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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385년(우왕 11)∼1443년(세종 25) =59세]. 조선 초기 태종~세종 때의 문신, 척신(戚臣). 행직(行職)은 우찬성(右贊成)이고, 시호는 경절(敬節)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청주(淸州) 출신으로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의정부(議政府) 참찬사(參贊事) 최유경(崔有慶)이고, 어머니 고성이씨(固城李氏)는 고려 시중(侍中) 이숭(李崇)의 딸이다. 고려 감찰대부(監察大夫) 최재(崔宰)의 손자이고, 세종의 제 6왕자 금성대군(錦城大君)의 장인이다.
[태종 시대 활동]
처음에 음직(蔭職)으로 벼슬하여 문무의 하급 관직을 여러 번 옮겨 다녔다. 1416년(태종 16) 2월 중군(中軍)경력(經歷)으로 있을 때 그의 맏딸이 태종의 서출 제2왕자 함녕군(諴寧君)에게 출가하면서 신분이 척신(戚臣)으로 현귀(顯貴)하게 되어, 곧 초자(超資)하여 2품의 사간원(司諫院)지사(知事)에 임명되었다. 이는 그의 아버지 참찬 최유경이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李芳遠)을 지원하였기 때문에 태종이 그 은혜를 갚은 것이다. 1417년(태종 17) 12월 세자(世子) 양녕대군(讓寧大君)과 여러 왕자(王子)·부마(駙馬)들이 광연루(廣延樓) 아래에서 왕에게 헌수(獻壽)할 때 대호군(大護君) 최사강은 양녕대군의 장인인 병조 판서 김한로(金漢老), 충녕대군의 장인인 이조 판서 심온(沈溫) 등과 함께 연회에 참여하였다. 태종이 말하기를, “지금 여기 김한로 등 6인은 왕실과 혼인을 맺은 사람들이니, 이후부터는 종친의 내연(內宴)에 모두 와서 잔치에 참여하라.” 하고, 김한로 등에게 명하여 차례로 술잔을 바치게 하였다.(『태종실록(太宗實錄)』 참고.)
1418년(태종 18) 2월 태종의 제4왕자 성녕대군(誠寧大君)이 갑자기 죽자, 막내를 잃은 원경왕후(元敬王后)가 서울의 궁전을 보기 싫다고 하였으므로, 태종이 왕후의 슬픔을 달래려고 개성의 옛 수창궁(壽昌宮)으로 옮겨갔다. 6월 양녕대군이 어리(於里) 사건을 일으켜서 세자의 자리에서 폐위되고, 제3왕자 충녕대군이 세자가 되었다. 의정부와 6조는 서울에 있고, 왕은 개성에 있었으므로, 관리들이 서울과 개성을 오가면서 일을 보는 데에 불편이 매우 많았다. 7월 태종이 빨리 환도(還都)하라는 6조의 진언(陳言)을 보고, 마침내 환도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때 사간원 지사 최사강 등 대간(臺諫)에서 건의하기를, “7월은 무더위가 심하므로 동가(動駕)하기가 어려우니, 9월 보름께가 가장 낫습니다.” 하고, 여러 대신들은 모두 10월 말이 좋다고 하였다. 그러나 각사(各司)에서 진언한 글이 하루 빨리 환도하기를 청하는 내용이었으므로, 태종이 7월 19일에 서울로 돌아왔다.(『태종실록』 참고.) 태종은 서울로 돌아오자마자, 다음 달 곧바로 세자 충녕대군에게 선위(禪位)하였다.
[세종 시대 활동]
1418년 8월 세종이 태종의 양위(讓位)를 받아서 왕위에 올랐으나, 군권(軍權)과 인사권은 상왕(上王) 태종이 행사하였다. 태종은 최사강의 인품과 자질을 보고 젊은 세종의 최측근으로 발탁하여, 새 임금을 보필하게 하였다. 그해 9월 최사강은 동부대언(同副代言)이 되었다가, 11월 우부대언(右副代言)으로 옮겼다. 1419년(세종 1) 12월 예조 참의(參議)로 옮겼으며, 1420년(세종 2) 3월 경기도도관찰사(京畿道都觀察使)로 나갔다가 겨울에 호조 참판(參判)에 임명되었다. 1421년(세종 3) 2월 장마로 냇물이 넘치고 길이 질퍽거렸는데, 세종과 태종이 함께 풍양(豊壤) 이궁(離宮)에 머물렀다. 경기도 양주(楊州) 동쪽에 시내가 창일하여 거의 건너지 못할 정도였다. 서울에 있던 백관들이 호조 참판 최사강을 보내어 두 임금에게 문안하였다.(『세종실록(世宗實錄)』 참고.) 1421년(세종 3) 12월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으며, 1422년(세종 4) 1월 태종이 의금부(義禁府) 진무(鎭撫)를 경상도에 보내서 관찰사 최사강을 국문(鞫問)하였는데, 그때 도성(都城)을 수축하는 군사를 경상도에서 늦게 보냈기 때문이다.(『세종실록』참고.) 5월 태종이 승하하였는데, 세종은 부왕(父王)의 유명을 받들어 황희(黃喜)·최사강 등 태종이 포치(布置)한 인물들을 그대로 중용하였다.
1422년(세종 4) 12월 중군(中軍) 동지총제(同知摠制)가 되었다가, 이듬해 1423년(세종 5) 2월 병조 참판(參判)이 되었다. 1424년(세종 6) 3월 세종이 병조 판서 조말생(趙末生)과 참판 최사강 등에게 각궁(角弓)을 한 벌씩 내려 주었다.(『세종실록』 참고.) 12월 좌군(左軍) 동지총제가 되었다가, 1425년(세종 7) 4월 충청도 도관찰사가 되었다. 1426년(세종 8) 2월 호조 참판이 되었다가, 그해 9월 사헌부(司憲府)대사헌(大司憲)이 되었다. 1427년(세종 9) 5월 대사간 최사강 등이 세종에게 관아를 비워 놓고 양녕대군을 불러보지 말도록 청하였으나, 세종이 허락하지 아니하였다.(『세종실록』 참고.) 세종은 대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맏형 양녕대군을 수시로 안가(安家)에 불러서 형제끼리 만나서 회포를 풀었다. 1427년(세종 9) 6월 우군(右軍) 동지총제가 되었다가, 그해 12월 이조 참판(參判)이 되었다. 1429년(세종 11) 8월 이조 참판 최사강을 강화도(江華島)에 보내어 성터를 살펴서 정하게 하였다.(『세종실록』 참고.) 11월 참판 최사강으로 원접사(遠接使)를 삼아서 명(明)나라 칙사(勅使) 진립(眞立)을 영접하게 하였다.(『세종실록』 참고.) 1431년(세종 13) 3월 병조 판서로 승진하였는데, 1432년(세종 14) 10월 이간(李侃)·박용(朴用)의 초사(招辭)에 관련되어 병조 판서 최사강, 공조 판서 조계생(趙啓生), 좌대언 김종서(金宗瑞) 등을 의금부에 하옥하였다.(『세종실록』 참고.)
1434년(세종 16) 3월 문과(文科)·무과(武科)의 은영연(恩榮宴)을 의정부에서 베풀 때, 영의정 황희와 우의정 최윤덕(崔閏德)을 압연관(壓宴官)으로, 병조 판서 최사강을 부연관(赴宴官)으로 삼았다.(『세종실록』 참고.) 1435년(세종 17) 4월 세종이 좌의정 최윤덕과 병조 판서 최사강을 보내어 중국 명나라 사신을 벽제역(碧蹄驛)에서 맞아서 위로하였다. 1436년(세종 18) 12월 의정부 참찬에 임명되었다가, 1437년(세종 19) 10월 우참찬에서 좌참찬으로 옮겼고, 1441년(세종 23) 9월 의정부 우찬성(右贊成)으로 승진하였다. 1442년(세종 24) 6월 이조 판서를 겸임하였다. 그해 3월 최사강의 장모가 별세하니, 세종이 관곽(棺槨)과 종이 70권(卷)을 하사(下賜)하여, 세종이 최사강을 우대하였다. 그러나 그 해 7월 세종이 정사를 보는데, 대사헌 정갑손(鄭甲孫)이 아뢰기를, “이조 판서를 겸하고 있는 최사강이 자기의 동생 최사용(崔士庸)을 군기시(軍器寺)판사(判事)로 삼고도 태연히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 다만 염치만 없을 뿐만 아니라 대신다운 체모도 없습니다. 청컨대, 처벌하소서.” 하니, 세종이 말하기를, “이것은 내가 덕(德)이 적은 탓이다. 내가 이를 매우 부끄럽게 여긴다.” 하였다. 이때 최사강이 상언(上言)하기를, “신은 전조(銓曹)에 적임자가 아니어서 자칫하면 착오(錯誤)를 범합니다. 부끄러운 낯으로 직무에 나아갈 수 없으니, 신의 관직을 파면하소서.” 하였으나, 세종이 윤허하지 아니하였다.(『세종실록』 참고.)
1442년(세종 24) 8월 사은사(謝恩使)에 임명되어 중국 명나라 북경(北京)에 갔다가, 그해 12월 칙서(勅書)를 가지고 돌아오니, 왕세자가 백관(百官)들을 거느리고 모화관(慕華館)에 나가서 맞이하였다.(『세종실록』 참고.) 사신으로 4, 5개월 동안 중국에 왕래하면서 풍찬노숙(風餐露宿)하다가 병을 얻어서, 1443년(세종 25) 4월 3일 병으로 돌아가니, 향년이 59세였다.
[성품과일화]
최사강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의 성품은 남에게 공손하고 청렴함을 좋아하였다. 그는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사무(事務)를 공손하게 보았고, 청렴하고 분수를 지켰기 때문에 왕실과 연혼하여 갑자기 현귀하였으나, 태종과 세종의 신임이 두터워서, 대간의 청요직(淸要職)을 거쳐 6조의 판서와 의정부의 찬성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1428년(세종 10) 2월 처음에 양질(楊秩)의 범죄 사실을 국문(鞫問)할 때 양질이 남김없이 실토하지 아니하고 항거하니, 국옥청(鞫獄廳) 제조(提調) 최사강이 말하기를, “이것은 우리들이 마음대로 국문(鞫問)하는 것이 아닌데, 어찌 자복하지 않는가?” 하니, 다른 제조 안순(安純)과 신상(申商)이 듣고 깜짝 놀라서 세종에게 아뢰기를, “최사강이 양질을 시켜 성상께 원망을 돌렸으니, 청컨대, 그를 파면하소서.” 하니, 세종이 명하여 최사강을 제조의 직임에서 파면하여 사제(私第)로 돌아가게 하고, 판부사(判府事) 최윤덕에게 최사강의 자리를 대신하게 하였다.(『세종실록』 참고.) 그해 3월 집의(執義) 황보인(皇甫仁)이 최사강의 죄를 탄핵하니, 세종이 말하기를, “양질을 신문(訊問)할 때 양질이 잘 변명하면서 자복하지 않으니, 최사강이 말하기를, ‘이러한 신문을 너는 우리들이 신문하는 것으로 여기느냐?’고 하였다. 이는 죄인을 신문하는 사람으로서 할 말이 아니므로 대신의 체모를 잃었으니, 좌천시키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황보인이 아뢰기를, “지금 성상의 말씀을 들으니, 최사강의 소위(所爲)는 작은 과실이 아닙니다. 대체로 행상(行賞)하는 일은 비록 아랫사람이 주선하였다고 하더라도 마땅히 ‘성상의 덕’이라고 일컬어야 되겠지만, 행형(行刑)하는 일은 비록 성상의 명령이라고 하더라도 마땅히 ‘법에 의한 것’이라고 해야 되는 것입니다. 지금 최사강의 말은 실로 죄인을 신문하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서는 안 될 말을 하였으니, 그를 핵문(劾問)하소서.” 하니, 세종이 말하기를, “옳도다.” 하였다.(『세종실록』 참고.) 1428년(세종 10) 3월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이조 참판 최사강이 양질을 국문할 때에 말하기를, ‘이것은 제조의 마음이 아니다.’고 하였으니, 그가 남에게 잘 보이려고 성상께 원망을 돌렸으니, 불충(不忠)한 정상이 이미 드러났는데도, 지금 핵문할 때를 당해서 교묘히 말을 꾸며서 승복(承服)하지 않으니, 더욱 정직하지 못합니다. 청컨대, 직첩(職牒)을 회수하고 추국(推鞫)해서 과죄(科罪)하소서.” 하였으나, 세종이 윤허하지 아니하고 다만 그의 관직만 파면시켰다.(『세종실록』 참고.)
1429년(세종 11) 8월 이조 참판 최사강을 강화도에 보내어 성터를 살펴서 정하게 하였다.(『세종실록』 참고.) 세종은 서울과 가까운 강화성이 서울의 도성(都城)이 위급할 때 산성(山城)과 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강화성을 보다 안전한 곳으로 옮겨서 새로 튼튼하게 구축하려고 계획하였다. 이때 세종은 최사강을 강화도에 보냈고, 1432년(세종 14) 3월 세종은 판부사 최윤덕과 예조 판서 신상에게 강화도의 성터와 목장(牧場)을 살펴보게 하였다. 그 뒤에도 세종은 최윤덕에게 여러 차례 강화도에 가서 성터와 목장을 조사하게 하였다. 좌의정 최윤덕은 결론을 내리기를, “강화성은 옛터 그대로 두는 것이 편리할 것 같습니다.” 하므로, 세종은 안전한 성터를 찾아서 옮기려던 계획을 중지하고, 고려 때의 옛날 성을 그대로 보수하게 하였다. 그러나 고려 때 세운 강화성은 바로 강가의 언덕에 세워져서 적이 강을 건너기만 하면 아주 위험하기가 그지없었다.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청나라 군사가 강가에 이르러, 조선의 수비 군사가 도망간 틈을 타서 거룻배를 이용하여 강을 건너자마자 바로 강화성이 함락되었다. 그때 강화도에 미리 피란한 궁궐의 왕비와 궁녀들이 모두 포로가 되었고, 수많은 서울의 사대부 부녀자들이 오랑캐 군사에게 붙들려 능욕을 당하거나, 아니면 스스로 자결하는 등 처참한 비극을 맞았다.
1429년(세종 11) 11월 참판 최사강으로 원접사를 삼아서 명나라 칙사 진립을 영접하게 하였는데, 그는 고려 말엽에 중국 명나라에 보낸 화자(火者) 출신 명나라 환관(宦官)이었다.(『세종실록』 참고.) 중국 명나라 환관들이 칙사로 조선에 오면, 그 횡포가 이루 말할 수 없었는데, 특히 칙사 황엄(黃儼)과 윤봉(尹鳳)의 횡포가 더욱 심하였으므로, 대신들은 서로 그들의 접대를 맡지 않으려고 남에게 미루었다. 세종이 최사강에게 그 접대를 맡긴 것을 보면, 최사강은 사람을 잘 다룰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430년(세종 12) 2월 진립이 대궐에 들어와서 하직하니, 세종이 사정전에 나아가서 접견(接見)하고 다례(茶禮)를 행하였다. 다시 호조 참판 최사강을 반송사(伴送使)로 삼고, 그 아버지 최익생과 함께 의주(義州)까지 따라가서 전송하도록 하였다.(『세종실록』 참고.)
[묘소와 후손]
시호는 경절(敬節)이다. ‘경절(敬節)’이라는 뜻은 아침 일찍 일어나서 일을 공경하게 수행하는 것이 ‘경(敬)’이고, 청렴함을 좋아하여 사욕(私慾)을 버리는 것이 ‘절(節)’이다. 묘소에 묘갈(墓碣)이 없고, 유사(遺事)만 남아 있다.
1450년(문종 즉위) 2월 최사강의 아내 이씨(李氏)가 돌아가자, 나라에서 쌀⋅콩 아울러 30석(石)과 관곽(棺槨) 등의 물품을 부의(賻儀)로 하사하였다.(『문종실록(文宗實錄)』 참고.) 최사강과 부인 이씨는 3남 2녀의 자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최승녕(崔承寧), 최승정(崔承靖), 최승종(崔承宗)이고, 맏딸은 태종의 아들 함녕군에게 출가하고, 막내딸은 세종의 아들 금성대군에게 출가하였다. 또 맏아들 최승녕의 딸은 세종의 아들 임영대군(臨瀛大君)에게 출가하였다. 최사강은 조선 초기 태종·세종 시대 이씨 왕가(王家)와 겹으로 혼인 관계를 맺어, 전주 최씨가 조선 시대 5백 년 동안 명문 벌족으로 번창하는 기초를 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