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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40년(인조 18)~1688년(숙종 14) = 49세]. 조선 중기 효종~숙종 때에 활동한 문신. 행직(行職)은 도총관(都摠管)이다. 자는 정지(定之)이고, 호는 경신재(敬愼齋)이다. 본관은 반남(潘南)인데, 친아버지는 경력(經歷) 박세기(朴世基)이고, 양아버지는 첨추(僉樞) 박세면(朴世冕)이다. 친어머니는 조씨(趙氏)이고, 양어머니는 안동권씨(安東權氏)이다. 숙부(叔父)인 현강공(玄江公) 박세채(朴世采)의 문인이다.
[효종 · 현종 · 숙종 시대 활동]
1653년(효종 4) 10월에 소현세자(昭顯世子)의 둘째 딸인 경녕군주(慶寧郡主)와 혼인하여 1659년(효종 10) 윤3월에 금창부위(錦昌副尉)가 되어 봉순대부(奉順大夫)에 올랐다. 그 뒤 여러 차례 승진을 거듭하여 통헌대부(通憲大夫)에 이르러서는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도총관(都摠管)을 겸하였다. 이때 그는 의빈(儀賓)의 도리를 다하였는데, 그는 늘 말하기를, “사장(詞章)이나 논의하는 것은 아마도 의빈의 도리가 아닐 것이다. 오로지 삼가며 오직 조알(朝謁)하고 차견(差遣)에 게으르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물러나면 고요히 문설주에 발을 내리고 마치 사방에 사람이 있는 것처럼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1688년(숙종 14) 12월 26일 세상을 떠나니 향년 49세였다.
[성품과 일화]
박태정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어릴 때부터 단아(端雅)하고 성실하여 장난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늘 정좌(靜坐)하여 독서(讀書)에 힘쓰니, 학문이 특출하게 뛰어났다. 그는 지극한 성품으로 친부모·양부모를 모두 물심양면을 다해 받들고, 그 마음을 미루어 옆의 사람들을 다스릴 때도 측은지심을 가지고 자비를 베풀었다. 그리하여 은혜가 고르게 퍼졌으나 그는 오히려 부족하게 여겼다. 그는 일찍부터 박상충(朴尙衷)과 박소(朴紹), 두 조상의 유사(遺事)를 마음 속 깊이 생각하며 그 어짊을 본받았는데, 그의 스승 박세채는 그의 공손함과 온화함, 절의를 크게 칭찬하였다.
[묘소와 비문]
1711년(숙종 37) 6월 경헌(敬憲)의 시호를 받았다. 묘소는 경기도 연천(漣川) 지사촌(芝沙村) 갑향(甲向)의 묘원에 있다. 김창흡(金昌翕)이 묘지명(墓誌銘)을 지었다. 부인은 소현세자의 둘째 딸 경녕군주인데, 5남 4녀의 자녀를 두었다. 1자는 박필명(朴弼明)이고, 2자는 박필영(朴弼英)이며, 3자는 박필형(朴弼亨)이고, 4자는박필굉(朴弼宏)이며, 5자는 박필평(朴弼平)이다. 1녀는 이희남(李喜楠)의 처가 되었고, 2녀는 유정진(柳挺晉)의 처가 되었으며, 3녀는 이병성(李秉成)의 처가 되었고, 4녀는 김치겸(金致謙)의 처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