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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09년(태종 9)∼1474년(성종 5) = 66세]. 조선 초기 세종~성종 때의 문신·학자. 행직(行職)은 영의정이고,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자는 정부(貞父), 호는 태허정(太虛亭)·동량(㠉梁)이다. 본관은 삭녕(朔寧),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집현전(集賢殿) 직학(直學)최사유(崔士柔)이고, 어머니 해주오씨(海州吳氏)는 종부시(宗簿寺) 사(事) 오혁충(吳奕忠)의 딸이다. 부자(父子)가 세종 때 집현전 학사(學士) 출신이다. 부인 대구서씨(大丘徐氏)가 서미성(徐彌性)의 딸이자 양촌(陽村) 권근(權近)의 외손녀였으므로, 지재(止齋) 권제(權踶)의 조카사위이고, 사가정(四佳亭) 서거정(徐居正)의 매형(妹兄)이다.
[세종 시대 활동]
1434년(세종 16) 알성시(謁聖試)문과(文科)의 별시(別試)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집현전 부수찬(副修撰)이 되었다. 그해 집현전에서 『자치통감 훈의(資治通鑑訓義)』를 편찬하였는데, 최항도 참여하였다. 이어서 세종이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창제할 때 최항은 박팽년(朴彭年)·신숙주(申叔舟)·성삼문(成三問) 등과 함께 이에 참여하였다. 서거정이 지은 그의 비명((『사가집(四佳集)』 문집 보유2 「최문정공항비명(崔文靖公恒碑銘)」, 이하 「비명」이라 약칭)을 보면, “세종은 최항과 신숙주 등에게 명하여 그 일을 관장 보게 하였고, 『훈민정음(訓民正音)』과 『동국정운(東國正韻)』 등을 짓게 하니, 우리 동방의 어음(語音)이 비로소 바로잡혀졌다. 비록 규모와 조치는 모두 임금의 뜻을 따라서 만든 것이었으나, 최항의 협찬도 많았다.” 하였다.
1444년(세종 26) 집현전 교리(校理)로 승진하여, 『오례의주(五禮儀注)』를 편찬하는 데에 참여하였고, 그해 박팽년·신숙주·이개(李塏) 등과 함께 『운회(韻會)』를 한글로 번역하였다. 1445년(세종 27) 집현전 응교(應敎)로 승진하여,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짓는 데에 참여하였고, 뒤이어 『동국정운(東國正韻)』·『훈민정음 해례(訓民正音解例)』 등을 편찬하였다.
1446년(세종 28) 9월 이달에 ‘훈민정음’이 이루어졌다. 예조 판서(判書)정인지(鄭麟趾)의 서문을 보면, “신(臣)이 집현전 응교 최항, 부교리 박팽년과 신숙주, 수찬(修撰)성삼문(成三問), 돈녕부(敦寧府) 주부(注簿)강희안(姜希顔), 집현전 행부수찬(行副修撰) 이개·이선로(李善老) 등과 더불어 삼가 모든 해석과 범례(凡例)를 지어 그 경개(梗槪)를 서술하여, 이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스승이 없어도 스스로 깨닫게 하였습니다.” 하였다.(『세종실록(世宗實錄)』 참고.) 최항은 박팽년·성삼문보다 나이가 8~9세 많았고, 또 벼슬자리도 1~2품 높았기 때문에 정인지와 함께 8명의 집현전 학사 명단 앞에 들어간 것이지만, 직책상으로 보면 정인지의 정2품 판서보다 최항의 정4품 응교가 실질적으로 <훈민정음> 창제를 주관하였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한글을 창제하는 데에 있어서 최항의 업적도 젊은 신숙주·성삼문·박팽년보다 결코 뒤지지 않는다고 보아야 마땅하다.
1447년(세종 29) 문과(文科)중시(重試)에 5등으로 합격하였다. 집현전 직제학(直提學)으로 승진하여, 세자시강원 우보덕(右輔德)을 겸임하였다. 그때 세종은 세자(世子: 문종)로 하여금 섭정(攝政)하게 하였는데, 최항은 서연관(書筵官)으로서 왕명의 출납을 맡았다
[문종~단종 시대 활동]
1450년 2월 문종이 즉위하자, 선위사(宣慰使)가 되어 명(明)나라 사신을 접대하였고, 그해 좌사간대부(左司諫大夫)에 임명되었다. 1451년(문종 1) 7월 다시 집현전으로 돌아와서 부제학이 되었고,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주석하는 일을 맡았으며, 기전체(紀傳體)로 편찬하는 『고려사(高麗史)』의 열전(列傳)을 집필하였다. 1452년(문종 2) 2월 『세종실록(世宗實錄)』을 편찬할 때는 수찬관(修撰官)으로 참여하였고, 그해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임명되었다.
1452년(문종 2) 5월 단종이 즉위할 때 동부승지에 있다가, 단종이 즉위하자 우부승지·좌부승지를 거쳐 좌승지로 승진하였다. 1453년(단종 1) 수양대군(首陽大君: 세조)이 쿠테타를 일으킬 때 단종은 향교동(鄕校洞) 영양위(寧陽尉) 정종(鄭悰: 단종의 매형)의 집에 나가 있었는데, 최항이 마침 승정원의 좌승지로서 숙직(宿直)하였다. 그날 저녁 수양대군은 김종서(金宗瑞) 부자를 죽이고 홍달손(洪達孫) 등을 데리고 시재소(時在所)로 곧장 달려가서, 대문 틈으로 입직승지(入直承旨) 최항을 불러내었다. 수양대군은 덥석 최항의 손을 잡고 김종서를 죽인 연유를 말하고 협조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간청과 협박에 못 이겨, 최항은 수양대군을 어린 단종에게 안내하였는데, 겁에 질린 단종은 수양대군이 시키는 대로 한밤중에 황보인(皇甫仁)·조극관(趙克寬)·이양(李穰) 등 중신들을 입궐하게 하였다. 급작스레 왕명을 받고 입궐하던 황보인·조극관 등 중신들이 어둠 속에서 홍윤성(洪允成)·구인후(具仁垕) 등이 내려치는 철퇴를 얻어맞고 모조리 척살(擲殺)되었다. 이것의 수양대군 일파의 쿠테타인 <계유정난(癸酉靖難)>이다. 이때 좌승지 최항이 수양대군에게 협력하지 않았다면, <계유정난>은 결코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정권을 잡은 수양대군 일파는 최항의 공로를 인정하여 <정난 공신(靖亂功臣)> 1등에 책봉하였다. 그는 도승지(都承旨)로 영전되어, 어린 단종을 보호하였으나, 궁중의 일은 모두 영의정 수양대군과 상의하여 처리하였다. 1454년(단종 2)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 참판(參判)에 임명되고, 영성군(寧城君)에 봉해졌다. 그해 10월 「공신연곡(功臣宴曲)」 4장(章)을 지어서, 나라에서 공신에게 잔치를 베풀 때 노래하였다. 이를 보더라도 그는 수양대군 일파의 쿠테타를 찬양하였던 것 같다. 1455년(단종 3)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는데, 그해 아버지 최사유가 84세로 돌아갔다.
[세조 시대 활동]
1455년 윤6월 세조가 즉위(卽位)하자 최항을 좌익 공신(佐翼功臣) 2등에 책훈하였고, 7월 상중에 있는 그를 기복(起復)하여 서연의 우부빈객(右副賓客)으로 삼았다. 세조는 즉위한 직후 육전 상정소(六典詳定所)를 설치하고 『경국대전(經國大典)』의 편찬에 착수하였는데, 최항은 김국광(金國光)·한계희(韓繼禧) 등과 함께 육전 상정관(六典詳定官)에 임명되었다. 1457년(세조 3) 종2품상 가정대부(嘉靖大夫) 호조 참판이 되었다가, 다시 이조 참판으로 옮겼다. 1458년(세조 4) 정2품하 자헌대부(資憲大夫) 형조 판서가 되었다가, 곧 공조 판서 되었다. 1458년(세조 4) 『신육전(新六典)』의 초안을 작성하여 바쳤다. 그 해 겨울에 어머니의 상(喪)을 당하여 상중에 있었는데, 1460년(세조 6) 세조가 기복하여 정2품상 정헌대부(正憲大夫) 중추원(中樞院) 사(使)에 임명하였다. 이어 예문관 대제학이 되어 성균관(成均館)대사성(大司成)을 겸임하였는데, 대제학은 문형(文衡)을 담당하는 관직이다. 그때 최항이 세 번이나 상서(上書)하여 어머니 3년 상을 마치도록 해달라고 간청하였으나, 세조가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1460년(세조 6) 종1품하 숭정대부(崇政大夫) 이조 판서에 올랐으며, 1461년(세조 7) 최항은 양성지(梁誠之)의 『잠서(蠶書)』를 한글로 번역하여 간행하였다. 1463년(세조 9) 의정부 우참찬(右參贊)에 임명되었다가, 곧 좌참찬(左參贊)으로 전임(轉任)되었다. 이때 사서오경(四書五經)의 구결(口訣)을 바로잡는 일에 참여하였다. 1464년 9월 왕명으로 『병장설주(兵將說註)』를 산정(删定)하였다. 1466년(세조 12) 종1품상 숭록대부(崇祿大夫)로 승품되어 병조 판사(判事)로 임명되었다가, 정1품하 보국 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좌찬성(左贊成)으로 승진하였다. 1467년(세조 13) 정1품상 대광보국 숭록대부 우의정에서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으로 영전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다시 영성군(寧城君)으로 봉해졌다.
[예종~성종 시대 활동]
1468년 9월 예종이 즉위하자, 정희대비(禎禧大妃: 세조의 왕비) 윤씨(尹氏)의 명으로 최항은 신숙주·한명회(韓明澮)·김국광 등과 함께 원상(院相)이 되어, 젊은 예종을 보필하였다. 1469년(예종 1) 경국대전(經國大典) 상정소(詳定所)의 제조(提調)를 겸임하여 『경국대전』을 편찬하였고, 뒤이어 『무정보감(武定寶鑑)』을 수찬(修撰)하였다.
1469년 11월 성종이 즉위하고, 원상(院相)이 되어, 어린 성종을 보필하였다. 1470년(성종 1) 영성 부원군(寧珹府院君)으로 진봉(進封)되었고, 『역대제왕 후비명감(歷代帝王后妃明鑑)』을 찬진(撰進)하였다. 1471년(성종 2) 좌리 공신(佐理功臣) 1등에 책훈되고, 다시 의정부 좌의정에 임명되었다. 1474년(성종 5) 4월 28일 노병으로 돌아가니, 나이가 66세이다.
그는 세종부터 성종까지 40여 년 동안 벼슬하면서, 부수찬에서 영의정까지 올랐으나, 한 번도 탄핵을 당하지 않았고, 하루도 외직(外職)에 나가지 않았다. 그는 뛰어난 문장가로서 활동하였을 뿐만 아니라, 각종 서적 편찬에 참여하여, 세종·문종·단종·세조·예종의 5대『실록(實錄)』과 『경국대전』·『무정보감』·『무경7서 주해(武經七書註解)』등 20여 종의 서책을 찬정(撰定)하였던 것이다. 그의 문집으로 『태허정집(太虛亭集)』 2권이 남아 있다.
[문장가 최항]
최항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글 읽기를 좋아했다. 최항은 사마시(司馬試)를 거치지 않고, 성균관에서 공부하였는데, 동재(東齋)에서 사량(私糧: 개인 곡식)을 내던 정원 이외 유생(儒生)이었으므로, 주위의 괄시를 받았다. 그가 26세 때 1434년(세종 16) 세종이 성균관에 나아가서 문묘(文廟)에 배향하고 알성시(謁聖試)를 보일 때 별과(別科)에 당당히 장원(壯元) 급제하였다.(『방목』) 그때 세종은 과거에 우수한 성적으로 급제한 젊은 엘리트를 발탁하여 새로 설치한 집현전의 학사로 임용하여, 각자 자기 전문적 분야의 학문을 연구하고 각종 서적을 편찬하게 하여, 우수한 학자를 양성하였다. 최항은 과거에 급제한 직후 6품의 집현전 부수찬에 임명되어, 18년 동안 집현전 관원으로 있으면서, 교리·응교를 거쳐 부제학으로 승진하였다.
세종은 최항을 비롯하여 신숙주·박팽년·성삼문 등 젊은 학사들에게 다른 관직으로 나가지 않고 집현전 안에서 연구와 서적 편찬에만 몰두하게 하였다. 세종은 집현전의 아카데믹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다른 관직보다 우대하였기 때문에 세종 시대 아무도 집현전을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 최항은 1452년(문종 2) 동부승지로 발탁되어, 집현전을 떠났다. 집현전 학사들은 항상 경연관(經筵官)과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여, 임금의 최측근으로 활동하였을 뿐만 아니라, 국가의 제도를 개혁하기 위하여 고제(古制)의 연구와 각종 서적 편찬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최항은 문장(文章)을 지을 때 옛 사람의 문장을 그대로 답습하지 않고, 스스로 문사(文辭)를 얽는 솜씨를 개발하여 자기 뜻을 글에다 풍부하게 표현하니, 그 문장이 웅장하고 호탕하여, 마치 길고 큰 강물이 도도(滔滔)하고 거침없이 흐르다가, 백 번 꺾이고 구비치는 듯하여, 문맥의 흐름이 그칠 줄 모르는 것 같았다고 한다. 그는 집현전에서 중국의 남북조 시대 병려체(騈儷體)를 깊이 연구하여, 모두가 어렵다고 외면하는 ‘사륙 병려문(四六騈儷文)’에 남다른 재능을 발휘하였다. 그러므로 중국에 보내는 표문(表文)·전문(箋文) 등 고문 대책(高文大冊) 등이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 왜냐하면, 대개 외교 문서는 병려체로 지었기 때문이다. 중국 명나라 조정의 유신(儒臣)들도 그가 지은 조선의 표문을 보고, “글이 정밀하고 적절하다.”고 극구 칭찬하였다.(「비명」 참고.)
지재(止齋) 권제(權踶)는 일찍이 젊은 최항을 큰 인물로 보고 누님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게 하였다. 그는 최항이 저술(著述)을 낼 때마다 항상 읽어보고 감탄하며, “우리 동방의 문체(文體)가 활기가 없어서 날로 침체되었는데, 지금 고문(古文)을 부흥시킬 수 있는 사람은 반드시 이 사람 하나뿐이다.” 하고, 칭찬하였다.(「비명」 참고.) 반대파 사관(史官)들도 『성종록(成宗實錄)』「최항 졸기」에서 그의 학문과 문장을 긍적적으로 평가하기를, “그는 학문(學問)을 좋아하고 기억력이 좋았다. 문장은 병려체에 능하여 한때의 표문과 전문은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 심지어 중국 조정에서까지 그의 문장이 정절(精切)하다고 호평을 하였다” 하였다.
[최항에 대한 상반된 평가]
나라에서 최항에게 ‘문정(文靖)’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려주었는데, ‘문정’이란 시호의 뜻은 도덕(道德)이 높고 박학다문(博學多聞)한 것을 ‘문(文)’이라 하고, 몸가짐을 공손히 하고 말이 적은 것을 ‘정(靖)’이라 한다. 이를 보면, 최항은 몸가짐이 공손하고 말수가 적고, 학식이 높고 박학다식한 사람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서거정이 지은 최항의 「비명」을 보면, “최항의 천성이 겸손하고 조용하였으며, 단정하고 화려함이 없었다. 세상에 나서 행동함에 있어서 항상 정대(正大)함을 지켜 흔들림이 없었고, 평소 비록 추운 겨울철이나 무더운 여름철이라고 하더라도 하루 종일 관(冠)을 바로 쓰고 반듯하게 앉아서 나태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비록 갑작스런 사고를 당하더라도 말을 빨리 하거나 얼굴빛을 변하지 않았다. 공직을 수행할 때에 정도(正道)를 지켰고, 나라의 근심을 자기 집안일처럼 생각하였다. 두 번이나 재상이 되어서 정무(政務)에는 관대하였으나, 경장(更張: 개혁)을 좋아하지 않았다. 사람과 말할 때에 언제나 먼저 겸손을 보였고, 자기 자랑을 하거나 남보다 잘난 척하지 않았다. 조정에서 큰일을 논의하고 결단할 때에는 확고한 신념을 가져서 남이 범할 수 없었다. 집안에서 청렴하고 결백을 내세워 청탁(請託)이 접근하지 못하게 하였다. 풍악과 여색(女色)을 가까이 하지 않았고, 산업(産業)에 마음을 쓰지 않아 욕심 없이 깨끗하였다. 일을 처리할 때에는 항상 세 번을 생각하였으므로, 벼슬에 나아간 지 40년에 한 번도 공사(公事)에 탄핵을 당하지 않았다. 과거(科擧)에 올라서 정승에 오르기까지 항상 관각(館閣: 홍문관과 예문관)의 소임을 겸하였으므로, 일찍이 하루도 외직(外職)에 나가지 않았다.” 하고, 최항의 성품과 업적을 극구 칭찬하였다. 그가 한 번도 외직에 나가지 않았던 까닭은, 관각에서 나라의 문필(文筆)을 맡은 사람은 교서(敎書)와 외교 문서를 지어야 하므로 외직에 나가서 한가하게 지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벼슬에 나아간 지 40여 년 동안 한 번도 공사로 인하여 탄핵을 당하지 않았던 사람은 정승 가운데 최항뿐이었다.
1474년(성종 5) 4월 최항이 돌아갔을 때 반대파 사관이 쓴 『성종실록』의 「최항 졸기」를 보면, “최항은 일을 처리하는 데에 과단성 있게 재결(裁決)하는 경우가 적었다. 전조(銓曹)의 우두머리가 되고 재상의 자리에 있을 때에도, 건백(建白)한 것은 하나도 없고, 남의 의견을 그대로 따랐을 뿐이다. 그보다 앞서 문형(文衡)을 맡았던 사람들은 의정(議政)에 임명되면 반드시 사양을 하였는데, 최항은 의정에 임명되었을 때 그대로 제수(除授)를 받아들이고 사양하지 않았으므로, 그 당시의 여론이 그를 비난하였다. 그의 아내 서씨(徐氏: 서거정의 누님)는 성질이 사나와서, 가정일은 모두가 서씨가 하자는 대로 했으므로, 최항이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최항은 딸이 많았는데, 사위를 선택할 때 부자인 사람만을 고르고 인품을 따지지 않았기 때문에 대다수가 어리석은 자들이었다. 최항이 일찍이 탄식하기를, ‘우리집은 활인원(活人院)이다.’ 하였는데, 그것은 병신 사위들만 모였다는 뜻이다.” 하고, 사장파(詞章派)의 대표적 인물 최항을 극구 비난하였다.
원래 젊은 사관들은 공자(孔子)의 ‘춘추(春秋) 직필(直筆)’을 본받아서 사실을 바른 데로 기록해야 한다는 의욕(意慾)에 넘쳐서, 당대의 집정자들의 졸기를 쓸 때 난도질하여 흉허물을 밝혀내고, 또 근거 없는 뜬소문까지 기록하는 것이 보통이므로, 실록의 사평(史評)은 악평(惡評)이 대다수다. 최항이 성삼문·박팽년·이개처럼 세종·문종의 유명(遺命)을 지키지 않고, 세조의 왕위 찬탈에 협조한 것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가 반영된 글이라고 생각된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광주(廣州) 동쪽 기현(丌峴)의 언덕에 있는데, 그의 처남 서거정이 지은 비명이 남아있다.(『사가집(四佳集)』 문집 보유2 「최문정공항비명(崔文靖公恒碑銘)」) 자문(子聞) 남학명(南鶴鳴)이 말하기를, “최항을 지금의 남한산성(南漢山城) 밑 광주에다 장사지냈다. 그런데 그 부인이 이 산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이곳은 대를 이을 자식이 없을 땅이므로 응당 개장(改葬)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나라의 제도에 예장(禮葬)한 곳은 감히 천장(遷葬)할 수가 없으니, 나를 당연히 따로 장사지내야 할 것이다.’ 하였다. 그러고 마침내 부인이 여기에서부터 10여 리 쯤 떨어진 곳에다가 스스로 자기 무덤 터를 잡아 두었는데, 죽은 뒤에 자손들이 부인을 따로 장사지내 주었다.” 하였다.(『임하필기(林下筆記)』 권16 참고.)
부인 대구서씨(大丘徐氏)는 달천부원군(達川府院君) 서미성의 딸이고, 서거정의 넷째 누님인데(「서미성 묘표」 참고) 자녀는 2남 4녀를 두었다. 맏아들 최영린(崔永潾)은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 참의를 지냈고, 둘째 최영호(崔永灝)는 문과에 급제하여 사도시(司䆃寺)정(正)을 지냈다. 맏딸은 장악원(掌樂院)첨정(僉正)정함(鄭涵)에게, 다음은 통례원(通禮院)인의(引儀) 문간(文簡)에게, 다음은 사복시(司僕寺) 판관(判官)이균(李鈞)에게, 다음은 사직서(社稷署)참봉(參奉) 신수(申銖)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비명」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