 그대로 지켰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화담 학파(花潭學派)’를 거론할 때 허엽과 박순 두 사람을 그 후계자로 꼽았다. 서경덕이 병이 위독할 때 허엽을 불러서 ‘원리기(原理氣)’ 등의 여섯 편을 구두로 그에게 전하여 주었는데, 이것이 바로 서경덕의 학설의 요체(要諦)였다. 이를 보면, 서경덕이 허엽을 그의 후계자로 지목한 것 같다.
박순은 타고난 자질이 청렴하고 절조가 있었고 이이·성혼(成渾)과 어울려 서인의 영수가 되었다. 선조 때 영의정까지 역임하고, 그 문하에서 최립(崔岦)·최경창(崔慶昌)·백광훈(白光勳) 등과 같은 당대의 대문장가를 길러냈다. 허엽은 서경덕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학문과 조행(操行)에 볼 만한 것이 많았으나, 포용력이 모자라고 성품도 집요한 점이 있어서 박순만큼 출세하지도 못하고, 또 문하에서 훌륭한 제자를 길러내지 못하였다. 사림파(士林派)가 동인과 서인으로 나뉠 때 허엽은 동인이 되었다. 허엽과 박순은 서경덕 문하에서 동문수학(同門修學)한 친한 친구였으나, 만년에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져, 동인과 서인간 당파 싸움에 서로 공박하는 일을 서슴치 않았다. 두 사람이 힘을 합쳐서 <화담 학파>의 인재들을 이끌고 서경덕의 학설을 더욱 발전시키지 못하고 서로 분열하였다. 박순은 이이의 기호학파에 영합하여 이이·성혼과 마음이 하나가 되었다. 허엽은 이황의 영남학파에 합류하였으나, 학문적으로 이황과 합치되지 못하였다.
허엽이 이황과 여러 번 학문을 토론하였는데, 허엽은 서경덕의 학설을 주장하고 많은 논변을 늘어놓자, 이황이 아쉬워하면서, “태휘(太輝)가 학문을 하지 않았더라면 참으로 착한 사람이 되었을 걸….” 하였다.(『선조수정실록』「허엽 졸기」 참고.) 이황이 여러 번 그 학설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했으나 허엽은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허엽은 『주역(周易)』등 경전(經典)을 읽기를 아주 좋아하여 늙도록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므로 이황의 제자들도 이것을 훌륭하게 여겼다. 동인과 서인으로 당파가 갈라진 뒤에 허엽은 동인의 종주(宗主)가 되어 서인의 영수가 된 박순과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박순은 주장하기를, “성인(聖人)의 학문을 다른 데에서 찾을 것이 없다. 일상생활 속에서 이곳저곳 이치를 따르는 것이 바로 이 도(道)인 것이다. 그러나 만일 먼저 그 이치를 밝히지 않으면 또 어떻게 올바른 처사(處事)를 할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격물(格物)·치지(致知)의 순서가 수신(修身)의 앞에 있는 것이다.” 하였다. 그러나 허엽은 이치보다 기질이 앞선다고 주장하고, 선한 기질이 양지(良知)에 이르면, 격물치지가 저절로 이루어진다고 주장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허엽의 집안을 ‘묘지(卯地)’라고 일컬었는데, 묘(卯)는 정동쪽의 방위이므로 문운(文運)이 아침 햇살이 이글거리는 것처럼 일어난다는 뜻이다. 그의 세 아들 허성·허봉·허균과 그의 두 사위 우성전(禹性傳)·김성립(金誠立)이 모두 문사(文士)로서 조정의 벼슬에 올라서 당시의 문장 수준을 한 단계 높였기 때문에 세상에서 일컫기를 “허씨(許氏)가 당파의 가문 중에서 가장 치성(熾盛)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허엽의 막내아들 허균이 반역을 도모하다가 가문이 멸망당하기에 이르러, 그 집안이 ‘묘지(墓地)’가 되었다.(『선조수정실록』「허엽 졸기」 참고.) 허균의 반역도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제거하여, 동인과 서인의 당파 싸움에 핵심 쟁점이 되었던 인목대비의 폐위 문제를 일거에 없애려고 기도하였던 사건이었다.
[성품과 일화]
허엽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풍채가 중후(重厚)하고 성품이 충직(忠直)하였다. 사람됨이 안정되고 단아(端雅)하여 말을 빨리 하거나 안색을 갑자기 바꾸거나 하는 일이 없었다. 사람들과 담소(談笑)할 적에 화기(和氣)가 넘쳐흘렀다. 만년에 화평하고 편안하게 살면서 기쁨과 노여움을 표정에 드러내지 않고, 혹시라도 나쁜 말로 노복을 꾸짖지 않았다.(「비명」 참고.) 그러나, 『명종실록』 명종 14년 9월 25일 기사의 사평(史評)을 보면, “품성이 우둔하고 감정에 치우쳐서 행동이 앞섰다. 그러나 착한 사람을 좋아하여, 선류(善類)을 찾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하였다. 그는 명종과 선조 시대 조정에 벼슬하면서 남을 속이지 않으려고 애를 썼으며, 목숨을 바쳐서 나라에 충성하면서, 대체(大體)를 다스리는 데에만 힘을 쓰고 작은 일은 아랫사람에게 맡겼다. 세 고을의 수령(守令)을 지냈지만, 처자들이 감히 사사로이 무엇을 청하지 못하였다.(「비명」 참고.)
허엽은 윤춘년과 동문수학하였는데, 윤춘년이 도(道)를 터득하였고 생각하여, 사람들에게 “윤춘년은 나보다 먼저 형연부동(瑩然不動)한 사람이다.”고 칭찬하였다. 어떤 친구가 비아냥거리기를, “형연 부동이란 번쩍이는 것이 마치 수정과 같다는 말이 아니냐?”고 하니, 또 어떤 친구가 변명하기를, “그가 무엇을 보고 그렇게 말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의 행동에는 그런 점이 있기는 있지.” 하였다.(『명종실록』명종 17년 7월 21일 참고.) 그는 윤춘년을 학문적으로 도를 깨달은 사람이라고 믿었다. 1549년(명종 4) 4월 허엽이 이조 좌랑이 되었는데, 윤춘년이 추천한 이감이란 사람을 못마땅하게 여겨서 3망(望)에 천거해 주지 않았다. 1553년(명종 8) 9월 허엽이 사헌부 장령이 되었을 때 종갓집을 다시 지었는데, 이감이 허엽을 무함하기를, “허엽은 자기 집을 지으려고 황해도 만호(萬戶)에게 재목을 수송해 오도록 요구하였고, 또 간의대(簡儀臺) 사령(使令)들을 데려다가 그 집을 짓는 데에 사역하였습니다.” 하였다. 그때 대사헌 윤춘년이 이감의 말을 듣고 양사를 동원하여 허엽을 탄핵하여, 파면시켜버렸다. 그러나 허엽과 윤춘년은 동문수학하고, 또 친척 사이였으므로, 두 사람은 만나서 화의하고, 그 뒤에 서로 관직을 밀어주었다. 허엽이 박순·윤춘년등과 힘을 합쳤더라면, 조식(曺植)의 ‘남명학파(南冥學派)’가 동인(東人)에서 북인파(北人派)를 형성하였던 것처럼 4색 당파에서 충분히 한 파를 형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1559년(명종 14) 황해도 배천군수 허엽은 사헌부 집의에 임명되었으나, 대사헌 의견이 맞지 않아서 서로 대립하다가 파면당하였다. 그때 이조 판서 윤춘년은 허엽이 파면된 지 열흘만에 그를 다시 세자시강원 필선으로 삼았다. 이러한 인사를 못마땅하게 여긴 명종이 정청(政廳)에 하교하기를, “집의 허엽은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올라서 파직당하기에까지 이르렀는데, 겨우 열흘이 지나서 갑자기 학관(學官)에 의망(擬望)되었으니, 그 자리가 비록 실직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역시 너무 빠른 듯하다.” 하였다. 이조 판서 윤춘년이 당황하여, “학관은 실직이 아니므로 전에 파직된 사람도 의망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감히 의망한 것입니다. 미처 자세히 살피지 못하였으므로 대죄합니다.” 하니, 명종이 타이르기를, “경도 관례에 따라 주의(注擬)한 것이고, 학관도 관례에 따라 주의한 것이다. 대죄하지 말라.” 하였다.(『명종실록』 참고.) 윤춘년은 윤원형의 친척이어서 소윤으로 활동하다가, 윤원형이 몰락하자, 정계에서 물러났다. 윤춘년은 이개(李塏)의 외손자로서 화담의 학통을 선술(仙術)로 발전시켰고, 불교·도교의 음률(音律)에도 정통하였고, 김시습(金時習)을 공자(孔子) 대신으로 성인(聖人)으로 내세울 것을 주장하였다.
허엽은 어려서부터 학문에 대한 열의가 남달라서 처음에 나식(羅湜)에게 글을 배우다가,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을 찾아가서 『심경 부주(心經附註)』를 배우면서, 마침내 학문에 이르는 방법을 터득하였다. 또 진천(鎭川) 이여(李畬)를 찾아가서 성리학을 깊이 공부하여 특히 『주역』에 정통하였다. 그 뒤에 다시 화담 서경덕을 찾아가서 학업을 전수 받고 서경덕의 수제자가 되었는데, 서경덕이 병이 위독할 때 서경덕의 ‘기일원론’에 관한 여러 학설을 구술로써 그에게 전해 주었다. 허엽은 언제나 여러 스승을 만나서 수업을 끝마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였다. 처음에 그는 문사(文詞)에 치중하여 아들과 딸들을 가르쳐서 문장가와 시인으로 만들었으나, 나중에 그는 문학을 버리고 오로지 성리학 연구에만 몰입하였다.(「비명」 참고.)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광주(廣州) 토당리(土堂里)에 있는데, 소재 노수신이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소재집(蘇齋集)』 권20 「유명조선국가선대부 경상도관찰사 허공엽신도비명(有明朝鮮國嘉善大夫慶尙道觀察使許公曄神道碑銘)」) 개성의 화곡서원(花谷書院)에 제향되었다.(『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5 참고.)
첫째 부인 청주한씨(淸州韓氏)는 서평군(西平君) 한숙창(韓叔昌)의 딸이고, 둘째 부인은 강릉김씨(江陵金氏)로 예조 참판 김광철(金光轍)의 딸이다. 자녀는 3남 3녀를 두었는데, 한씨 소생의 아들 허성(許筬)은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 판서를 지냈고, 사위 박순원(朴順元)은 전함사(典艦司) 별제를 지냈고, 사위 우성전은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대사성을 지냈다. 김씨 소생의 아들 허봉(許篈)은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를 지냈고, 아들 허균(許筠)은 문과에 급제하여 좌찬성(左贊成)을 지냈고, 막내사위 김성립은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저작(著作)을 지냈다.(「비명」 참고.)
막내딸 허초희는 필명이 허난설헌인데, 문사(文士)로서 31세에 요절한 김성립에게 시집가서 어려운 시집살이를 하다가 27세의 나이로 죽었다. 그녀는 218수의 주옥 같은 시를 남겼는데, 동생 허균이 누나를 추모하여 그 초고를 모아서 『허난설헌집(許蘭雪軒集)』을 간행하였다. 1605년(선조 38) 2월 예빈시(禮賓寺)부정(副正) 허균이 접반사(接伴使)신흠(申欽)의 종사관(從事官)으로 발탁되어 의주(義州)에 가서 명나라 사신 한림원(翰林苑) 학사(學士) 주지번(朱之蕃) 일행을 마중하여 서울로 오는 도중에, 3월 27일 가산(嘉山)의 공강정(控江亭)에서 묶었다. 그때 사신 주지반이 허균을 불러서 허난설헌의 시에 대해 물었으므로 허균이 누님의 시집을 가져다가 주었더니, 주지번은 이를 읽으면서 칭찬해 마지않았다.(『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권18 참고.) 명나라 사신 주지번이 중국에 돌아가서 『난설헌집(蘭雪軒集)』을 간행하였는데, 명나라 문사들이 이 시집을 읽어보고 허난설헌을 조선 제일의 여류 시인으로 평가하였다. 허난설헌이 조선 시대 5백여 년 동안 제일의 여류 시인이 된 것은 열정과 사랑에 넘쳤던 남동생 교산(蛟山) 허균의 덕택이었다. 허난설헌은 중국과 일본에서 먼저 당대의 유명한 여류시인으로 평가되었기 때문에, 조선에서도 규방(閨房) 문학가로 각광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