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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12년(태종 12)~1466년(세조 12) = 55세]. 조선 초기 세종~세조 때에 활동한 문신. 행직(行職)은 의정부(議政府) 죄참찬(左參贊)이다. 자는 경윤(慶胤)이고, 호는 묵재(黙齋)이다. 본관은 밀양(密陽)인데, 아버지는 교서관(校書館)정자(正字)박절문(朴切問)이고, 어머니는 개성왕씨(開城王氏) 왕격(王鬲)의 딸이다. 증조부는 호조 전서(典書) 박침(朴忱)이고 조부는 안변부사(安邊府使) 박강생(朴剛生)이다.
[단종 · 세조 시대 활동]
1452년(단종 즉위) 7월에 다시 우승지가 되었고 이 해 12월에 좌승지가 되었다가 1453년(단종 1) 6월에 승정원 도승지(都承旨)가 되었다. 이 해 10월에 병조 참판(參判)이 되었는데, <계유정란(癸酉靖難)> 때 수양대군(首陽大君)을 도와 김종서(金宗瑞)·황보인(皇甫仁)·안평대군(安平大君) 등을 제거한 공으로 정란공신(靖難功臣) 1등에 책록되고 응천군(凝川君)에 봉해졌다. 이때 세종대왕과 영빈 강씨(令嬪姜氏)의 아들이자 박중손의 사위인 화의군(和義君) 이영(李瓔)이 수양대군을 반대하다 귀양가게 되어 한때 난처한 입장에 빠졌다.
1454년(단종 2) 2월에 한성부윤(漢城府尹)이 되고, 6월에 대사헌(大司憲)이 되었으며, 1455년(단종 3) 2월에 공조 판서(判書)가 되었다. 1455년(세조 1) 윤6월에 이조 판서가 되었다. 1456년(세조 2) 2월에 예문관(藝文館)대제학(大提學)이 되었고, 이 해 5월에 형조 판서가 되었으며, 6월에 예조 판서가 되었다. 밀산군(密山君)으로 개봉되었다. 1457년(세조 3) 1월에 의정부 우참찬(右參贊)이 되었고, 7월에 죄참찬(左參贊)이 되었다. 그는 세 번이나 과시(科試)를 고선(考選)하였는데, 그가 뽑은 사람 중에 이름이 알려진 선비가 많았다.
1459년(세조 5) 7월에 다시 의정부 좌참찬이 되었다. 이때 어머니 상(喪)을 당하였는데, 상기(喪期)를 마치자 1461년(세조 7) 11월에 다시 밀산군(密山君)에 봉해지고, 위계(位階)는 숭록대부(崇祿大夫)로 올랐다. 1466년(세조 12) 5월 26일 정침(正寢)에서 향년 5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지, 조정에서 공효(恭孝)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성품과 일화]
박중손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타고난 자질이 온아(溫雅)하고 용의(容儀)는 단정(端正)하며, 효도와 우애가 순수하고 지극하였다. 다른 사람을 접대하고 일을 처리할 적에는 겸손하고 공손하며 청렴하고 근신하였다. 일찍이 상주(喪主)가 되어 여막(廬幕)에 있을 때에, 글을 지어 고금(古今)의 사치와 검소의 득실을 논하여 아들들을 경계하였으며, 또 계주명(戒酒銘)을 지어서 자신(自身)을 경계하기도 하였다.
[묘소와 비문]
시호는 공효(恭孝)이다. 묘소는 교하현(交河縣) 북쪽 탄포(炭浦)의 오고미리(烏告美里)에 있다. 김수녕(金壽寧)이 비명(碑銘)을 지었다. 부인은 남평문씨(南平文氏) 공조 정랑 문승조(文承祚)의 딸인데, 3남 2녀의 자녀를 두었다. 1자는 부평도호부사(富平都護府使) 박전(朴栴)이고, 2자는 한성부서윤 박미(朴楣)이며, 3자는 승정원 우승지 박건(朴楗)이다. 1녀는 화의군 이영의 처가 되었고, 2녀는 유오(柳塢)의 처가 되어다.