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총론]
[1445년(세종 27)~1502년(연산군 8) = 58세]. 조선 전기 세조·예종·성종·연산군 때에 활동한 문신. 행직(行職)은 홍문관(弘文館)부제학(副提學)이다. 자는 거경(巨卿)이다. 본관은 고령(高靈)이다. 아버지는 성균관(成均館)전적(典籍)박사란(朴思欄)이며, 어머니 부평유씨(富平柳氏)는 군사(郡事) 유한(柳閑)의 딸이다.
1489년(성종 20)에 성종이 그가 어질다는 것을 알고 장차 중용할 목적으로 남양부사(南陽府使)로 임명하였다. 그는 이때 선정으로 백성을 자식과 같이 사랑하며 농업(農業)과 잠업(蠶業)을 권장하고, 학교를 일으켜 남양 고을에 많은 선비가 배출되도록 하는 등 치적을 올렸다. 과만(瓜滿) 후에 봉상시(奉常寺)부정(副正)이 되었다가 1494년(성종 25) 2월에 사간원 사간이 되었다. 남양의 백성들이 그가 남양부사 때의 치적을 들어 진정을 올렸으므로 첨중추부(中樞府) 지사(僉知事)에 임명되었다. 이 해 10월에 관압사(管押使)로 차출되어 연경(燕京)에 갔다가 1495년(연산군 1) 3월에 돌아와 사간원 대사간이 되었다가 곧 홍문관 부제학이 되었다. 그 뒤 지제교(知製敎)로 전직되었다. 1497년(연산군 3) 1월에 형조 참의(參議)가 되었다가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에 임명되었다. 이때 선정으로 그 이름이 높았는데, 다음 해에 신병으로 조정으로 돌아와 중추부 첨지사(僉知事)에 임명되었다. 1502년(연산군 8) 7월에 향년 58세로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성품과 일화]
박처륜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수려하고 특이하여 이미 7, 8세 때 『소학(小學)』을 읽었다. 타고난 성품이 침착하고 묵중하였다. 집에 있을 때 근엄하였고 가업을 경영하지 않았다. 어버이를 섬기고 아우들을 보살필 때는 효성과 우애가 매우 독실하였다. 사람을 접할 때나 벗들을 대할 때 한결 같이 성신(誠信)하고 간이(簡易)하게 하였다.
[묘소와 비문]
묘소는 경기도 부평(富平) 선친 묘소의 밑에 있다. 김안국(金安國)이 묘표(墓表)를 지었다. 부인 수원최씨(水原崔氏)는 최치빈(崔致濱)의 딸인데, 2남 1녀의 자녀를 두었다. 1자는 박세언(朴世彦)이고, 2자는 박세호(朴世毫)이며, 1녀는 조원충(趙元忠)의 처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