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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59년(명종 14)∼1619년(광해군 11) = 61세]. 조선 중기 선조~광해군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영흥대도호부사(永興大都護府使)이고, 증직(贈職)은 영의정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주거지는 서울인데, 만년에 경기도 가평(加平)에 은거하였다. 자는 흥숙(興叔), 호는 만곡(晩谷)·만옹(晩翁)·양암(養庵)이다. 증조부는 종사랑(從仕郞)최명손(崔命孫)이며, 조부는 빙고별제(氷庫別提)를 지내고 이조 판서에 추증된 최업(崔嶪)이다. 아버지는 좌찬성에 추증된 최수준(崔秀俊)이고, 어머니 의령남씨(宜寧南氏)는 호조 참의(參議)에 추증된 남상질(南尙質)의 딸이다. 영의정 최명길(崔鳴吉)의 아버지다.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문인이다.
[선조 시대 활동]
1585년(선조 18) 사마시(司馬試)에 생원(生員)으로 합격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27세였다.(『방목』 참조.)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가서 공부하던 중에 1589년(선조 22) 호남(湖南) 출신 유생(儒生) 정암수(丁巖壽)가 <정여립(鄭汝立)의 옥사(獄事)>의 배후 인물로서 동인(東人)의 유력자를 지목하여 처벌할 것을 주장하다가 선조의 뜻을 거슬러 하옥되는 일이 일어났다. 그때 최기남은 여러 유생들의 소두(疏頭)로서 상소하여 정암수를 석방하도록 간청하니, 선조가 즉시 정암수를 풀어주었다. 그러나 좌의정 정철(鄭澈)이 <정암수의 소장(疏章)>을 이용하여 동인의 과격파 이발(李潑)·최영경(崔永慶) 등을 그 배후로 지목하여 죽이고, 동인 1천여 명을 숙청하였다. 이것이 <기축옥사(己丑獄死)>이다.
후에 세자 책봉을 둘러싸고 당쟁(黨爭)이 일어났는데, 북인 유영경(柳永慶)·홍여순(洪汝諄) 등이 선조의 신임을 얻자, 1591년(선조 24) 홍여순이 정철을 공격하여 유배가도록 하고, 서인들을 대거 축출하였다. 이때 유생 최기남이 이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정거(停擧)를 당하여 오래도록 과거 시험을 보지 못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피난을 다니면서 갖은 고생을 하며 양식을 구해 어머니를 봉양하느라 수염과 머리카락이 모두 하얗게 세어버렸다.(『계곡집(谿谷集)』 권13「유명조선국 증 순충적덕병의보조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 완흥부원군 행 통정대부 영흥대도호부사 최공 신도비명(有明朝鮮國贈純忠積德秉義補祚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完興府院君行通政大夫永興大都護府使崔公神道碑銘)」 참고. 이하 「최기남 비명」이라 약칭함.)
1600년(선조 33) 비로소 음보(蔭補)로 추천되어 왕자(王子)의 사부(師傅)가 되었는데 3명의 왕자들을 가르치면서 사도(師道)를 엄하게 준수하여 세 왕자의 학문이 날로 발전되었다.(「최기남 비명」 참고.) 1602년(선조 35) 알성시(謁聖試)에서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44세였다.(『방목』) 성균관(成均館)전적(典籍)에 임명되었다가 병조 좌랑(佐郞)으로 전직되었는데,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
1603년(선조 36)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사서(司書)가 되었다가, 1604년(선조 37) 병조 정랑(正郞)이 되었다. 이때 과거의 시관(試官)이 되어 감시(監試) 1소(所)에서 합격자 방(榜)을 내다붙이면서, 파장(罷場)한 뒤에 하룻밤을 지나서 임금에게 복명(復命)하였다고 추고(推考)당하고 파직되었다. 1605년(선조 38) 세자시강원 문학(文學)이 되었다가, 1605년(선조 38) 외직으로 함경북도 평사(咸鏡北道評事)로 나가서, 온갖 고생을 다하였다. 1606년(선조 39) 예조 정랑(正郞)이 되었고, 1607년(선조 40) 다시 병조 정랑이 되었다가, 성균관 직강(直講)이 되었다. 1608년(선조 41) 세자시강원 필선(弼善)으로 승진하였다.
[<기축옥사(己丑獄事)>와 최기남]
1585년(선조 18) 최기남이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입학하여 공부하였다. 이때 <정여립의 옥사>가 일어났는데 좌의정 정철(鄭澈)이 위관(委官)으로 이를 다스리면서 동인(東人)들을 그 배후 세력으로 지목하여 이발·최영경 등을 죽이고 동인 1천여 명을 숙청하였다. 이때 세력을 잃은 동인들이 떠도는 말로 정철을 비방하는 말을 만들어, 심지어 정여립 옥사가 진짜가 아니고 정철이 조작한 사건이라는 말까지 나돌았다. 이로 말미암아 조정의 관료들이 서인과 동인으로 나누어 격렬한 논쟁을 벌여 당파 싸움이 그치지 않았다.
이때 호남 지방의 선비들이 더욱 소란을 피우고 서로 선동하였는데, 호남 출신 유생(儒生) 정암수(丁巖壽)가 상소하여 정여립 옥사의 배후 인물로서 동인의 유력 인사를 거론하다가, 선조의 뜻을 거슬러 하옥되었다. 이때 최기남이 성균관 유생 가운데 나이가 많았으므로, 많은 유생들의 앞장을 서서 소두(疏頭)가 되어 연명 상소하여, 정암수를 석방할 것을 간청하였는데, 선조가 그 간청을 받아들여 정암수를 풀어주었다.(「최기남 비명」 참고.)
한편 정암수의 소장은 중도에 동인들에게 가로막혀 그 주장대로 시행되지는 못하였으나, 정철이 그 소장에 거명된 동인의 인사들을 모조리 체포하고 심문하니, 형벌을 받고 죽은 자가 수 백 명에 이르렀다. 정암수는 본래 전라도 동복현(同福縣) 사람으로서 여러 유생들의 추대를 받아서 소두가 되었을 뿐이고, 자기의 뜻으로써 상소한 것은 아니었다.(『선조실록(宣祖實錄)』 참고.) 이것을 <기축옥사>라고 하는데, 서인 정철이 <정여립의 옥사>를 다스리면서 <정암수의 소장>을 이용하여, 그 배후 세력으로 동인을 지목하고 수많은 동인의 유력 인사들을 숙청하는 계기로 삼았던 것이다. 말하자면, 정철은 <정여립 옥사>를 심문하다가, <정암수의 소장>을 계기로, 그 사건을 <기축옥사>로 확대하였던 것이다.
그 뒤에 세자 책봉을 둘러싸고 북인들이 선조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1591년(선조 24) 북인 홍여순 등이 서인을 공격하기를, “정철이 정암수를 사주하여 당대의 이름 있는 재상(宰相)들을 역당(逆黨)으로 몰았습니다.” 하였다. 그는 정철이 북인 최영경을 억울하게 죽인 것을 공격하여, 정철을 명천(明川)으로 유배가도록 하고, 서인 윤두수(尹斗壽)·유공신(柳拱辰)·황정욱(黃廷彧) 등 많은 인사들을 조정에서 내쫓았다. 이것을 <신묘사화(辛卯士禍)>라고 하는데, 이때 최기남은 유생의 신분으로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정거(停擧)를 당하여 오랫동안 과거 시험을 보지 못하였다.(「최기남 비명」 참고.)
[광해군 시대 활동]
1608년(광해군 즉위) 홍문관(弘文館)수찬(修撰)이 되었다가, 사헌부(司憲府)장령(掌令)을 거쳐서 다시 홍문관에 들어가서 부교리(副校理)·교리(校理)로 승진하였다. 이때 <임해군(臨海君)의 옥사>가 일어났는데, 최기남이 사건을 심문하는 낭청(郞廳)이 되었다. 옥사의 국문(鞫問)이 진행되는 동안 그러한 사실이 없었다는 사실을 알고 그에 대한 상소를 올리려고 하였으나, 친척들이 극력 저지하는 바람에 그만두고 병을 핑계대고 출사(出仕)하지 않았다.(「최기남 비명」 참고.) 그 해 목장흠(睦長欽) 등과 함께 암행어사(暗行御史)에 임명되어 8도(道)에 각각 파견되었다. 몰래 촌락을 암행하면서 민간의 폐단과 수령의 잘못을 염탐하였는데, 최기남은 황해도 지방을 암행하였다.(『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1612년(광해군 4)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陞品)하여, 영흥대도호부사로 나갔다. 당시 정세가 크게 변하여 북인 정인홍(鄭仁弘)·이이첨(李爾瞻) 등이 정권을 잡자, 그는 내직(內職)에 몸담고 있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고, 극력 외직(外職)으로 나가기를 원하였다. 마침내 영흥 부사로 나가게 되자, 그는 “이곳이라고 해서, 어찌 멋지게 한번 정치해 볼 수가 없겠는가?” 하고, 기꺼이 부임하였다.(「최기남 비명」 참고.)
당시 광해군이 장차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위(廢位)하려고 하자, 북인 이이첨 등은 이를 부추겨서 마침내 큰 옥사를 일으켰다. 폐비(廢妃)를 반대하는 서인의 중신(重臣)들을 <계축옥사(癸丑獄事)>에 연루시켜 죽이거나 유배보냈는데, 영흥 부사 최기남도 체포되어 심문을 받고 잘못하면 죽을 뻔 하였으나 겨우 목숨을 건져 관직만 삭탈당하였다.(「최기남 비명」 참고.) 그는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난 다음 경기도 가평으로 이사하여 시냇가에 집을 짓고 ‘만곡정사(晚谷精舍)’라는 편액(扁額)을 걸었다. 그는 젊었을 적에는 스스로 호를 양암(養菴)이라 하였는데, 이때부터 자연을 벗하며 늦은 나이에 산곡(山谷)을 거닐면서, 만곡(晩谷), 또는 만옹(晚翁)이라고 호를 바꾸었다.(「최기남 비명」 참고.) 은퇴하여 8년을 한가롭게 지내다가, 1619년(광해군 11) 병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 61세였다.
[<계축옥사(癸丑獄事)>와 최기남]
1612년(광해군 4) 최기남은 영흥대도호부사로 나갔는데, 이듬해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癸丑獄事)>가 일어났다.(『포저집(浦渚集)』 권29 참고.) 영의정 박순(朴淳)의서자 박응서(朴應犀)가 시문(詩文)에 능하였으나, 서출이기 때문에 벼슬길이 막히자, 서양갑(徐羊甲)·심우영(沈友英) 등 명문집안 서출 친구들과 어울려 ‘죽림7우(竹林七友)’라는 조직을 만들어 술을 마시고 세상을 원망하였다. ‘죽림 7우’는 광해군 초에 조령(鳥嶺)에서 은(銀) 상인을 죽이고, 은화 6천 7백 냥을 약탈하였다는 혐의로서 체포되었다. 대북(大北)의 이이첨·정인홍은 박응서를 사주하여, “그 돈은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옹립 자금으로 조달하려고 약탈하였다.”고 거짓 자백하게 하여, <계축옥사>를 일으켰다. 이 옥사로 영창대군(永昌大君)을 강화도로 귀양 보내 죽이고, 그 외조부 김제남(金悌男)을 처형하였다. 대북은 소북(小北)의 영수 유영경을 죽이고 서인의 중신들을 제거하는 데에 박응서 사건을 이용하였다. 마침내 광해군의 의도대로 인목대비를 서궁(西宮)에 유폐하는 데 성공하였다.
1613년(광해군 5) 5월 종성 판관(鍾珹判官)으로 있던 정협(鄭浹)도 김제남의 역모에 가담하였다는 혐의를 받고 체포되어 와서 압슬형(壓膝刑)을 받고 고통에 못이겨 거짓으로 자복하면서 마침내 애꿎은 사람들을 마구 끌어들였다. 김제남의 자제(子弟)들과 서인의 재상과 명사(名士) 등 수십 명을 끌어들이고서, “이들 모두가 서인이거나 김제남 편에 선 사람들인데, 함께 역모에 가담했습니다.” 하였다. 이리하여 선조의 유명(遺命)을 받은 신흠(申欽)·박동량(朴東亮)·한응인(韓應寅) 등 7신(臣)과 이정귀(李廷龜)·김상용(金尙容)·최기남 등 10여 명의 이름이 그의 입에서 거명되었다. 그의 공초에 연루된 사람들은 무두 체포되어, 끌려와서 온갖 고문을 당하였다.(『광해군일기』)
1613년 5월 영흥 부사 최기남도 정협의 무고를 당하여, 영흥부(永興府)에서 잡혀와서 고문을 받으면서 공초하기를, “신은 김제남과 평생 두 차례 만나 보았을 뿐입니다. 그가 귀하게 되고 나서는 그의 문정(門庭)이 매우 번잡했으므로 가지 않았습니다. 그 뒤에 김제남의 권세가 없어지고 난 뒤에 한번 가서 만나 보았습니다. 그리고 재작년에 한번 그 집 잔치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만, 결코 절친하게 지내지 않았습니다. 신이 일찍이 비국(備局)의 낭관(郎官)으로 있을 때 정협과 같이 일을 보면서 사이가 벌어졌는데, 이번에 정협이 잡혀서 영흥을 지나갈 때도 신이 나가서 대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필시 이 때문에 원망을 품고 신을 무고했을 것입니다.” 하였다. 광해군이 공초를 읽어보고 전교하기를, “최기남의 공초를 보건대, 책임을 회피하려고 억지로 꾸며내는 말인 것 같다. 그러나 그 역모를 사람들마다 알고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으니, 다만 최기남은 삭직(削職)하고 놓아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광해군일기』) 그리하여, 최기남은 모진 고문을 받다가,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와서, 두 번 다시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성품과 일화]
최기남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성품이 근후하고 효성과 우애에 독실하였다. 나이 겨우 15세에 아버지를 여의었는데도 거상(居喪) 중에 예법을 어기는 일이 없었다. 어려서부터 외가(外家)에서 자라면서 외할아버지 남상질(南尙質)을 모시는 것이 마치 부자지간처럼 정성과 예의를 다하였다. 평소에는 말을 더듬거리며 주저하는 듯이 행동하다가도, 관직에 나아가서 임무를 수행할 때에는 자신에 넘치고 말을 거침없이 하며, 맡은바 책임을 완수하였다.(「최기남 비명」 참고.) 어려서부터 훌륭한 자질이 있었는데, 커서는 우계(牛溪) 성혼(成渾)을 찾아가서 수학하여 학문과 행실로서 동료들의 존경을 받았다.(「최기남 비명」 참고.)
1605년(선조 38) 외직으로 함경북도 평사로 나가게 되었는데, 그 무렵에 만주의 동관(潼關) 지방이 후금(後金) 누르하치의 오랑캐 군사에게 함락되었으므로, 사람들이 북쪽 변방을 사지(死地)로 여기고 평사로 부임하기를 싫어하였다. 그래서 평사에 임명되는 사람들은 병을 핑계대고 교묘하게 피하였다. 이조에서 아홉 차례나 평사를 다시 임명한 끝에 최기남이 임명되었는데, 그가 말하기를,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사양하지 않는 것이 신하된 자의 직분이다.” 하고, 순순히 받아들이고, 즐거운 마음으로 부임하였다. 그러나 북방 지방에 가서 온갖 고생을 다하다가, 마침내 1년 만에 풍토병에 걸렸다.(「최기남 비명」 참고.) 1606년(선조 39) 1월 영의정 유영경이 아뢰기를, “평사 최기남이 병에 걸려서 경성(鏡城)에 돌아와서 누워 있다고 하는데, 둔전(屯田)에 대한 제반 일을 관장할 사람이 없습니다.” 하고, 그를 체직시켰다.(『선조실록』) 이리하여 최기남은 들것에 실려서 간신히 서울로 돌아왔다.
1608년(선조 41)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이 경기 선혜청(宣惠廳)을 설치하고 처음으로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하려고 하였을 때 조정에서 반대하는 자가 많았으나, 최기남은 적극 찬성하였다. 이리하여 경기청(京畿廳)이 설립되어 대동법에 의하여 대동미(大同米)와 포(布)·전(錢)을 출납하니, 경기 백성들이 혜택을 보고, 이를 아주 편리하게 여겼다. 그 뒤에 진상(進上)하는 연지(硯紙)의 크기와 문양이 너무 크고 사치스러워서 선혜청에서 크기를 줄이고 문양을 간단하게 하기를 청하였으나 광해군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최기남이 다시 상소하여 개혁할 것을 청하니, 광해군이 더욱더 그를 싫어하였다. 어느 날 경연(經筵)의 자리에서 최기남이 또 그 폐단을 개혁해야 한다고 극력 주장하자, 광해군이 상기된 얼굴로 옆에 상신(相臣)들을 돌아보면서, “조정 신하들이 대부분 시끄럽게 개혁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이는 아름다운 일이 아니다. 대신들이 의당 이를 진정시켜야 할 것이다.” 하였다.(「최기남 비명」 참고.)
[묘소와 후손]
계곡(谿谷) 장유(張維)가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 (『계곡집(谿谷集)』 권13「유명조선국 증 순충적덕병의보조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 완흥부원군 행 통정대부 영흥대도호부사 최공 신도비명(有明朝鮮國贈純忠積德秉義補祚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完興府院君行通政大夫永興大都護府使崔公神道碑銘)」) 아들 최명길(崔鳴吉)이 <인조반정(仁祖反正)>에 참여한 공훈으로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부인 전주유씨(全州柳氏)는 관찰사(觀察使) 유영립(柳永立)의 딸인데, 자녀는 5남 1녀를 두었다. 둘째 아들 최래길(崔來吉)은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이고, 셋째 아들 최명길(崔鳴吉)은 영의정이고, 넷째 아들 최혜길(崔惠吉)은 홍문관 부수찬인데, 모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조정의 고관으로 진출하였다. 외동딸은 예조 참의 한필원(韓必遠)에게 시집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