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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66년(세조 12)∼1536년(중종 31) = 71세]. 조선 전기 중종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예조 참의(參議)다. 자는 여신(汝愼), 호는 송음(松陰)·송석(松石)이다. 본관은 개성(開城), 서울 출신인데, 만년에 서울의 명승지 쌍계동(雙溪洞)에 집을 짓고 살면서 스스로 송석거사(松石居士)라고 일컬었고, 사람들이 그를 ‘적창재상(糴倉宰相)’이라고 일컬었다. 아버지는 충좌위(忠佐衛)부사과(副司果)로 병조 참판에 추증된 최철손(崔鐵孫)이며, 어머니 해평윤씨(海平尹氏)는 찰방(察訪) 윤례경(尹禮卿)의 딸이다. 증조부는 한성부윤(漢城府尹) 최천보(崔天寶)이고, 조부는 개성군(開城君) 최유(崔濡)이다.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으로서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과 친하였다.
[중종 시대 활동]
1489년(성종 20) 사마시(司馬試)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고, 아버지의 상(喪)을 당하여 여묘(廬墓) 살이 하다가, 병이 나서 오래도록 과거 시험을 보지 못하였다. 1504년(연산군 10) 식년시(式年試) 문과(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39세였다.(『방목』) 승문원(承文院) 부정자(副正字)에 보임되었다가, 그 뒤 여러 관직을 거쳐, 성균관 전적(典籍)으로 승진하였다. 1509년(중종 4) 2월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이 되었다가, 6월 홍문관 수찬(修撰)이 되었는데, 어사(御史)로 차출되어 평안도 삼화(三和)로 가서 공채(公債)의 수렴(收斂)을 단속하고, 형벌의 남형(濫刑)을 단속하였다.(『중종실록(中宗實錄)』 참고.) 1510년(중종 5) 3월 사간원 헌납(獻納)이 되었다가, 1511년(중종 6) 5월 이조 정랑(正郞)이 되었다. 이때 이조의 낭관(郎官)들이 모여서 강태수(姜台壽)를 경연관(經筵官)으로 선발하여 홍문록(弘文錄)에 기록하려고 하자, 정랑 최명창이 홀로 격분하여, “장리(贓吏)의 친자(親子)를 어찌 경연관으로 선발할 수 있겠는가?” 하고 반대하니, 강태수의 술대접을 받은 여러 낭관들이 얼굴을 붉히고 아무 말도 못하였다.(『중종실록』 참고.) 강태수는 그의 생부 강학손(姜鶴孫)이 사평(司評)으로 있을 때 관노비를 자기 노비를 삼았다가, 장안(贓案)에 기록되고 영광(靈光)으로 부처(付處)되었기 때문이다. 그 뒤에 최명창은 개성부도사(開城府都事)로 나갔다가, 봉상시(奉常寺) 판관(判官)에 임명되었다·
1513년(중종 8) 9월 홍문관(弘文館)교리(校理)가 되었다가. 그해 11월 사헌부 지평(持平)이 되었다. 1514년(중종 9) 1월 홍문관 응교(應敎)가 되었는데, 그해 12월 영의정 유순(柳洵) 등이 사유(師儒)에 적합한 인물로서 최명창·홍언필(洪彦弼) 등 28인을 추천하여, 성균관 사예(司藝)에 임명되었다. 1516년(중종 11) 8월 어버이를 봉양하려고 자청하여 덕원 부사(德源府使)가 되었으나, 대간(臺諫)에서 탄핵하기를, “최명창은 모친이 서울에 있는데도 수령이 되었는데, 외직을 중하게 알고 내직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니, 내보내지 마소서.” 하였다.(『중종실록』 참고.)
1517년(중종 12) 5월 사간원 사간(司諫)이 되었다가, 그해 말에 안변부사(安邊府使)로 나갔는데, 1년이 안 되어 임금 측근의 사람이 부족하다고 하여 홍문관 전한(典翰)으로 소환하였다. 1518년(중종 13) 9월 홍문관 직제학(直提學)으로 승진하였고, 11월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다. 1519년(중종 14) 1월 좌부승지가 되었다가, 3개월 뒤인 4월에 예조 참판이 되었다. 그때 사헌부에서 탄핵하기를, “예조 참판 최명창은 승지가 된 지 오래되지 않아서 2품의 참판에 올랐는데, 이는 진실로 미편하니, 개정(改正)하소서.” 하였으나, 중종이 윤허하지 않았다. 이에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최명창은 자기 뜻대로 행동하고 융통성이 없었으므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던 것이다.” 하였다.(『중종실록』 참고.)
1519년(중종 14) 11월 예조 참판 최명창은 형조 판서 김정(金凈) 등과 함께 반정공신(反正功臣)을 개정하도록 청하였다. 이때 조광조(趙光祖)의 사림파(士林派)가 훈구파(勳舊派)를 타도하기 위하여 반정 공신 박원종(朴元宗) 등 76명의 위훈(偉勳)을 삭감하여버렸다. 이에 격분한 훈구파의 홍경주(洪景舟)·남곤(南袞)·심정(沈貞) 등이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켜서 조광조와 김정·김식 등을 죽이고, 나머지 사림파를 모두 유배보냈다.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최명창은 훈구파에게 배척을 당하여, 1520년(중종 15) 1월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로 좌천되었다. 그해 여름 병 때문에 감사를 사직하고, 집으로 돌아와서 오랫동안 병을 치료하였다.(『기묘록보유(己卯錄補遺)』 상권 참고.)
중추부 동지사의 한직에 오랫동안 머물다가, 전주부윤(全州府尹)으로 나갔는데, 1524년(중종 19) 11월 새 전라도관찰사 유여림(兪汝霖)이 전주부에 이르렀을 때 곧바로 맞이하지 않았다고 하여, 12월에 부윤에서 파직되었다. 그 뒤에 생활이 곤궁해지자, 자청하여 원주목사(原州牧使)로 부임하였는데, 정사를 간편하게 하고 부세를 가볍게 매겨 백성들이 매우 좋아하였으나 강원도관찰사와 법을 놓고 다투다가, 끝내 굽히지 않고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왔다.(『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8 참고.)
이때부터 벼슬에 뜻을 버리고, 성균관 뒤에 경치 좋은 쌍계동에 정자를 짓고 한가롭게 지내면서 스스로 ‘송석거사(松石居士)’라고 일컬었다. 이때 김안국이 최명창을 위하여 「송석정기(松石亭記)」를 지었다.(『기묘록보유』 상권 참고.) 1531년(중종 26) 척신(戚臣) 김안로(金安老)가 정권을 잡고 전횡하자, 최명창은 이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서반(西班)의 관직마저 잃게 되었다. 이때부터 생활이 곤궁해져서 해마다 양주(楊州)의 환상곡(還上穀)을 꾸어다가 먹기까지 하였는데,(『중종실록』 참고.) 이처럼 청빈하게 살았던 것이 나중에 알려져서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병석에 누워서 노병을 앓다가, 1536년(중종 31) 11월 12일 돌아가니, 향년이 71세였다. 그가 저술한 유고는 후손들이 간직하고 있었으나, 간행되지 못하였다.
[상례의 간소화]
최명창은 병을 앓다가 죽을 때 자녀들에게 유언하기를, “사람은 태어나면 반드시 죽는 법, 오래도록 살아 남을 수 없는 것이다. 나의 생애는 이미 만족스러웠으므로 다시금 소망이 없다. 더구나 어버이 곁에 묻히면 옛날 집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으니, 너희들은 슬퍼하지 말라. 그리고 내가 죽으면 염할 때 비단을 시용하지 말고, 널은 좋은 재목을 사용하지 말고, 묻을 때 회를 사용하지 말고, 제사를 지낼 때 유밀과(油蜜果)를 사용하지 말라. 장사를 치르면, 곧바로 반혼(返魂)하여 조석으로 전(奠)드리는 것과 상식(上食)하는 것을 그만두도록 하라. 그리고 참람된 예는 모두 행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의 아들 최천(崔倩)이 아버지 뜻을 어길까봐 두려워하여 한결같이 유언을 준행(遵行)하여 감히 어기지 아니하였다.(『모재집(慕齋集)』 권12 「가선대부 예조참판 최공묘비명(嘉善大夫禮曹參判崔公墓碑銘)」참고. 이하 「최명창 묘비명」이라 약칭함.)
최창명의 유언에서 반혼(返魂)하여 조석으로 전(奠)드리는 것과 상식(上食)하는 것을 그만두도록 한 것이, 나중에 사대부 집안 중에 상례를 간소화하고 그 번례(煩禮)를 개혁하려는 사람들에게 본보기가 되었다.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렸던 박세당(朴世堂)이 돌아갔을 때 그 아들 박태한(朴泰翰)이 아버지 빈소(殯所)에 상식을 올리지 않다가, 말썽이 크게 일어났었다. 1710년(숙종 36) 6월 숙종이 박세당의 아들 박태한이 3년 동안 상식하지 않았다고 하여, 체포하여 하옥시키고 심문하였다. 박태한이 심문에 공초(供招)하기를, “고 참판 최명창은 효성으로써 칭찬받았는데, 그가 말하기를, ‘신주(神主) 앞에 아침저녁으로 상식하는 것은 번독(煩瀆)한 예이고, 제사가 아니므로 행할 필요가 없을 뿐만 아니라, 바로 마땅히 행하지 않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김안국이 최명창의 묘비명을 지으면서 이미 장사지내고 상식을 그만두라고 말한 유언을 칭찬하고, 술회(述懷)하기를, ‘그의 아들이 유명(遺命)을 한결같이 준행하여 감히 어기지 아니하였으니, 부자(父子)가 모두 마땅함을 얻었다.’고 하였습니다.”고 하였다.(『숙종실록(肅宗實錄)』 참고.) 이를 보면, 최명창은 제사 의식에서 번례를 없애도록 주장하였는데, 사대부 집안에서 이를 따라서 행하는 자가 많았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성품과 일화]
최명창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이하 「최명창 묘비명」 참고.) 그의 모습은 풍만하고 수염이 아름다우며, 자태가 바르고 엄숙하였다. 누구나 그를 한번 보면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는 평생 행동하고 사물에 수응할 때 의중에 선으로 여겨지면 과감하게 실행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았으며, 구차하게 시속(時俗)에서 숭상하는 것을 따르지 않고 꿋꿋하게 자신감을 가졌다. 그의 행동은 표리가 다르지 않아 순고(淳古)한 기풍이 있었다. 그는 학문을 좋아하고 글을 잘 지었다. 그는 본디 성품이 담담하여 항상 책을 보기를 좋아하고 시를 읊기를 좋아하였다. 술을 많이 마셨으나,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취하여 품위를 잃은 적이 없었다.
그는 집에 있을 때에 검소하였다. 집의 재산을 경영하지 않아서, 거처하는 집을 마련하지 못하여 항상 남의 집을 빌려서 살았다. 그러나 거처가 불편하다고 하여 집을 지으려고 계획하지도 않았다. 만년에 성균관 뒤에 지은 쌍계동의 집도 겨우 몸을 움직이고 비바람을 피할 정도였다. 벼슬을 그만둔 뒤에 길주(吉州)의 사전(私田)마저 없어져서 해마다 양주창(楊州倉)의 곡식을 꾸어다 먹으니, 사람들이 그를 ‘적창재상(糴倉宰相)’이라고 일컬었다.
성품이 엄격하고 정중하여 남에게 농담 한 마디도 하지 않았고, 예법으로 자손들을 가르쳤다. 언제나 자손들로 하여금 『논어(論語)』를 읽게 하고, 공자의 가르침을 몸가짐의 근본으로 삼도록 하였고, 나라에서 금지하는 의관과 의복을 입지 못하게 하였다. 그는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해 자청하여 개성·안변·전주의 세 고을 수령으로 나갔는데, 그때마다 고을 수령의 임기를 끝마치고 그 고을에서 떠날 때 언제나 행낭이 텅텅 비어 있었다. 집에 도착하여 혹시 여비가 남았을 경우에는 반드시 그 고을에서 따라온 사람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었다. 그러므로 그가 다스렸던 고을의 백성들은 그가 떠난 뒤에 반드시 그를 사모하였고, 뒤에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상가(喪家)까지 찾아와서 빈소에 전(奠)을 드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는 어버이를 효성으로 섬기었다.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 어머니를 즐겁게 해드릴 수 있는 일이면 무엇이든지 다하였다. 그가 태어난 생일날에도 먼저 어머니에게 축수(祝壽)의 잔을 올려서 즐겁게 해드렸다. 어머니가 돌아가자, 생일날을 만나면 풍속에서 하는 것처럼 잔치를 벌이지 않고, 대문을 닫고 매우 슬퍼하며. 어머니를 기렸다.
[묘소와 비문]
묘소는 경기도 양주 북쪽 천천리(泉川里)의 선영에 있는데, 그보다 먼저 죽은 부인 우씨(禹氏)의 무덤에 합장하였다. 모재 김안국이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모재집(慕齋集)』 권12 「가선대부 예조참판 최공묘비명(嘉善大夫禮曹參判崔公墓碑銘)」)
부인 단양우씨(丹陽禹氏)는 사과(司果) 우경조(禹敬祖)의 딸인데, 자녀는 1남 5녀를 낳았다. 외아들은 군기시(軍器寺)별좌(別坐) 최천(崔倩)이고, 큰딸은 왕실(王室) 영성수(寧城守) 이경생(李敬生)의 처이고, 둘째 딸은 아산현감(牙山縣監) 윤관(尹寬)의 처이다. 셋째 딸은 왕실 결기수(結己守) 이현(李玄)의 처이고, 넷째 딸은 부사용(副司勇) 윤계훈(尹繼勳)의 처이며 다섯째 딸은 선비 이명(李溟)의 처이다. 둘째 사위 윤관의 외동딸이 김안국의 아우 사재(思齋) 김정국(金正國)과 혼인하였다.(「최명창 묘비명」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